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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 킴 / 성의 재구성을 위한 의례(儀禮) 2

이선영

성의 재구성을 위한 의례(儀禮) 2

 

이선영(미술평론가)

 

(1편에서 이어짐)

섭식에 관련된 다발 킴의 도상은 먹는 이미지의 관습을 전도시킨다. 캐롤 코니한에 의하면 음식 관습의 연구는 인간이 어떻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중재하는지 전체적이고 통일성 있게 바라보게 해 준다.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음식을 통해 이루어 나가면서 자신과 사회적 세계를 동시에 규정해 나간다. 섭식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이브(음탕한 육체)에 의해 유혹당하는 아담(의혹을 품는 정신) 이야기처럼, 서양의 이원적 전통에서 여자들은 통제되어야 하는 본능과 감각적 신체로 동일시되고, 남자들은 통제를 하는 문화와 정신으로 연관’(캐롤 코니한)됨을 밝힌다. 요컨대 ‘여자들은 식욕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해야만 자신의 영성, 규율성, 그리고 도덕성을 확고하게 할 수’(캐롤 코니한) 있다. 여성에게 음식 절제는 ‘사회적 순화, 우아함, 고상함, 그리고 도덕성을 의미’(캐롤 코니한)했다. 남성/여성의 이분법이 정신/몸, 문명/자연의 이분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때, 다발 킴의 작품은 섭식에 대한 금기를 풀어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전사들



.드리밍 클럽-가면극



작품 속에 또 다른 작품을 끼워 넣는 방식은 다발 킴의 이전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코드의 혼합은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자신의 작품들도 그 재료가 된다. 전시된 작품들은 신화나 종교의 구체적인 실행이기도 한 축제의 행렬을 포함한다. 특히 많은 의상에 빠지지 않는 마스크는 변신의 매개로 성과 속, 삶과 죽음이 연결되는 시점과 지점을 표현한다. 가면을 쓰는 것도 인류학적 장식문화의 거대한 일부분이다. 시제어 퍼피는 [가면, 또 하나의 얼굴]에서, 가면은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위계적인 체계의 상징이거나, 축제의 의식용 장비들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가면이 갖는 근본적인 힘은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그것을 고정시키는 능력’(시제어 퍼피)에 있으며, 아울러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시인이자 비평가 옥타비오 파스는 가면을 축제라는 과도적 시기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 시론]에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가면, 또는 이름, 즉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 우리의 얼굴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가면 속 가면이라는 방식을 통해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예는 종종 발견된다. 옷은 물론 마스크나 모자 또한 기상천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옷의 제작에 필수적인 바느질은 극과 극을 포함하여 이질적인 것들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다. 영상으로도 부연되는 조형적 의상 사진들은 몸이 빠진 채여서 다소간 불안정해 보이는 의상들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는 새의 깃털같은 긴 소매와 금속성 색상의 가면의 조합이 특징적이다. 철 가면을 생각나게 하는 마스크는 ‘눈물’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슬픔을 감추는 강인한 면모가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영상 작품 속 신화적 이야기에 등장할 때 새는 날개짓 하며, 그때 다발 킴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드 스타킹이 드러난다. 




드리밍 클럽-가면극의 여신



.드리밍 클럽-전사01



한복의 긴 치마 아래에서 살짝 드러나는 자그마한 버선코에 대한 페티쉬에 가까운 찬미가는 얼마나 많았는가. [눈물을 마시는 새]라는 시적인 제목은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제목에서 온 것으로, 영상 작품 [신전의 전쟁: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는 겁탈하라]라는 대사가 차용되기도 했다. 거문고와 불협화음을 깔고 진행되는 퍼포먼스에는 다발 킴의 레드 스타킹과 처용무 가면이 조합된 화려한 행렬이 등장한다. 신화적 이야기는 오래된 시간의 겹을 둘러쓴 자연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시멘트 벽같은 문명을 배경으로 할 때 새는 전사들과 함께 한다. 전시들의 모자는 버선을 뒤집어 쓴 모습이다. 폭소를 자아내는 요소임과 동시에 버선의 선(線)이 참 예쁘구나 하는 발견적 가치를 제공한다. 발에 착용하는 버선이 머리로 이동함으로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역전의 순간은 혁명적이다. 축제 중 가면극이 수행하는 드라마틱한 전도다. 


축제나 서커스의 피에로처럼 그들은 거꾸로 서서 세상을 풍자한다, 여성적 캐릭터는 전사로 나타나는 남성적 캐릭터보다 압도적이다. 신화적 서사에서 축제의 왕은 잠시 영광을 누린 후 집단의 안녕을 위해 희생되곤 한다. 변산반도에서 행해진 퍼포먼스는 바위 절벽과 동굴, 바다같은 야생적 배경을 가진 탓인지, 희생제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동굴의 입구에 나란히 선 공연자들을 실루엣으로 처리한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것이 그림자같은 허구, 한바탕 꿈같은 것일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떠한 대사도 나오지 않는 다발 킴의 연극, 또는 춤에 구체적인 줄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우선 옷을 고안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형태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은 행위이며, 그 행위를 담은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다. 옷은 몸을 입고, 또는 몸을 매개로 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드리밍 클럽-가면극]의 의상은 방독면 같은 기구가 머리에 장착되어 아직도 마스크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여전사의 행렬



전사-돌기신화



코끼리처럼 길게 늘어진 방독면 같은 마스크에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바라는 이미지들이 그려져 있다. 마스크를 제외한 온통 붉은색 의상은 위험에 처한 몸을 상징하는 듯하다. [드리밍 클럽-가면극의 여신]은 딱 붙은 사도매저키즘적 유희의 복장 재료로 많이 쓰이는 뱀피 무늬로 한복을 지었다. 육체의 선을 드러내면서 욕망하는 부위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밀착 의상은 아니지만, 육체에 걸쳐진 주름만으로도 욕망의 흐름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눈은 가려져 있지만 응시의 대상이 되곤 하는 여성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고정되어 있다. 거기에는 매저키즘적 환상이 있다. 뿔과 연결된 베일같은 가면은 뱀피 무늬처럼 이국적이지만, 한국과 멀리 있는 소재도 아니다. 고대 유라시아의 알타이(Altai)의 종교로 알려진 샤머니즘은 북방의 알타이 민족인 우리도 공유한다. 고안된 옷을 입고 어떤 자세가 가장 잘 어울릴까하는 문제는 각 사진마다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다. 


작가는 이 의상에서 뿔을 움켜쥔다. 앞을 가리는 답답한 가면을 벗으려는 것일까. 신내림의 통로가 되고 있는 뿔의 요동침을 안정시키려는 것일까. [드리밍 클럽-전사01]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모자인 갓을 두 개나 착용한다. 갓은 보통 남성이 썼지만, 세속을 벗어나거나 성과 속을 잇는 존재들은 성과 무관하게 착용한다. 갓은 여자 무당의 모자이기도 하다. 의상과 자태는 여성적이지만, 이목구비를 완전히 가린 ‘마스크’는 존재의 익명성을 강조한다. 다발 킴의 조형적 의상에서 보이지만, 한복은 어떠한 색감의 조화도 가능한 융통성을 지녔음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색감의 조합에 형태, 재질의 조합 등 보다 복합적인 변수를 통해 다양성과 이질성을 꾀한다. [드리밍 클럽-전사2]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색동이라는 무늬를 적극 활용한다. 매우 많은 색이 들어간 의상이어서 그런지, 작가는 대칭적 자세를 통해서 질서 감각을 부여한다. 어느 하나는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살마키스-돌기신화



신의가면을 쓴 여전사와 꽃의 향연 여전사



[드리밍 클럽-전사3]은 베개를 소품으로 삼은 기발한 발상이다. 크로스백이나 클러치백처럼 착용된 베개는 그 안에 들어간 화려한 전통적 문양이 명품의 조건을 갖춘다. 요즘 명품은 만화나 전통 등의 요소를 적극 끌어들이고 있음도 참고할 수 있다. [드리밍 클럽-사천왕]에서 기본 모델이 되고 있는 한복의 흔적은 거의 사라져 있다. 사천왕은 작품 [9명의 여신 (Mousai)와 사천왕]에 등장하면서,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여신(무사이)들과 세상 사람의 눈보다 깨끗한 하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해 위호 하는 사천왕(세상을 보호하는 왕)’이라는 캐릭터를 소화한다. 사천왕은 현대적 사유에도 흔적을 남기는 수많은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타파하려는 존재다. 그들의 의상은 현대의 패션쇼에서 보이는 컨셉 제시용의 부조리한 ‘옷’을 연상시킨다. 그 지점에서 예술과 패션, 퍼포먼스 등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이번 전시도 다발 킴이 순수조형의 영역을 넘어 전방위적인 작업을 해왔던 작가라는 점이 드러난다. 


작품 [살마키스-돌기신화]에서 얼굴을 완전히 감싼 마스크, 벗은 붉은 갓은 마치 그자체가 또 다른 가면이나 방패처럼 보인다. 앉아 있는 자세의 사진을 보면 안면에 걸쳐 있다. 가면 뒤에는 또 다른 가면이 있을 뿐, 본질적 실체는 없는 가상의 유희이다. 꽃분홍색 바지와 붉은색 하이힐, 고름의 변주 등이 조합된다. [전사-돌기신화]에서는 남성 공연자들도 등장하여 그에 맞는 의상을 하고 있는데, 버선을 뒤집어쓴 모습이 풍자적이다. [살마키스-돌기신화3]은 버선을 투구처럼 쓴 코미디 같은 의상임에도 불구하고, 의례적 행동 중의 엄격함은 유지된다. [신의 가면을 쓴 여전사]에서 금속으로 장식된 갓은 가면이 된다. 반짝이거나 복잡한 전선을 생각나게 하는 그물망으로 만들어진 의상은 어느 작품보다 사이보그 풍이다.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여전사 컨셉은 유연하게 재구조화된 신체가 여성에게 줄 긍정적인 영향력을 암시한다. 자연에 얽매이지 않고 문화와 기술을 덧입고 다시 태어나는 그/녀는 경이롭고 강하다. 그 와중에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드리밍 클럽-전사03



드리밍클럽의 사천왕



[신의 가면을 쓴 여전사와 꽃의 향연 여전사]는 여전사들을 꽃무늬가 있는 의상과 금속성 의상으로, 자연/인공적 소재를 대조한다. 레드 스타킹과 그것의 연장인 레드 하이힐은 다른 겉모습 와중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영상 장면 중 [신의 가면]은 모든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다. 민트색 당의를 입은 여왕을 뒤에서 보좌하는 검은 의상의 사람들, 그 뒤에 베개 뭉치를 머리에 장착한 사람들이 있다. 다발 킴에게 마스크의 재료는 거의 무한대다. [신전의 전생-서막]은 하얀 갓과 하얀 버선을 쓴 이들이 기름탱크에서 기능을 바꾼 야생적 공간을 무대로 공연한다. 긴 소맷부리가 있는 의상은 탈춤의 동작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떤 동작은 무술같기도 하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투사된 의상과 달리, 공연자들의 안무는 절도 있고, 의식을 치루듯 진지하다. 문화비축기지 야외 무대에서 행해진 [신전의 전쟁]은 전시된 의상을 입은 공연자들이 주연과 조연을 맡아 결기(決起)있는 동작들을 선보인다. 


[드리밍 클럽-사천왕]에서 양쪽으로 천으로 쌓인 이들은 가면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몸을 가리고 있어 제의에 필수적인 희생의 역할을 떠올린다. 영상 작품이 촬영된 주요 무대이기도 한 변산반도 부안 채석강에서의 풍경은 바닷가에서 행해지는 제의나 의식에 포함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이어진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외출할 때 둘러썼던 천과도 유사하다. 아직도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전신 가리개 복장은 계급 사회에 필수적인 희생자의 자리에 여성을 배치한다. 희생은 자연이 아닌 문화적 차원에 존재한다. 억압과 부자유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색과 무늬가 고운 한복 천들은 어떠한 조합에도 어울림을 가진다. 베개 모양의 가방과 모자를 착용한 여전사의 모습이 있는 [여전사의 행렬]은 긴 머리카락 같이 보이는 기괴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카리스마 넘친다. 얼굴이 180도 꺽여 뒤통수 자리에 붙었다면 그것은 분명 인간적 존재는 아닐 것이다. 




신의 가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여전사의 행렬-신화 속 등장]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의상이 한데 등장하여 행렬을 이루며, 신화적 서사를 이끌어간다. 헝가리 한국문화원을 비롯하여 한복 전문 전시장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의상과 착용한 사진, 영상들이 함께하는 구성이 공통적이다. [돌기가 돋아나다] 시리즈의 제목은 무엇인가 발생하거나 변신할 때 일어나는 사건의 시작을 ‘돌기의 돋아남’으로 비유한다. 이 시리즈에서 특이한 마스크는 방독면같이 방어적 특성이 있다. [돌기가 돋아나다-내리고]에서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마스크는 동물의 형상이 그려져서 주술적인 방어막의 느낌을 더했다. 바느질 선을 따라 돋아난 돌기들은 마치 라이더 자켓처럼 야성적이다. 라이더가 속도와 소음, 힘을 과시하는 남성적인 캐릭터라면, 여성성의 화신은 ‘돌기의 돋아남’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기본적인 기능을 벗어나곤 하는 과도한 장식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생물학적 본능 또한 포함한다. 


이 시리즈의 경우 의상도 활동성에 맞춰져 있다. 의상과 마스크를 돌려가며 착용하고 [-당기고], [-밀고]의 방식으로 여러 동작으로 찍힌 장면들이다. 춤사위를 연상시키는 [돌기가 돋아나다-꺽고]는 색동으로 츄리닝같은 장식을 한 의상에 검은 두건같은 마스크를 썼다. [돌기가 돋아나다–내리고]는 머리를 완전히 가린 무력한 모습이지만, 장식된 검은 갓을 마스크처럼 쓴 [-밀고]는 활짝 뛰어오고, [-꺽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돋아난 돌기신화-드리밍클럽]은 방독면을 비롯해 고깔 등 다양한 마스크를 쓴 인물이 산수화가 그려진 배경 여기저기에 출몰한다. 산수화 속 인물은 공간적 배치에 따라 동선이 나타나는 전통적인 형식을 활용한다. 같은 의상을 입은 경우 잠재적인 동감이 더 확실하다. 평안하고 초월적이어야 할 산수풍경에는 폭격을 비롯한 각종 재난 상황이 펼쳐지고, 인물들은 상황에 맞는 여러 가지 (리)액션을 보여준다. 




신전의 전쟁-I



2021년에 열린 [돌기가 돋아나다] 전의 의상과 사진들은 박물관 속의 전시물처럼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처럼 종합적 방식으로 제시된다. 의상이 정적으로 걸려 있다면, 사진은 그것을 입고 어떤 행위를 했을지에 대한 모습을 실제처럼 보여준다. 전통의상의 변주에 마스크의 조합은 춤과 의례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다. 혼종에 기반한 다발 킴의 작품은 성의 이원성을 통한 생식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이 아닌, 또 다른 연결이 작동된다. 따라서 하나, 또는 둘이 아닌 성을 생각해야 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인 [카프카론;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에서는 이분법에 기초하지 않은 또 다른 성의 가능성이 언급된다. 그에 의하면 이 또 다른 성은 상보적(complementary)인 것이기보다는, 종횡무진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유사한 것들의 연결체다. [카프카 론]에서 남녀의 합일은 꽃이나 나뭇잎같은 식물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꽃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이다. 


그것은 라깡이 [사랑의 편지],([자끄라캉의 욕망이론]에 수록, 권택영 엮음)에서 언급한 성, 즉 대립적인 성관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성이고, 상징적인 우주로부터 배제된 성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주리라 믿지만, 열락은 늘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흘러넘침은 남녀가 보완의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라깡은 여성이 '전부가 아닌 존재' 속에서 덧붙여지는(supplementary) 희열을 갖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남성적’과 ‘여성적’은 두 긍정적인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두 상이한 양상이다. 라깡은 남녀가 서로에게 보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보성은 하나로서의 전부를 전제한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통일성으로 결합될 수 있는 두 개의 반쪽이 아니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신적 존재같은 대타자를 경험하고 이와 관련을 맺을 뿐, 어떤 파트너를 경험하거나 관계 맺는 것은 아니다. 




신전의 전쟁-II



라깡에게 성은 자연적인 소여가 아니라, 브리콜라주(bricolage), 즉 이질적인 담론적 실천의 인공적 통일이다. 브리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는 항상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봉합된 구조’이다.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렬한 주장인 성 그 자체는 두 이질적인 요소들의 몽타주인 것이다. 여기에서 성은 해체된다. 통상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음/양처럼 기호학적 대립을 이룬다. 여성은 실체(substance)와 현상(appearance)으로 남성인 본질(essence)과 주체(subject)의 대립항으로 가정되어 왔다. 그러나 라깡에게 성차는 이러한 담론적 및 상징적 구성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전체의 보완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러한 전체를 상징화하려는 두 실패한 시도라고 말한다. 라깡에 의하면 모든 성은 결여에서 만들어지며, 남성과 여성을 욕망으로 가득한 부분적 존재로 남겨둘 따름이다. 이러한 가정은 남녀 간의 ‘성관계는 없다’는 유명한 언명을 낳았다.


라깡은 논문 [신, 그리고 (빗금처진)그 여성의 희열]([자끄라캉의 욕망이론]에 수록)에서, ‘하나라는 어떤 것이 있다’라는 전제를 완강히 부인한다. 프로이트의 담론에서 그것은 둘이 녹아 하나가 되는 용해, 즉 에로스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 에로스는 거대한 다수로부터 차근차근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경향이다. 프로이트도 에로스가 하나 됨을 막는 또 다른 요소로 먼지로 되돌아가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떠올려야 했다. 통상적으로 결혼의 명령은 ‘둘이 하나가 되라’이다. 이러한 ‘하나 만들기’의 명령은 인간 생활의 모든 양상을 지배한다. 다발 킴의의 작품에 나타난 수많은 욕망의 틈새들은 하나 됨과 완성의 이데올로기를 파열시킨다. 양성성은 반쪽의 성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기존의 양성성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두려움과 거세의 기호 아래 펼쳐진다고 비판한다. 




여전사의 행렬-신화 속 등장



엘렌 식수에 의하면 양성성에 대한 고전적 개념은 또한 총체적인, 그러나(두 개의 반쪽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통해 차이를 감춘다. 엘렌 식수는 거세를 액막이하고자 하는 양성성에 대한 대안적 양성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남성중심적인 표상의 거짓 극장 안에 갇히지 않는 주체이다. 엘렌 식수에 의하면 이 또 다른 양성성은 차이들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을 추적하며 첨가하는 영매 상태의 양성성이다. 어떤 면에서 여성은 양성적이다. 남성은 ‘영광스러운 팔루스적 단일성을 겨냥하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엘렌 식수)이다. 팔루스의 우위를 너무나 주장해왔기에 그리고 그것의 효력이 발생되어 왔기에 남성중심적인 이데올로기는 하나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발 킴이 호명한 양성구유는 변증법적인 종합이 아닌 또 다른 방식의 결합을 예시하며, 그것은 대안의 여성성과 더불어 양성성을 모색해온 페미니즘의 주장과도 만난다. 다발 킴의 모호한 성들은 ‘살아 움직이는 경계이며 열려진 지평’(뤼스 이리가라이)이라는 점에서 여성적 몸과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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