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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을 /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선영


  


흐르는 물감을 판화지에 직접 찍어내서 색과 형태를 첨가하는 김가을의 작품은 찻잔 속의 소용돌이같은 흐름을 풍경이나 우주적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프랙털 이론이 말하듯이, 미소한 것도 동형 반복적으로 확장될 수 있기에, 차원의 이동에서 손실되는 것은 없다. 김가을의 작품은 설치를 위해서 원본 이미지를 천 등에 출력했을 때도 그 밀도가 흐트러지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평면 작품 외에, 한복 천인 ‘샤’에 그림을 출력한 설치작품도 선보였다. 원본 이미지가 유동적인데 그것을 또한번 부드럽게 한다. 물질과 생명에 공히 적용되는 (들뢰즈가 말한)주름이 겹이며, 이러한 겹들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반투명한 표면이 지그재그식으로 여러 장 걸리면서 새겨진 이미지들은 상호작용한다. 천정에서 드리워진 작품들은 여러 흐름을 내장한다. 흐르기 위해서는 밀도의 차이가 필요하다. 평면과 설치를 막론하고 일관되게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만물은 끝없이 흐른다’(루크레티우스)는 고대의 사상부터 현대의 카오스나 카타스트로프 이론 등도 연상시킨다. 




천안시립미술관 전시전경



김가을의 작품에는 물질의 운동을 위한 빈공간이 편재한다. 이 공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비워진 것은 아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여백은 움직이지 않는 평면에 동감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부분이다. 『몽환적 산수 표현의 연구』나 『‘遊’의 심미적 관점으로 본 산수 표현 연구』 같은 작가의 논문 제목에 나타나듯, 산수라는 동양화의 모델은 고답적인 틀이 아니라 유동적 흐름을 위한 실험의 장이 되어준다. 카오스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에너지의 선행성을 강조한다. 그는 자연이라 불리던 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현존하며, 세계의 형성은 끊임이 없는 연속적인 형성이다. 그는 사물들의 형성처럼 인류의 역사도 물렁물렁한 것에서 견고한 것으로, 끈적끈적한 것에서 단단한 것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반면 실증과학은 견실하다. 실증과학은 고체 역학이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은 곧 공간 속에 배열되어 있고, 잘 재단된 체계를 부과하고 구축한다. 


미셀 세르는 모든 것을 단단한 대상으로 여기는 실증주의의 독단성을 비판한다. 고체의 패러다임 대신에 율동적인 소용돌이의 패러다임이 제시된다. 이 근본적인 소용돌이가 없다면 어떤 것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미셀 세르는 그동안 비과학적으로 여긴 소용돌이의 위상을 되찾아준다. 이러한 유동적 패러다임은 세계를 혼돈에 빠지게 할까. 하지만 우리가 요즘 매일의 현실에서 보는 것은 모든 독단적 이데올로기와 경직된 체계가 항구적인 재난을 낳는 현장이다. 그것은 ‘혼돈의 이론’(미셀 세르)에 힘을 실어준다. 김가을의 작품에서 여러 층위에서 강조하는 유동성은 그것이 자연이라는 모델이기에 믿음이 간다. 물질뿐 아니라 무의식도 흐른다. 하기야 의식과 무의식의 원천인 몸 또한 물질에 속하지 않은가. 편리하지만 악명 높은 이원론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다. 하나는 여럿과 대립되지 않는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하나가 그저 동어반복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와 여럿 사이에 상호 변환의 계기를 최대한 전개하는 것이 관건이다. 


2020년에 제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열린 [바람과 물결]이나 [보이지 않는 遊] 전은 작가의 관심을 드러낸다. 여러 전시에서 보여준, 얇은 천들에 출력해 공중에 늘어뜨려 설치한 작품은 작은 움직임에도 하늘하늘 일렁이면서 높은 하늘이나 심해 같은 이미지에 움직임을 준다. 물 위에 떨어진 물감을 직접 찍어내는 마블링 기법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 된 오묘한 형상들을 만든다. 결국은 인공품인 예술작품이기에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김가을의 작품들은 생성되고 있는 듯 자연스럽다. 여기에 야광 이미지를 더해서 불빛을 비추면 또 다른 이미지가 보이게 하여 작품의 층위를 더 늘려나간다. 최근 전시에서 빛(2022 ‘BLUE OCEAN LIGHT’, 2021 ‘Green Light’, 2021 ‘산수의 빛을 담는다’)이라는 코드가 더 해지는 것은 작품 관람에 빛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은 손전등을 켜고 작품에 빛을 비추어 봄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손전등은 일종의 탐색등 같은 역할을 한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줬듯이, 둥근 빛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영역에서 감추어졌던 부분이다. 판화지에 찍어서 그린 작품 뿐 아니라, 출력된 작품들은 무대처럼 연출될 수 있다. 김가을은 무용이나 문학 등이 함께 하는 다원 예술을 추구한다. 관객층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아이들부터 어르신까지, 그리고 장애인들까지 함께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작가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고 믿는다. 김가을의 작품은 물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호환성을 기대어 양자 간의 흐름에 주목한다. 작품 속에서 물은 액체이자 기체로 편재한다. 오랫동안 작업해온 기법인 마블링의 위상에 대해 작가는 ‘나의 마블링은 해양’이며, ‘물 위의 유영’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주름들로 이루어진 마블링 형상은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에 대한 비유가 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주름]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묘사한다. 이것은 소용돌이처럼 되어가며, 증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용돌이는 단독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나선을 프랙탈의 구성 방식을 좇아가는데 이 방식에 따라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 마찬가지로 주름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또다시 주름이다. 마블링 기법은 상자 안에 물을 넣고 그 위에 물감을 떨어뜨려 움직임을 만들어 물감의 기름기가 떠돌면서 생기는 결을 종이로 찍어내는 기법이다. 일종의 판화로 흑백으로 찍어낸 원본에 채색을 한다. 마블링에 더해진 색은 마블링을 강화한다. 물의 흔적이 주도적인 가운데, 비정형적 형상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숨은그림처럼 자리한다. 새나 배 같은 작은 이미지를 그려 넣음으로서 작품은 그림을 넘어 장으로 확장된다. 새가 추가되면 그곳은 하늘이 되고, 배가 추가되면 그곳은 바다가 되는 식이다. 


마블링 패턴으로 가시화된 에너지, 또는 기(氣)의 흐름은 바다와 하늘 사이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작가에 의하면 마블링 작업의 조건 자체가 자연과 밀접하다고 한다. 겨울에는 물이 얼고 여름에는 물감이 굳는다는 어려움이 있다. 햇빛도 너무 강하면 안되고 바람 또한 살살 불어야 한다. 작업 시작부터 살아있는 자연의 조건을 품고 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효과가 나온다. 그것은 다른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애쓰는 무균실험실과는 다르다. 실험이라는 키워드를 예술이 차용했을 때의 오류는 과학과도 같이 보편적인 재현 가능성을 위한 환원적인 태도일 것이다. 김가을의 ‘물’은 생명의 기원이었던 원시 수프나 모태의 양수같이 다양한 현실화를 위한 잠재태에 속한다. 여기에 작가가 몸으로 체득한 경험 또한 가세한다. 해양 생태계에 관심을 가지는 작가는 해녀처럼 바다에 직접 뛰어들어 물속의 세계를 접한다.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는 [물의 역사]에서 물속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체중 가운데 약 90% 정도가 줄어드는 듯한 가벼운 느낌을 받는다는 지표를 제시한다.


[물의 역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균형이 흐트러지면 물질 세계와의 감각적 접촉을 통해 안정을 취하려고 한다...’(스티븐 스펜더)는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물에 들어가는 것은 육체의 갱신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풀이한다. 우리는 해상도 높은 사진으로 별천지 같은 바닷속을 감상하곤 하지만, 실제는 깊어질수록 빛이 닿지 않아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내려가는 느낌이다. 작가는 2022년 순천의 기억공장 1945에서 열린 BLUE OCEAN LIGHT 전에서 ‘가라앉는다는 건 어쩌면 진짜 내가 된다는 것, 온전히 나로 존재한다는 것’(시인 고우리)이라고 적어놓았다. 이어지는 글에는 ‘바람을 떠나 보내고 파도를 지나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짙은 어둠과 강한 고요 속에서 나는 나에게 집중한다’ 심연으로의 여행은 무의식으로의 침잠에 해당되는 것이다. 작가가 다이빙을 통해 내려가는 수면 아래는 ‘모든 잠재성의 집적소’(엘리아데)로 이는 예술이 추구하는 바와 같다. 


인류는 이러한 이행에 대해 상징성을 부여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물은 원천이자 기원이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모태라고 한다.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가정한다. 물에 잠기는 것은 형태의 해체, 선(先) 존재의 미분화된 양상으로의 복귀에 해당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물과의 접촉은 항상 재생을 함축한다. 물질의 양태로부터 형이상학을 일구어내는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도 [물과 꿈]에서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물의 운명을 묘사한다. 또한 철학자는 이 유동성으로부터 언어의 욕망을 본다. 언어는 막힘없이 흘러가기를 바란다. 마블링 패턴이 보는 이의 무의식에 의해 또 다른 형태와 의미로 변화하는 것과 같다. 물속 깊이 들어갈수록 색은 사라지고 나중에는 갈색만 남는다. 빛을 켜야만 형태든 색이든 보인다. 작가는 심연의 어둠 속에서 촉감에 의지한다. 해초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질 때 느낌을 표현한다. 




전시전경



야광 안료는 심연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마술같은 이미지의 연출을 위해 사용했다. 불을 끄고 LED 손전등을 비추면 그림이 나타나는. 한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 푸른빛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야광의 선은 복잡하게 가지를 뻗은 해초처럼 보인다. 만약 푸른 빛을 하늘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나무가 될 것이다. 이 또한 정지된 매체인 회화 속에 움직임을 넣는 방식이다. 추상 속에 구상적 이미지를 숨겨놓는 방식은 가상과 현실의 관계에 상응한다. 추상적 패턴 안에 작은 새나 사람을 그려 넣으면 패턴은 율동감 있게 흘러가는 풍경이 된다. 산수화는 새로운 기법과 재료가 첨가되어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비율로 치면 작은 화면도 거대해질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연구했던 장자나 즐겨봤던 영화 아바타 등과도 접목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대자연 속의 작은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깨달음은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지속가능한 삶에 근본적인 방향성을 제시한다. 


출전; 천안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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