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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 담을 수 없는 그릇

이선영

담을 수 없는 그릇

 

이선영(미술평론가)

 


흙으로 빚어 고온에 굽는 도자는 보기보다 약하지 않지만, 깨지기 쉽다는 통념이 있다. 물렁한 흙덩어리에서 고밀도 광물질로 변하는 환골탈태의 과정은 그자체로 드라마틱하다. 완성된 작품이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과감히 깨버리는 모습 또한 도자예술에 대한 영웅적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인기 영화 [사랑과 영혼] 이래, 여성 도예가에 대한 이미지도 곱다. 하지만 인상과 실제는 많이 다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는 부제를 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깨고 싶은 것은 도자기나 그를 둘러싼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난 현대미술에서 문제시됐던 관념이다. 오랜 역사를 가지는 도자예술 또한 기법 면에서 재현이 중요했다. 잘 만들어진 기(器)와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 또한 동양화 기법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 전은 그 아름다움을 깨고자 한다. 그것은 미학적으로 미를 극복하려 했던 숭고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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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도라지화병 9x18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해서]에서 칸트를 따라 미와 숭고를 구별한다. 숭고는 대자연에서 느낄 수 있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자연이란 방식은 그 거대함이나 거친 힘에 있다. 거대한 산더미, 하늘을 뒤덮는 듯한 위협적인 바위, 뇌우, 집채 만한 파도를 지닌 대양, 화산,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이 모든 거친 것들의 현시(現示)가 숭고이다. 기후 변화에 의해 자연재해의 힘이 나날이 커지는 현대에 인간의 기준일 따름인 아름다움은 상대화된다. 칸트 미학에 의하면 숭고는 그 자체의 순수한 상태인 크기, 힘, 양이며, 하나의 형식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미와 숭고는 대상의 한정된 특성과 무한정한 특성 간의 차이다. 솜씨 있게 만들어지고 그려진 형태들은 주어진 형식에 충실하며 아름답다는 평가를 낳는다. 반면 형식에 의존하는 예술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숭고다. 그것은 ‘몰형식’(칸트)으로 나타난다. 


숭고의 미학에 의하면, 상상력은 그것이 더 이상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리오타르는 자신의 과도함으로 인해 넋이 나가더라도 자신의 유한성에 맞서는 숭고가 최종적으로 광기에 근접한다고 말한다. 최유진의 작업에서 아름다움을 담은 도자기는 폭력적으로 부수어진다. 망치지도 않은 작품들에 마구 망치질하는 행위는 주변 사람들의 염려를 낳을 만하다. 작가가 빚은 청화백자는 아름답기에 깨짐 또한 아깝기 그지없다. 전시장 한켠에 깨기 행위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극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관객에게 이번 전시의 작업 과정을 알려주기 위한 설명적 장치일 따름이다. 아름답고 섬세한 도자기를 망치로 박살내는 작가의 목표는 크지 않았다.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이다. 놓아주는 것,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박한 듯하면서도 큰 목표라는 역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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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내려오는 기법이나 소재를 재현하는데 충실한 작업과 달리, 현대의 도예가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요구를 통해 예술과 만난다. ‘새로움의 전통’, ‘영원한 과도기’ 등으로 규정되는 현대예술이 온갖 실험과 도발을 행하다가 결국은 기법의 문제가 작가 개인을 특화시키는 기준이 되면서, 공예는 또 다른 신선한 원천이 되고 있다. 새로움은 새로움만으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편의에 따라 어수룩하게 배우는 기법에는 한계가 따른다. 수집된 오브제들을 짜맞추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어떤 순간에는 작가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최유진에게는 그다음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다. 아름답게 완성된 도자기는 중간 과정일 따름이다. 전시장에 같이 전시되지만, 관객은 ‘아름다운’ 도자기들과 깨져서 재구성된 작품, 요컨대 ‘아름답지 않은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깨는 행위는 큰 목적을 가지든 아니든, 자극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작가는 깬 것을 다시 평면으로 재구성한다. 예술을 부정적인 것조차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흩어졌다 다시 모인 조각들은 둥근 형태의 배치를 통해 꽃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다. 평면으로 구성된 도자 파편들의 표면은 자연의 꽃잎만큼 부드럽지만, 경계면들은 날카롭다. 그것들은 산산조각 난 상흔을 그대로 노출한다. 평면으로 고정시키기 위한 사각 틀을 슬쩍 넘어가는 단편도 있다. 완성된 도자기를 이루는 부드러운 선이나 무엇인가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기능은 파괴되었다. 백자 위에 푸르게 그려진 아름다운 꽃들은 접시나 병의 형태에 따라 잘 담겨있는 듯이 배치된다. 하지만 입체감이 있던 것이 평면으로 펼쳐지면 담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최유진의 작품은 아름다운 것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공간으로의 탈주 또는 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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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탄생, 또는 성장을 위해서 기존의 세계는 파괴되어야 하는, 가령 알 깨기나 꽃봉오리 터지기 등의 자연적 과정과도 비교될 수 있다. 예술의 정체성을 이루는 몸통인 아름다움을 깨려는 시도다. 잘못 만들어진 것을 깨는 것은 아니다. 섬세하고 예민한 도자기를 망치로 깨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깨서 재구성한 작품이 5점,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작품인 청화백자로 만든 화병, 접시들이 18점 공개됐다. 벽에 걸린 평면작품은 그 아래의 온전한 작품보다 더 많은 사고와 행위가 덧붙여진 것이다. 부조처럼 걸린 평면작품의 ‘재료’는 여러 개의 도자기다. 입체를 깨서 평면으로 재조합하여 에폭시나 시멘트로 고정시킨다. 파편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도자기를 빚고 그 위에 푸른 물감으로 무늬를 그릴 때보다 더 많은 공이 들어간다. 여러 도자기들이 재료가 된 단편들은 퍼즐 조각이 되어, 이를 맞추기 위한 몰입과 긴장감을 요구한다. 


작품, 또는 작품 재료인 청화백자는 무늬가 있음으로 인해 단편의 조합이 변화무쌍하다. 보통 청화는 도안처럼 제작되지만, 최유진의 경우 문인화의 몰골법처럼 한 번에 그어 완성하는 스케치 없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작가는 양감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면이 많은 모란을 선호한다. 꽃들은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는 모란 외에 진달래, 도라지, 소국 등, 작가가 좋아하는 꽃들이 병과 접시 등 여러 형태의 도자기 위에 피었다. 동양화의 기법으로 그려진 꽃들은 무한의 색인 파랑의 농담을 살려 재현된다. 모란은 부귀영화 상징인데, 최유진에게 부귀는 마음의 평온에 해당된다. 하지만 부귀만큼이나 평온도 가지기 힘들다. 예술은 이래저래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과 친숙하다. 깨기는 단순히 치기 어린 행위는 아니다. 도자예술이 아름다움을 벗어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규모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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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공간의 한계로 큰 작품을 못 걸었지만, 가능성은 열려있다. 깨뜨리고 재구성함으로서 가마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에 제한되는 도자예술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최유진에게 깨기는 도자예술의 확장가능성과 관련된다. 확장을 위해 기존의 형식은 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했다. 칸트식으로 해석한다면, 몰형식성을 거쳐야 했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칸트가 말한 몰형식성은 형식의 부재, 즉 좋은 형식의 위안을 거부하고, 취미의 합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순수예술은 방법이 아닌 방식’(칸트)을 가지기 때문이다. 숭고의 미학에 의하면 재현할 수 없는 것과의 마주침은 근본적인 개방성으로 이어진다. 한정된 세계를 확장하는 것, 요컨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것은 예술은 물론 일반적 소통의 조건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하듯이, 자신에게 불가사의하게 보이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 즉 언표 불가능한 것은 자신이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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