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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인 / 치유의 시간

이선영

치유의 시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지인의 [치유의 시간] 전에 피어있는 꽃들은 태양처럼 강렬하다. 크지는 않아도 한 화면을 가득 채운 기념비적인 스케일 때문이다. 이 꽃들은 치유를 상징한다. 그것은 안과 치료 등을 마치고 맨 마지막에 빛이 나오는 기기에 감은 눈을 가까이 대는 과정을 떠올린다. 뜨거운 열기도 느껴지는 빛은 상처뿐 아니라 치료 자체 때문에 자극받고 경직되었을 환부에 피를 다시 돌게하고 원상 복귀의 시간을 앞당긴다. 이때 감은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붉은색인데, 그것은 빛 자체가 그래서가 아니라, 빛이 투과된 눈꺼풀 피부 안의 피색이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꽃은 붉은색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렌지, 레드 등 붉은 계열이 많고, 모노 톤으로 칠해진 바탕에서도 붉은 계열이 있다. 비록 붉은 계열은 파장 면에서 푸른 계열에 비해 에너지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따스하다. 작가는 얼마 전 병원에서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 또한 붉은색 계열에 대한 선호가 있음을 알게 됐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색은 타고난 것일까. 인류사 전반에 걸쳐 유전된 영혼의 무의식적인 구조일까, 아니면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원형의 예일까. 또는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진리일까’를 물으면서, ‘색의 내면성’을 말한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신앙이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색도 병을 고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색은 감정과 결부’되며, ‘기분이 좋아지면 어떤 병에 대해서도 저항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바 헬러는 레드가 ‘불이고 피’라고 하면서, 그것이 어떤 상징일지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경험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작가가 치유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심신의 병 또한 마찬가지다. 병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독특한 체험일 수 있다. 어쨌든 예술도 살아남은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심연으로 내려가 바닥을 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예술 또한 분리된 경계를 통과하는 여정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파스칼), ‘우리가 삶을 통하여 찾고 있는 것을 오직 그것, 죽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슬픔인지도 모른다’(셀린)는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울증과 멜랑콜리는 예술가의 변수가 아닌 상수로 간주한다. 정지인의 경우, 이전에는 파스텔 계열에 채도가 낮은 색, 요컨대 다소간 우울한 색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제 우울증은 ‘진짜’ 극복해야 할 것이 됐다. 요즘 작품이 강한 색감의 원색으로 채워지는 것은 암흑 속에 내려앉은 것 같은 삶에 빛을 끌어들이려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의지의 산물이다. 심신을 무기력하게 옭아맨 어둠은 빛을 요구했다. 그 빛을 어둠을 포함하거나 전제한다. 빛은 이성을, 어둠은 광기를 상징해왔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세계에서 광기는 진리의 빛에 맞선 어둠의 의미했다고 말한다. 








푸코에 의하면 어둠을 흩뜨리지만, 어둠이 사라질 때 안보이게 되는 빛이 실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광기의 어둠 속에서 일 뿐이다. 인간(빛)과 광인(어둠)은 ‘상호적이면서도 양립할 수 없는 진실의 끈으로 이어져’(미셀 푸코)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시켜온 각종 의학이나 법적 체계에도 불구하고, 정상/이상의 경계는 모호하며, 인간은 이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다. 가장 흔한 소재이기도 한 꽃은 이상의 증후를 분명히 나타낼 수 있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활짝 핀 붉은 꽃의 푸른 배경이 있는 작품의 경우, 차가움과 뜨거움이 대결하는 듯한 긴장감도 느껴진다. 붉은 꽃 두 송이가 그려진 작품에서 난데없이 화면의 1/3을 차지하는 푸른 바탕 또한 목에 겨눠진 칼끝같이 서슬 퍼런 기운이 느껴진다. 단독이 아니라 대조를 통해서 그 효과를 자아내는 색은 꽃을 더욱 강조한다. 대개 화면 한가운데에 하나씩 박혀있는 꽃들은 일종의 초상의 역할도 한다면, 온기는 한기를 바깥으로 밀어내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인생이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가는 결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하나의 꽃, 즉 한 명의 사람은 스스로의 취약함을 막아줄 단단한 사각 프레임, 즉 정사각형 캔버스에 담겨있다. 둥근 꽃이 안치된 정사각형은 중심집중적 구조를 가지며, 만다라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식물이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하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식물은 살아있는 현실이자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이다. 정지인에게도 식물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 ‘다양한 리듬으로 재생되고 숭배되고 고양되고 촉진되는 것은 삶 전체이며 자연’(엘리아데)이다. 작가는 꽃을 보는 자연스러운 시점을 바꾸어 꽃의 중심부를 애써 강조하는데, 그것은 마치 종교적 관념에서 세계의 중심과도 같은 역할을 말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어떤 의미 있는 존재나 행위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이 하늘의 원형을 지니거나 행위가 원초의 우주론적 행위를 반복할 때다. 정지인에게 화면 가득히 피어있는 꽃은 ‘우주적 삶의 현현’(엘리아데)인 것이다. 입원했을 때 친구가 선물해준 식물 관련 책자나 산책길에 만난 꽃들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아크릴 물감의 쨍한 색감 때문에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호하다. 요즘은 제조 기술이 좋아서 조화가 생화보다 더 생생해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실주의를 위해서라면 유화가 더 유리하겠지만, 유화는 치료 중인 화가에게 직업병을 악화시키는 위험한 재료다. 또 하나의 특징은 꽃의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활짝 핀 것이 만개의 순간을 맞고 곧 질 것임을 예고한다. 다른 작품과 달리 비스듬하게 포착된 꽃은 태양이 아니라 중력을 향하는 꽃잎이 드러나기도 한다. 늦가을에 활활 타오르는 단풍잎처럼 말이다. 


작품 속 꽃들은 활짝 피어있기 위해 전력을 다한 존재의 모습이다. 세계를 향해 힘껏 속살을 내보이는 꽃은 잎새가 하나하나 떨어질 일만 남았지만, 다행히 그림이라 절정의 순간에 고정시킬 수 있다. 공간예술인 회화는 결정적 순간을 정지시키며, 전후의 상황을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회화에서 이야기는 직접적이기보다는 상상의 몫이 크다. 이번 전시는 작가 개인에게는 절박하고 분수령을 이루는 것으로, 근 몇 년간의 시간들을 한 송이 꽃들로 압축했다. 전시 부제 ‘치유의 시간’에서 치유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가 시간이다. 행복은 짧고 불행은 긴 것같은 고무줄 시간이 객관적 시간을 대신한다. 앞서 인용한 [검은 태양]의 저자는 ‘멜랑콜리 환자의 기이하고도 느린 혹은 주의 산만한 언어가 그로 하여금 중심을 잃은 시간성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성은 흘러가지 않고, 선/후라는 개념이 그 시간성을 지배하지 못하며 한 과거로부터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지도 않는다.’(크리스테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삶의 기본 축인 시간성 또한 부정하게 했을 것이다. 동물로 치면 내장을 다 드러낸 것같은 정지인의 꽃은 짧지만 하루가 1년보다 더 길고 지루했던 병원 생활 속에서 정상/이상을 판별 받기 위해 낱낱이 관찰되고 있다는 경험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분홍색 꽃은 줄기나 꽃병이 아닌 받침대 같은 평면 위에 해부학적인 정확성을 견지한 채 자신을 활짝 벌리고 있다. 통상적인 시선이라면 잘 안 보일 것들, 요컨대 내밀하게 꽁꽁 쌓여 있던 것들도 다 보여준다. 작가가 ‘치유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개화처럼 접혀있던 것을 풀어헤치는 방식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병원에서 작가를 꺼내준 것은 다름 아닌 그림이었다. 그곳에서 그림을 하루에 8시간 이상 그리는 모습에서, 비정상인으로 간주 된 이의 정상성을 확인받았기 때문이다. 병원은 치료를 위해서 가는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병을 더 키울 수도 있다. 


정지인은 자신을 더 악화시킬 그곳에서의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직감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이러한 시설의 수용에 대해 ‘죄악과 처벌, 방종과 부도덕, 회개와 체벌이 만연하는 세계’라고 평가하면서, 이성의 시대에 탄생한 이러한 보호시설은 광기를 잠재우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푸코의 기준에 비정상은 정상이 무엇인지 공표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타발적으로 이루어진 이 통과의례는 예술을 전부로 만든 계기가 됐다. 작가를 처음 만난 몇 년 후 필자가 다시 방문한 집에 살림살이는 거의 빠져 있고 작품들만 가득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예술은 작가의 광기를 부추키는 것일까. 다스리는 것일까. 어쨌든 예술은 폭풍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정지인은 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입원실에서 몇 시간씩 그렸고, 그림으로 ‘방을 가득 채우면 난 퇴원할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그렸다. 








그 와중에 환자, 간호사, 의사 등 그곳 구성원들과 그림으로 소통한 점은 큰 수확이다. 예술은 그것에서 각별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소통된다. 예술작품은 소비되기 위해 그저 눈길을 사로잡는 대상이 아니다. 꽃 그림은 잘 정돈된 일상을 장식하는 도구가 아니라, 마치 부적같이 개인을 지켜주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열린 동공처럼도 보이는 꽃들은 신경이 곤두서서 잠들지 못했던 시간들 또한 떠올린다. 예술작품이 어떤 증상의 표현은 아니지만, 반복은 치유의 효과를 줄 수 있다. 묘사된 꽃잎의 주름들은 부드럽기보다는 날 선 가장자리를 강조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육체의 병보다 정신이 더 힘들어서 잠 못 이루던 숱한 날들에서 삶과 죽음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다가왔다. 화면에 편재하는 빛은 어둠 또한 필요한 전 존재를 24시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소리치지만, 바깥으로는 새어 나가지 못하는 아우성처럼도 보인다. 


그림은 침묵하는 매체이기에, 소리를 개입시키려면 표현은 더 과장되어야 했으리라. 항암치료 이후 닥친 쓰디쓴 현실 속에서 들렸던 환청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던 비명이 본인에게 되돌아온 소리는 아닌가. 바깥 또는 안에서 들려온 소리들은 작가를 시험에 들게 했다. 몸이 병과 싸우듯이 영혼은 악마와 싸우는 듯한 형국 속에서 탄생한 그림은 의외로 고요해 보인다. 재활의 시간을 보내는 작가에게 하루 중 얼마 안 되는 휴지의 시기에만 그림은 그려질 수 있다. 꽃이라는 상징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작업에 대한 의지 하나로 단기간에 한꺼번에 닥친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녀의 꽃들은 각별해 보인다. 특히 양귀비 같은 소재는 향정신성 약재로 사용될 수 있기에 금지된 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과 약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것을 전래된 의술은 알려준다. 






정사각형 화면에 하나씩만 자리한 꽃들은 트라우마를 주었던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아직 작업에만 매달리기에는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서이다. 한때 그녀에게도 남부럽지 않을 든든한 삶의 맥락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작업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인생에 전환점이 될 만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원래 풍경화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너무 먼 길처럼 느껴졌고, 작가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줬다, 여러 개의 꽃이 그려진 한 작품은 그리다 지친 듯 화면 한켠을 단색으로 처리했다. 꽃과 잎의 정교한 묘사에 비한다면 여백처럼 보일 정도다. 이번 전시에서 꽃은 다시 시작될 풍경의 초입에 해당된다. 꽃이든 풍경이든 인적 없는 자연은 인간에게 상처받은 존재에게 공감이 갈 수 있는 보편적 소재다. 이번 전시에서 주로 그린 꽃들은 튤립, 양귀비, 매리골드 등인데, 매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행복해지고 말거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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