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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희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끝나지 않을 이야기

고충환

박명희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끝나지 않을 이야기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는 자신을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이며 곰팡내 나는 서가에다가 비유했다. 삶이란 책들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이라는 비유도 있다. 이런 비유가 아니더라도 한 권의 책 속엔 저자의, 주인공의, 익명적 주체의,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결국 한 권의 책을 펼쳐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관음행위가 된다. 이런 관음행위를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적용해볼 수도 있다. 그럼, 삶이란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저술하는 행위가 된다. 책을 저술한다는 것, 그건 무슨 의미인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여기서 박명희가 자신의 조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한, 끝나지 않은 이야기란 주제와 만나진다. 삶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끝이 없다. 하나의 이야기가 의미를 갖기 위해선 화자와 청자가 있어야 하고 저자와 독자가 전제되어져야 한다. 침묵이나 독백도 분명 하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주관에 함몰된 이야기는 흡사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허언으로 그치기 쉽다. 다시, 이건 무슨 의미인가. 하나의 이야기가 공감을 얻기 위해선 사람과 사람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바로 나와 너의 관계가 전제되어져야 하며, 그 전제를 작가는 소통과 인연이라고 부른다. 결국 삶이란 저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소통이며 인연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 이야기는 이야기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끝이 없다. 삶이란 매번 그리고 매순간 새로운 관계며 소통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인연에 노출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은 가변적이고, 삶을 받아쓴 책의 내용은 비결정적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치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하이퍼텍스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마구 접속되고 연결되고 확장되고 변형되는 하이퍼링크처럼. 

삶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이야기를 거는 기술이다. 저마다의 상징이며 기호 그리고 표상형식을 매개로 삶을 이야기하고 존재를 코멘트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삶의 본성이며 예술의 본질을 자신의 조각을 통해 풀어놓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대리석, 2014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는가. 그러나 정작 작가의 조각을 본 첫인상은 이런 이야기며 서사와는 거리가 먼 추상조각이다. 이러저런 기하학적 형태에 부분적으로 유기적인 형태가 어우러진, 돌의 질감과 색감이 부드럽고 우호적으로 와 닿는, 정적이면서 관조적인 분위기의 조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추상조각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그 인문학적 배경이며 당위성을 얻는다. 그 논리에 의하면,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이라는 것이며, 장르 고유의 성질을 강조한 장르적 특수성이 주요한 덕목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조각으로 하여금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수성 곧 조각의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물성과 양감과 구조가 그것이다. 물성과 양감과 구조만으로 이미 조각이 성립된다는 논리며 발상이다.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물성과 양감과 구조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가운데 특히 구조적인 측면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구조는 도날드 주드의 최소한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사물대상은 최소한의 구조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최소한의 한정이 미니멀리즘과 통한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각각 물성과 양감과 구조로 나타난 조각의 본질에 천착한 것으로 보이고, 특히 이 가운데 구조적인 측면이 강조돼 보이고, 이로써 사물대상을 최소한의 구조로 한정한 미니멀리즘에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의 조각은 어떤 사물대상을 어떻게 최소화한 것인가. 그 자체 추상적인 기하학적 구조가 강조돼 보이는 작가의 조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실제로 일부 알만한 형태가 감지되는데, 원형 내지는 세로로 긴 쪽창이 나 있는 건물이며, 교회나 성당과 같은 성소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건물 자체가 대개는 기하학적 형태에 착상된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이런 건축물 중에서도 특히 일체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기능주의 건축양식(가장 기능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모토에 의해 뒷받침되는)을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기능주의 건축양식의 이런 장식에 대한 배제는 그대로 종교건축양식의 금욕과도 통한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내어주고 숨길 것인가. 바로 숨기고 드러내는 과정이 만나지는 감각점을 찾아내고 조율하는 것. 비록 작가의 조각이 애초에 건축물을 모티브로 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처럼 결과적으로 건축양식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나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이런 암시의 기술과 통한다. 무의식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조각은 어떤 건축양식을 의식한 것이라기보다는, 집에 대한 막연한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실현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집이란 특정의 건축양식으로 구현된 집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존재의 집 내지 정체성의 집(산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작가는 기하학적 구조가 두드러져 보이는 조각을 통해 사실은 집으로 상징되는 자기 정체성을 배어들게(배어나게?) 하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전경, 대리석, 2014


여기서 다시, 끝나지 않은 이야기란 작가의 주제로 되돌아가 보자. 주제대로라면, 예술이란 삶에 대해 그리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때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 이야기의 전제 내지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인연 그리고 소통인 것이며, 존재는 언제나 새로운 그리고 예기치 못한 관계와 인연과 소통 가능성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옛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 포개지고 수정되고 변질되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인연 그리고 소통을 조형으로 옮기는 일이다. 관계며 인연 그리고 소통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전제되어져야 하고, 나와 네가 전제되어져야 하고, 주체와 타자가 전제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정작 작가의 조각은 유기적인 한 덩어리로 형상화돼 있다. 비록 이처럼 한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 덩어리는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진 것 같고 조합된 것 같다. 마치 이러저런 부속 구조물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하나의 유기적인 건축물을 이루듯.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비록 하나의 덩어리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이처럼 작가는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를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인연이며 소통을 표상한다는 과업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성취를 완성하기 위해선 여기에 좀 더 설득력 있는 무엇이 전제되거나 부가되어져야 하는데, 얼굴과 손을 마주하고 속삭이는 듯한 모습을 추상화한 것이 그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기하학적 구조가 두드러진 추상조각처럼 보이고, 건축물 내지 집이라는 사물대상을 최소한의 구조로 한정한 조각처럼 보이고,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일궈내는 경우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여기서 부분과 부분이란 사실은 얼굴과 손을 마주하고 있는 형상을 추상화하고 양식화한 것이다. 작가의 조각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바로 얼굴과 손을 마주하고 나와 네가 마주한 최초의 형상으로부터 집이며 건축물 형상이 파생되고, 기하학적 구조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조각 속에 마주한 얼굴과 손이, 나와 너의 관계며 인연 그리고 소통으로 나타난 주제의식이, 집이며 건축물 형상이, 그리고 기하학적 구조 모두가 함축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 작가의 조각이 내포하고 있는 중층적이고 다중적인 의미의 지층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일종의 삶의 좌표를 더한다. 허다한 화살표 모양의 기호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공간에 설치한 것이 그것으로, 여기서 화살표 모양의 기호는 저마다의 삶의 좌표를, 가능한 미래를 향해 열린 꿈과 이상을 상징한다. 이로써 작가는 허다한 삶의 좌표들이며 저마다 다른 꿈과 이상이 써나갈 이야기들을 마치 허공에 떠도는 그 자체 비가시적인 전파처럼 형상화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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