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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의미의 용법과 욕망의 사용법

고충환

초현실주의, 의미의 용법과 욕망의 사용법



말과 말 사이의 연결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는 구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덧없는 것이 될 것이고, 마치 흐르는 물처럼 될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흔히 20세기 문명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꼽는다. 삶은 결국 먹고 사는 문제(경제적인 그러므로 정치적인)와 종족보존(욕망과 에로스의 자기실현)이라는 가장 동물적인 층위에서 결정된다. 이 가운데 특히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깊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예술은 억압되고 잠재된 욕망이, 특히 성적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한 결과이다. 억압되고 잠재된 성적 욕망이 대부분의 무의식의 지층을 이루는 것이며, 그 중 일부가 예술로 표출되는 것. 결국 예술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한 방법이다. 이런 프로이트의 관념 곧 모든 욕망을 성적 욕망으로 일반화하는 것에 대해선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굳이 성적 욕망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억압되거나 잠재된, 그러므로 무의식의 지층을 이룬 욕망이 예술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은 무의식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의식보다 무의식(아마도 의식의 원형 내지 원형의식으로 부를 만한)이 더 본질적이다. 이처럼 의식이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처럼 무의식도 의식을 반영한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그러므로 현실에 연동된 욕망이 무의식의 지층으로 잠수를 타는 것. 


이런 프로이트의 관념은 정신분석학 비평의 전범이 된다. 이에 의하면, 작품에 드러난 특정 표현은 때론 작가 자신마저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어떤 억압된 욕망의 반영이다. 이때 반영은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왜곡된, 우회적인, 암시적인 형식을 취하기 쉽다. 자기를 속이고 제도를 속여 예상되는 질책을 피하려는, 그렇게 피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보존본능에 연유한 것이다. 결국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과 처벌을 피하려는 충동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것인데, 이때 숨바꼭질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꿈, 백일몽, 환각, 환영, 환청, 편집증, 정신분열증, 과대망상증, 조울증, 공포증, 실어증, 판단불능증, 두려움, 불안, 자폐, 공허, 허무, 방언, 그리고 자살충동과 죽음충동, 폭력충동과 살해충동과 같은, 프로이트라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했을, 억압을 통해 말하는, 억압된 채로 말하는 언술의 방법들이 포진해 있는 지점이며 성분들이다. 욕망과 억압, 유혹과 처벌의 수위와 경계를 넘나드는 이 지점이며 성분들은 이성의 영역 안에 자기를 정의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지금껏 이성의 언어로 정의되고 호명되고 등재된 적이 없는 탓에 불완전언어로 말하고 불구의 언어로 말한다. 그렇게 불구의 언어로 말하면서 현실과는 다른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세계를, 어쩌면 현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억압된,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을 펼쳐 보인다. 


이 목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지점이며 성분이 꿈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꿈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욕망의, 그러므로 무의식의 스크린이기도 하다. 이런 꿈에 대해선 쇼펜하우어가 프로이트를 앞선다. 1850년 쇼펜하우어가 출간한 <환영에 대한 소고>에 의하면, 꿈의 재현능력 곧 꿈에 나타난 사물의 생생한 묘사와 현실감은 단순한 상상력의 재현능력을 넘어선다. 꿈에 등장하는 직관적인 사물들 하나하나는 저마다 어떤 진리 혹은 본질 혹은 예견에 해당한다. 심지어는 논리적인 보편성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넘어서 현실 자체를 드러낸다. 꿈의 재현은 자연의 질서 혹은 법칙에 종속되지 않은 사물 자체의 본질이 유래하는 토대가 된다. 


꿈이 현실 자체를 드러내고 사물 자체를 드러낸다? 현실 자체와 현실이라는 개념 혹은 개념화된 현실은 다르다. 사물 자체와 사물이라는 개념 혹은 개념화된 사물은 다르다. 세계 자체와 세계라는 개념 혹은 개념화된 세계는 다르다. 어쩌면 현실 자체며 사물 자체 그리고 세계 자체를 개념화하는 것 곧 개념으로 옮기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래서 다시, 어쩌면 현실 자체며 사물 자체 그리고 세계 자체는 이런 개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자체가 개념화 이전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상 자체를 겨냥한 현상학과 현상학적 에포케와도 통한다. 다시, 그 자체가 개념화 이전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상 자체를 겨냥한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도 통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당대적인 아방가르드였다. 그리고 그렇게 초현실주의가 열어 보이는 사물대상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이중적이고 다중적이다. 꿈에 등장하는 사물대상이 현실에서 건너간 것이기에 친근하고, 그것이 배열되고 배치되는 방식이 비현실 아님 초현실적이기에 낯설다. 그리고 여기서 낯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현실 아님 초현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현실이며 현실 자체를 겨냥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념으로 옮기기 이전의 모든 사물대상은 낯설다. 그리고 당연히 어떤 의미로 결정화되어져 있지도 않다. 초현실주의는 사물대상의 바로 그 낯선 지점을, 개념화 이전의 상태를, 의미화 이전의 상태를 정조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렇듯 현실 자체를 열어 보이는 꿈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도 연동된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와 개별적인 존재자를 구별했다. 그리고 예술을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세계 자체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 식으로 예술이란 존재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존재의 존재다움이 실현되는) 일이며,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일이다. 곧 세계 자체가 아님 하나의 세계가 개시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꿈은 현실 자체를 드러내고 사물 자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세계 자체며 존재 자체 그리고 어쩌면 현상 자체를 드러낸다. 


다시, 하이데거는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를 구분한다. 과학적 진리는 논증의 대상이면서 실제로 논증을 해보면 논증이 되는 진리다. 이에 반해 예술적 진리는 진즉에 논증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실제로 논증을 해봐도 논증이 안 되는 진리다. 꿈이 그렇다. 꿈의 언술이 이중적이고 다중적이라는 것, 억압된 채로 말하고 억압을 통해서 말한다는 것이 그렇다(억압된 채로 말하고 억압을 통해서 말하는? 바로 무의식이 말을 하고 몸이 말을 한다. 그래서 자크 라캉은 우리는 언제나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고,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들어있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억압되기 이전의 욕망 자체(개념화되기 이전의 현실 자체)를 드러낸다. 다시, 그러면서 인간이 욕망의 동물이라는 진리 앞에 서게 만든다. 



MAGRITTE YOUNG GIRL EATING A BIRD 1927


다시, 꿈은 친근하고 낯설다. 그리고 꿈의 언술은 이중적이고 다중적이다. 억압된 채로 말하고 억압을 통해서 말한다. 꿈은 억압된 욕망의 우회적 표현이며 실현이라고 했다. 꿈이 친근하고 낯선 것은 억압된 욕망이 자기를 보여주는 시지각 방식이며,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것은 억압된 욕망이 말하는 기술이다. 결국 문제는 억압이었다. 나는 욕망을 실현하고 싶고, 제도는 욕망을 억압한다. 나의 관성과 제도의 관성이 부닥친다. 그 결과로 욕망이 억압되는데, 나는 억압된 욕망을 보상받고 싶고, 억압된 쾌락원칙을 회복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친부살해는 피할 수가 없다. 친부살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실제로 막스 에른스트는 이런 친부살해를 암시하는 아님 체제전복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다 큰 아들 그림의 제목이 <피에타 혹은 밤의 혁명>이다. 여기서 밤은 말할 것도 없이 억압된 욕망이며 혁명을 꿈꾸는 무의식이다. 이처럼 억압은 존재론적인 조건(흔히 결여와 결핍으로 나타난)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고, 동시에 사회학적인 지평을 얻는다.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그렇고,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가 그렇고,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리즘이 그렇고, 질 들뢰즈의 욕망이 그렇고, 자크 라캉의 실재계가 그렇다. 



Ernst Pieta or Revolution by Night, 1923, Oil on canvas


실제로는 있는데, 사실상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며 없는 장소를 미셀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감옥, 정신병원, 군대, 기숙사와 같은 사회의 변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는 억압된 욕망이 차곡차곡 쟁여질 뿐 해소될 기미가 없다. 


그리고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 사회가 잉여를 생산한다고 본다. 경제제일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이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잉여로 내몬다. 그러므로 잉여는 본질적으로 체제전복을 지향한다. 예술도 이런 잉여에 해당하며, 죽음이 가장 지극한 잉여다. 자본주의 사회가 죽음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죽음이 삶의 지향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기 때문이고, 예술을 매도하는 이유는 예술이 철저하게 비생산적인 것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도는 항상 일정한 잉여를 필요로 하는데, 제도가 고장 날 기미가 보일 때 예상되는 폭력에 내어줄 희생양이 필요해서다(르네 지라르). 체제안정을 위해 잉여가 필요하고 희생양이 요청되는 것. 그러므로 아이러니 하게도 아님 당연하게도 바타이유에게 잉여는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의 계기가 된다. 


그리고 바타이유에게 잉여는 에로스를 의미하며, 에로스는 작은 죽음 혹은 검은 죽음으로 형용된다. 그것의 언술은 예술의 언술과도 통하는데, 예컨대 항문에 박힌 눈알에서처럼(눈 이야기) 의식의 지정학이 몸의 지정학 그러므로 욕망의 지정학에 의해 재편되고 재구성된다. 더불어 초현실주의는 브르통파와 바타이유파로 나뉘는데(할 포스터), 브르통파가 에로스를 삶의 충동으로 해석했다면, 바타이유파는 에로스를 잉여 곧 죽음충동을 견인하기 위한 계기로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 사디즘과 마조히즘, 가학과 피학, 체제전복과 파시즘이 애매하게 뒤섞여 있는, 그러면서 신체의 절단된 부분 부분들이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자유자재로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한스 벨머의 인형들이 특히 이런 바타이유파의 에로스 해석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텍스트가 되어준다. 




Hans Bellmer_poupee_조합된 소녀_미노토르_1934-35


그리고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리즘은 억압의 물꼬가 터지면서 존재가 전인(완전한 인간)을 회복하는 장이다. 제도가 그어놓은 모든 경계의 금들이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뒤섞이는, 그리고 그렇게 섞이면서 세계가 재편되는 장이다. 그 장에서 일체의 이분법은 의구심의 대상이 되고, 모든 학문적 진지성은 회피된다. 그것이 욕망의 건강한 자기실현과 생명원리를 억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 들뢰즈에게 욕망은 각각 편집증과 정신분열증 분석에게로 분유된다. 편집증은 욕망이 집중되는 점이며, 정신분열증 분석은 욕망이 펼쳐지는 지평이고 고원이며 주름이고 리좀이다. 편집증은 국가의 논리며 제도의 논리 그리고 정체성의 논리로 대변되다. 여기에 대해 정신분열증 분석은 차이의 논리를, 말하자면 결정적인 의미를 요구해오는 제도의 논리에 대해 탈주를 꾀하는, 그렇게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렇게 차이들의 영토를 축조하는 실천논리를 대질시킨다. 


그리고 자크 라캉의 실재계는 특히 억압된 욕망의 쾌락원칙과 관련된다. 라캉이 주이상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연하면, 존재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억압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것이 잠수를 탄 것이 실재계를 이룬다. 이처럼 실재계는 상징계가 금기로 봉해 놓은 것들로 구조화돼 있는 것인 만큼 상징계에 드리워진 죽음(아님 죽음충동)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라캉주의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실재계를 사막에 비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친부를 살해한, 쾌락원칙이 자기를 실현한 자리엔 다만 황량한 사막에 스산한 바람이 불 뿐,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 황량한 사막은 동시에 불모의 사막이기도 한 것인가, 지젝의 비유는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한편으로 쇼펜하우어의 저작에 보다 직접적인 세례를 받은 키리코는 자신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형이상학적 회화로 명명함으로써 쇼펜하우어와의 관련을 암시하고 있다. 흔히 사물의 전치로 알려진 초현실주의 회화의 중요한 방법으로서, 그 핵심은 이질적인 사물들을 하나의 공간속에 만나지게 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어떤 표정과 의미를 사물에게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때 사물은 처음의 표정과 의미를 상실하는 대신 처음과는 다른 제3의 의미로 거듭난다. 이러한 생각 자체는 수술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이란 로트레아몽의 시적 단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렇담 이런 사물의 전치가 현대미술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사물의 의미는 그 자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배열과 배치에 연동된다. 말하자면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 그리고 화용론이다. 즉 말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그 말이 실제로 말해진 지점 곧 발화지점에서이다. 같은 의미지만, 말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이다. 맥락이 달라지면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즉 탈맥락과 재맥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 그래서 맥락이 의미를 낳는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물의 전치는 현대미술이 특히 개념미술 이후에 의미론 곧 일종의 의미를 다루는 기술에 다름 아님을 예시해주고 있고, 그 예시를 선취하고 있다. 


그리고 편집증과 관련해서는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가 주목된다. 달리의 회화에 있어서 편집증은 비현실적인 풍경이나 상황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그것의 치밀한 재현(묘사)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계나 더위에 땀을 흘리는 시계, 때론 따로 지지대가 필요할 만큼 무거운 졸음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방법을 편집증적 비평으로 명명한다. 아마도 편집증을 통해 세계를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화가의 방법 내지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이외에도 무의식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는 자동기술법, 있을 법 하지 않은 현실을 현실인 양 생생하게 그려내는 눈속임 회화기법을 통해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저마다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열어 보인다. 



Dali The Phenomenon of Ecstasy, 1933, Fotocollage


이런 태도며 방법과 입장이 비록 이성의 왕국인 현실에서는 정신적인 모순이나 착오 내지 정상의 결여로 치부되지만, 특히 예술에서는 신적인 아님 형이상학적인 영감의 순간성과 우연성을 포착함으로써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여는, 그리고 어쩜 현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이며 현실 자체를 여는 계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굳이 초현실주의가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모순이나 착오 내지 정상성의 결여 자체가 이미 현대미술의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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