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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영 / 행복을 향한 변신

이선영

행복을 향한 변신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positive imagination](2023)은 밝은 이미지의 결정체다. 푹신한 노랑 소파와 그 뒤로 열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식물의 이미지가 따스함에 신선함을 더한다. 노랑 소파 뒤의 벽에 해당되는 부분은 푸른색으로, 난색과 한색의 조화를 꾀했다. 화면 중앙에 난데없이 떠 있는 사각형은 더 밝은 빛의 영역이 아닐까. 빛은 창문이나 조명기구에서 공간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명암법을 통해 화면에 드리워진 것이다. 이상적 장면이 그렇듯이 이 아늑한 방 또한 작가의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노트에서 ‘긍정적인 상상은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 힘으로 나를 생기 돋게 하는 것, 이것이 positive imagination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방이 대체로 사실적인 이미지로 채워진 가운데, 낯설게 재현된 부분은 식물이다. 식물은 자신의 원래 자리인 바깥에서 안으로 침투하는 모양새이며, 형태와 색을 스멀스멀 변화시키는 중이다. 



positive imagination,2023,Acrylic on canvas,162.2x112.1cm


덩굴같은 식물이 많이 등장하는 탓에 마치 뱀이 변태하는 과정도 연상시킨다. 자연에서의 변신은 말그대로 환골탈태의 예도 적지 않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여전히 자연이 예술의 모델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환경이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것, 또는 영향을 준다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생겨난 믿음이다. 야생의 거친 환경에서 실내라는 부드러운 문명의 지대에 들어선 식물은 더 화려하게 변화한다. 빛을 고정하기 위해 푸르게 진화한 식물 이파리는 보석을 박은 듯이 다양한 색으로 빛난다. 이파리 가장자리는 거의 야광처럼 밝게 처리했다. 장미영은 식물과 자신을 비교한다. 노란 소파는 부재의 자리이며, 작가는 식물로 변신해서 그곳에 함께 한다. 통상적으로 적극적인 유형을 동물성, 그 반대인 유형을 식물성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식물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 식물은 화려하게 변태하면서 식물성의 정적인 분위기를 상당 부분 극복한다. 식물이 이동하려면 바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서나 가능하다. 


장미영의 작품 속 식물은 동물처럼 이동한다. 보다 정확히는 바깥쪽에 뿌리를 내리고 일부를 이동시켜 변신한다. 작품 속 식물은 좋은 환경에서 자신을 꽃피우려 한다. 작가에게 이상적인 장소의 모델은 집보다는 작업실이다. 물론 장미영의 실제 작업실이 이렇게 넓고 환하고 아늑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일상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작은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숨통이 틔이고’, 그 이후 몰입의 시간은 실제의 공간을 이상적 공간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작품 속 식물처럼 그 자신도 변화한다. 작업에 몰입함으로서 변신하는 것, 그것이 작업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늘 몰입할 꺼리를 찾는다. 전면적으로 시장화된 현대사회는 이러한 욕망에서 상업적 이익이 취해진다. 도처에 만연한 상품 물신주의에 비한다면, 예술은 몰입에 대한 긍정적인 예에 속한다. 작가의 몰입을 통해 타인도 몰입시킬 수 있는 진한 소통이기 때문이다. 



positive imagination-1,2023,Acrylic on canvas,162.2x112.1cm


빛이 필수인 식물은 그자체로 빛의 화신이 되어 주변을 밝게 비춘다. 식물이 밝게 변형시키는 공간은 작가가 작업으로 불태우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물론 작업하는 삶을 무조건 미화해서도 안되겠다. 우선 변신의 과정은 고통일 수 있다. 난색/한색의 공존도 조화이기도 할테지만 온탕과 냉탕을 왕래하는, 작업 과정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갈짓자 행보 있수도 있다. 무엇보다 장미영이 추구하는 밝음은 실제가 아닌 당위이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나 무의식처럼 예술 또한 개인의 소망이 투사되는 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나 또한 어린 시절 결핍된 부분인 괜찮은 장소, 곧 일상생활을 위한 쾌적한 공간에 늘 눈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원래 태양과 친숙한 식물조처도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빛이 가득한 방이 바로 그러한 공간 중 하나이다. 장미영은 시골에서 성장했다. 지금 50대 중반이므로 어린 시절의 시골집은 꽤나 초라했을 것이다. 


지금도 어릴 때 불편했던 화장실 때문에 헤매는 꿈도 꿀 정도다. 작가가 어렸을 1970년대는 도시에서도 극소수 양옥집이나 부엌과 화장실 같은 공간이 방과 인접한 환한 평면에 자리했다. 또 다른 방은 열린 문으로 빛과 식물이 쏟아지듯 들어오며, 푸른색 벽이 변형 중인 식물이 있는 공간을 화려한 무대처럼 만들어준다. 자연의 색과는 무관한 여러 색으로 칠해진 줄기는 그대로 다양한 무늬의 잎으로 펼쳐진다. 식물 줄기에 붙어있는 작은 토끼 인형은 크지 않게 그려진 식물을 기념비적인 차원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책꽂이가 있는 실내에 자리한 은방울꽃은 ‘행복’이라는 꽃말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은방울꽃은 행복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장미영의 작품과 관련되어 설득력 있는 가설을 인용하고 싶다. 작가의 소망이 투사된 방과 그것을 모델로 하는 작품은 그 안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는 어떤 해방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positive imagination,2023,Acrylic on canvas,162.2x112.1cm


샌더 길먼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을 다룬 저서 [성형수술의 문화사]에서 정신분석학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그에 의하면 유아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환상에 의하면, 좋은 것이 좋은 이유는 그것이 선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나쁜 것은 그 통제권 너머에 있다고 믿어지는 세계의 양상들을 재현한다. 이것은 성장의 한 단계에서 자신이 곧 세계라고 실제로 믿는 유아들의 과대망상이다. 그 세계를 통제하지 못했던 경험만이 유아의 지배 의식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 붕괴는 우리고 공포스럽다고 상상하는 일체의 것들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샌더 길먼에 의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계를 조직화하는 수단의 확보이다, 그 수단은 세계에 대한 질서 감각을 회복시켜줄 것이다. 자율성의 약속, 누구든 선택의 권리가 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약속이야말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장미영의 작품에서 따사로운 빛이 가득한 공간이나 작품이 행복의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세계를 자율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매개고리가 되는 것은 유희이다. 자체 발광적인 해바라기들이 가득한 방은 아이들이 노는 공들과 여러 가지 장난감들이 놓인 작품은 놀이와 예술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작업하는 공간은 작가가 만든 규칙에 의거한 놀이가 벌어지는 ‘따로 잡아둔 시공간’(로제 카유와)이다.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해바라기는 이 재미있는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붓터치를 살린 푸른 벽은 틈들이 조금씩 보인다. 다른 작품에서처럼 고립된 바깥의 해바라기도 틈을 노려 변신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영에게 창문이나 문같이 안과 밖의 경계 지대에 존재하는 것들은 기회이자 위험이기도 하다. 작가는 ‘좋을 땐 영원할 것만 같은 인간관계도 하나의 작은 틈이 비집고 들어오면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질 수 있음을 경험한다’고 하면서 틈이나 변신의 양면성을 말한다. 



 A.L,2021,이합지위 아크릴,162.2x112.1cm


긍정성은 부정적 현실이 만연함에 대한 반동일 수 있다. 작가가 ‘변화는 자연의 섭리다’라고 말할 때, 변화는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조리를 생각하면 자연의 법칙이 인간의 규칙보다 더 정의롭게 다가올 수 있다. ‘어린 시절 놀이터가 산과 들이었기에 풀 한 포기 꽃 한송이가 내겐 정겹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자연은 예술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전시에서 추상작품은 구상작품보다 먼저 시작된 것으로, 캘리그래피 강사이기도 한 작가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 구상작품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검은색은 글자 색의 흔적이다. 글자는 보통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씌여지며, 장미영의 또다른 작업인 캘리그래피는 더더욱 그렇다. 글자는 원래의 형태를 잃고 녹아서 화면과 하나가 된다. 대상의 경계가 없이 해체된 상태의 추상화이다. 원래 염두에 둔 내용은 ‘행복’, ‘사랑’같은 단어라고 한다. 


작업의 선후 관계를 생각할 때, 대학원 시절에 먼저 시작한 추상회화에서의 문자를 통한 긍정적 메시지는 억압되어 있다가, 최근에 본격적으로 그린 구상회화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그 또한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서 변치 않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하는 의혹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구상회화에서는 변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으로 뒤집은 것이다. 작가는 작품 [always](2023)를 비롯한 자신의 추상회화에 대해 ‘글자가 해체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해체주의의 가설에 의하면 문자는 그자체로 해체되어 있다. 해체주의자들이 말하기 보다는 글쓰기, 즉 문자에 집중했을 때 그것들은 ‘끝없는 차이와 연기(차연)’(데리다)에 의해 모호해진다는 것이었다. 작품 [A.L](2021)은 밝은 바탕에 어두운색의 글자 궤적이 보다 선명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작품 제목도 암호처럼 해독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후의 식물들처럼 변형 중이다. 



always,2023,Oil on canvas,90.9x72.7cm


작가는 이에 대해 ‘화면 안에서 글자의 변화는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두근거림’이라고 말한 다. 캘리그래피의 먹색 글씨는 밝은 화면에 녹아 일종의 토양이 되고 이후 밝은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배경이 된다. 식물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식물은 나를 대변해 준다. 어떤 식물은 흙의 조건에 따라 다른 색의 꽃을 피운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그래서 잎의 색을 바꿔본다’고 말한다.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식물은 변신을 은유하기에 적절한 대상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예처럼, 신화는 변신을 상징하기 위해 식물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다. 밝음이란 타인들과의 소통을 포함한다. 자기만 알 수 있는 꿍쳐놓은 덩어리를 구체적으로 전개시키는 과정은 어두운 토양에서 밝은 곳으로 싹을 내고 줄기를 뻗는 식물과 유사하다. 그 식물은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고 항상 밝을 수 있는 ‘내부’로 잠입한다. 그 안에서 살고 꽃피우고 열매맺기 위해 또 다른 변신을 한다.


출전; 충북문화재단, 충북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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