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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준 / 소리, 말, 언어로 표상되는 나팔의 위상학

고충환

임형준 / 소리, 말, 언어로 표상되는 나팔의 위상학


임형준은 속된 말로 나팔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팔은 그의 조각의 트레이드마크랄 만하다. 작가는 몰라도 나팔은 다들 알 정도가 되었으니, 나팔은 일종의 작가의 명함 역할을 한다고 봐도 되겠다. 트레이드마크가 뭔가. 그건 개성이고 개성적 표현이다. 트레이드마크는 그저 한 소재 내지 한 경향에 일관되게 천착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소재 내지 한 경향에 천착하는 식의 반복과 심화와 변주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상당한 완성도와 함께 이를 매개로 뚜렷한 자기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당대적인 미의식이며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나팔을 매개로 자기를 표현하고 세상에 말을 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나팔은 시대를 보는 눈이며 시대의 초상이 되었다. 나팔로 대리되는 소리와 말과 언어와 같은, 특히 의미론을 매개로한 동시대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되어졌다고나 할까. 



sounds-소리


작가의 조각은 크게 각종 악기를 소재로 한 경우, 신체를 소재로 한 경우, 그리고 악기와 신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결합한 경우로 구별된다. 먼저 악기를 소재로 한 경우로 치자면, 작가의 조각에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그리고 피아노와 하프 같은 현악기가, 그리고 나팔과 트럼펫 같은 관악기가, 그리고 축음기와 오디오 그리고 전화기와 같은 소리재생장치가 등장한다(특히 전화기는 소통에 대한 염원을 반영할 것이며, 그 반영이 나팔로 대리되는 소리며 말이며 언어의 의미와도 통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와 소리재생장치는 다 뭔가. 그것들은 우선 형태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연유로 작가의 조각 속에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부 악기(특히 바이올린)와 신체의 닮은꼴이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리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조형언어는 원체는 시각언어다. 작가는 이런 시각언어를 통해서 청각언어를 암시하고 상기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조형물인 탓에 실제로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음악이며 소리를 암시하고 싶었을 터이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이를 그대로 작가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시각적인 것을 통해서 청각적인 것을 암시하고, 조형을 통해서 소리를 암시하는 것이 되겠다. 이런 암시가 가능한 것은 공감각 탓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감각 센서는 제각각이지만, 그러나 이 다른 감각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이를테면 날카로운 소리나 부드럽게 흐르는 소리, 가볍게 부유하는 소리나 무겁게 가라앉는 소리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실제로 작가가 조형한 악기들 중 특히 해변조형물로 설치된 첼로에선 파도에 밀려온 바다소리가, 바다의 사연이, 바다의 이야기가, 바다의 시간이, 바다의 역사가 들린다. 시인 말라르메의 바다 소리를 듣는 소라가 귀와 등치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논리를 뛰어넘는 시인의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이런 공감각과 더불어 작가는 하모니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제각각의 악기들이 내는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서 합주를 이루듯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표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조형한 악기 앞에 서면 애잔하고 격렬하고 쓸쓸한 선율이 들린다. 당신의 귀에도 그 선율이 들리고, 당신의 눈에도 그 선율이 보이는가. 


모르긴 해도 일부 악기와 신체의 닮은꼴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바이올린과 첼로의 체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이 말은 나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종의 의인화된 악기의 경우를 떠올려볼 수가 있는데, 작가의 조각에서 나팔은 그대로 신체를 대리한다. 이를테면 유기적인 꼬리처럼 생긴 몸통 부위를 하체 삼아 그 위에 나팔처럼 생긴 머리를 이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서 나팔은 사람의 꼴을 닮았고, 희로애락과 같은 삶의 질을 다양한 표정으로 연출해 보인다. 이를테면 첼로가 무슨 집이나 되는 양 몸통에 난 창살 너머로 세상 밖을 내다본다든지, 아마도 미지의 곳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할 여행 가방을 열고 고개를 내민 나팔이 그렇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존재로 하여금 존재이게 해주는 매개가 언어이며, 존재는 언어로 인해 비로소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작가에게 나팔은 소리며 말이며 언어를 표상한다. 작가가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말을 표상하며, 세상에 대한 작가의 말 걸기를 표상하는 것. 그러므로 나팔이 살고 있는 첼로며 여행 가방은 또 다른 존재의 집인 것. 주로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생활언어며 예술과 같은 시어로 구조화된 존재의 집인 것. 시어는 그렇다 치고(앞서 본 바와 같은 바다 소리를 듣는 아님 들려주는 첼로와 같은), 작가는 특히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 발췌한 이미지들이며 기사들을 악기의 표면에 덧바르는 것으로 이런 생활언어의 사회학적 의미를 강조한다. 


한편으로 생활언어는 나팔에 부수되는 표상, 이를테면 소리와 말과 언어 중 특히 말과 관련이 깊다. 예컨대 축음기 옆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 축음기 위에 달린 나팔관 속에 벌린 입이 목청껏 떠들다가도, 손잡이를 멈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팔관 밖으로 지친 혀를 길게 빼문다. 짝을 이룬 한 쌍의 조각인데, 손잡이를 돌리면 소리가 증폭되다가 손잡이를 멈추면 덩달아 소리도 멈추는 축음기의 작동원리에 착안한 것이며, 그 착상 그대로 세상살이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손잡이에 실린다. 누가 손잡이를 돌리고 멈추는가. 누가 말의 수위를 조절하고 말의 질을 결정하는가. 손잡이를 돌리고 멈추는 데 연동된 입과 혀로 표상되는 말이 꼭두각시 같은 말, 자존감을 상실한 말,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해 허공중에 떠도는 말과 같은 헛말들로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자기도 상처를 입는, 그런 현대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떤 나팔은 입이 막혀 있어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불통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말을 표상하는 나팔을 매개로 작가는 생활언어의 사회학적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세상살이에 대한 풍자며 해학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책 위에 가부좌를 튼 나팔이 반가사유상으로 변태되고, 무슨 연인 아님 자매처럼 언덕 위에 나란히 앉은 쌍 나팔이 일종의 풍경조각을 예시해준다.  



sounds-침묵


그리고 작가는 이런 악기며 나팔을 소재로 한 일련의 조각들과 함께 신체를 소재로 한 조각을 선보인다. 신체는 하나같이 머리가 없는 토르소들이다. 악기를 소재로 한 작업들에서처럼 형태 자체가 주는 안정감이나 함축된 느낌이 작가로 하여금 토르소를 소재로 취하게 한 원인이겠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식의 일종의 부재의 미학이 작동하고 있고, 암시에 대한 개념적 혹은 감각적 이해가 작용한다. 사람들은 특정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부분이 생략되면 그 생략된 부분을 채워 넣어 완성하려는 경향(아님 관성?)이 있다. 저마다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바로 생략이야말로 암시를 매개로 관객의 의식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얼마만큼 보여주고 감출 것인가. 어디를 어떻게 생략하고 강조할 것인가. 결국 조형이란 조율의 문제인 것. 작가의 토르소는 바로 이런 조율의 문제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토르소는 하나의 전체로 조형되기도 하고, 부분과 부분이 재구성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후자의 경우인데, 그 속에 해체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고, 실제로도 어떤 작업에선 부분과 부분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설치작업의 전망을 열어 놓는다. 일차적으론 조각의 범주를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계기로 볼 수 있겠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하나의 형태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이며, 그리고 그렇게 그것이 재구성되는 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른 전망(예컨대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이며 의미(예컨대 파편화된 주체 같은)를 열어놓을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일 것이다. 그 자체로 조각의 존재방식을 다른 차원으로 견인하는 계기로 봐도 되겠고, 이로써 결과적으론 조각의 개념을 확장하는 계기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재구성된 토르소 속에 무슨 벽감처럼 공간이 열리고, 그 열린 공간 속에 나팔이 위치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나팔은 소리며 말이며 언어를 상징한다고 했다. 여기서 다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정의가 반복 재생산된다. 이를테면 내면의 소리로 구조화된 존재의 집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부분과 부분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신체는 아예 신체의 특정 부위를 부각하고 강조하는 경우로 현상하기도 하는데, 특히 입술 모양을 조형한 일련의 작업들이 주목된다. 무슨 토템폴처럼 위로 쌓아 포개진, 그리고 풍경처럼 옆으로 배열된 입술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리와 말과 언어의 또 다른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나팔의 표상형식에 해당하는 신체부위로 보면 되겠고, 이를 부각하고 강조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입술모양이 일종의 신체언어를 닮았다. 이를테면 입술모양만으로 울고 웃는 것 같은, 짐짓 진지하거나 어색한 것 같은, 그런 신체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조형한 나팔은 이렇듯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삶의 희로애락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가 하면,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기도 하고, 때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불통의 현실을 증언해준다. 그렇게 나팔은 입으로 변주되고, 입과 더불어서 소리며 말이며 언어를 표상한다. 몸통 속에 자리한 나팔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주문처럼 들리고, 그래서인지 다른 신체 부위들과 함께 조형한 귀 형상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자기 외부를 향해 열린 귀 형상이 말하는 기술보다 듣는 기술이 더 결정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차이에 대한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 듣는 기술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자기 외부를 향해 열린 귀는 사실은 저마다의 내면의 소리를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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