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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정 / 꽤나 감각적인,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빈 봉지의 유혹

고충환

장호정 / 꽤나 감각적인,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빈 봉지의 유혹


장호정의 작업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상황 연출하기와 사진으로 기록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진 그대로 캔버스에 확대해 그리기. 이 가운데 앞의 두 단계는 말 그대로 과정으로 남겨지고, 그 과정은 회화에서 최종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 하나의 과정 속에 연출과 사진 그리고 회화가 모두 들어있고, 최종적인 회화를 위해 연출과 사진이 동원되는 것. 여기서 연출과 사진을 따로 떼어 놓으면 연출사진이 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연출사진은 현대사진에서 중요한 자기표현의 방법론이며 형식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연출 자체는 어떤가. 연출은 일종의 유사현실 내지 대체현실을 매개로 감각적 현실 내지 현실 자체를 간섭하고 대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궁극적으론 현실 인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예술의 중요한 실천논리로 인정받고 있다. 연출사진만으로도 이미 작품 아님 현대미술에 요구되는 자격이랄지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왜 굳이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것일까. 사진만으론 뭔가 부족한 것일까. 여기서 사진을 캔버스에 확대해 그린다는 대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이즈가 커지면 느낌의 강밀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진을 회화로 옮긴다고는 해도, 사실은 사진 그대로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사진과 회화는 비록 하나같은 실재감과 실물감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엄밀하게는 질감도 다르고 색감도 다르고 정감도 다르다. 여기에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노동이 요구되는 일이다. 작가는 바로 그 지난한 과정이 예술을 통해 자기를 찾고 나아가 자기를 치유하는 과정에 흡사하다고 본다. 자기수행? 그래서 굳이 사진을 회화로 옮겨 그린다. 정리를 하자면, 연출을 통해 현실인식에 개입하고 간섭한다(현실과 현실인식은 다르다). 그리고 회화를 통해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개입과 간섭, 그리고 그 과정과 흔적에 실체를 부여하고 몸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연출과 사진과 회화가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어우러지면서 특유의 긴장감이며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상황을 어떻게 연출하는가. 그리고 그 연출은 어떤 유의미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비닐그릇, 캔버스에 오일, 2014


작가가 연출한 상황을 보면, 연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의외의 소재와 만나진다.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 비닐 소재다. 작가는 이 비닐 소재로 사물을 감싼다. 이까지만 놓고 보면, 비닐 소재로 책이며 카터 등 사물을 감싼 크리스토의 초기 작업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그렇게 감싼 사물 오브제를 노끈으로 묶으면 영락없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작가의 개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렇게 감싼 비닐을 해체해 다시 원형 그대로를 복원한다. 그러면 사물은 온 데 간 데 없고, 사물의 흔적만 남는다. 그 흔적이 흡사 사물의 껍질을 떠올리게 하고, 사물이 벗어놓은 허물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는 의자의 흔적이며 신발의 허물을 제시하고 있었다. 작가의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지점이며, 한때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형으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인 존재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에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일종의 사물 초상화를 제시하고 있었고, 사물의 흔적이며 허물이 불러일으키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어떤 감각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다. 인식론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보다는 감성이 오롯해지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사물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물과는 다른,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사물은 없는, 다만 흔적을 매개로 지금은 부재하는 사물을 증명할 뿐인, 그런 기묘한 오브제를 통해 작가는 사물이 존재하는 또 다른 지점을 열어놓고 있었다(사물이 존재하는 지점은 많다. 인식론의 그물에 걸린 사물의 존재태는 다만 그렇게 허다한 지점들 중의 한 지점일 뿐).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는 다만 형식실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 성과를 완성하기 위해선 좀 더 다른, 좀 더 뚜렷한(?)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진 것이 비닐봉지다. 작가는 언젠가 우연히 비닐봉지에 눈이 갔다. 그리고 그 비닐봉지가 꼭 자기 같다고 느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담았었을, 지금은 빈, 비닐봉지와 자기를 동일시한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라고는 했지만, 사정은 많이 다르다. 전작에선 여하튼 의자며 신발과 같은 존재의 흔적이 또렷했다. 모르긴 해도 비닐의 성분도 좀 더 견고했을 것이고, 그 견고한 성분 탓에 존재의 흔적을 좀 더 또렷하게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닐봉지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도대체 뭘 담았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물을 담았을 수도 있고, 과일이며 채소를 담았을 수도 있고, 종이 곽 형태의 무언가를 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심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슨 말인가. 전작이 개념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면, 근작에서의 비닐봉지는 상대적으로 더 암시적이고 그 생리가 그림에 가깝다. 전작이 개념적이라면, 근작은 더 그림다워졌다.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이 더 부각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전작에선 여하튼 의자며 신발과 같은 사물이 먼저 왔다면, 근작에선 비닐봉지 자체로서 다가온다. 비닐봉지의 비닐봉지다움이 강조되고 부각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물초상화로 부를 만한 경지를 열어놓고 있다. 사물개념이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오히려 더 암시적이고 회화적이게 된 경우이며, 사물개념에 부수되던 소재(비닐봉지)의 위상이 강조되면서 소재 자체가 부각되는, 그런 차원으로 이행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사물에 내어준 위상을 되찾고 마침내 그림의 메인으로 들어온 비닐봉지는 무슨 말을 걸어오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감성을 건드리는가. 봉지의 봉지다움이 강조되고 부각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 한갓 사물은 언제 무의미에서 유의미로 건너가고, 어떻게 유의미한 의미체로 거듭나는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꽃은 그저 막연한 무엇에 지나지 않았다고, 김춘수의 시는 적고 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명명한다는 것, 본다는 것, 걔와 눈을 맞춘다는 것에 의해서만이 비로소 세상은 존재하게 되고 생기를 발하게 되고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 전에는 모조리 한갓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추상적인 개념을 살과 피가 흐르는 생기발랄한 무엇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그래서 다름 아닌 나에게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로 재생되게 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결코 존재하지도 태어나지도 않는다. 꽃이 그럴진대 비닐봉지는 말할 것도 없다. 비닐봉지에 눈을 맞춘다는 것, 비닐봉지에서 존재의 흔적을 냄새 맡는다는 것, 비닐봉지에서 존재의 비의를 캐낸다는 것, 그리고 특히 빈 봉지에서 연민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바로 추상적 개념으로 코팅된 개념의 더께를 걷어내고 사물(존재) 자체를 구제하는 행위이며 세계를 구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게, 말하자면 사물초상화에 내재된 아님 은폐된 의미일 것이고, 작가의 비닐봉지 그림은 바로 그 의미를 건드린다(캐낸다?). 


비움으로 부터의 사유, 캔버스에 오일, 2014


그렇담, 그렇게 캐내진 의미는 뭔가. 비닐봉지에는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가 담겼던 사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손으로 움켜쥘 때 생겼을 잔주름이며, 부분적으로 팽창된 볼륨이, 그리고 사물이 담기면서 늘어졌을 흔적들이다. 이 흔적들은 한마디로 빈 봉지에 원래 사물이 담겼었음을 증언해준다. 이처럼 흔적으로 남은 빈 봉지가 공수래공수거의 전통적인 삶의 전언을 떠올려준다. 공수래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삶은 어쩜 저마다 빈 봉지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봉지 옆구리 터지는 줄도 모르고 이것저것 되는대로 주어 담는 그리고 때론 말 그대로 끌어 모으기에 급급한, 그런 우매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담긴 봉지의 내용물을 근거로 서로를 평가하고 재단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봤자 죽을 때는 내용물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흔적은 남는다. 그저 덧없는 욕망의 흔적과 서로 상처 입고 상처 입힌 난타의 흔적들이다. 그렇게 삶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고, 빈 봉지로 왔다가 재차 빈 봉지로 되돌려진다. 

그 서양화 버전으로 치자면 바니타스 정물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것은 다만 빈 봉지처럼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은 다만 빈 봉지처럼 죽음의 그림자에 지나지가 않는다. 욕망은 결여와 결핍이 본질이다. 욕망은 삶에 들러붙어있는 죽음의 메신저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호시탐탐 상징계를 위협하는 실재계의 잠행이고 매복이다. 그렇게 빈 봉지는 무상함을, 허상을, 죽음을, 그러므로 해골을 표상한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흑과 백의 대비가, 무슨 심연과도 같은, 칠흑 같이 새까만 배경화면과 표면에서 반짝이는, 꽤나 감각적으로 하늘거리는 빈 봉지와의 대비가 그 표상을 강화시켜준다.  

그리고 작가의 봉지 그림은 일종의 사물풍경화를 예시해준다. 세로보다는 가로로 긴 그림들이 그런데, 칠흑 같은 바다를 배경으로 흰 포말을 일으키며 자잘한 조각들로 부서지는 파도가 끝도 없이 펼쳐진, 아님 달빛으로 은근한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진, 그런 일종의 유사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칠흑 같은 화면은 꽤나 암시적인데, 그 자체가 심연의 메타포 같고, 막막한 우주의 메타포 같다. 작가의 사물풍경화는, 보기에 따라서 그런, 원형적 바다 앞에 서게 만들고, 마치 우주를 떠도는 빈 봉지와도 같은, 그런 절대고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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