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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 수행성의 시각화

이선영



순면사를 비롯해서 섬유 소재의 재료를 사용하여 짜고 엮는 작업을 주로 하는 임도는 전공이 섬유예술인 것 같지만, 서양화과를 나왔다. 작품에서 수행성을 중시하다 보니 반복적인 행위가 몸통인 공예적 기법에 대한 관심으로 선회한 경우다. 그리기와 짜기가 공존하던 시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최근 작업에는 조각적 과정이 덧붙여진다. 시간을 투여하여 짠 만큼 결과치가 나오는 섬유 작업은 작가에게 만족을 주었으며, 작가의 노고가 들어간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최첨단에서 실험하던 작가들도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좀 더 견고하게 구현하기 위해 수작업에 관심을 보이곤 한다. 그러한 작업이 단지 타인의 노동력을 활용하거나 구매함으로서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작가가 손수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개념은 최초의 관념보다 더 가치 있다.


 


[Digging]_2023_대구예술발전소_대구_전시전경



[목,돗,닻]_2023_순면사, 나뭇가지_가변설치



[목,돗,닻_2]_2023_나뭇가지_27.5(h)×14×22.5cm



수행성이란 결코 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기계로 대체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바늘이나 가위같은 소재는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다. 가령 날이 다 닳아질 정도로 활용된 가위는 튀김옷을 입히듯이 통째로 페인트에 담궈져 또 다른 작품으로의 탄생을 기다린다. 실을 연결하거나 자르면서 이미지와 서사의 과정을 매개하는 도구가 그자체로 작품이 된다. 화가가 그림의 자기지시적 차원에 주목했을 때 물감이나 붓을 다루는 방식이 중요해지는 것과 같다. 임도의 작품에서 바늘은 화가의 붓처럼 공간에 이미지를 구체화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3차원상에서 자족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입체 작품은 그림이라는 환영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간에 ‘그린다’. 물론 임도의 작품은 섬유미술이 아니라 현대미술 작품이다. 


섬유미술이 공예의 경계를 넘어서 미술이 되는 즈음, 이러한 경계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미술과 공예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그의 작품은 근대미술이 다른 분야와도 다른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익명의 장인들이 수행해왔던 전래의 기법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주요 모더니즘 작가들은 무대미술을 비롯해서 ‘순수’가 아닌 ‘응용’ 쪽으로도 관심을 보였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동일성(그림은 무엇인가, 화가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의 몸통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순수와 본질은 그자체로 자족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질성과 주변성과 대립하지 않는다. 장마와 태풍이 잦았던 올여름 떠내려온 쓰레기 중의 하나였던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그 형태를 최대한 살려가며 깎아 만든 나무 바늘은 주변적인 것에 대한 임도의 관심을 보여준다.


 


목,돗,닻 (부분)_1



목,돗,닻 (부분)_2



[목,돗,닻_면]_2023_나뭇가지에 오일코팅_77×38cm



나무는 돗바늘로 만들어져서 더 이상 쓰레기로 굴러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들은 죽음을 상징하는 수평성을 극복하고 똑바로 서 있다. 본래 그것들이 비롯되었던 나무가 태양을 향해 가지를 가득 뻗었듯이 말이다. 종교를 가진 관객이라면 부활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버려지고 망가지고 눈에 안 띄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끌림과 측은지심에 시각적인 모양새를 부여한다. 방점을 이동시키는 이러한 역전에 대해 ‘자존감’까지 부여한다. 심지어 나무 바늘을 만들기 위해 깎아 낸 껍질마저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서 작품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 [ㅁ]은 행위만큼이나 행위의 흔적을 중시한다. 선이 모여 면이 된 이 작업에 대해 ‘수행성의 시각화’라고 말한다. 그의 이전 작업에서 투명 낚싯줄로 만든 작품 또한 마찬가지 맥락이다. 다른 것들을 위해 스스로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인 낚싯줄을 작업의 본체로 삼은 경우다. 


그는 이러한 바늘을 (실제 바늘 크기에 비한다면)기념비적 차원으로 확대해서 순면사 더미 위에 꽂아 놓았다. 이번 전시에 바닥에 설치된 작품 [목, 돗, 닻]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의 거품과 같이 연출된 하얀 실 더미 위에 세워놓은 나무 바늘들이 주인공처럼 관객과 마주한다. ‘닻’이라는 키워드는 봉긋한 실더미에 꽂혀 있어 자칫 묘비처럼도 보이는 이미지를 벗어내고, 항해 중 잠시 정박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보통 바늘은 무엇인가 짜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오히려 실을 바닥에 해체하고 바늘을 중심에 세워 놓았다. [목, 돗, 닻]에서 돗바늘은 선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전시장 벽에는 여러 크기의 돗바늘(길거리에서 주워온 나무 크기가 각기 다르기에)을 빽빽하게 배열해서 면으로도 보여준다. 짜던 것이 짜여지는 것이다. 현대의 텍스트 이론은 이러한 상호적 과정에 주체 또한 포함시킨다. 




[도도구구_재립]_2023_나뭇가지, 걸개, 순면사_205.5(h)×121.2×70cm



[Any%_2]_2023_순면사_가변설치



작가는 작품 앞에 있지 않고 작업 과정에 의해 작품과 더불어 생산된다. 주체는 주도적이지 않다. 그렇게 생산된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본질보다는 맥락을 중요시한다. 섬유라는 유연한 재료는 맥락의 실험에 유리하다. 이에 따라 실의 역할도 달라진다. 그동안은 순면사로 짜서 펼친 작업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풀어헤쳤다. 실들은 돗바늘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것들은 짜여짐을 벗어나 그저 집합되어 있다, 그동안 많은 재료를 거쳤지만 순면사는 그가 꾸준히 작업한 소재로, 그 물성의 ‘끝을 보고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더니즘적인 태도로, 공예와 미술이 공유하는 태도이자 결과이다. 또한 설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임도의 작품들은 대개 조명이 강하지 않은 어둑한 공간 속에서 그림자의 역할이 강화된다. 이 또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선택이다. 그것은 공예든 순수미술이든 현대사회에서 주변화된 예술에 대한 자의식의 발로이다.   


출전; 대구예술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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