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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미술관 손수전 리뷰 '신의 손, 조각가의 손'

고충환

남포미술관 손수전 리뷰

손, 아로새길, 빼어날 수 / 신의 손, 조각가의 손


로댕의 조각 중에 신의 손이란 조각이 있다. 거대한 손이 한 쌍의 남녀를 빚어 만드는, 신의 손에 의해 생명체가 탄생하는 극적 순간을 조형한 것이다. 비록 신의 손을 조형한 것이지만, 그 조형은 그대로 예술가의 손에도 해당한다. 비록 형상에 지나지 않지만, 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을 빚어 만드는 로댕 자신의 자부심이 반영돼 있다. 이처럼 특히 조각가의 손은 예전에 신의 손이 속해져 있던 위상을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가의 손은 존재의 내면과 외면을 아로새겨 존재가 오롯이 드러나게 하는, 존재의 존재다움이 부각되게 하는 도구다. 여기에 폐석과 이쑤시개, 스테인리스스틸과 오석, 그리고 나무를 소재로 한 노동집약적인 조각들이 있다. 한갓 소재로 하여금 집합과 해체,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반영상,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메타포와 같은 관념을 표상하는 조각들이다. 빠르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인심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직조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걷기와 느리게 살기 그리고 신성한 노동을 추구하는 영성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그래서 오히려 그만큼 더 귀하다. 



강인구, REMEMBER OF FOREST, 2006, 이쑤시개


강인구. 하나의 이쑤시개는 비록 냄새나고 어둑한 입 동굴 속을 청소하고 있지만, 그것이 원래 떠나온 숲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작가는 숲의 기억 혹은 숲에 대한 기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의 잡석 내지 폐석은 지금은 비록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타이어에 짓밟히지만, 그것이 원래 떨어져 나왔을 바위를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을 작가는 바위의 기억 혹은 바위에 대한 기억이라고 부른다. 모든 게 그랬다. 작가는 그저 단순한 소재적인 관심에서 이쑤시개며 폐석을 소재로서 차용한 것은 아니었다. 소재와의 인연이 각별했고, 소재가 품고 있을 기억이며 그리움이 특별했다. 소재를 조형언어로 되불러낸다는 발상도 그렇거니와, 소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매개로 정작 존재의 원형에 해당할 이야기를 듣고 싶고 들려주고 싶었다. 존재의 원형에 해당하는 이야기? 바로 이쑤시개가 기억하는 숲이, 폐석이 그리워하는 바위가, 존재가 유래했을 자연이 원형인 것이고, 작가는 그 원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조형하고 형상화한 것이다. 때론 외적 형상에 사로잡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이면에 이처럼 존재의 원형 아님 원형적 존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장돼 있는 것이다. 

원형이란 하나의 관념인 것이며, 주로 기하학적 형상을 통해 표상된다. 예컨대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그저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할 뿐인 존재의 운동이며 이행을 표상하고, 사각형은 안정된 형태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원형적 형상을 빌려 숲이며 바위 그리고 자연으로서의 원형을 표상한다. 관념적 원형상과 존재론적 원형상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융합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 과정에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작용하고, 세계를 이루는 단위원소 곧 모나드와 단자에 대한 인식이 작동한다. 세계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로 축조돼 있고, 단위원소들의 유기적인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다. 그 관계망이 촘촘하면 단단해지고, 느슨해지면 해체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집합과 해체 사이의 변증법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특히 자잘한 폐석을 소재로 사람 얼굴 형상을 구조화한 작업이 그렇다. 이 작업에서 폐석 하나하나는 마치 픽셀 같고, 이런 픽셀이 만든 미디어이미지를 허공에 띄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가녀린 와이어로 폐석을 엮어 만든 탓에 실제로 이를 설치했을 때는 마치 폐석 하나하나가 허공에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운석이나 은하수처럼 보인다. 어떠한 중량감도 느낄 수 없는 가벼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작가는 폐석이라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소재를 매개로 디지털을 암시하는 일종의 미디어이미지를 구현해놓고 있었다.      



이윤복, Motion, 60x60x202cm, Stainless Steel, 2011


이윤복, 비결정적인 그리고 비정형적인. 개인차가 있겠지만, 이윤복의 작품을 접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조형이 주는 매력에 사로잡힌다. 뭐, 개인적인 인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여하튼. 보통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치자면 빛을 난반사하는 금속성의 표면질감이 기하학적인 형태와 어우러진 조형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비정형적인 형태며 유기적인 형태에 이 소재가 적용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소재 자체가 다루기가 쉽지 않은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인데, 보기에 따라서 소재를 무슨 흙 주무르듯 하는 작가의 작업이 갖는 자유자재한 표현이며 유연한 형태가 그래서 오히려 더 감각적으로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소재가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단조 곧 두드리기, 굽히기, 용접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광내기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제작과정에 흘렸을 피와 땀이 무색할 정도로 형태는 가볍고 샤프하고 매끄럽다. 지난한 노동과 함께 원하는 감각의 정점을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고, 지난한 노동이 가볍고 샤프하고 매끄러운 형태 뒤로 사라지는 지점에 대한 몸적인 이해가 없이는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고, 중량감이 공기 속으로 휘발되는 지점에 대한 감각적인 이해가 없이는 성취되기 어려운 일이다. 소재를 흙 주무르듯 하는, 어떠한 중량감도 느껴지지가 않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열했을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는, 그런 면면들이 뒷받침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덧붙이자면, 형태는 무수한 섬세한 굴곡들로 구조화돼 있음에도 어떠한 이음새도 찾아볼 수가 없고, 그 섬세한 굴곡들 위로 반영상이 미끄러질 만큼 완벽한 표면을 보여주고 있다. 굴곡들 위로 반영상이 미끄러진다? 수사적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반영상의 형태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섬세한 굴곡과 완벽한 표면이 반영상을 왜곡시켜 비정형의 형태로 견인하고 비결정적인 형태로 유인한다. 예기치 못한 형태를 되돌려주는 거울이라고나 할까. 거울치고는 참 희한한 거울이다. 작가는 작품이 과정을 통해서 진화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진화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이처럼 변화무상한 반영상에도 적용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작품이 과정을 통해서 진화한다는 말은 형태가 사전에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서 형태가 결정된다(형태가 스스로를 결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조형은 서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흘러내리다 맺힌 물방울 같기도 하고, 흐르다 만 눈물 같기도 하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 분명한 것도 결정적인 것도 없다. 그렇게 비결정적인, 비정형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암시적인 형태가 이거지 싶은 알만한 세상의 모든 형태를 싸안는다. 



정광식, View 연작, 2011, Black Granite, 120 x 60 x 2cm


정광식, 회화적인 조각. 정광식의 조각은 회화적이다. 무슨 그림처럼 벽에 걸리는 것이 그렇고, 릴리프로 나타난 평면이 그렇고, 더욱이 표면을 채색하는 것이 그렇다. 그 과정이며 생리 그대로 평면 위에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 그림을 닮았다. 회화는 회화다워야 하고 조각은 조각다워야 한다는, 회화의 본질이 있고 조각의 특수성이 따로 있다는 식의 소위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모더니즘 패러다임 이후 가속화된 탈장르 내지 탈형식의 논리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고,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경계 넘나들기의 사례로 보이고, 궁극적으론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심화한 경우로 보인다. 

한마디로 무슨 그림을 그리듯 조각한다고나 할까. 이때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는 붓 대신 소형 그라인더다. 칠흑 같이 새까만 오석(검정색 화강암)의 표면에다 대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라인더를 비스듬하게 각도를 유지하면서 돌 조각을 파낸다. 이때 각도와 힘을 감각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며, 그 여하에 따라서 섬세한 세부표현이 가능해진다. 평면의 판석인 탓에 힘 조절에 실패할 경우에 자칫 구멍이 나거나 아예 판석이 깨질 수도 있다. 그동안 작가는 분명 이런 시행착오를 거쳤을 터이고, 지금은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섬세한 세부 표현이며 원하는 질감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평면의 판석 위에는 울울창창한 숲의 벽이, 육박해오는 파도가, 그리고 특히 무슨 성냥갑처럼 빼곡한 빌라가 오롯이 그 형태를 드러내 보인다. 일종의 풍경조각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여기서 숲의 벽이나 파도는 그대로 자연을 재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섬세한 요철이며 재질감으로 인해 일종의 자연의 결이며 존재의 결 그리고 시간의 결과 같은 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지점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칠흑 같이 새까만 오석이라는, 다분히 수사적인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라인더가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흔적이 남겨지고, 그 흔적이 새까만 표면과 대비되면서 무슨 드로잉처럼 선이 부각되고 회화적인 효과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도를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각도가 있다는 것, 그것은 화면 위에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이며, 시점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비교적 각도가 크게 작용하고 적용된 경우, 말하자면 빌라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 결정적이다. 그렇게 작가가 재현해놓은 빌라는 멀리서 보면 무슨 성냥갑처럼 올망졸망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빛과 그림자가 적절하게 분배된 집들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정겨움을 더한다.      




차종례, Expose exposed 131201, wood, 183x60x22cm, 2013

차종례, 드러내기와 드러나기. 차종례는 시종 자신의 작업을 드러내기와 드러나기(Expose exposed)라고 명명한다. 그 명명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자체 개별 작품에 적용되는 제목이기도 하고,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 봐도 되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제목이면서 동시에 주제이기도 한 이 말은 하이데거의 진리를 매개로 한 세계와 대지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대지는 자기 속에 진리를 품고 있는 은폐를 그 본질로 한다. 그리고 세계는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비은폐가 본질이다. 진리는 은폐되어져 있을 때 진리이지만, 은폐되어져 있는 한 그것이 다름 아닌 진리임을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정작 그것이 다름 아닌 진리임이 드러났을 때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로부터 단순한 사실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 결국 이미 진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에서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가 있고, 따라서 가급적 진리로서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과제로 주어지는 것. 정리를 하자면 은폐와 비은폐, 드러내기와 숨기기를 감각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며, 이 문제는 그대로 예술의 존재방식과 통하고 작가의 주제의식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무엇을 드러내고 숨기는가. 작가의 작업에서 무엇이 드러나 보이는가. 그리고 이때 드러나 보이는 것은 작가에게 연동된 것인가 아님 작가와는 상관없는 것인가. 작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의 소산인가 아님 객관적인 어떤 원리나 개념을 제안한 것인가. 적어도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불어 의미의 키를 관객의 몫으로 내어줌으로써 저마다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오픈 콘셉트) 배려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 두 사실은 서로 상충하는데, 여하한 경우에도 의미는 재현적이기 때문이다. 의미 자체가 이미 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님, 어떤 전제도 없는 자기 발생적 사유의 사례? 

아무튼 이런 작가의 배려(자의적인 해석에 열려 있다는)를 염두에 두고 작가의 작업을 보면 날카로운 돌기와 부드러운 돌기가 두드러져 보인다. 우회를 모르는 기(기운?)와 우회하는 기 아님 찌르는 기와 감싸는 기의 대비로 볼 수가 있겠고, 나아가 일종의 상처와 치유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어느 경우이건 나무가 주는 부드럽고 우호적인 재질감으로 인해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 성질을 자아낸다. 여기서 다시, 드러내기와 드러나기라는 주제에 주목해보자.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기의, 자연의,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 이중성이며 양면성이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진리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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