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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정 / 선긋기와 점찍기,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전유하고 탈주하기

고충환

선긋기와 점찍기,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전유하고 탈주하기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 미술사에서 표현주의가 바로 이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예술의 정의로 삼았고 모토로 삼았다. 표현주의자에게 세계는 주체에 연동돼 있고, 외계는 주체의 내면에 연속돼 있다. 똑같은 대상도 감정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 똑같은 대상도 꿀꿀할 때 틀리고 발랄할 때 다르다. 외계는 그대로인데, 주체의 감정 여하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외계에 주체의 감정을 이입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표현주의는 외계, 엄밀하게는 세계의 감각적 표면현상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그 전제를 창작주체의 내면으로 옮긴 것이 추상표현주의다. 표현주의가 감각적 표면으로 드러난 사물대상에 감정을 이입한 경우라면, 추상표현주의는 감정 자체를 표현하고 표출한다. 감정에 정해진 형태가 따로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비대상회화고 비구상회화다. 그렇게 알만한 형태가 따로 없지만, 에토스며 파토스와 같은, 다르게는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의 흔적이 낭자하고 역력하다. 감정을 대상화한 것인데, 여기서 감정은 사실상 몸이다. 몸은 감정이 거하는 집이고, 따라서 몸과 감정을 따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감정을 그린다는 것은 곧 몸을 그린다는 것이다. 다르게는 바이오리듬을 그린다는 것이고, 생체의 습성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 곧 몸 그림이라고도 한다. 



선긋기_종이에 목탄


여기서 권혜정은 순수감정을 그리고 싶다. 아님 그린다. 순수감정? 감정 자체? 텅 빈 감정? 감정의 최초 상태? 마치 백지와도 같은 감정의 영도지점?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외계는 물론이거니와 감정마저도 대상화하지 않은 감정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감정이란 외계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그 무엇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감정 자체)마저도 대상화하거나 전제하지 않은 감정 자체를 그린다는 것은 일견 모순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순수감정을 그린다는 작가의 기획은 어쩜 이런 모순율이며 불가능한 기획 자체를 대상화하고 전제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정컨대 사심 없이, 이해관계 없이, 목적지향성 없이 그리기, 내면의 눈으로 보고 혜안과 심안으로 그리기, 대상과 내가 일체화된 나머지 대상에 대한 의식이 지워진 상태에서 그리기, 능동태보다는 수동태로서의 그리기, 그린다기보다는 그려지게 하기, 그럼으로써 심지어 주체에게 마저도 알려진 적이 없는 어떤 미답의 영토에 가닿고 그 비전이며 이미지를 열어 보이기, 이로써 시각에 가려진 다른 감각요소들을 구제하고 복원하기(하나의 이미지란, 특히 몸으로 그린 이미지의 경우에 이는 그저 시각정보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쩜 통감각의 소산이며 결과일 수 있다)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몸 그림. 작가는 긴 나무 끝에 연필을 매단 나무막대를 바닥에 깔린 종이를 향해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려친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조형요소의 점과 선을 얻는다. 이를 통해 감정이 작용하고 작동되어지는 방식을 형식 실험한 것이며, 내면의 눈을 통해 몸속 깊은 곳에서 작용되어지는 감정의 리듬을 선 또는 점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내면의 눈? 외면의 눈이 감기면 내면의 눈이 열린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내면의 눈으로 오롯이 감정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아님 뭘 그리겠다는 의식, 말하자면 사물대상에 대한 의식이 지워진 상태에서 그린 것이므로, 사실은 그려진 그림이다. 감정을 그린 것이므로 그림은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레 감정에 연동된다. 격한 감정이 격한 점을, 순한 감정이 부드러운 선을 그린다. 아님 그려지게 한다. 격한 감정의 경우에 연필은 곧잘 부러지기도 하고, 점이며 선도 짧게 끊어지듯 단속적이다. 점과 점 사이가 단절되면서 연이어지는, 아님 그렇게 단절되면서 어떤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그대로 한 장의 종이 위에 격하고 순한, 세고 부드러운, 정적이면서 동적인 감정의 기복이 오롯이 기술되고, 분노와 슬픔, 에토스와 파토스, 광풍과 적요, 그리고 어쩌면 명상과 관조와 같은 감정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감정의 성분이 고스란히 등재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면 같은 방법으로 작가는 연필 드로잉을 그리고, 붓 드로잉을 그리고, 크레파스 드로잉을 그린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그림들은 그대로 감정을 그린 것이고, 바이오리듬을 기록한 것이며, 몸의 습성이며 생리를 기술한 것이다. 


선긋기. 작가는 종이 위에 목탄으로 선을 긋는다. 그리고 이건 아니지 싶어 손으로 그 선을 지워 뭉갠다. 그리고 다시 선을 긋는다. 그리고 다시 이것도 아니다 싶어 선을 지운다. 감정에 부합하는 선, 감각이 좋아하는 선이 찾아질 때까지 이 지난한 과정은 반복되고 계속된다. 그리고 그렇게 지워지고 뭉개진 선들의 자국으로 거뭇해진 화면 위로 마침내 하나의 선이 그어진다. 그렇다면 그 선은 최종적인 선이며, 감정에 부합하고 감각이 좋아하는 선인가. 최종적인? 그 선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그리고 최소한 잠정적으로나마 최종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부정과 부인으로 점철된 선들의 흔적이며 사체가 만들어준 분위기 곧 죽은 것들의 아우라에 합치되고 중첩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얀 종이 위에 최종적인 하나의 선이 그어졌다면 분명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줄 것이고, 그 선이 과연 최종적인지도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선은 사실은 그 밑에 죽은 선들과 구별할 수 없고 별개일 수가 없다. 


옛날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종이 대신 양피지를 사용했다. 종이에 쓴 글씨가 틀리면 종이를 버렸지만, 양피지에 쓴 글씨가 틀리면 그 글씨를 지우고 다시 썼다. 이런 사실에 착안한 롤랑 바르트는 하나의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제안한다. 양피지 위에 주체에 대한 정의를 쓴다. 그리고 이건 아니지 싶어 그 정의를 지우고 다른 정의로 고쳐 쓴다. 그리고 역시나 이것도 아니다 싶어 그 정의를 다시 지우고 또 다시 고쳐 쓴다. 그리고 최종적인 정의가 찾아질 때까지 이 과정은 거듭되고 반복된다. 그런데, 그 정의는 과연 최종적인가. 아니다. 다만 잠정적으로만 최종적일 뿐이다. 그것도 아니다. 주체에 대한 정의는 양피지 위에 거듭 지워진, 그렇게 지워졌지만 양피지에 아로새겨져 양피지를 너덜너덜하게 만든, 부정과 부인으로 거듭된 다른 정의들이며 죽은 정의들의 집합 내지 총체다. 모든 의미가 그렇다. 하나의 의미란 사실은 거듭 부정되고 수정되는, 보완되고 보충되는, 그리고 그렇게 이미 달라진 다른 의미들로 중첩되고 포개지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인용과 주석의 결과이며 소산이다. 이걸 바르트는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고쳐 쓰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라고 부른다. 



점찍기_캔버스에 아크릴


감정에 부합하는 선, 감각이 좋아하는 선, 최종적인 선을 찾아가는 작가의 지난한 과정은 그 선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함께 한 장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진다. 지난한? 부단한? 머뭇거리는? 멈칫거리는? 이거다 싶은 결정적인 감각점 주변에서 맴도는? 서성이는? 끊임없이 결정을 유보하는? 거듭 다른 선들을 부정하는? 하나의 선을 긋기 위해, 하나의 선을 찾기 위해, 하나의 선을 정의하기 위해, 하나의 선의 의미를 부여잡기 위해 작가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몸에서 일어나는 일, 이 모두가 마치 너덜너덜한 양피지처럼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에 오롯이 내려앉아 쌓인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 몸이 하는 일? 그래서 작가의 선 긋기는 차라리 수행에 가깝다. 


점찍기. 수행으로 치자면 점찍기가 선긋기에 못지않고, 오히려 점찍기가 선긋기보다 더하다. 선긋기는 그나마 감각의 정점 내지 감각점을 어림할 수나 있지만, 점찍기는 그마저도 없다. 아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선긋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감각점, 말하자면 그림을 향해 가게 만드는 방향이며 최종적으로 붓을 놓게 만드는 지점으로 치자면 이건 숫제 안개 속을 헤매기 그대로이다. 그저 빼곡한 점들로 텅 빈 캔버스를 가득 채우기라는, 일견 무모해보이기 조차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게 뭔가. 작가가 점찍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지점인가. 그렇다. 그래서 수행이고 몸 그림이다. 몸으로 그린 그림이며, 의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점을 찍는다는 맹목적인 과정이며 기계적인 과정에서 의식은 주체 뒤로 빠지고 몸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주체가 몸에 일체되고, 몸이 투명해지고, 다만 몸의 투명한 수행만이 오롯해진다. 뭘 그린다는 것, 뭘 만든다는 것이 거기에 개입될 여지는 없다. 그렇게 밀고가다 보면 어느새 텅 빈 캔버스는 빼곡한 점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 자체로 집요한 그리기며 편집광적 그리기를 예시해준다. 편집광적 세계관이란 하나의 점 속에 세계가 오롯한, 세계가 하나의 점 속에 수렴되는, 하나의 점이 세계 전체와 등가를 이루는, 그런 세계관이다. 그 세계(사실상 세계관)의 표면 위로 작가는 몸을 밀어올리고, 몸의 투명한 수행을 밀어 올린다. 


덧붙이자면, 선긋기나 점찍기는 점과 선, 면과 색채와 같은 형식요소에서 회화의 존재이유를 찾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형식요소를 위해 재현과 서사 그리고 특히 몸을 배제시켰다. 작가는 그렇게 배제된 몸을 복원함으로써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전유한다. 아님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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