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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종 / 걷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텅 빈 사람들

고충환

김형종 / 걷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텅 빈 사람들


자코메티의 걷고 있는 사람처럼 걷는다. 단순히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생각 없이, 아니면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걷고 있다고 김형종은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삶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겠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주제의식을 함축한 글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로 보든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 소회며 주제의식에서처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생각 없이 아님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저 단순히 무작정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텅 빈 실루엣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왜 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고, 그들이 하고 있을 생각은 고사하고 텅 빈 생각마저 알아낼 재간이 없다. 텅 빈 생각? 텅 빈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고 징후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텅 빈 생각이며 징후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아님 어딘가로 간다는 최소한의 의식마저도 없이 그저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도 할 일도 없는 현대인의 초상을, 방향을 좌표를 목적의식을 상실한 현대인의 암울한 아님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인생을 표상하는 것일까. 



Silhouette - BR.4M, 35x8x55cm, plate glass, epoxy, 2011ⓒ갤러리그림손


방향을 좌표를 목적의식을 상실한, 그럼에도 무작정 걷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도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이란 상황이 왠지 삶이란 무대 위에 올려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극적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사람들은 말하자면 부조리극으로 유명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연상시킨다. 극에서 주인공들은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고도를 기다린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걸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과연 블랙코미디의 원조랄 만하다(관조하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라고 했다). 극에서처럼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현대인은 걷고 있음에도, 정작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무작정 걷고 있을 뿐. 

이처럼 무작정 걷고 있는 사람들로 치자면 자코메티가 원조다. 자코메티가 형상화해놓고 있는 걷고 있는 사람들은 실존주의적 인간의 대변인이며 대리인들이다. 실존주의적 인간이 뭔가. 그는 자유의지를 쟁취하기 위해 기꺼이 부조리를 떠맡은 인간이며, 존재를 위해 무를 떠안은 인간이며, 존재와 무를 맞바꾼 인간이다. 금욕을 넘어 처참하리만치 살을 발라낸, 그럼에도 앙상한 뼈만으로 우뚝하고 오롯할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 형이상학적 인간을 떠안았기 때문이다. 실존적 인간은 무겁다. 스스로 떠안은 부조리며 무의 무게 때문이고 형이상학의 무게 탓이다. 그런데 정작 실존적 인간을 표현한 자코메티의 인간은 가볍다. 바로 이런 가벼운 무게로 무거운 무게를 대리하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텅 빈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고 징후라고 했다. 바로 텅 빈 생각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대리하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고, 그런 점에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과 자코메티가 형상화해놓고 있는 실존적 인간이 서로 통한다. 

작가가 굳이 자코메티를 인용한 이유이며 최소한 공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자코메티가 무거운 인간을 무겁게 표현하고 있는 것에 반해(외관상 자코메티가 형상화해놓고 있는 가벼운 인간은 사실은 무거운 인간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적 표현인 것), 작가는 무거운 인간을 텅 빈 인간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자코메티와 작가가 속해져 있는 달라진 시대상황도 차이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로 대변되는 무거운 존재의 시대와 밀란 쿤데라의 키치로 대변되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가벼운(아님 텅 빈) 존재의 시대가 그렇다. 이렇게 작가의 걷고 있는 사람들은 자코메티의 걷고 있는 사람들과 닮았으면서 다르다. 


Silhouette - R.O.3M, 35x9x60cm, plate glass, epoxy, 2011ⓒ갤러리그림손


작가는 평면의 유리판으로 인체형상을 커팅 한다. 그리고 그렇게 커팅 된 인체형상들이 군상을 이룬다.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은 군상들이다. 세부가 생략된, 투명하고 편평한, 다만 최소한의 아우트라인만으로 겨우 인간임을 암시할 뿐인 것을 제외하면 형상에 대한 그리고 대상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이 형상들을 작가는 실루엣이라고 부른다. 실루엣은 그림자며 실체를 결여하고 있는 허상이다. 그 자체 순수한 이미지(아님 순수한 기호?)라고나 할까. 아마도 이처럼 실체를 결여하고 있는 순수한 이미지로 환원된 인간군상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의 익명성이며 익명적 주체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다른 시리즈 작업에서 작가는 평면의 유리판에다가 사람형상을 비롯한 일상적인 기물이며 사물형상을 표현하는데, 주로 투각기법이 그리고 샌딩 기법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렇게 투각하거나 샌딩 처리된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다른 유리판에다가 중첩시키기도 하고, 그 자체로 벽면에 띄워 설치하거나 한다. 그리고 그렇게 투각된 형태의 그림자가 또 다른 유리판인 배경화면에 그리고 벽면에 맺힌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투각된 형상보다 그림자가 더 뚜렷하게 어필된다는 점이다. 투각된 형상과 그림자가, 이미지와 실루엣(실루엣은 그림자를 의미한다)이, 실재와 허상이 실재감을 놓고 서로 다투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림자며 실루엣 그리고 허상이 실물보다 오히려 더 또렷한 실체감을 얻는다. 실물과 그림자의 전복? 실제와 일루전의 전복? 이처럼 한갓 그림자에게 그리고 일루전에게 존재감을 내어준 실물이란 상황이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그리고 시뮬라크라(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적 현실)를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에 대한 보들리야르의 관념이 형상으로 예시된 경우를 보는 것 같고, 그 물화된 형식을 보는 것 같다. 

이처럼 이 일련의 시리즈 작업도 그렇거니와 인간군상 작업도 하나같이 그림자를 만드는데, 조명을 조절하기에 따라서 다양한 그림자의 꼴이며 형태를 얻을 수가 있다. 유리 고유의 투명성이며 투과성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그 자체 유리의 고유한 감각적 성질에 대한 오랜 숙고의 과정과 함께 지난한 형식실험의 결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림자의 꼴이며 형태가 조명에 연동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조명의 조도를 조절하기에 따라서 또렷하고 흐릿한 그림자를 얻을 수가 있고, 나아가 동원된 조명 수만큼 그림자 수를 연출할 수가 있다. 그렇게 두 세 개의 흐릿하고 또렷한 그림자가 하나의 화면 속에 아님 하나의 공간 위에 포개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너는, 그리고 존재는 무한정 포개지고 중첩되고 확장된다. 이를테면 투각된 형상, 샌딩 처리된 형상, 그리고 투각되거나 샌딩 처리된 형상보다 더 흐릿하거나 또렷한 그림자, 그리고 여기에 거울 형상마저 가세하면 나는, 너는, 그리고 존재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존재는 무엇인가. 작가의 작업은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있는가에 맞춰진 존재론적 물음 앞에 서게 만들고, 나는 너를 반사하고 너는 나를 반영하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반사하고 반영되는 존재의 거울그물(불교에서의 인드라망?) 앞에 서게 만든다. 그런데, 이 모두가 다만 그림자일 뿐이라면? 어디에도 실체가 없다면? 다만 반사되고 반영되는 무한현상이 있을 뿐이라면?  


실루엣이란 그림자를 의미한다. 그 그림자가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든다. 실루엣은 평면이다. 그 평면이 또 다른 평면을 낳는다. 이로써 평면의 실루엣 형상의 인간군상을 하나로 포개놓은 아님 중첩시켜놓은 작가의 작업은 실제와 이미지, 실제와 그림자, 그리고 종래에는 그림자와 그림자와의 관계를 묻는 작업이다. 그 어디에도 실체는 없다. 다만 순수한 이미지며 순수한 기호로 환치된, 그 자체 추상적인(아님 투명한) 존재의 표상이 있을 뿐. 어쩜 실체 자체가 이미 그림자일지도 모르고, 순수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에서 보는 바와 같은, 투명한 유리판을 투과하는 인간군상이며 그림자들은 어쩜 텅 빈 사람들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나는 너를 투과하고 너는 나를 통과한다. 그림자가 그림자를 투과하고 통과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걷고 있는 사람들에서 텅 빈 사람들에게로 연이어진, 존재론적 이행의 과정을 형상화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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