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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자 / 상호 반향(反響)하는 우주

이선영

상호 반향(反響)하는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영은 미술관에서 열린 김희자의 [심리학적 풍경: 나무의 영혼을 찬미하다] 전은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고 작업하다가 일흔이 넘어서 귀국하여 그간에 쌓아온 역량을 한국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귀한 전시다. 물론 회고전은 아니고, 최근의 작품이 주로 나왔다. 회화와 설치작품을 아우른 전시는 작가의 감성이 밀도 있는 형식에 담겨 있다. ‘나무의 영혼’이라는 키워드는 김희자의 그림이 캔버스가 아닌 나무판에 그려져 나뭇결의 형상이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이미지와 합쳐지는 미묘한 효과를 말해준다. 나뭇결은 일렁이는 물이나 대기 등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표현한다. 흐름은 공허가 아닌 충만을 향한다. 우주가 비워진 것은 과학적 근대를 열어 제친 뉴턴에 의해서다. 이 거인은 이전 시대에 정신으로 가득한 우주를 과학법칙이 전개되는 중성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많은 저항이 있어왔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라이프니츠다. 




검푸른 밤에 (At deep blue black night), 36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2(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영은 미술관)



제임스 글릭은 [아이작 뉴턴]에서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진공을 혐오했다고 지적한다. 라이프니츠로서는 방대한 무(無)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뉴턴은 인류에게 무한 공간을 제시했지만, 충만함을 앗아갔다고 평가되었다. 과학이 비워낸 공간을 다시 충만하게 채우려던 괄목할만한 문화적 흐름이 낭만주의라면, 김희자의 작품도 그 계보에 속할 것이다. 자연은 물론 별과 밤, 음악이 가득한 작품들의 면모가 그렇다. 나무가 각별한 소재이다 보니 풍경으로도 나타난다. 나무의 안팎이 모두 등장하는 셈이다. 나뭇결이 나무의 내부에 있었던 것이듯, 흐름은 또한 인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한다.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원시적 사고부터 근대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범신론적 세계관이 관통한다. 예술철학자 김혜숙과 김혜련은 [예술과 사상]에서 낭만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독일 관념론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자들은 일체의 대상성을 주관의 생산적 기능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꾀한다. ‘존재하는 것은 일체 자아’(피히테)가 되었다. 


[예술과 사상]에 의하면 낭만주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셸링은 모든 존재의 배후에 놓여있는 생성의 근거를 정신이라고 본다. 셸링에 의하면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좀 더 높은 형성으로 나아가려 하며, 자연과 주관의 산출력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적 정신이다.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체일뿐만 아니라 통일적으로 일관된 예술작품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예술은 우주를 따로 표현한다기 보다 그자체가 우주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객의 구별의 사라져야 할 것이다, [예술과 사상]에 의하면 낭만주의자들은 전 우주와 자신을 연결짓는 신의 감각을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전 우주에 정신력이 편재해 있다는 감정이입의 정서였다. 김희자의 작품에서 나뭇결 무늬로 나타나는 물질 또는 에너지의 흐름은 자연과 인간의 혼연일체를 표현한다. 나뭇결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형상들은 분리된 것을 잇는 것이 종교적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 




영원의 교향곡 (Immortal Symphony), 720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2



작품 앞의 김희자 작가



작품 제목들에서 발견되는 ‘승화’, ‘기도’, ‘영원’, ‘초월자’, ‘시공’, ‘無’, ‘환희’, ‘정령’과 같은 키워드는 근대가 예술 그자체에만 집중하자면서 하나둘 잘라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불러들여 잇는다. 감성 전체가 삶으로부터 가능한 것인데, 그 중 극히 일부인 회화적 논리만을 전부인 양 선명성 경쟁을 해온 미술사가 있지만, 그것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편향적 해석이다. 작은 규모든 큰 규모든, 우주적 풍경들로 갈무리되는 김희자의 작품은 인류학적 상상계를 복원하는 총체적인 장이다. 나무 위에 그린 그림들은 나뭇결이 화면의 바탕이자 형상이다. 작품 [검푸른 밤에](2022)는 나뭇결 무늬를 조정해서 대형 화면 전체를 출렁이게 한다. 화면의 나뭇결은 물결 이미지와 겹쳐진다. 우주의 전 존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유인 유사와 상응이라는 방식을 통해, 세계를 이루는 여러 요소는 소통한다. 나무와 바다는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지만, 내재율을 통해 만난다. 대지에 새겨진 나무의 분지와 다를 바 없는 물길들이 만나 바다를 이룰 것이다.  


검푸른 밤바다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이 모호한 시공간은 우주와 닮았다. 깊은 우주를 무대로 전경에서 어떤 사건이 기록된다. 어디선가 풀려 나온 푸른 빛 틀은 오랫동안 작가를 옥죄던 삶의 굴레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다. 반영상까지 함께 하는 틀은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자발적 타발적으로 씌워진 인생의 굴레가 벗겨져 나가는 장면은 ‘시원 섭섭’이라는 한국어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하얀 포말이 몰려오고 물러나는 바다와 나뭇결의 절묘한 조합이 있는 작품 [영원의 교향곡](2022)은 세계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예시한다. 이중적 이미지는 김희자의 작품이 풍경이면서도 단순한 외적 재현은 아님을 알려준다. 교향곡 또한 파동이다. 영원은 중심에 근거한 정적인 관념이지만, 작가는 영원을 고정이 아닌 과정, 즉 그곳에 도달하려는 끝없는 추구로 해석한다. 하지만 과정이라고 해서 그리다만듯한 만들다만듯한 어정쩡함은 없다. 김희자의 작품은 많은 것을 품으면서 완결도를 지향한다. 




윤슬 (glittering), 24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2



승화를 위한 기도 (A pray for sublimation), 20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2



나뭇결 무늬로부터 출발하거나 수렴되는 파동은 단독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나뭇결과 함께 일렁이는 작품 [윤슬 (glittering)](2022)은 흐름으로 가득한 세계의 단면이다. 파동을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색상은 우주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그저 아름답거나 유명한 장소가 아니라, 감정이 이입되는 풍경 [폭풍의 퀘렌시아](2021)는 피난과 안식을 동시에 포함한다. ‘Querencia’라는 스페인어의 기원은 투우사와 싸우는 소가 힘들 때 다시 힘을 모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삶이라는 투쟁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퀘렌시아 같은 장소가 있을까. 있다면 그는 행복할 것이다.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기술을 터득한 김희자는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은 곳 그 어디에서나 안식을 얻는다. 나뭇결의 일렁이는 움직임은 치유의 소리와 향기가 되어 관객을 감싼다. ‘나무의 영혼을 찬미하다’라는 또 다른 부제를 가지는 이번 전시에서 나무는 나뭇결 뿐 아니라 나무 그자체로도 나타난다. 


작품 [승화를 위한 기도](2022)는 성황당 주변의 큰 나무에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할 때 묶는 매듭이 오로라 형태와 결합된다. 기도가 승화되어 하늘과 연결되는 모양새다. 기원만큼이나 단단하게 묶인 매듭은 잡을 수 없지만 보이는 형태로 변화한다. 신화에서 여신의 옷자락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오로라는 삼줄이나 천 같은 섬유질 구조와 연결된다. 분리된 것들 간에 출렁이면서 연결되는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버텨냈을 듯한 나목의 형태는 마치 무당이 다른 세계와 만나기 위해 춤을 추는 듯 기(氣)에 가득 차 있다. 서 있는 고목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모른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은 소리 없는 매체인 회화에 소리의 효과를 준다. 특히 나뭇결 무늬가 파동같이 시각적인 메아리를 큰 화면 구석구석으로 전달한다. 근대적 공포에 대한 표현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뭉크의 [스크림]이 그랬듯이, 색과 소리의 상응 관계를 생각할 때 붉은색은 처절하다. 긴 파장의 색인 붉은색은 에너지로서의 강도는 낮지만, 시각적으로는 강하다. 




무시무공(無時無空) (no time no place), 24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0



초월자의 집 (The house of the transcendence),120x120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3



폭풍의 퀘렌시아(Querencia of storm), 240x120x8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2021



이 전시의 검푸른 바다 풍경과 함께 상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짙은 안개 또는 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봉우리들만 보이는 작품 [무시무공(無時無空)](2020)은 밝은 화면이라 파동이 더 잘 보인다. 이 작품에도 나목(裸木)이 있는데, 나목의 경우 가지 형태가 율동적이어서 파동으로 가득한 배경을 반향(反響) 한다. 김희자의 풍경은 산이든 언덕이든 섬이든 파동에 둘러싸여 있다. 대개 기류나 해류처럼 지형이나 기상현상 등과 교묘히 겹쳐있지만, 대자연에서 흘러나오는 영험한 기운이 공통적이다. 대자연을 마음에 담아 다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주체는 소우주의 위상을 가진다. 김희자의 작품에서 대우주와 소우주는 상응한다. 상응은 유비(analogy)를 통해 이루어진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유비란 총총한 그물을 통해 우주 전체, 즉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파악하려는 중세적 사유의 기본적 성향이라고 하면서, 르네상스 철학의 한 모티프인 소우주 모티프를 논한다.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대우주는 소우주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진다’(보빌루스). 이번 전시의 ‘심리학적 풍경’은 인간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대우주의 질서를 직관한다. 에른스트 카시러에 의하면 르네상스의 철학은 인간은 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자아는 세계에 대하여 둘러싸이는 동시에 둘러싸는 존재, 즉 인간은 신과 무한한 우주에 대해 감싸면서 감싸이는 관계를 취하고 있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쿠자누스에게 유래하는 소우주 사상을 ‘인간은 우주를 묶는 끈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희자의 작품에 가득 파동치는 선들은 그러한 이음의 과정을 표현한다. 상응은 감각들 간에도 일어나는데 특히 파동 형태가 소리를 내재하고, 작품에 따라 실제로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한다. 작품 [초월자의 집](2023)에서 큰 나무 곁의 작은 집은 나무 만큼이나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 나무는 영험한 기운으로 파동치는 우주 한 켠을 바라보는 주체를 상징한다. 이러한 우주적 조응으로 인해 주체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집으로 상징되는 자아는 초월자와 마주한다. 










영은 미술관 전시전경



바람결의 속삭임 (the whisper of breeze), 240x40x7cm, mixed media, 2022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은 그저 고립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만큼이나 설치작품이 포함되는데, 설치라고 해서 거칠게 얼기설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회화만큼의 형식과 그 밀도가 공유된다. 작품 [바람결의 속삭임](2022)은 언뜻 벽에 걸린 평면작품 같은데 교란적 요소가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아무리 멋진 풍경도 벽에 걸어두면 또 다른 벽이 되는 것 같아서 취한 일련의 조치라고 말한다. 나뭇결에 겹쳐진 유려한 흐름 사이사이를 끊어서 반사면을 설치한 것이다. 작품은 벽의 일부를 넘어서 시공간에 반응하는 미묘한 표면이 된다. 전시장 한 면에 설치된 정삼각형 구조물들은 그 안에 반사면이 설치되어 있어 기하학적인 우주의 면모를 다채롭게 보여준다. 작가가 매료되었던 만화경에 대한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시오반 로버츠는 [무한 공간의 왕]에서 초다면체의 대칭적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늘 거울 세트를 가지고 다녔던 기하학자 콕세터를 소개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만화경은 1814년 데이비드 브루스터가 발명한 것으로, 만화경을 가지고 콕세터는 정확한 2차원 및 3차원 기하학 패턴을 생성했다. 김희자의 작품에서 활용된 거울면 대칭 같은 반사는 이미지와 함께 작용하여 미묘한 광학적 효과를 자아낸다. 거울은 설치작품에도 적극 활용되어 시각적 메아리를 울려퍼지게 한다. 시오반 로버츠가 밝히는 만화경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상에서 나온 광선이 거울에 비춰질 때 입사각(광선이 거울에 닿는 각도)은 반사각(광선이 거울에서 반사되어 나가는 각도)과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화경은 반복되는 일련의 반사를 일으키며. 거울들이 만나는 각도에 따라 반사된 상이 무한히 증가되어 무한한 패턴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반사된 상들이 일치하여 동일한 경로로 되밟아 가면서 그자체로 되돌아가게 된다.’ 김희자의 작품 속 대칭을 만들어내는 만화경적 원리는 차원을 하나씩 더하는 유희를 펼친다. 고차원의 초다면체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끌어들이는 작가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나무가 삼계(三界)를 연결하면서 차원을 변형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유칼립투스가 보낸 메세지 충만한 고독

(Message from eucalyptus Full Solitude Fullness), 120x120x16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with mirror, 2023


환희의 춤 (a dance of jubilation for joy), 120x120x16cm, Acrylic on the grain plywood with mirror, 2022



 영은 미술관 전시 전경



오로라와 춤을 (dancing with aurora), 300x300x300cm, Digital stereoscopic structure, 2022



나뭇결 같은 곡선적 율동 대신에 기하학적 대칭을 반복함으로서 비슷한 효과, 즉 ‘고차원으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하나 더 얻는’(시오반 로버츠) 것이다. 거울에 의한 반사로 생성될 수 있는 대칭군은 이번 전시에서 설치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기하학자는 반사가 기하학과 대수학에 가지는 숨은 의미를 탐색하지만, 예술가는 여기에 자신의 회화 이미지를 개입시키면서 환상적 영상(phantasmagoria)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에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작가는 관객을 그 내부로 빠져들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도 나무가 주인공이다. 지상에 우뚝 서서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의 존재태는 늘 인간과 비교되었다. 작품 [환희의 춤](2022)에서 나뭇가지는 기하학적 구조의 반사면에 힘입어 무한히 확장하며, 춤추는 듯하다. [유칼립투스가 보낸 메세지 충만한 고독](2023)에서 나무의 독특한 문양은 실제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은 그 다양성에서 예술적 창조성의 모델이 된다. 예술가에게 발견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이다. 삼각형 구조물을 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도 들어갈 수 있는 연극적 무대 같은 작품들이 전시장 한 면을 차지한다. 300x300x300cm 규모의 대작 [오로라와 춤을[(2022)은 입체경 같은 구조(Digital stereoscopic structure)다. 그림이나 사진 등 여러 평면적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다. 마치 줄지어 설치된 텐트처럼 연출된 삼각형 구조물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우주 안에 들어서게 한다. 주변을 어둡게 연출해서 더욱 아늑한 느낌을 주는 구조물은 시각적인 메아리 덕분에 내외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안에서도 열림을 바깥에서도 둘러싸임을 느낄 수 있다. 그 근처에 설치된 [숲의 정령을 찾아서](2023)도 비슷한 구조지만, 전시장 한 면을 통째로 어두운 감실(龕室)로 만들어서 보다 자족적인 우주를 이룬다. 세계의 조각에 불과하지만, 전체가 담겨 있다. 




숲의 정령을 찾아서 (in search of forest spirit), 350x300x300cm, Digital stereoscopic structure, 2023



전문가가 찍은 천체사진, 어디선가 비치는 울렁거리는 빛, 잔잔한 음향 등이 잘 어우러지는 우주는 황홀하다. 여러 감각 기관을 공략하는 총체적인 효과 때문에 연극의 무대같은 효과가 있으며, 내부로 더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주는 시각적 무대는 관객들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장소가 되었다. 실루엣으로만 드러나는 나무들의 형태는 그림자 연극같은 효과를 주며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자는 시각적 메아리를 이룬다. 가장자리에 설치한 반사면은 곡면을 내재해서 작품 내부에 오로라같은 빛을 어른거리게 한다. 연극적인 연출은 장르와 장르 사이에 존재하면서 시각 뿐 아니라 신체적 감각을 고양한다. 김희자의 무대는 이미 그림의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밀도 있는 파동의 형태를 바탕에 깔면서 여러 요소들을 조율한다. 형식을 한정함으로서 완벽함을 추구하려했던 고전주의와 달리, 낭만주의는 보다 많은 것을 작품에 포함시키며, 유한이 아닌 무한을 추구한다. 


밤하늘로 대변될 수 있는 우주는 그러한 장이 펼쳐지기에 알맞은 무대이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은 꿈과 무의식이 투사되어 있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영혼과 꿈]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우주적 무한과의 소통이었다고 하면서 이들이 표현한 우주가 ‘낭만적 하늘의 천문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특히 음악과 어우러지는 김희자의 작품은 공감각적인 우주이다. 알베르 베갱은 ‘우주가 무한히 부드러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소리와 색과 향기들이 서로 교감하는 이 우주 속에서는 사물들이 끊임없이 변모하고 그들의 일시적인 겉모습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면서, 꿈은 먼 태고의 지질학적 시대, 창조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의 우주를 포착하는데, 묘하게도 이 순간은 수많은 시인들의 환영들, 태초의 신화들, 밤의 꿈들 속에 살아남아 있다’고 말한다. 김희자의 작품 속 별빛 우주는 나무를 비롯해서 작품 속에 나타났던 모든 소재들을 오케스트라처럼 조율하면서 관객의 오감에 침투하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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