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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훈 / 바람이 말하는 진실

이선영

바람이 말하는 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서걱이는 바람의 말] 전은 우리 근대사에 새겨진 깊은 상처인 제주 4.3을 사진에 ‘담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진상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역사를 담는 일은 어쭙잖은 계몽주의적 조치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지나간 역사 뿐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과 한계를 인식하는 성남훈의 작품은 대상을 모호하게 제시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회화나 조각같은 미술에 비해 명증하게 대상을 앞으로 끌어다 놓는다는 점에서 투명한 매체로 간주되는 사진은 무엇을 담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오래된 창으로 보는 풍경처럼 흐릿하다. 창에 해당되는 면은 물론 그 가장자리인 틀조차도 무정형적으로 흐물거리면서, 사진으로 포착되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침범하고 교란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며나온 누액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의 전제인 경계를 넘나든다. 제주 4.3은 사진이라는 형식에 자연, 역사, 신화, 인간을 한데 버무릴 수 있게 했다. 

  



4.3, 성산읍, 제주도 4.3, Seongsan-eup, Jeju-do 2023(이하 모든 사진의 출전은 작가 성남훈) 



작품의 독특한 효과는 ‘대형 4x5 폴라로이드 필름을 사용해 촬영한 뒤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고 위로한 현장의 나무나 바위 위에 사진을 밀어 이미지를 파열시킨’ 형식적 장치의 결과다. 물론 그러한 형식은 단지 심미적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이 많다는 역사적 진실과 관련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 과정은 한 장의 사진으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역사의 불완전성, 희미해질수록 붙들어 두어야 하는 기억의 소명에 대한 사진의 질문’이다. 그것은 이 소재가 시간의 시험에 붙여진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고, 그동안의 많은 규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진실이 묻혀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돼 있다. ‘7년 7개월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섬 전체를 피로 물들인 제주 4.3’은 경악할만한 역사적 비극으로 온전히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미학적 범주로 대별시킨다면 형언할 수 없는 역사적 비극을 담은 작품은 숭고에 속한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강제수용소가 트라우마의 장소인 것은 그곳에서 자행된 만행의 과도함이 인간적 이해력과 표현력을 넘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학에서 미/숭고의 대립은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에서 감성과 신비에 경도는 낭만주의의 이동을 낳았고, 표현하기 힘든 것을 표현하려는 조형적 어법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외곽선이 해체되면서 추상의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현실 세계에서 색의 감축을 보여주는 모노톤의 작품들은 생략과 말없음표의 전략이다. 그것은 산문처럼 세상을 투명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함축적으로 진실을 전달하려 한다. 지시대상을 완전히 삭제하는 추상적 작품은 아니지만 사진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는 인덱스로서의 기능은 훼손된다. 토벌대에 의해 진압된 불온한 세력의 반란이라고 단순화할 수 없는 사건의 심각함에 비한다면, 그 사건이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굿, 북촌리, 조촌읍, 제주도 Gut Ritual, Bukchon-ri, Jocheon-eup, Jeju-do 2020



굿, 북촌리, 조촌읍, 제주도 Gut Ritual, Bukchon-ri, Jocheon-eup, Jeju-do 2021



제주 4.3은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잔재가 낳은 일그러진 이념의 지형도와 관련된다. 우리 근대사에 적지 않게 벌어졌던 국가폭력 사태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낳았지만, 현재도 이분법의 논리에 젖은 지배적 권력의 성향에 따라 가벼이 여겨지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수많은 희생자로부터 흘러나와 제주의 곳곳에 스며들었을 체액은 살아남은 자들의 비통한 눈물로 이어졌다. 제주 곳곳 억울한 영혼들을 위한 민간 의례들이 그의 작품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작가는 명확한 대상이 아닌 흔적을 통해 역사에 접근한다. 즉 그의 작품에는 역사적 사실을 명증하게 드러내는 무슨 증거물이 아니라, 해석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불완전한 기호들이 산재한다. ‘서걱이는 바람의 말’ 전은 바람이라는 막연한 화자를 내세운다. 작가는 ‘우리는 말하지 못했어도, 바람은 말해왔다’는 제주 토박이의 말을 인용한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이라는 서양의 유명 노랫가사도 있는 것을 보면, 바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에 대한 은유였다. 


성남훈의 작품에 스며있는 바람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멈춤을 야기하는 신령한 바람이다. 제주에 많은 바람은 그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음산하면서도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작품 속 풍경은 우선 작가를 사로잡았던 곳들이며 작품을 통해 관객들도 그 분위기에 스며들게 된다. 사진을 비롯한 기계 복제가 예술작품의 ‘아우라’(벤야민)를 사라지게 했다고 말해졌지만, 그의 작품에는 아우라가 존재한다. [기억의 공간]에 의하면 기억은 가장 가까운 것을 아득히 먼 곳으로, 그리고 먼 것을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가지고 올 수도 있다. 가깝고도 먼 것의 독특한 결합이며, 이것들을 아우라가 있는 장소로 만든다. 성남훈이 다시 호출한 기억의 장소는 ‘접촉 지역으로서의 마법’(알라이다 아스만)에 속한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땅에 부는 바람에서 작가는 무슨 소리를 들었고, 그것은 거듭되는 해석의 과정을 통해 말로 거듭날 잠재적인 것이 되었다. 




살아낸 딸들, 북촌리, 조천읍, 제주도 Daughters Who Survived, Bukchon-ri, Jochon-eup, Jeju-do 2020 



‘한 줄기 바람의 말’이기를 바라는 작품에서 말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그 말이 고여있다고 믿어지는 장소나 사람을 통해 타자들의 소리를 보여주려 한다. 이 공(共)감각적인 방식은 ‘세계의 외침을 귀담아 들은 자’로 해석되는 불교의 관음(觀音)을 떠올린다. 그의 작품 속 바위나 바다 같은 소재보다 나무는 보다 표현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인간처럼 서 있으며, 깊은 뿌리로부터 줄기,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까지 지하와 지상, 그리고 하늘까지 삼계에 걸친 기념비적인 위상을 가지며,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기억과 염원을 상징한다. 융 학파로 집단 무의식을 중시하는 저자 에리히 노이만은 [위대한 어머니 여신]에서 식물은 지상계의 어두운 자궁에서 쏟아져나와 세계와 빛을 보는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어둠에서 빛으로의 방출은 생명의 길, 의식의 길과 연관된 특성이다. 대지, 밤, 어둠, 무의식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는 식물의 생태는 빛을 다루는 사진적 과정과 중첩된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속이 채워져 있어 스스로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식물은 더 견고하며 더 오랜 시간을 견디면서 자기 내부에 주변의 소리를 담아왔다. 성남훈의 작품 속 바람은 인간들끼리의 사건을 또 다른 차원에서 증언한다. 그의 작품에 자연과 밀접한 신화나 무속 같은 민간 신앙의 자취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2019년 봄부터 4.3사건의 현장이었던 학살터, 희생자들이 수장된 바다, 굿, 신당 등을 찾아다녔다. 작품 속 오래된 나무는 몸을 비틀며 무엇인가 이야기하려 하고 가지 위에 걸린 천들은 숨겨진 이야기를 바람결에 실어 흩뿌린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2002)에서 나무는 자신 속에 글씨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면서, 나무는 그것을 자연적으로 저장하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저장하고 기억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나무 아래서 공동의 기억을 되새겨왔다. 나무는 ‘기록하고 새기고 서고에 보관하는 재료로서의 역할’(뒤마)을 하기 전부터 집단의 기억을 담아왔다. 




4.3, 애월읍, 조천읍, 제주도 4.3, Aewol-eup, Jocheon-eup, Jeju-do 2020 


 

성남훈의 경우에는 사진을 인화하는 종이 또한 나무라는 원재료의 가공품이며 기억을 담는 매체로서 역할을 한다. 바람이 휘돌고 가는 바다와 숲, 바위도 나무와 다를 바 없다. 그의 작품 속 자연에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끔찍한 기억을 안고 수십년을 살아왔을 4.3 생존자의 얼굴에는 자연이 있다. 그의 초상사진 속 인물들은 죽음을 기억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지만 모든 사진에는 죽음이 깃들여 있다는 미학적 성찰 또한 담고있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은 그것이 지금 거기에 없으며, 또 한편으로 그것은 참으로 존재했다 환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모든 사진에 다 같이 존재하는 사자의 귀환’을 말하면서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인’인 사진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기호가 내재해 있다’(바르트)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에 스며있는 불명확함과 죽음은 성남훈의 작품에도 유효하다, 


출전; 전북특별자치도립미술관 서울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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