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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 털과 털 뭉치,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의 알레고리

고충환

이주형 / 털과 털 뭉치,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의 알레고리


습지에서 사구로. 전작에서 작가는 습지를 그렸다. 여기서 습지는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을 하나의 이상향으로 설정해 놓고, 그 이상향에 대비되는 축축하고 눅눅한, 뭔가 명확하지가 않은 현실을 대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은 말 그대로 이상향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회의가 들었다. 그럼에도 여하튼 바싹 마른 것 중에서도 바싹 마른 사구를 그린다. 그렇게 작가의 주제의식은 습기로부터 사구로 옮아왔다. 그러므로 습기와 사구는 하나로 통하면서 다르다. 하나같이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통하고, 그 명확함이 사실은 하나의 이상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회의 내지 의심 이전의 지향과 이후의 지향이란 점에서 다르다. 회의 내지 의심 이전은 그렇다 치고, 왜 작가는 회의 내지 의심 이후에도 여전히 명확함을 지향하는가. 그 명확함은 하나의 이상향임이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확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이상향임을 인정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의 기획이 곧 불완전한 기획임을 인정한다는 것, 그럼에도 그런 불완전한 기획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추구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곧 불완전한 추구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쩜 예술이란 무의미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이며, 불완전한 추구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예술의 본질을 향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것을 빌려 비가시적인 것을 밀어 올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매개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상기시키는, 존재를 통해서 부재(어쩜 그 자체 감각적 존재를 넘어선 진정한 존재일지도 모를)를 암시하는, 그런 암시의 기술을 부려놓고 있었다. 




묵념, Oil on canvas, 91X117, 2013


털과 털 뭉치, 비결정성과 애매모호함. 그렇담 작가의 그림에서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부재하는가. 무슨 존재를 통해서 무슨 부재를 암시하는가.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털이며 털 뭉치다. 작가는 털을 그리고 털 뭉치를 그린다. 화면을 온통 털이 뒤덮어서 가린다. 아마도 털을 클로즈업해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뒤로 빠지면서 털 뭉치의 형태가 드러나 보인다. 그 형태는 머리의 뒷모습 같기도 하고, 웃자란 머리칼로 뒤덮인 얼굴 같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확대해본 세포 내지는 포자 같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풀풀 흩날리는 먼지뭉치 같기도 하고, 스멀스멀 새나오는 불안에 형태를 부여해준 것 같기도 하고, 무의식 아님 알 수 없는 무엇 아님 오리무중의 무엇에 가시의 옷을 덧입힌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에서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매개로 그린 털이 털인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여기서 00같다, 라는 표현에 주목할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00같아 보일 뿐, 바로 이것 아님 저것,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 토록이나 명확함을 추구하는데도 말이다. 어차피 명확함이란 하나의 이상향임이 판명되어졌고, 그래서 오히려 더 불명확한 것에 천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란 온통 불명확함 투성이다. 존재는 어떻고 죽음은 어떻고 실존은 어떻고 실재는 어떤가. 섹스와 공포의 저자이기도 한, 파스칼 키냐르는 해석학(그러므로 인문학)이 헛소리라고 했다. 결국 인간이 머리로 지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관념의 코팅을 걷어내고 나면, 인문학 밖에서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면, 온통 불완전 투성이고 암흑천지며 오리무중이다. 


혹 털은 바로 삶이, 존재가, 죽음이, 실존이, 그리고 실재가 온통 불완전 투성이고 암흑천지며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유령 같은 것은 아닐까(여기서도 다시 00같다는, 유보적인 표현에 만나진다). 도대체 털이라니. 털처럼 알 수 없는 것이 또 있을까. 털처럼 오리무중인 것이 또 있을까. 작가가 그린 털과 털 뭉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그것이 머리와 같은 털을 상기시켜서 친근하고, 머리와 같은 알만한 형상 이외의 다른 무엇, 왠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낯설다. 그렇담 다시, 친근한 건 뭐고 낯선 건 또한 뭔가. 친근한 건 유혹이고 낯선 건 처벌이다. 털은 유혹하면서 동시에 처벌한다. 아님, 유혹하면서 동시에 거세불안을 상기시킨다. 죽음에로 이끄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죽음을 넘어서는, 그런 치명적인 유혹이라고나 할까(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스를 작은 죽음이며 예비적인 죽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털은 분명 에로스를 상기시킨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 보면 쥐 사나이가 나온다. 쥐 털의 부드러운 감촉에 매혹돼 산 쥐를 포켓에 넣어 다니는데, 쥐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쥐가 죽은 줄도 모르고 죽은 쥐를 포켓에 넣고 다닌다. 결국 쥐 털을 만지다가 쥐를 죽이고, 그 연장선에서 여자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여자를 죽인다. 부드러움이 죽음을 넘어선 경지? 죽음충동이 삶 충동을 넘어선 차원? 부드러운 유혹을 매개로 죽음충동을 실현하는 반복강박? 쥐 털에서 여자 머리칼로, 그리고 모르긴 해도 또 다른 무언가로 옮겨갈,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전이되고 이행할 죽음충동의 반복강박? 그래서 치명적인 유혹이고, 삶 충동을 넘어선 죽음충동이다. 그렇게 작가는 털 그림을 매개로 친근하면서 낯선, 캐니하면서 언캐니한(프로이트는 낯선 것은 원체는 친근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친근한 것이 불현듯 낯설게 다가올 때 바로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온통 중의적인 의미들의 지층으로 뒤덮인 세계의 맨살을 그려내고 있었다. 



Portrait, Oil on canvas, 100X80, 2012


다시, 사구에 서서. 사구란, 바람에 불려온 모래가 쌓여 만든 언덕이다. 바람이 만든 언덕인 만큼, 다시 바람이 불면 그 언덕은 또 다른 형태로 쌓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일 수도, 아님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듯이 언덕도 움직인다. 바람이 이행하듯이 언덕도 이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구는 어쩜 불모의 땅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모의 땅에는 그러나, 모래의 여자가 산다. 일본의 카프카로도 불리는 아베 코보의 소설에 등장하는 곤충학자는 우연히 모래의 여자를 만나게 되고, 모래의 여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마침내 모래의 여자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종래에는 다시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모래의 여자는 신기루다. 삶은 신기루다. 다시, 부드러움을 매개로 죽음충동이 자기를 실현하는 순간을 본다. 치명적인 유혹이 자기를 실현하는 순간을 본다. 여기서 도대체 부드러움이란 뭔가. 그건, 불모고 유혹이고 죽음이고 신기루다. 모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사구 그림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저작을 상기시킨다. 라캉주의자이기도 한 지젝은 이 저작에서 상징계(언어와 기호로 구조화된 세계)를 위협하는 실재계(거세불안으로 억압된 상상계)의 출현을 불모의 사막에다가 비유한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집행되던(남근으로 표상되던) 제도와 상식, 합리와 정상,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본주의가 붕괴되면서 불모의 사막이 열리는 것. 쾌락주의가 손익계산을 따지기 위해 되돌아오고, 억압된 것들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귀환하는 것. 그렇게 작가가 그린 사구 그림은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불모의 사막 위로 열리는 쾌락과도 같은 삶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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