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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민 / 삶과 죽음의 상징적 교환

이선영

삶과 죽음의 상징적 교환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지민의 작품에는 병, 촛대, 반지, 가방, 천사상, 손목시계 등, 바로 알 수 있는 명품들의 흔적이 있다. 요즘 명품은 비슷한 부류의 부자들끼리만 알아보는 코드가 숨겨져 있다(일명 ‘올드머니룩’)고 한다. 작가가 명품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패로디의 대상은 보다 전형적인 필요가 있다. 실루엣만 스쳐도 알만한 그런 상품이 모델이 선택된 이유다. 상품 이미지는 소비사회의 거울로, 팝아트 이래 현대미술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대미술은 자본주의 문화의 우세종이 된 대중문화에 대응하여, 살아있음을 예찬하는 화려한 스펙터클의 틈새를 공략한다. 김지민의 작품에서 대상에 선명하게 새겨진 여러 색의 화려한 줄무늬는 잘 알려진 상품의 형태를 교란한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며, 비슷한 패턴으로 뒤덮인 벽과도 상호작용한다. 화려한 색층은 물감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3D 프린터로 적층 구조로 출력된 색들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대적 상품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대상들은 고전적 정물화의 구도로 배치된다. 작가가 참조한 17세기의 정물화라는 모델은 본격적인 상품사회가 도래한 자본주의의 모델이다. 그는 SNS에서 넘쳐나는 보여주기의 욕망에서 오래된 모델이 동시대성과 접속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작품은 배경/형태가 시차에 의해 나타남과 사라짐을 보여준다. 부조처럼 바탕과 형태를 붙인 작은 작품들은 정물조각에 대한 부조적 버전으로 작품이 작동하는 시각 원리를 보다 잘 설명해준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유기체처럼 어떤 대상이 주변과 구별이 안된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죽음 자기 동일성과 항상성을 가능하게 하는 경계의 와해를 말한다. 구별되던 것이 사라지는 체험은 죽음과 연결되는 아찔한 유혹과 관련된다. 기괴한 체험을 낳는 작품이지만, 작가는 죽음의 기호를 산뜻한 외관의 꾸며진 대상으로 연출한다. 작가는 시대를 넘나드는 소재를 호환 가능성 있는 구조 안에 배치한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이자 잠재적 소비자의 시선이 들어가서 대상(이자 상품)을 하나하나 음미할 수 있게 짜여지곤 한다. 고전적 정물화는 이후 본격적인 소비사회의 시각적 패러다임이 된 광고에서 계승된다. 이번 작품은 전시 공간에 비해 다소간 크게 제작됐다. 그의 작품은 실내에서도 바깥에서도 보여질 수 있다. 작가는 시장의 전략 또한 차용하여, 여러 방향에서 다가오는 시선들의 보이지 않는 문턱을 제거하려 한다. 정물화와 함께 발흥한 초상화의 시대에 관객에게 보다 확 당겨진 시점은 대중매체의 시대의 시각적 패러다임이 된다. 대상은 그것을 보는, 봄으로서 소유하고 지배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김지민의 작품은 정물적 대상을 보는 시차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서 보는 주체의 위상을 시험대에 놓는다. 이미지의 역사는 당대의 지배적 계층의 시점을 반영해왔다. 현대는 근대의 확고한 주체중심적 사고를 상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것은 정신분석학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거울을 보는(또는 거울처럼 세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고 믿어지는) 자아의 상상(the Imaginary)에 대한 심리학 이론은 미술에도 시사점이 크다.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주체 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에서 정신분석학적 경험은 의심할 수 없는 사고 주체(Cogito)에 근거한 어떤 철학도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시선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자아는 취약한 거울상에 근거하며 정신분석학은 반영상의 허구를 지적한다. 김지민은 작품 또한 시선의 미끄러짐을 통해 관객 앞에 있는 대상의 환영적 특성을 강조한다. 이와 연동되어 주체의 성격 또한 변형된다 마단 사럽은 [알기쉬운 자크 라캉]에서 인간 주체는 전 생애에 걸쳐 상상적인 전체성과 통일성을 계속 찾아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주체에 영속성과 안정성이라는 감정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은 에고 심리학의 문제점이 객관적이고 인식가능한 현실이 있다는 사고라고 지적한다. 단단한 플라스틱 덩어리지만 유령처럼 사라지는 김지민의 작품을 가로지르는 많은 선들이 시간성(temporality)에 의해 변화한다. 


보기와 연동되는 주체의 위상도 변화한다. 시각의 장을 역동적으로 조직함으로서 앞에 있는 대상의 환영적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은 ‘인간 주체의 한가운데는 기본적인 존재의 결여가 있다’(라깡)는 것을 암시한다. 정물은 그것을 봄으로서 소유하는 자아를 비춰볼 수 있는 믿을 만한 거울로 간주되었지만, 그 거울에는 균열이 가득하다. 회화는 화면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전제된다. 김지민은 정물조각을 통해 시각적 구멍은 다양하게 만든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라깡의 관점을 이어서 거울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드라마를 통해 인간은 특별한 중심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거울상은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을, 불변의 요소보다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균형보다는 불규칙성, 영속성보다는 유동성을 우위에 둔다. 김지민은 비스듬한 시선을 도입함으로서, 대상에 대한 낯섦을 드러낸다. 그것은 정물을 바라보는 의식적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적 타자를 비추는 불안한 장면이다. 


정물화나 초상화의 전성기는 상업 자본주의의 발흥과 겹쳐진다. 소유하고 싶은 것을 재현하고 보는 시선은 건축에 복속되던 미술을 캔버스에 담아 이동하게 했다. 이전 시대의 벽화나 천정화 등에 비해 보다 작은 단위에 담아 이동할 수 있는 유화는 소유 욕망과 밀접하다. 김지민은 정물화라는 형식에 내재된 소유 욕망을 손에 닿을 듯이 생생하게 재연한다. 재현이 아닌 재연인 이유는 대상의 외곽선을 교란시키는 선이라는 추상적 요소가 관객의 움직임과 연동되는 연극성(theatricality)이 있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 엠블럼 아래에 좌대처럼 배치된 것은 책들인데, 작가는 지식 또한 욕망에 포함시킨다. 그 경우는 앎을 통해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고전주의와 리얼리즘에 깔려 있다. 이성과 욕망이 대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도 욕망이 있는 것이다. 김지민의 작품에서 원래 소재의 규모는 왜곡되어 있다. 그것은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3D 프린트의 특징에 기인한다. 


가령 명품백은 대략 실제 상품과 비슷한 크기지만, 고급 차의 엠블럼은 차량 장식물로서는  크게 만들어졌다. 해골도 사과도 실제보다는 크다. 해골과 사과가 정물화처럼 한 자리에 배치될 때 왜곡된 부피감이 두드러진다. 2m 60cm로 천정 높이만큼 큰 꿈틀거리는 듯 연출된 기둥만이 실제의 건축적 스케일과 엇비슷하다. 주변의 정물과 달리 바로 세울 수 밖에 없는 기둥은 가로줄 무늬로 존재감을 분명히 한다. 정확히 특정되지 않았지만 좀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으로 꿈틀대는 듯 표면의 굴곡이 복잡한 기둥은 역사상의 기념비에 내장된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한다. 기둥은 인간의 상징으로 조각의 기준점이 되었지만, 김지민의 작품 속 기둥은 한도를 초과한 움직임, 무엇을 위한 움직임이 아닌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같은 반복적 맹목성이 있다. 그것은 김지민의 정물 조각에 이런저런 형태로 보이는 타오를수록 녹아내리는 촛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물조각의 구성요소로서의 촛대는 지하 전시실에서도 검은색 샹들리에에 12개가 설치되어 주변의 어둠을 밝힌다. 그것이 놓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샹들리에는 과시 욕망을 상징한다. 3차원 상에서 관객이 돌아가면서 볼 수 있는 조각의 특성을 가진 대상의 몸통을 이루는 줄무늬 또한 각도마다 달라지고 주변 벽의 무늬에 따라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마술적 시점이 내재한다. 물론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착시에 의한 것이다. 김지민의 작품은 미술 자체가 착시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그의 작품은 지각 심리학에서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입장에 있는 저자 로저 세퍼드는 [마음의 시각]에서 분류한 시각이상(visual anomaly)에 속한다. 시각이상의 예로는 ‘깊이 착시, 애매한 깊이, 애매한 대상, 애매한 형/배경, 불가능한 형/배경, 불가능한 깊이’ 등이 있다. 로저 세퍼드에 의하면 이러한 착시들은 이미지가 함축하는 특정 관찰지점을 사용하는 여부에 좌우된다. 무엇보다도 구성은 동시에 해체를 포함한다. 


김지민이 명확한 대상이었던 것들에 도입한 애매함은 하나의 고정된 패턴을 넘어서 매번 다른 관계들을 택함으로서 분열적 시각을 도입한다. 어떤 각도에서 특정 대상을 어떤 대상의 특성을 알려주는 명확한 경계가 해체되고 이상하게 파동치는 얼룩이 되곤 한다. 내부로 접혀진 듯한 색 주름들은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유희를 펼친다. 정물 조각에 선택된 소재들은 17세기 바니타스 주제의 은유적 대상과 비슷한 역할이다. 그의 작품은 대개 조각적 과정을 거쳐 최초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재료를 주물럭거리며 자신의 육감을 좌표 삼아 제작된 형태가 다시 디지털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은 작품을 더 수월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한 형식은 작품의 메시지와 관련된 선택이다. 실재와 상상이 사라진, 적어도 그 거리를 점점 줄여가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시뮬레이션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전유되는 대상과 관련된다. 


3D 출력은 24시간 돌아가는 기계가 하지만, 색의 선택과 조합은 그때마다의 맥락과개인의 감각이 반영된다. 그의 작품은 디지털과 아나로그 방식이 함께한다. 조각처럼 실제로 제작하는 과정이 있지만 3차원 조형물이 데이터화 되기에 가변적 크기로 뽑아낼 수 있다. 아나로그든 디지털 방식이든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3차원상에 현실화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실제 공간의 안팎에서 구체적인 물성을 가지고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들이 지나치게 많아서 사물의 경계가 불확실한 작품에는 각 정물과 배경의 줄무늬가 혼동되는 시점이 있는데, 여기에서 시각에 얽힌 역동적 심리학이 펼쳐진다. 대상과 배경이 하나가 되면서 유기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간의, 다시 말해 정신세계와 주위세계 사이에 어떤 관계가 교란된다. 자연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는 의태(mimicry)다. 마단 사럽은 [알기쉬운 자크 라캉]에서 라깡이 거울단계의 개념을 전개하면서 인류학자 로제 카이와의 의태에 관한 이론을 참조했음을 지적한다. 


카유와 이전에는 동물의 의태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대개 적응행과 관련된다고 믿어졌다.  가령 곤충이 그 적이나 먹이를 속이기 위해 그 환경의 색채, 형태, 모양을 취한다는 것이다. 카유와는 이 적응가설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의태는 곤충의 시각적 경험의 한 기능이다. 의태를 그 동물 자체의 공간 인식과 연결짓는다. 카유와는 모든 유기체의 삶은 그자체의 차별성 유지의 가능성에 의존하는데, 그 차별성은 경계에 의해 유지된다. 배경과 뒤섞이는 동물은 형태에서 탈피한다. 이는 공간 자체의 거대한 외부성이 그 곤충에게 가한 유혹이다. 원시적 교감마술을 상기시키는 카유와의 이론은 인간 또한 환경과 뒤섞이려는 유혹에 굴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떤 동물들이 자신의 주변 환경에 의태적으로 은신함으로서 자기의 진정한 본질을 소외시킨다는 가설은 유기체가 자기 통제 밖에 있는 힘과 구조에 의해 구성됨을 알려준다. 주체와 대상의 구별이 없는 상태로 홀딱 빠져드는 쾌락이자 죽음과 연결되는 중독이다. 


주체와 대상의 거리가 사라진 채 빨려 들어가는 듯한 구조는 상품의 라벨을 동심원 구조로 연결했던 이전 작업의 시각적 체험과 유사하다. 이전작업에서는 생산 공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세계적 분업화의 판도가 달라지고, 그의 작품도 새로운 생산방식을 취하게 됐다. 3D 프린트는 개인과 생산의 거리를 단축시켜 준다. 그것은 대량생산의 패러다임을 넘어선다. 3차원상에 존재하는 조각은 대개 부피감을 강조하고 색은 금기시된다. 김지민의 작품은 색이 아주 많이 있다. 마치 바코드처럼 세로줄로 새겨진 색선들은 은유적 대상들의 형태를 모호하게 한다. 여러 대상들과 주변의 환경을 통해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연출하는 그의 작품은 ‘정물 조각’이라고 표현한다. 각 소재마다의 상징이 있지만, 전체가 어우러져 욕망과 허무를 말한다. 현대 심리학은 사유하는 주체보다는 욕망하는 주체를 강조한다. 중심을 자기 내부에 놓는 관념론이 아니라 바깥에 놓는 타자적 시선의 우위다.


자크 라캉은 [욕망이론]에서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말한다. 김지민의 작품은 ‘기표를 작동시켜 주체를 반복충동으로 몰아넣는 중심의 결여, 즉 실재계에 난 구멍’(라캉)을 암시한다. 라깡은 [왜곡된 형상Anamorphosis]에서 시각적 관계에서 주체가 끊임없이 머뭇거리며 사로잡혀 있는 환상은 응시하는 대상에 의존한다고 하면서,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는 특권을 강조한다. 라깡은 ‘세계는 내가 재현해낸 것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주관론이라고 비판한다. 주관론은 세계 속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한다는 확실성을 믿는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의식을 제한된 것으로 간주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대표자인 의식을 이상화와 오인의 원리로 규정한다. 라깡은 주체의 기능이 데카르트적 사유에 의해 가장 순수한 형태를 띠게 된 때 원근법에 반대되는 평면광학이 개발되었음을 강조한다.  


평면적 원근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배열이다. 전통적인 원근법을 상대화시키는 김지민의 작품은 ‘잡아 늘여서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왜곡된 이미지’(라캉)를 보여준다. 라깡은 그 논문에서 홀바인의 [대사들](1533)의 예를 든다. 그 그림은 ‘세계를 발견하게’ 한 과학적 도구들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두 인물상에 비스듬히 끼워넣은 해골로 유명하다. 라깡은 주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평면과학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당시에 홀바인은 주체의 소멸을 보여둔다고 해석한다. 라깡은 응시의 각 점에서 응시를 찾는 바로 그 순간 응시가 사라져버린다고 하면서, 문제의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욕망의 주체라고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상승하는 계급이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어주었던 전능한 도구들과 함께하는 초상이자 정물화에는 바니타스의 상징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김지민은 고전적 정물화의 상징처럼 욕망과 허무를 연결짓는다. 


하지만 욕망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욕망의 끝없음은 결핍을 지속시키지만, ‘욕망이 없다면 삶도 없고’, ‘꿈틀거리는 욕망이 바로 삶’이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대량 생산/소비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다. 소비하지 않으면 망하는 방향으로 결정지어진 생산의 운명이다. 인기있는 상품을 정물화처럼 배치한 김지민의 작품은 정치경제학에 죽음을 도입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정치경제학과 죽음]에서 사회화는 차이성의 상징적인 교환에서 동등성의 사회적 논리로 옮아가는 거대한 여정이라고 정의한다. 죽음의 충동은 경치경제학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김지민의 작품에서 대상과 배경의 구별불가능에 내재된 죽음은 현 체계의 부정인 셈이다. 죽음을 소멸시키려는 체제의 환상은 ‘종교에서는 내세와 영원성의 환상이 있고, 과학에서는 진리의 환상, 경제에서는 생산성과 축적의 환상’이 있다. 작가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 양자의 교환을 금하는 질서에 도전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권력의 기초는 죽음의 조작과 관리 속에서다. 죽음이 삶과 교환되는 것을 멈추고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회화된다. 생산의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역행하는 김지민은 상징적 순환 밖으로 내던져진 죽음을 불러들인다. 체계에 대항해서 죽음을 상연함으로서 삶과 죽음이 가역적인 세계가 도래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죽음은 분해도 퇴화도 아니다. 죽음은 뒤집기이며 상징적인 도전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일상의 전면적인 미학화에 의해 모든 것이 지나치게 보여지는 스펙터클의 사회로 평가된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원래 의미는 사실상 뭘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게 한다, 나타나게 하고 드러나게 한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보드리야르는 포르노의 예를 들면서, 지나치게 가시성을 부여하는 것들을 경계한다. 독특한 시각적 장치를 통해서 죽음의 기호를 연출하는 김지민의 정물 조각은 생산이 아닌 마술적인 유혹의 방식으로 지배적 가치체계에 균열들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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