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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구 / 이미지 시, 꿈과 현실의 언저리에 있을 존재의 원형이며 비의를 찾아서

고충환

이미지 시, 꿈과 현실의 언저리에 있을 존재의 원형이며 비의를 찾아서



퍼포머, 무당의 후예. 신용구는 행위예술가다. 영어로 치자면 퍼포머고 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예술은 세상에 대해 말을 거는 기술이다. 여기서 행위예술가는 몸을 매개로 세상에 대해 말을 건다. 그런데, 몸을 매개로 세상에 대해 말을 거는 것은 퍼포먼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임도, 연극도, 무용도 세상에 대해 말을 걸기 위해 몸을 매개로 사용한다. 그래서 작가의 행위예술은 조형예술보다는 공연예술에 가깝다. 모더니즘의 장르적 특수성 이후 보편화된 탈장르 현상이나, 통섭이나 융합 같은 현대미술과 관련한 주요 담론들, 그리고 원래 신에 대한 제사로부터 예술이 유래했고 당시 예술은 장르 간 구분이나 경계가 없는 토탈아트로 나타난 예술기원론에도 부합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특히 신에 대한 제사로부터 유래한 신화적 제의며, 이를 집전하고 수행하는 주체 내지 대리주체(신의 메신저)로서의 무당이 그것이다. 이러저런 신화(신화는 옛날이야기고, 특히 존재론적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를 차용하고, 그렇게 차용된 이야기를 현대적 이야기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대를 하나의 직물로 직조해내는 현대판 무당이다. 무당이란 말하자면 이야기꾼이고 신의 메신저다. 이야기꾼으로서의 무당은 특히 구술문화시대에 신성한 이야기를 전수하는 매개체가 된다. 과거와 현재, 현실적 존재와 원형적 존재, 그리고 특히 삶과 죽음을 매개시켜주는 중재자가 된다. 현대미술로 치자면, 의미와 무의미를 매개하고 중재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은 무당과 관련이 깊다. 현대미술은 말하자면 무당을 이어받았고, 특히 행위예술가가 그렇다. 




이미지퍼포먼스


여기에 작가는 표현의 도구로서 자기 몸을 대상화하고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기연출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런 연유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짙다. 자기에게서 시작해 재차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를 자기 외부로 확장하고 자기 내부로 심화시키는 과정을 순환 반복하는 작업은 결국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나서는 머나먼 여로에 다름 아니다. 영화로 치자면 로드무비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그것은 비록 개인사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진정한 자기며 원형적 자기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가의 퍼포먼스가 퍼포먼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움직임이 적고 정적이라는 점이다. 흔히 그렇듯 서사가 강하고 이데올로기가 뚜렷한, 그리고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움직임이 큰 여타의 퍼포먼스의 경우를 소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작가의 경우는 시에 가깝다. 표현의 키가 자기 외부를 향하는 경우와 비교되는, 자기 내면을 겨냥한 경우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의 퍼포먼스는 시적이고 정적인 여백이 있다. 이런 여백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반성적인 작업의 경향과도 통한다. 메시지를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함축적으로 던지는, 그런 암시의 기술이 강조된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의미론적 여백을 제시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여백을 채우게 해 자연스레 관객참여를 유도하는, 그럼으로써 자기를 관객들에게 내어주는, 그런 존재의 분유며 표현의 분유를 실천하고 실행하는 것. 


신화와 더불어 꿈을 꾸다. 순환, 꿈, 바람을 안고가다, 미로속의 실타래, 현의 변주, 그리고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 신용구가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들이며 주제의식들이다. 여기서 순환은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 삶은 죽음을 향하고,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재생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무한 반복되면서 무한정 연쇄된다. 그러므로 삶은 어쩌면 그렇게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과정의 한 순간이며 계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에서 잠시잠깐 꾼 막간의 꿈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망각의 강을 건너는 순간 다 잊힐 일장춘몽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처럼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의 고리를 끊어 그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윤회의 고리를 끊어 미궁과 미로로부터 탈주하는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은 대략 이런 서사를 함축하고 있다. 기왕에 알려진 존재론적 거대담론에 기대어 자기 식의 그리고 자기만의 서사를 생성시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작가는 몇 가지 의미심장한 신화를 차용한다. 크레타 섬의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쳐 죽인 영웅 테세우스의 무사귀환을 도운 아리아드네의 실 이야기, 신들로부터 산 정상에 바위를 굴려 올리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을 반복해야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프스 이야기, 그리고 이카루스의 잃어버린 날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의미심장한 것은 하나같이 인간의 그리고 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삶은 미궁이고 존재는 그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루스다. 미노타우루스가 반인반수의 괴물인 것은 존재의 양면성을 상징하고, 이중인격이며 다중인격을 상징하고, 정체성 혼란을 상징하고, 판단불능증(매 순간 선택과 판단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노이로제가 만든 증상이며 징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인간은 시시프스처럼 무익한 일을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무익한 일이 무엇인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고 생존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익한 일에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생존하기 위해 하는 일 바깥에 있다. 그게 뭔가. 잉여다. 그 자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니체는 미학이 아니라면,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했다. 바로 건전한 삶을 도탄에 빠트리는 잉여(조르주 바타이유)만이, 미학의 초월적 비약(니체)만이, 예술적 상상력을 통한 도피(보들레르)만이, 실재계의 쾌락원칙(자크 라캉)만이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이 비극적인 또 다른 이유이다. 


그리고 이카루스의 녹아내린 날개는 꺾인 이상이며 망실된 이상을 상징한다. 그렇게 진즉에 이상이 망실됐음에도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이상을 추구해야하는 것에 인간의 삶이 비극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이유가 취할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데 있고, 그 욕망이 취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도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정작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욕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취할 수 없는 욕망으로 그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이카루스는 추락하면서 한 쪽 날개를 남겨놓았다. 바로 꺾인 이상이며 망실된 이상을 상징하는, 취할 수 없는 욕망이라고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상징하는 부조리한 날개다. 


그리고 작가는 이카루스로부터 그 한 쪽 날개를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한 쪽 날개를 부여안고 벌이는 작가의 퍼포먼스는 이카루스의 실패를 그러므로 존재의 실패를 증명하는 일이며, 어쩌면 이카루스가 실패한 기획(날고 싶은 욕망)을 완성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불가능한 기획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기획을 가능한 기획으로 전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부조리한 날개로나마 날고 싶다는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는, 가련하고 위대한 인간정신의 그러므로 비극의 승리를 재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테세우스처럼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을 길잡이 삼아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여기서 실은 인연을, 관계를, 그리고 시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인연과 관계와 시간은 인간존재를 상징한다. 즉 삶이란 인연과 관계와 시간의 실을 가지고 실타래를 만드는 일이다. 인연의 골이 깊을수록, 관계의 망이 촘촘할수록, 시간이 층층이 쌓일수록 실타래는 그만큼 더 커진다. 윤회의 골이 깊고 시간의 켜가 두터운 사람일수록 실타래는 그만큼 더 크고 단단하고 아름답다. 그 실타래는 바로 시시프스가 굴리는 바위 덩어리다. 그 바위 덩어리는 이중적인데, 단단한 만큼 비극적 깊이가 깊고, 그 비극적 깊이를 온몸으로 겪는 존재를 증명하기에 아름답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의 실타래를 굴리며 인연을 찾고 관계를 만들고 시간을 쌓기 위해, 그리고 어쩜 이런 존재의 굴레를 벗기 위해 거리를 나서고 배 위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른다. 여전한 미궁 속을, 아님 미궁 밖을 종횡한다. 그런데, 작가는 과연 미궁 속을 빠져나온 것인가. 빠져나온 게 맞는가. 미궁은 혹 겹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서 하나의 미궁을 빠져나오면 또 다른 미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타래를 굴리는 작가의 행위는 이런 또 다른 미궁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미지퍼포먼스. 작가의 퍼포먼스는 움직임이 적다고 했다. 시적이고 정적인 여백이 있다고도 했다. 자기 자신을 표현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이런 점들이 모여 자기반성적인 내면화의 경향성을 강화시켜준다. 그리고 여기에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그리고 때론 아예 가면으로 대체하는, 하얗게 분장한 얼굴도 이런 내면화의 경향성을 돕는다. 분장한 얼굴은 무표정하거나 최소한 중성적으로 보이고, 이런 중성화된 얼굴이며 표정이 자기 외부보다는 자기 내면을 향한다. 자기 내부로 우주를 열고, 그렇게 열린 우주를 탐색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밑도 끝도 없는 내면의 바다(흔히 심연이며 지극한 어둠 아님 어둠 자체로 형용되는)를 헤매는 것이다. 그 과정이 행위 위로 어떤 의미심장한 이미지를 밀어 올린다. 비극적 존재의 원인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사실은 현대인이 비극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했다), 부조리한 삶의 비의를 응축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그 비의를 감각적 쾌락의 성분으로 승화시켜놓은 것 같은(시의 위상학?), 존재의 원형이며 원형적 존재에 대해 말해줄 것 같은, 그런 이미지들이다. 


작가의 행위는 이처럼 존재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비의를 내보이는, 드문 순간이며 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 같다. 그래서 일종의 이미지퍼포먼스로 명명할 만하다. 그렇게 작가의 행위는 이런 이미지들이 떠도는 흐름이며 지속 앞에 서게 만들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인, 그래서 오롯이 자기 자신과 만나지게 하는, 그런 극적인 순간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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