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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연 / 시공간의 싱크홀

이선영

시공간의 싱크홀

 

이선영(미술평론가)

 


최혜연의 풍경은 거의 모노 톤이라고 할 만큼 색이 빠져있다. 회색과 청색의 중간톤인 풍경은 콘크리트 빛 도시와 그 인근의 자연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비현실은 아니다. 비현실에는 현실성이, 현실에는 비현실성이 내재한다. 쉽게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계복제 시대에 작가는 동어반복적 표현을 거부한다. 현실을 현실적으로, 비현실을 비현실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색의 감축은 잡다한 소재들이 등장하는 화면에 통일감을 준다. 작품 소재가 뒷동산이나 잡풀 같이 주변화된 것이기에, 조형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작품 [밤의 빛]은 밤이 돼서야 더욱 활기찬 도시의 인공조명과 관련된다. 시스템이 삶의 주기를 지정함에 따라 인구가 많은 도시도 시간대에 따라 인적이 드물 수도 있다. 흩어져서 각자 나름대로 살지 못하기에 생기는 시공간의 싱크홀을 작가는 찾아낸다. 흐릿한 풍경임에도 가로등 빛이 강렬한 [밤의 빛]은 24시간 돌아가는 도시의 행인을 가정한 과도한 빛으로 가득하다. 밤도 낮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 축축 늘어져 보이는 식물들은 자연도 쉴 수 없음을 암시한다. 




곁의 곁 side of sides 91cm x72.5cm 장지에 혼합재료 2019



하루의 곁1 The side of the day1 100cmx10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하루의 곁2 The side of the day2 장지에 혼합재료 100cmx100cm 2023



유기체는 잠을 잘 수 없다면 죽는다는 점에서 24시간 돌아가는 사회는 불안하다. 무성하지만 보잘것없은 존재에서 작가는 [하루의 곁]을 본다. 작품 [밤의 이파리]는 인공조명을 받았는지 환하게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편 작품 [낮의 이파리]는 식물 특유의 물오른 풍성함 대신에 생사를 알 수 없는 덤불로 남은 모습이다. 작품 [하루의 곁]에서 빛을 가득 받은 잡목의 줄기들은 선의 내부를 비워낸다. 마치 입자들이 맹렬하게 브라운 운동을 하는 궤적 같다. 식물 또한 물리적인 대상이니 그 내부는 소립자들의 운동이 있을 것이다. [하루의 곁]에 등장하는 식물의 이미지는 외부이자 내부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초록빛 생생함이 배제된 식물에 투사된 정적인 삶에서 무료한 일상을 볼 수도 있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주변과 최소한의 물질과 에너지의 교류로 금욕과 절제하는 삶을 보여준다. 보리수 아래에서 붓다의 깨달음이 그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작가는 종을 알 수 없는 이 식물이 그 자리에서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지구의 생태계를 위해서 태양을 향해 활짝 촉수를 뻗는 적극적인 모습을 표현한다. 소리만 없지 폭발하는 듯한 방사형 형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하루에도 무한한 결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작가는 그 결의 곁에서 삶에 편재하는 익명적 사건들을 기록한다. 최혜연의 작품은 소재의 선택이나 형식에서 힘을 뺀다. 중심이 없고 모든 것이 주변이다. 그래서 화면은 수수께끼같은 단편으로 나타난다. 작품 [곁의 곁]은 무엇의 곁인지 주어가 생략된 채로 반복되는 자리를 보여준다. 중심은 비어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주로 시선이 잘 닿지않는 것들 (구석지거나 작은 존재) 낯선 감각, 감정, 상상을 이끌어내는 것들’이다. 작가는 ‘풍경에도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작품에는 ‘내면을 자극하는 외부의 세계와 대상’들이 담긴다. ‘비가 오는 날엔 노면을 스치며 지나는 자동차의 소리는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며 보수를 위해 테이핑해둔 비닐과 조명은 파도가 치는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길가에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방수천, 잎의 덩어리, 바람에 떨리는 얇게 흔들리는 이파리 등은 한눈에 읽히지 않는 여러 형상들을 떠올리게 하며 상상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대목들은 작품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낮그림자1 The shadow of the day1 8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낮그림자2 The shadow of the day2 8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낮의 이파리 The leaves of the day 8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밤의 이파리 The leaves of the night 8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그러한 작가의 체험을 오롯이 담고 있는 작품들은 은폐된 사물의 나타남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이다. 현상학의 출발점 중의 하나인 하이데거는 창조 활동이란 사물의 주요 모습보다 단순하고 보다 강렬하게 볼 수 있도록 부각시키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농부의 구두를 그린 반 고호의 그림의 예를 든다. 그는 반 고흐의 그림이 한 켤레의 농부의 구두가 진실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해명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품의 사물적 현실성에 이르는 길이 사물을 통해서 작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작품을 통해서 사물에 이름을 말한다. 최혜연의 작품 또한 새삼 작품 속 대상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작가는 늘 보는 잡풀과 잡목, 사물의 단편에 대해 낯설면서도 새로운 시야를 여는 시도한다. 물론 과정이나 결과가 순조롭지는 않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순수한 사물은 자신을 나타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사물의 본질에는 자기 억제와 낯설음, 그리고 폐쇄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며 사물의 본질에 내재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은 은폐된 대상들에 열려진 공간을 제공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사물의 거짓 없는 현존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능력은 예술가의 중요한 소양이다. 객관성의 정수인 철학에서조차 주체의 몫을 강조한 현상학적 흐름은 예술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니체는 높이 평가받는다. 하이데거는 [니체철학 강의;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에서 예술론에 대한 니체의 주도적인 명제 중 ‘예술은 창조적이고 생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중심 이동은 작품의 난해함을 낳을 수 있지만, 작품에 대한 거듭되는 해석 또한 가치있다고 여겨진다. 작품 [낮 그림자1]에서 아스팔트 길에 부분적으로 재현된 기호들, 그리고 좁은 보행로 위로 세워진 축대, 그것을 덮은 듯한 포장재의 광경은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보도 블럭같은 정사각형의 화면만이 그 완전성과 자족성을 보증해준다.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든 이 단편은 여러 시스템이 한데 모여있지만, 그것들이 유기적인 질서를 이룰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밤의 빛1 The light of the night1 131cmx108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밤의 빛2 The light of the night2 8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밤의곁1 The side of the night1 162.2cmx130.3cm 장지에 혼합재료 2021



숲의 틈새 A corner of the forest 장지에 혼합재료 90.9x72.7cm 2023



질서 감각은 부분과 전체의 조화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전통은 지나갔고, 새로운 질서는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다. 예술은 무질서와 자유 사이에서 유희한다. 작품 [낮 그림자2]에 등장하는 건물은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다. 잡다한 기능들로 와해된 간판 가득한 건물들과 전혀 다른 방식이어도 상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건물 외벽을 가득 메운 선들은 담쟁이의 흔적들일까. 밝은 벽을 배경으로 한 성장의 흔적은 아름다운 무늬로 다가온다. 눈구멍처럼 뚫린 작은 창문 두 개가 관객을 바라보는 듯하다. 선글라스 낀 사람처럼 자신의 시선은 숨긴 채 말이다. 최혜연의 작품 속 배경은 도시 근린공원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물과 인공물이 대신 말을 건다. 작가는 자연 그자체를 풍경화로 재현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선은 풍경 자체에 포함된다. 사람이 간혹 등장해도, ‘여기에 사람이 있을 것 같거나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같은. 또는 사람이 있는 것같은’ 상황이다. 사람을 통해 무언의 매체인 회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모두가 불확실하다. 


산책하듯 가는 동네 뒷산은 그리기를 위한 최소한의 참조물일 따름이다.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의 배경은 동작동 소재의 현충원 이어지는 산이다. 유명한 산도 야산도 아니고 공원급으로 정리된 곳이다. 하지만 작품 속 특정되지 않은 시간과 장소 속 풍경은 지각인지 기억인지, 현실인지 환상인지도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마주친 풍경 속에서 작가와 하나가 되는 시(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일렁이는 품]이라는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풍경과 작가는 서로를 품어주는 관계 속에서 작품이 탄생한다. 작가는 ‘풍경은 나의 예상치 못한 내면의 반응을 이끌어내주는 세계이자 그것을 투명하게 받아 내주는 품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인공물은 그 단편성으로 인해 종을 알 수 없는 식물류만큼이나 불확실하게 나타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잡목들이나 기능을 알 수 없는 인공구조물을 더욱 희미하게 표현하는 최혜연의 작품이 놓이는 좌표는 상대적으로 거시적이다. 작품 [낮 그림자2]에서 모노톤의 화면에서 빛/그림자, 낮/밤이라는 시공간적 범주는 거의 추상화된 표현 가운데서도 실재와의 유대를 암시한다. 




뜰의구석 A corner of the yard162.2cmx130.3cm 장지에 혼합재료 2019



해와 파도가 있는 풍경 A Scenery with sun and waves 100cmx80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일렁이는 품1 Surging scnery1 115cmx145.5cm장지에 혼합재료  2023



일렁이는 품2 Surging scnery2 53cmx45cm 장지에 혼합재료  2023



작품 [일렁이는 품2]에서 인공의 배경이 자연이 아닌 그 반대, 콘크리트 숲을 배경으로 한 나뭇가지들은 밝은 배경 위에 자연스러운 선을 드리운다. 작품 [뜰의 구석]에서 자유롭게 무작위적으로 자라난 풀들은 동양화의 선적 표현에 실린다. 작품 [밤의 곁3]에서 화면 가득한 풀숲은 원근감이 배제되어 추상적이다. 자연도 선택에 따라 추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이 잘 등장하지 않는 최혜연의 풍경에 환대의 분위기가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작품 [밤의 빛2]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빛은 메아리처럼 더 큰 궤적으로 공간을 채운다. 이때 밤의 빛은 온기가 있다. 작품 [일렁이는 품1]은 2023년 서울에서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과 같은 작품으로 드물게 등장하는 인물은 우산을 들고 있다. 땅바닥의 무엇도 덮개를 쓰고 있다. 어디인지 누구인지 왜, 때로는 시간도 계절 감각도 모호하다. 경험 또는 그리기의 어떤 시점의 감성에 충실할 따름이다. 일렁이는 품은 마음의 어떤 상태를 암시한다. 포장에 덮인 큰 덩어리같이 설렘을 주는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는 마음을 일렁이게 할 것이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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