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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 프레임을 통해 본 도시, 자연이 들려준 소리

고충환

프레임을 통해 본 도시, 자연이 들려준 소리 



전통적으로 회화는 일종의 유사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을 의미했다. 벽 위에 가상의 창을 만들어 공간을 확장하고 현실을 연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사현실을 매개로 현실을 연장하고 확장하는 것인데, 그림이 붙박이로 존재하던 시절에 유사현실은 벽 위에 그려졌었고, 이후 그 역할을 이젤 페인팅 곧 평면의 캔버스가 떠맡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 아님 결정적인 것이 창이며, 이런 창에 해당하는 것이 캔버스고 프레임이다. 해서, 회화란 가상의 창을 만들고 프레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 흡사한 유사현실을 재현하고 제안하는 일이다. 그렇게 재현하고 제안된 유사현실은 친근하면서도 낯선데, 유사현실이 현실을 닮았기 때문에 친근하고, 그 매개역할을 하는 가상의 창이며 프레임이 현실을 확장하면서 단절시키기 때문에 낯설다. 유사현실을 매개로 현실에 개입하고 현실을 낯설게 하는 것. 결국 재현적인 회화란 그저 그림의 감각적 표면현상에 머물기보다는, 이처럼 가상의 창이며 프레임을 매개로 현실과 유사현실의 관계를 묻는, 그런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논평적인 일종의 메타회화(회화의 본질을 묻는 회화)를 수행하고, 그 수행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김영구의 회화는 이런 메타회화를 수행하는 일면이 있고, 그 수행을 엿보게 해주는 적절한 사례가 되어주고 있다. 



Frame-city-공사중_캔버스에 아크릴


김영구는 프레임을 그린다. 보통은 캔버스 자체가 일종의 가상적인 창이며 프레임이다. 그래서 굳이 프레임을 강조할 일도 없고 필요도 없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전제며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이런 암묵적인 사실 뒤로 그림이 다름 아닌 가상의 창이며 프레임이라는 사실이 묻히고 잊힌다. 작가는 그렇게 묻히고 잊히는 사실을 그리고 싶고 드러내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이 일종의 가상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로써 다른 재현적인 회화들이 간과하고 있는 지점을 건드리고 싶고, 다른 재현적인 회화들이 미처 가닿지 못한 지평을 열어놓고 싶다. 


무슨 말인가? 캔버스 자체가 이미 프레임임을 인정한다면, 그림 속에 굳이 프레임을 그려 넣는 작가의 행위는 프레임에 프레임을 그려 넣는, 일종의 이중프레임이며 이중그림이며 액자그림(소설 속에 소설이, 서사 속에 서사가 중첩되고 포개지는 액자소설에 비교될 만한)을 수행하는, 그러므로 그림으로 재현된 현실과 그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조적인 조건으로서의 프레임의 관계를 묻는 일이다. 해서, 하나의 그림이란 그림인가 아님 개념인가를 묻는 르네 마그리트의 과제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마그리트가 텍스트를 매개로 그 과제를 묻고 있다면, 작가는 프레임을 매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굳이 프레임을 의식하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화를 프레임 자체의 문제로 환원한 쉬포르 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와도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유사현실이며 가상적인 환영이, 회화의 본질을 묻는 메타회화며 개념미술이, 회화를 구조적인 문제로 환원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긴밀하게 직조돼 있다. 회화적 성과로 드러나 보이는 감각적 표면이 재현적인 것이어서 자칫 지나치기 쉽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그림을 탄탄하게 지지해주는 논리의 지층이며 베이스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프레임 속에 프레임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프레임 속 프레임에다가 사계를 그리고 풍경을 그리고 자연을 그리고 섬을 그리고 도시를 그려 넣는다. 작가는 특히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를 곧잘 그리는 편인데, 아마도 실제로 그 앞에 서 있었지 싶은 지점에다가 시점을 설정해 관객의 자연스런 동일시를 유도하고 참여를 유도한다. 거기엔 이러저런 자연풍경과 함께 바이올린과 색소폰 같은 악기가 그려져 있고, 소라가 그려져 있다. 자연을 음색으로뿐만 아니라 음률로도 재현한 것이며, 음색과 음률이 상호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자연에 대한 감동을 배가하고 증폭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비록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어서 실제로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그림 앞에 서면 왠지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며, 자연에 대한 감동을 음률로 번안한 바이올린 선율이며 색소폰 연주가 들려올 것만 같다. 특히 소라는 소라를 파도에 떠밀려온 태곳적 소리며 원초적 소리, 자연 저편으로부터 건너와 존재의 비의를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 귀에다가 비유한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시를 연상시킨다. 



Frame-city-채식주의자_캔버스에 아크릴


실제로는 들리지가 않는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음색이 음률을 떠올리게 한다? 소라가 귀에 비유된다? 이것들은 다 뭔가? 여기에는 감각 상호간의 연동이 있다. 비록 감각들 저마다는 각각이지만,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통하게 해주는 것이 공감각이고, 연상 작용이고, 암시다. 어쩌면 예술은 이런 암시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것으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일지도 모르고, 음색으로 하여금 음률을 암시하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소라와 귀의 차이를 넘어 귀 대신 소라를 대입시키는, 소라로 하여금 귀를 대리수행하게 하는, 그런 대입과 대리의 기술일지도 모르고, 그런 상호 연상 작용의 기술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앞에 서면 파도소리가 들리고, 자연의 음률이 들리고,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유래한 존재의 전설이 들린다. 


작가의 그림에선 대입과 대리의 기술이 수행된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비의 기술이 부가되면서, 또 다른 의미론적 지평을 열어놓는다. 특히 도시를 소재로 한 그리고 섬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 그렇다. 이를테면 도시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작가는 도시 이미지를 흑백 모노톤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전사하고, 그렇게 전사된 이미지를 전면에 포치한 일상적인 모티브와 대비시킨다. 여기서 배경화면으로 등장한 도시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재현한 것은 회색도시며 무미건조한 도시, 차가운 도시며 기계적인 도시, 그리고 특히 중성적인 도시며 익명적인 도시로 나타난 현대도시의 성분이며 질감에 어울린다. 


작가는 이런 회색도시를 배경으로 그림의 전면에 그려진 트럭이며 공사현장표지판과 대비시킨다. 아마도 공사 중인 도시로 상징되는 역동적이면서 어수선한, 뭔가 안정적이기보다는 불안정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의 질을 논평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런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치자면, 배경화면의 회색도시와 함께, 이를 그림의 전면에 포치한 먹음직스럽고 탐스런 과일이며 야채와 대비시킨 그림일 것이다. 회색도시와 자연을 대비시키고, 삭막한 도시적 삶에 풍문으로나 떠돌 자연의 생명력을 대비시킨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는 이 그림을 채식주의자로 명명하는데, 도시적 삶에 자연의 생명력을 수혈하는 것과 함께 최근의 채식주의 열풍을 풍자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오히려 바니타스 곧 인생무상의 역설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대비가 강조되는 또 다른 그림으로 섬을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역시 흑백 모노톤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섬 이미지를 전사하고, 그렇게 전사된 섬 이미지를 전면에 그려 넣은 소라며 화병에 꽂힌 꽃과 대비시킨다. 두 개의 자연 곧 섬으로 대리되는 자연 자체와 화병으로 대리되는 인공자연을 대비시켜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자연 자체를 표상하는 섬이 흑백모노톤으로 처리된 점이다. 아마도 과거지사가 된 자연, 풍문으로나 떠도는 자연, 상실된 자연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소라는 그 섬이 들려준 소리가 그립고, 희미한 전설처럼 기억으로 남겨진 그 소리가 더 그립다. 그래서 섬은 자연 자체를,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바다 앞에 서고 섬 앞에 서면 이처럼 파도에 떠밀려온 상실된 것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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