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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갑 /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다

이선영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길종갑은 고향에서 고향을 그린다. 그에게 고향은 땅이고 사람이고, 역사다. 그의 작품은 누추한 광경들조차 대지에 깊숙이 뿌리내린 충만한 삶에 대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사는 과정이 그림’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뭘 그릴까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행운아다. 고향은 단순히 여러 지역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에 의하면, 중심에 대한 사고는 항상 낙원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은 낙원에서 낙원을 꿈꾸는 셈이다. 신화 속 세상의 중심인 ‘옴팔로스’는 배꼽을 말한다. 세상의 중심은 모성적이다. 한국화 전통에 있는 지형도의 기법을 살려 실제 이름을 가지는 봉우리들로 마을을 감싸 안은 실경에 기초한 대작은 중심의 면모를 살린다. 춘천의 개나리 미술관에서 열린 [사창리 사람들] 전의 무대인 화천 사창리는 작가의 고향(정확히는 바로 옆동네)이자 60년 가까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기에 작품 속 등장인물은 고향 사람들인 셈이다. 




이상한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267x238cm, 2022



꼼꼼한 재현주의적 필법이 아니라서 작품 속 사람들을 누군지 특정하기 힘들지만, 모델은 있다. 자신과 가족 또한 사창리 사람들인 것은 물론이다. 작품 [기념 촬영(숲가꾸기)](2018)에는  같은 복장을 하고 공공 근로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작가는 그들을 약간은 어색하게 기념사진처럼 포착했지만, 표현주의처럼 기억으로 그린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뭔가 심각하게 토론하는 작품 [대동회](2022) 또한 주민이 모여 실제 사건을 해결한 직접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민속 기록적 가치도 가지고 있는 작품 [장삿날(회다지)](2022)에서도 나타나듯, 이전에는 마을 대소사를 공동체의 참여로 이루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고향은 멀리 있다.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한 이제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특히 고향이 시골일 때 그곳은 사라져버린 유토피아적 시공간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고향에서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았을지라도 사람들은 오래전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후하게 생각한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이가 마침 고향을 기록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 거리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을까.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 이외에 어떤 감성으로 그곳을 표현할 수 있을까. 길종갑에게는 고향이 미학적 거리감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요건이 있다. 우선 그는 고향의 현재를 넘어 먼 과거까지 본다. 사창리 자체가 조선시대부터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은둔지이기도 했던 기록문화의 보고다. 그의 그림 속에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은 물론 역사가, 한문학자, 인문 학자들과의 답사 및 공동연구는 물론이고, 팔순 노모의 기억까지 등장한다. 작가가 기억하지 못하는 먼 과거에 대해서 직접 들을 수 있는 구술문화의 산증인이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는 그림도 잘 그린다고 한다. 13세에 민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는 지금도 코로나 시대의 노인이 겪는 아픔을 포함하여, 그 세대의 여성을 대표할 만큼의 전형성을 가진다. 




기념촬영(숲가꾸기), 캔버스에 유채,  90.5x72.5cm, 2018



삼일리 사람들(하천정리), 캔버스에 유채, 90.5x72.5cm, 2022



장삿날(회다지), 캔버스에 아크릴,  90.5x72.5cm, 2022



대동회, 캔버스에 유채, 72.5x60.5cm, 2022



그래서인지 지금은 없는 초가집 풍경마저 리얼리티가 있다. 초가집은 사라졌어도 그 집을 품고 있던 산이 그대로여서 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금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미시 역사의 현장을 작품으로 기록한다. 초가지붕과 산의 봉우리가 잘 어울리는 [결혼식(엄마16세)], [민며느리(시집오던 날)](2022)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상상의 풍경이다. 작품 [피난(시어머니와 함께)](2022)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줄지어 피난 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현재의 산과 과거의 행동이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결합된다. [옛집(~1993)](2022)에 나오는 초가집은 분명 누추했을 테지만, 기억 속의 집은 따스하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라고 정의 한다. 철학자는 하나의 우주로서의 집은 모든 공간에 투사된다고 말한다. 집은 ‘몽상을 지켜주고 집은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평화롭게 꿈꾸게’(바슐라르) 해준다. 


실제하는 또는 상상의 집을 그리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합하는 행위이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집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집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것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바슐라르)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사용가치 보다는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현대에 사라진 것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집이다. 자기만의 정원에서 고추를 다듬는 어머니의 집(동시에 작가의 집)은 세상의 중심이다. 작품 [비 오는 날]이나 [입원실에서](2022)같이 실내풍경을 보면, 시골도 고독함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창밖으로 자연이 연결되는 모습이 있다. 도시같은 완벽한 고립은 없다. 어머니는 과거에 고착된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자식과 농사를 지으며 작은 가게에서 장사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변화는 보편적 이익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결혼식(엄마16세),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민며느리(시집오던 날),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옛집(~1993),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피난(시어머니와 함께),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엄마의정원  캔버스에 유채, 160.5x130cm, 2018

                                


특히 권력자들의 개발을 앞세운 자연과 역사의 파괴는 그를 분노하게 한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온 이들의 서사가 바로 문화이며 그의 예술이 지향하는 바다. 농사에 작업에, 크고 작은 어이없는 정책들에 대한 반대 투쟁까지 ‘지역작가’--그는 강원도 형상미술 작가그룹인 ‘산과 함께’를 이끌고 있다—라고 해서 한가하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길종갑의 필법이 다소간 표현주의적 격정을 담고 있는 점은 도상뿐 아니라 형식에 실은 내용이다. 그는 유화에 비해 빨리 마르는 아크릴을 선호하며, 빠르고 거친 필법으로 감정을 즉발적으로 광경, 또는 풍경에 투사한다. 그는 자신의 성글성글한 붓터치에 대해, 그림은 ‘나에 대한 질문’이기에 ‘덜 그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작품 [갈등1](2017)은 강원도의 꼬불거리는 길을 배경으로 오르막의 운전자와 앞서 걷는 사람 간의 드라마틱한 상황에 의해 화면 전체가 울렁거린다. 그것은 사실적 풍경이면서도 작가의 심리적 상태가 투사되어 있다. 


그 자신을 포함하여 농촌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밝고 순박한 것이 아니다. ‘사창리 사람들’은 비틀리고 기괴한 느낌 또한 가진다. 길종갑은 농사꾼이기도 하다. 농사와 작업을 병행하며, 농한기 때 끊김없이 작업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지역 특산품인 토마토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이 처한 삶의 결을 온몸으로 이해한다. 그의 풍경에는 산과 밭. 그 사이를 이어주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 [일몰](2022)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검은 실루엣은 작가의 모습이라 추측된다. 한편 면 소재지인 사창리는 군대 주둔 및 지역농산물로 활기를 띠고 있으며, 현재 진행 중인 소멸단계의 시골 마을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발굴하지 않는다면 소멸이라는 대세를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작품에 담은 이발소, 방앗간, 종묘사 같이 나지막한 작은 가게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풍경에 속한다. 




유년의 추억(아버지와 함께),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슬픈 기억, 캔버스에 아크릴,  90.5x72.5cm, 2022



미림이발소,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사내 방앗간 , 캔버스에 아크릴, 72.5x60.5cm, 2022



홍농 종묘사(사라진 가게),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하얀 칠을 한 단층의 방앗간 건물이 푸른 하늘과 대조된 작품 [사내 방앗간](2017)을 보면, 지상의 삶에서 먹을꺼리와 관련 풍경은 언제나 포근함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것들은 자연이 처한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 작품 [유년의 추억(아버지와 함께)](2022)에서는 작가 어머니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숲속에서 일하던 기억을 그린 것인데, 당시만 해도 자연은 대규모 개발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사용했기에 회복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무조건 파헤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거대한 웅덩이에 산채로 매몰되는 돼지와 슬퍼하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 [슬픈 기억](2019)은 대량생산과 소비의 주기에 끼어든 자연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림이든 토마토든 길종갑은 생산하는 자다. ‘모든 이들은 자기만이 아닌 다른 대상들을 위해 기능하고, 서로 주고 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작가노트) 자들이 바로 생산자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이전과 이후를 판별하는 생산자는 현재를 상대화하는 비전을 가질 수 있다. 


현재는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굳건한 질서가 아니다. 자연에 크게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작가는 ‘다수가 소수를 위해 고용되어진 듯한 사회구조’가 아닌,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믿는 인간계를 벗어나 수평적 사고’를 중시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표현했다. 얼마 전 개인전에서 거시적인 비전을 한껏 펼쳤기에, 또 다른 차원에 주목한 것이다. 미시 역사가 없는 거시 역사는 관념적이다. 물론 거시적 비전이 없다면 삶은 시시콜콜한 단편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번 전시는 세세한 마을 풍경이 있음과 동시에 마을을 품고 있는 거대한 지형도 같은 작품 또한 포함되어 있어, 일종의 공간적 좌표를 제시한다. 작품 [이상한 풍경](2022)에는 첩첩산중에 감싸인 마을이다. 성벽처럼 둘러싼 봉우리들 안에 자리한 공간은 주변과 격리되어 있고 미광이 발하는 등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다. 




갈등1, 캔버스에 아크릴, 48.5x38cm, 2017



비오는 날,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일몰, 캔버스에 아크릴, 52.5x40.5cm, 2022



한국화의 전통에 있는 기법을 포함하기에, 성/속을 구별하는 전통적 사유가 중첩된다. 내용이 어떤 형식을 요구한다면, 형식 또한 어떤 내용을 내포한다.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 공간을 변화시키고 특수화함으로서, 요컨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이 공간을 축성했던 원초의 성현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성벽은 군사적 보루가 되기에 앞서서 주술적 방어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마와 원령이 우글거리는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 되고 ‘우주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일체의 축성된 공간이 중심이다. 중심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엘리아데는 그것이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 현실적이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길종갑에게 고향은 우주의 중심이 투영된 곳이다. 고향마을 다시 그리는 것은 새 도시의 건설과도 같은 ‘세계 창조의 반복’이다. 작가의 마음 속 중심에 자리한 고향은 ‘우주의 복제’(엘리아데)인 것이다. 


그 마을의 중심에 어머니의 정원이 있는 집이 자리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도시가 항상 세계상이듯이 집은 소우주이다. 공간의 신성화라는 역설에 의해서, 또한 건조 의례에 의해서 모든 집은 중심으로 변화한다. 고향 집은 세상의 중심이기에 낙원에 대한 향수가 있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낙원에의 향수에서 힘들이지 않고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어하는 바람, 요컨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신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바람을 읽는다. 엘리아데는 또 다른 책 [이미지와 상징]에서, 인간 존재라면 모두 총체적 실재, 신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중심을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지향한다고 본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실재의 한가운데, 즉 천상계와의 교신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중심에 있으려는 욕망의 뿌리가 깊다. 이 욕망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그토록 과도하게 활용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전야제(토마토축제)  캔버스에 아크릴, 160.5x130cm ,2022



 토마토가게  2022, 캔버스에 유채, 52.5x40.5cm ,2022



하지만 길종갑이 신화와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고향은 은둔의 땅이기도 했지만, 작품은 현실 도피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지금도 자연 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땅을 소수에게 귀결될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권력에 저항한다. 작가는 낙원에의 향수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는, 또는 사라질 수 있는 낙원을 지키고자 한다. 도시에서 내려온 투자자는 마을의 상징인 큰 나무를 함부로 베어낸다. 화가가 베어지기 전의 나무를 멋지게 그린다면 사람들은 마을의 중심을 기억하고, 흩트러진 중심을 다시 잡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의 작품 속 마을은 통상적인 시골과도 다르게 번화한 모습이다. 그 지역은 토마토가 특산품인 곳으로, 작품 [전야제(토마토 축제)](2022)를 보면 과일수확기를 맞은 축제로 인파가 가득하다. 윈도 갤러리를 포함하여 전시장에 걸린 20여 점의 작은 작품들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형도 안에 각각의 현실적 자리가 있다. 


출전; 개나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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