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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섭 / 지상낙원을 실현하고 상처를 보듬는 조각

고충환

지상낙원을 실현하고 상처를 보듬는 조각



고대 그리스에선 사물에 깃든 완전한 형상을 에이도스라고 불렀다. 사물에 이미 완전한 형상이 깃들어있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는 이 말을 자기 조각의 화두로 삼았다. 돌 속엔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깃들어있다. 해서 조각가란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털어내는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조력자? 누구의 조력자인가. 사물에 완전한 형상을 심어놓은 자는 신이다. 그래서 결국 조각은 사물에 깃든 완전한 형상의 자기실현을 돕는 일이며, 신의 의지를 돕는 일이다. 다시 말해 조각이란 신의 의지와 조각가의 의지가 서로 상충하고 부합하는 일이다. 미켈란젤로는 바로 이 일로 괴로워했고, 특히 말년의 미완성작들에 그 인간적인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신과 인간의 투쟁을 함축한 파토스를 침묵으로 증언해주고 있고, 그래서인지 현대조각을 예비하는 것만 같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플로티누스의 일자로 연이어지고 재차 중세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으로 귀착된 것 곧 세속적인 학문과 교부사상이 합치된 것을 신플라토니즘이라고 하는데, 이런 신플라토니즘이 말년의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해준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다시, 사물에 이미 내재된 완전한 형상은 그러므로 신이며 신의 의지다. 그리고 자연이다. 로댕은 조각가의 일이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만 자연 그대로를 옮기는 일이라고 했다. 자연의 본성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 말하자면 존재가 진정 자기를 실현한 차원이며, 존재가 자기다움을 실현한 경지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정리를 하자면 사물에 이미 내재된 완전한 형상이란 신 또는 신의 의지를, 자연이며 자연의 본성을, 그리고 존재의 존재다움을 의미하고 아우른다. 


한진섭 作


이 화두는 그대로 조각가 한진섭의 화두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의 조각을 특징짓는 성질이기도 하다. 그 화두며 성질은 말하자면 자연의 본성 곧 돌의 본성이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급적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손길을 최소화해야 한다. 꼭 필요한 부분만을 표현하는, 소위 표현의 경제학이 요구되는 일이다. 도날드 주드라면 최소한의 구조라고 했을 것이다. 조각의 본질을 사물의 구조에서 찾는 소위 구조주의적 환원을 실행한 것인데,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사물의 본성이며 돌의 본성에서 조각의 본질을 찾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를 위해선 돌의 본성에 부합하는 성질이며 질감이며 색감이 무엇인지를 읽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읽은 것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돌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전제되는 것인데, 그 전제는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 돌과 내가 합치되는 경지며, 돌의 본성과 나의 본성이 하나로 부합하는 차원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모티브를 전제하지 않는다. 모티브를 먼저 정해놓고, 그 모티브에 돌을 맞추지 않는다. 통상은 그런데, 작가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거꾸로다. 먼저 돌의 표정을 보고, 그 본성에 귀 기울인다. 특히 막돌을 대충 쌓아놓은 것 같은데, 희한하게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완결된 느낌의 사람형상이 어필돼오는 일련의 조각들에서 그 적극적인 경우를 확인해볼 수가 있다. 막돌이 뭔가. 막돌만큼 돌의 본성이 오롯한 다른 경우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막돌은 세월이 만든 조각이다. 그 조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의 지층이 만든 주름이 보이고 그 결 위로 세월이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그 세월을 자기 내부로만 삭였을,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응축시켰을 응어리가 보이고 상처가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이 보이고 표정이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몸통이 보이고 다리가 보인다. 그렇게 막돌은 저마다 고유한 형태며 표정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 해서 그 중 몸통처럼 보이는 것이며 다리처럼 보이는 것 그리고 얼굴처럼 보이는 것을 가져다가 층층이 쌓아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완결된 사람형상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최소한의 표정을 보탤 수도 있고, 좀 아니다 싶으면 머리와 몸통 사이에 고임돌을 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막돌의 표정이 천태만상이듯 천의 표정이며 만의 얼굴을 가진 선남선녀들의 초상이 빗어진다. 동네 이웃 같은 사람들이며,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들이다. 


막돌을 소재로 한 조각들을 예로 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가급적 돌의 본성 그대로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본성은 대개 프리미티비즘 조각, 아르카이즘 조각, 그리고 특히 대충 쪼다 만 것 같은, 어눌한 듯 자연스러운 표정의 동자승과 같은, 전통적인 석물조각에서의 미의식이며 성정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하나같이 소위 현대조각의 전형으로 알려진 경우와는 일정한 차이를 갖는 것인데, 반쯤은 시간이 만들어준, 그리고 그 절반은 돌과 같은 질료 자체의 본성에서 유래한 어떤 원형적 형상을 매개로 현대조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돌의 본성에 충실한 경우로 치자면 이처럼 막돌조각 연작에서 그 두드러진 특징이며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지만, 다른 작업들은 이와는 또 다른 형태로 그 본성을 실현한다. 이를테면 산지에서 석재를 캐낼 때 대개는 일의 편의상 사각형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고, 작가는 가급적 그 형태 그대로를 존중하는 편이다. 마치 전체적으로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 속에 형상이 담기는 포맷을 기본형으로 하여 무게중심이 가운데로 집중되는, 그리고 그렇게 좌우대칭 구도를 이루면서 힘의 안배가 균형을 유지하는, 그런 정적이면서 안정된 조각이 가능해진다. 그 유래로 치자면 정적인 구조 속에 내면화의 경향성과 영원한 시간을 담은 고대 이집트 조각 정도를 그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조각 중엔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이처럼 정적이고 안정감 있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인상을 주는 조각이 많은데, 아마도 작가의 심성과도 그리고 조각에 대한 관념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 조각들은 말하자면 돌에다가 작가의 심성을 투사한 것이고 조각에 대한 생각을 투자한 것이다. 돌의 본성에 자기의 본성을 일치시킨 것이다. 그 조각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작가의 조각을 관통하는 세계관이며 자연관이 보인다. 조각들은 부분과 부분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조합해낸 조각은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통 돌인 경우에도 대개는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와 같은 세 덩어리로 나뉜다. 신체의 구조를 함축하고 분화한 것이지만, 말하자면 신체의 본성 그대로를 옮긴 것이지만, 더불어 여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탑재돼 있다. 상호간 이질적인 기능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되는 조화로운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 개개인을 보면 그렇고, 탈개인적으로도 사회적인 삶의 양상이며 양태를 암시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런 조화로운 인간과 인간이 만나지는 지점, 이를테면 가족과 연인을 소재로 한 일련의 조각들이 만남과 인연의 메타포를 예시해주고 있다. 공동체문화로 대변되는 관계며 연대와 같은 존재론적 성찰이 깃들어있다. 말하자면 나는 너에 의해 그리고 너는 나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고 최소한 존재의 의미를 얻는,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소위 타자론에 대한 인식이 배어있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에선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전체를 만든다. 머리와 몸통과 다리가 어우러지고, 나와 네가 어우러지고,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지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지고, 동물과 사물이 어우러지고, 사람과 세계가 어우러진다. 작가의 조각에선 심지어 동물과 사물에서마저 인간의 그것과 같은 살과 피가 흐른다. 돌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고, 인간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고, 동물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고, 사물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고, 세계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다. 독일의 미학자 빌헬름 보링거는 세계와 친화적인 예술이 세계에 자기를 감정이입하고, 세계와 불화를 겪는 예술이 추상미술을 낳는다고 했다. 작가는 세계를 자기 속으로 불러들이고, 자기를 세계에 내어준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이입을 매개로 세계와 만난다. 그러므로 그렇게 세계에 자기를 이입하는, 심지어는 무생물에마저 자기를 내어주는 작가는 행복하다. 이쯤 되면 사실상 유토피아랄 만하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신의 조각을 통해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지고 사람과 사물의 경계가 넘나들어지는, 그런 지상낙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에게 지상낙원은 하늘의 일이 아닌, 땅의 일이었고 세속의 일이었다.

 

이처럼 작가에게 나는 너의 부분이고 너는 나의 일부이다. 그런 유대관계로 인해 나는 너로 확장되고, 동물로 연장되고, 사물에 연동되고, 세계와 통한다.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전체며 조화로운 총체를 일궈낸다는 발상인데, 그 발상은 근작에서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파벽돌이며 기왓장 파편을 마치 모자이크하듯 형태의 표면에 덧붙여나간 조각이다. 파벽돌이며 기왓장 파편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것들이 모여 사람을 만들고, 동물을 만들고, 사물을 만들고, 세계를 만든다. 파벽돌이며 기왓장 파편은 저마다 자기 내면에 꼭꼭 숨겨놓은 상처를 상징하며, 그것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어우러지면서 치유의 표상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선 세계와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지상낙원을 실현하고 있었고, 쓸모없는 것들에 살과 피가 흐르게 해 상처를 보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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