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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티언스대전 / 현실 속의 상상, 상상 속의 현실

이선영

현실 속의 상상, 상상 속의 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과학과 예술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종합되었던 르네상스 이후, 분화하는 세계와 더불어 각자의 길을 걸어왔던 양극은 어떻게 융합할 수 있을까. ‘아티언스 대전’은 이제 서로의 언어가 너무 달라 낯설어진 두 영역의 융합을 추구한다. 각자 구축해온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변화를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변화의 필요충분조건인 융합이 필요하다.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시대의 첨단에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미술이 과학을 소재로 활용한다고 해서 첨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형식을 추동하기 때문에, 기존 미술 문법의 갱신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진보가 중요한 가치였던 근대시대 미술이나 과학은 그자체가 미래를 담보하는 듯이 보였다. 한편 집단화 된 연구 시스템 때문에 적지 않은 자원이 투자되어야 하는 과학기술 분야는 그 가치와 의미를 사회에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민보라(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아티언스 대전-대전문화재단)



임승균



장한나



과학의 역사는 최초의 발견이나 발명이 사회에 받아들여질 때만 발전이나 진보의 대열에 속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집단적이며, 많은 자본이 필요한 맥락 때문에, 발명이나 발견은 선진국 등 중심에 집중되곤 한다. 박람회 등 사회적 접촉의 장에서 예술은 강렬한 인터페이스 역할을 할 수 있다. 융합은 변화의 필요 충분 조건인 셈이다. 물론 현대의 과학이나 미술이 모두 사회로부터 거리가 있는 소수의 언어라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며, 대사회적 소통 창구의 개척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만날 필요가 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예술은 개별적이고, 자연으로부터 출발하는 과학은 보편적이다. 개별도 보편도 아닌 중간 영역이 융복합의 장이 된다. 미학에서는 개별과 보편 사이에 특수성이라는 범주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참여 예술가는 자연의 특수한 국면을 다루는 과학기술과 만났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말하게 된다.


협업 주제는 ‘식물과 미생물의 상호작용 및 식물 분자 면역’(배규무 작가-박정미 박사)부터 ‘합성 생물학’(이승연 작가-이대희 박사), ‘질량분석기를 이용한 합성 고분자 분석기술’(장한나 작가-조건 박사) 등, 막연하게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 아닌, 매우 전문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이 2011년 이후 매해 꾸준히 실행되어온 덕분이다. 대부분 어릴 때부터 예술을 시작해서 예술을 모국어로 알고 있는 9명의 작가/팀은 외국어에 해당되는 과학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2년 간 대화했다. 그 대화가 늘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갱신을 위한 도전 자체가 중요하다. 대전에 깔려있는 과학 인프라를 활용한 이 프로그램은 올해까지 100명/팀이 거쳐갔다. 낯선 도전에 비한다면 늘 촉박할 수 밖에 없는 일정이지만, 전시라는 형식을 가지고 대중과도 소통한다.



배규무



이승연



주다은



과학은 현실에 예술은 상상에 방점을 찍지만, 애초에 현실과 예술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이기에, 과학과 예술의 융합은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다. 현실은 상식이나 실증주의의 가정과 달리, 그자체로 자명한 것은 아니다. 현실, 특히 상징의 장을 이루는 지배적 현실은 구성된 것이며 따라서 재구성될 수 있다. 그것은 상상의 사다리를 통과해서 도달해야 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과학 또한 가설이나 모델의 역할이 중요하다. 비록 그 사다리는 나중에 치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상업주의가 부추키는 물신숭배는 과정을 생략하고 독점하여 이익을 챙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신기함과 맹목을 낳는다. 한편 상상 또한 현실로부터 그 자원을 얻는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는 상상은 신기루같다. 오늘날 현실을 이루고 있는 인공 생태계의 주요 부분은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이제 인터넷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다. 발명은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도를 붙인다.


예술가는 이전의 자연이나 전통처럼 막강하게 다가오는 현실을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변화가 수월하다. 과학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과의 접촉은 작가의 예술적 상상을 좀 더 견고하게 해준다. 과학이 추구하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참고하는 것은 작가의 상상이 현실화 된다거나 하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은 늘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편에 속했기에, 선구자처럼 미래 쪽에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인 다양성은 차이에의 감각을 더욱 세분화하는 것에 있고, 과학기술은 그러한 지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가령 막연하게 감각에만 의지하기 보다는 수학적인 조합과 순열의 방식을 활용한 실험이 그것이다. 이번 협업에서도 측정, 분석, 변화에 대한 기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융합은 늘 자신에게만 익숙한 언어에 안주하는 동종 번식이 아니라, 낯선 언어와 대화한다.




이다희



채종혁



홍주희



대화가 관객의 상상에 열려있는 아카이브나 SF 적인 내용을 담은 책자 형식의 생산물이 많은 게 올해 아트+사이언스의 특징이다. 전시는 크게 광물학적 시간대를 다루는 작품군, 혼종과 이종의 축제를 벌이는 작품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오가는 작품군으로 분류되었다. 과학기술이 다루는 시간대는 인간의 역사와 비교도 안될만큼 장구하다. 자잘한 인간사를 상대화 할 수 있는 거시적 관점이 요구되면서 그와 관련된 과학기술이 활용되었다. 자연에 종(種)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명명한 종이라는 범주는 상대적인 것이며 분류의 체계는 변화한다. 작가들은 확립된 범주와 범주 사이의 틈에서 새롭거나 이질적인 존재를 끌어내고자 한다. 그것은 불확정적일 뿐, 허구는 아니다.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양극화된 현실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뫼비우스 띠같이 출렁인다.


 

1. 광물학적 시간대—민보라, 임승균, 장한나




민보라 설치전경


민보라의 [파도치는 세월]은 ‘자성유체(Ferrofluid)’라는 과학적 소재를 활용하여 움직이는 수묵화를 연출한다. 요즘은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에 남북극의 빙하를 비롯해서 섬나라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지만, 작가가 소재로 한 제주의 절경 속 절벽은 100미터 높이의 수직 절벽을 수없이 쳤을 바닷물의 운동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시간대를 암시한다. ‘파도치는 세월’은 장기 역사 속의 시간을 6분 정도로 압축 재현한다.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며 작가가 활용하는 액체 자석 또한 인간이 발견한 자연 법칙을 산업 분야에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연출된 인공적인 ‘먹물’은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그 과정을 재현한다.




임승균 설치전경


임승균의 [Tide Pool]은 수집된 사물과 실험 도구로 채워진다. 수직으로 구멍을 내서 땅의 단면을 채취하고 거기에서 연대 측정을 비롯한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은 대전의 철도청 부지라는 일상적 공간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는데 활용되었다. 공적 기관이 오랫동안 점유해온 곳이라 그동안 쌓여온 것이 잘 보존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그곳에서 채취한 흙의 샘플에는 자연적 암석 뿐 아니라 인공적 시멘트 등이 섞여 있다. 시멘트 덩어리와 바위는 언뜻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공간을 공유했다. ‘Tide Pool’, 즉 ‘조수웅덩이’는 주변과는 다른 생태계가 형성되는 곳이다. 인간사 또한 특정 시공간의 웅덩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한나 설치전경


장한나의 [신자연의 탄생]은 문명의 산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이 됨을 알려준다. 작품 속 기이한 덩어리들은 플라스틱으로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플라스틱도 바위도 아닌 그 중간, 작가가 명명한 ‘New Rock’이다. 작가는 이를 수석수집가처럼 제시한다. 합성고분자 물질인 플라스틱은 인공 생태계에서는 바위만큼이나 필수적인 물질이 되었지만, 썩지 않아서 고스란히 자연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의 생태적 회로를 통해서 유기체의 체내에 축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긴 역사적 지평으로 본다면 그 역시 단단한 바위처럼 조금씩 변할 것이다. 자연/인공의 경계를 초월하는 보다 큰 지평인 ‘신자연’의 진화에 귀속시킨다.


  

2. 혼종과 이종의 카니발—배규무, 이승연, 주다은




배규무 설치전경


배규무의 작품에서 동물의 가죽을 떠올리는 부드러운 펠트 천 위에 오일파스텔로 화려하게 형상화한 미지의 존재들은 주체/객체를 넘어선 상호관계의 장으로 엮여 있다. 부드러운 평면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색 선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변환 중이다. 그것들은 각자의 정체성이나 항상성을 유지시키는 경계를 풀어헤친다. 그것은 개체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이종들 간의 공생을 위한 상호적인 변환을 말한다. 작가는 수동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존재들인 식물과 미생물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작가는 이러한 되기의 장을 연출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류의 흙을 섞은 도자 작품, 그리고 벽이나 사각형 프레임을 피하는 등의 형식을 선택했다.




이승연 설치전경


동서고금에 편재하는 탄생의 신화에는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기본 서사가 많이 발견된다. 질서가 탄생하기 위한 다양한 조합의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과 종의 이질적 결합인 괴물, 즉 변종으로 이어질 변형에 대한 인류학적 상상은 생물 종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 지도를 오리고 붙이는 기술에 의해 상상을 넘어 현실화되고 있다. 이승연의 작품은 신화적이거나 실험실에서 생성될 수 있는 미시적 차원의 새로운 종들이 만드는 서사가 몸통을 이룬다. SF적 상상력은 한 권의 책으로 더 완벽한 맥락을 갖춘. 모래나 소금 더미 위에 3D 프린팅 한 박테리오 파지 모양의 설치물은 질료/형태의 관계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주다은 설치전경


주다은의 [아주 모호한 개체: 잃어버린 기억들]은 동굴이나 땅같이 보이는, 좌표화되기 힘든 야생적 장소에서 굼실거리는 미지의 종을 형상화한다. 작가가 협업하는 주제인 ‘줄기세포 융합연구 기술’은 인간의 단편으로부터 또 다른 개체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전학적 차원의 재생산 기술이 개체의 기억같은 고유한 부분도 복제할 수 있을까. 물론 복제 불가능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어떤 시대가 올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내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했지만 나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아주 모호한 개체'이다. 개체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할 기억들을 복구하기 위한 퍼즐은 3D 프린트, 흙, 조각, 텍스트, 사진, 영상, 사운드 등 작가의 손이 닿는 다양한 형식을 동원하게 했다.


 

3.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이다희, 채종혁, 홍주희



이다희 설치전경


음악과 추상미술의 관계는 추상미술의 초창기부터 시도되어왔다. 칸딘스키나 클레가 대표적이다. 참조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 즉 그림만으로도 올곧게 서고자 하는 자율성의 추구이다. 그것이 조형 언어로의 환원이 아닌 공(共)감각같은 확장성을 통해 풍부해진다. 소리의 시각화는 기기를 조작하는 손을 대신하여 소리(명령어)로 작동시키기 위해 발전 중이다. 그러한 소리측정 기술을 활용한 이다희의 작품은 단순한 영감을 넘어서 명곡과 그 연주들을 완벽하게 체계화하려 한다. 바하의 곡 25점을 추상화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종이 위에 잉크와 수채로 그린 작품들은 개별적 시각적 기표화를 넘어서 한 권의 책으로 집약된다.




채종혁 설치전경


채종혁의 영상 설치작품 [DATUMIVORE]는 데이터를 먹고 자라나는 신적 존재를 가정한다. 소비자로부터 빼내 간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권력이 되는 것은 이미 다가와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근대의 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산물에 의해 소외된다는 사회적 현상과 닿아있다. 채종혁은 현대를 ‘데이터 시대’로 규정한다. ‘데이터를 먹고 자라나는 신적 존재’가 강해질수록 더 약해지는 존재는 정보화 이전의 인간과 자연, 사물과 예술작품 등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완벽한 정보 게임의 사회이고, 이는 데이터 뱅크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이상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제로섬 게임의 사회는 유토피아적 기대를 디스토피아적 현실로 전복한다.




홍주희 선치전경


홍주희의 [에너지 믹스]는 수소에너지를 통해 깨끗한 물이 만들어지는 기술을 참조했다. 명리학에서 물기운이 많다고 나온 자신의 사주가 과학적 탐구의 계기가 되었다. 우주의 기운은 균형이 중시되기에 물은 불을 끌어들인다. 소리에 반응하는 불 이미지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기계장치에서의 물 이미지는 상생한다. 물과 불같은 우주의 근본 요소와 개인의 운명과의 관계는 신화와 과학의 수렴을 말한다. 신화의 세계를 극복한 것이 과학이라고 평가되지만, 신화나 과학은 모두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편 사주는 임의적 상상이 아니라 통계학에 기반해 있다는 사고도 있다. 현대과학 또한 근대시대의 결정론을 버리고 통계학을 중시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를 연결시키는 관념은 시적이면서도 생태학적 대안이 된다.


출전; 2023 아티언스대전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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