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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 재봉질로 하는 여성적 글쓰기

이선영

재봉질로 하는 여성적 글쓰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영희의 작업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솔직함이 특징이다. 비망록 같은 작품 속에 반쯤 숨겨놓은 글자들을 찾아보면 욕도 읽힐 정도다. 이번 전시 작품의 주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재봉질이라는 방식 또한 평이하다. 농민의 깃발이나 오래된 이불과 관련된 광목이나 묵은 솜 같은 재료들 또한 마찬가지다. 바느질 또한 뛰어난 장인의 솜씨라기보다는 작가가 필요에 의해서 선택한 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바느질이나 재봉질은 여성의 노동과 관련되어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지만, 작가도 재봉질교습소의 단 한 명의 수강생이었다고 한다. 손수 무엇인가를 배워서 직접 하는 일은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오래된 물건인 목화솜이나 솜틀집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굳이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말할 내용에 따라 형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능숙한 기법이 없다. 자동화된 표현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예술가들은 늘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말한다. 



2022 Boundary_Alert 경계_경계 65x55cm(1) pen, ink, color pencil, cotten cloth, cotton, sewing



2022 Boundary_Alert 경계_경계 65x55cm(5) pen, ink, color pencil, cotten cloth,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9,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익숙한 언어에의 안주는 피상적인 장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익숙치 않은 언어는 틈이 많기에 날 것이 더 드러날 수 있다. [틈-흩어짐] 시리즈에도 나타나듯, 이영희의 작품에는 틈에 대한 자의식이 있다. 작가는 ‘난 틈새에서 견뎌낸 사람’이라고 자평한다. 공적/사적 영역을 불문하고 수많은 역할을 맡아왔던 여성은 틈과 경계를 매번 의식한다. 하지만 틈새만 주어진 상황은 궁색하다. 틈새를 벌려서 자기 마당을 만들 정도로 투쟁해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 전시도 여전히 틈새에서의 고민이 담겨있다. 솔직하지 않으면 추하고, 그냥 솔직하기만 해도 결과는 비슷하다. 누군들 자신을 좀 더 멋지게 포장하고 싶지 않겠나. 그것은 특히 ‘아름다울 미(美)’의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빠지는 유혹이며, SNS를 통해 사회 전체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의 망이 된 이래 대중들도 비슷하다. 도구의 발달로 이제 누구나 편재하는 사진과 영상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과 현실의 틈은 더욱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영희는 얼마 전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교육계에서 퇴직했지만, ‘최선의 삶’에 작업이 빠질 수는 없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기에, 틈새가 아니라, 이제는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 즈음, 작가는 주변의 또 다른 기대치와 갈등을 겪었고, 급기야 [‘호구’에 든 여자 노인을 위한]이라는 자조적인 전시 부제를 생각할 정도가 된다. 제로섬 경제학의 사회는 다 같이 잘 살기보다는 타인들을 착취해야 잘사는 현실을 낳고, 이 상황에서 여러 ‘호구’가 있을 수 있지만, 여자 노인과 관련해서는 가부장제라는 지금도 엄연히 작동하고 있는 상징적 우주가 지명될 수 있다. 가부장제라는 지배적 우주에서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을 주장한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남성이 지배와 맺고 있던 오래된 관계에 대해 말한다.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6,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4,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엘렌 식수는 여성이 항상 남성의 담론 속에서 기능했음을 밝히며, 여성의 특별한 에너지를 무효화 하는, 그리고 여성의 너무나도 다른 소리들을 깍아 내리고 질식시키는 가부장적 문화를 비판한다. 물론 이영희가 페미니즘 투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많은 작업에서 텍스트를 다루고 텍스트와 함께 형성되거나 해체되는 여성적 주체의 면모가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한 땀 한 땀 진행되는 재봉질과 글쓰기를 연결시킨 대목은 특이하며, 이 대목은 페미니즘을 포함한 여러 해석학적 상상력을 낳는다. 내밀한 영역, 가령 비망록이나 예술적 작업에서의 언어 또한 사회적이다. 작가는 언어를 통해 변화될 사회에 대해 말한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나, 너, 우리-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에서 언어는 그 이전 시대 언어 활동의 침전 작용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하면서,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형태를 표현한 언어는 보편적인 것도, 중성적인 것도, 불가침적인 것도 아니라고 본다. 뤼스 이리가라이에 의하면 말하는 주체의 뇌 속에 보편적인 언어학적 구조가 항상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시대는 그 나름의 필요성을 갖고 이상을 창출하며 그와 같은 이상을 강요한다. 


작가는 ‘문법상의 성과 관련된 언어 법칙의 변화’를 야기함으로서 크게는 ‘성의 해방’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영희는 이 전시 부제에 대해서 ‘틈과 꿈 사이를 홀로 표류하다 호구(虎口)에 낀, 마지막 순간까지도 쓸모 있다가 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모든 여자 노인에 대한 헌정’이라고 밝힌다. 한 작품에 써있는 ‘자신의 권리엔 악착같으나 남의 권리는 가볍게 희생’(인터넷에서)한다는 양아치적 부류들이 여성 주변에 편재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작업이란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작가가 여성이라면 이기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일과 작업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온 모든 여성들이 떨쳐내기 힘들었던 굴레다. 여자 노인의 대표적인 부류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영원한 자원으로 간주되어 왔다.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1,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6,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22,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정작 어머니 당사자들은 전 존재가 사용되느라 자신을 추스르거나 제대로 말할 기회는 없었다. 경험과 표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불이익과 불의를 보편적으로 경험해왔지만, 표현은 또 다른 문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필요가 있기에 여성예술가들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현실 자체가 남성 주체의 집단적, 개인적 역사와 연결된 문화적인 현실로 나타남을 주장한다. 그것은 항상 육체적 뿌리와 우주적 환경, 생명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차적 자연이다. 뤼스 이리가라이에 의하면 여성은 실제 환경과의 관계를 유지하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체화하지는 못한다. 여성은 구체적인 현실의 체험을 위한 장소에 남아 있으나 그것을 조직하는 문제는 타자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일파는 여성의 언어를 중시한다. 엘렌 식수는 여성이 여성을 써야 함을 주장한다. 여성이 표현하는 여성과 남성이 표현하는 여성은 다르다. 물론 남성/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상징적 우주에 가득한 남성 중심주의에 대해 엘렌 식수는 ‘남성의 남성성과 남성의 여성성이 남성에게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남성의 소관이다. 남성들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될 때 그때서야 그것은 우리와 상관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예술은 보다 복합적이다. ‘문화적인 것 안에서의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것 안에서의 정신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이행과 관계’(뤼스 이리가라이)를 갖는다. 여성들은 삶 속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형식의 창안자이고 계승자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이름이 발굴되고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된다. 위대한 예술가라는 기록의 기준이 남성이었기에 조형 언어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했다. 바느질같이 공예에 속한 조형 언어가 재평가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이영희의 작업에서 시장통 사람들과 함께 한 다큐멘타리도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호명한 여성 노인은 대개 무명의 존재다.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5,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17,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20,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작품 속 글자에는 재래시장 좌판 상인 여자 노인의 대화 내용--‘껍데기만 남았지’, ‘죽는 게 별게요? 장사 접는 날이 죽는 날이지...’(2022)--이 적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의 죽음에 앞서서 사회로부터의 빠른 물러남은 여성 노인의 것만은 아니다. 그 점이 이영희의 작업을 자기 한탄에 머물지 않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한다. 작가가 집중한 부류가 여성이라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편 이영희가 호구같은 여성의 상황을 말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술 자체가 무한히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감수성이나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하는 엘렌 식수는 아예 여성은 주는 자라고 말한다. ‘여성은 준다. 여성은 자신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여성은 그것을 재지 않는다.’(엘렌 식수) 음으로 양으로 주거나 빼앗기는 여성은 주체로 고양되지 못하고 익명적 존재가 된다. 권력 없는 민중처럼 말이다.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여성은 자신은 사라지지 않으면서 익명성에 녹아들 줄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의 익명성을 몸의 조건과 연결시킨다. ‘여성은 끝부분이 없는 육체, 말단이 없는 육체, 주요한 부분들 없는 육체이다. 여성은 하나의 전체이다. 하나하나가 전체인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이다. 부분적인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움직이며 변화하는 집합, 에로스가 휴식 없이 돌아다니는 한계 없는 코스모스’이다, 엘렌 식수에 의하면 ‘남성은 페니스 주위를 맴돈다. 그래서 부분들의 독재 아래 중앙 집권화 된 육체(정치 해부학)’를 탄생시킨다. ’여성의 무의식이 세계적인 것처럼 여성의 리비도는 우주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다수로 존재하는 경이로움을 향유한다....변화 중에 있기에 살아있는 내가 나에게 접목된다. 공기처럼 가벼운 헤엄치는 여자, 비상하는 여자, 그녀는 자신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산가능하다. 그녀는 아끼지 않는다...’(엘렌 식수) 여성적 형식으로 간주되어 왔던 기법과 재료들을 활용하는 이영희는 모호하게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2022 How to get out of Hogu 23_23, 24x17cm pen, ink, liquid painkiller,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Crack_Scattering 3_1 80x12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cotton, sewing



2022, detail_ Crack_Scattering 3_1 80x12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cotton, sewing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작업 또한 오래된 앨범처럼 보며 작업 자체가 자기반성이자 수행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이영희는 종이보다는 포근한 재료인 솜을 사이에 넣은 천에 펜으로 쓴다. 남들이 읽으면 곤란한 내용도 많기에 교란되어 있다. 문장이란 시간적, 선적 순서에 의해 의미가 파악되는데, 작가는 글자를 공간적으로 배치했다. 흩어진 글자들은 천에 쓴 고민들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바깥으로 쏟아내고, 그마저도 흩어지게 한다. 글씨 대신에 그림이 새겨진 천은 연처럼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설치하기도 했다. 그만큼 쌓인 것을 푸는 것이 중요했다. 규범적인 것은 물론이고 감정노동의 강도가 강한 직업에 몇 십 년을 있다 보니 생겨난 자기 검열일 수도 있지만, 읽기와 보기가 동시에 좋기는 힘든 면도 있다. 관객이 애써 퍼즐을 맞출 수는 있지만, 이영희의 문체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조형적 언어다. 


완전히 감추지는 않고, 해체주의의 방식대로 ‘말소 하에’(데리다) 놓는다. 작품에 써있는 말들은 기원과 목적이 확실하지 않은 과정 중의 말들이다. 예술은 완결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예술은 한탄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래서 어느 순간 슬픔이 희열로 변모하는 순간을 증거 한다. 글자는 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으며 번지고 그 위로 재봉틀이 지나간다. 재봉질은 일종의 드로잉처럼 선들로 남아 다른 조형 요소들과 상호작용한다. 이영희의 재봉질은 그리 섬세하지 않다. 바느질이라고 해서 수놓는 여인네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농사 깃발의 형식을 빌어 설치한 작품 또한 광야에 세워 놓은 깃발같은 야성적인 면모가 있다. 물론 배설과 주장만 있는 공허하고 관념적 방식은 아니다. 공업용 미싱으로 광목천을 드르륵 박을 때 작가는 라이더 같은 기분이다. 속도감 있게 재봉틀의 노루발을 밟는 행위 또한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다. 그 압력에 의해 내밀한 속살 같은 솜이 바깥으로 비져 나온다. 



2022, detail_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70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detail_1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75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detail_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75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세상 일과 달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신나게 질러보는 작업의 쾌감에 대해 작가는 옛 여인들의 다듬이질이나 빨래 방망이질 같은 행위와 비교한다. 결혼 초부터 아파트 생활을 해왔던 작가는 두꺼운 이불을 즐겨 덮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가 혼수로 준비해준 모란 무늬 가득한 화려한 이불은 40년 가까이 간직해 왔다. 오래된 이불은 여성들끼리의 대를 이어주는 몸의 연장으로 존재해왔고, 이제야 장롱 깊숙한 곳을 벗어나 공적 소통의 장으로 불려 나왔다. 이전 작품목록에는 모친이 살아 생전에 같이했던 작업 [서명이 없는 예술가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 솜을 품은 도톰한 두 장의 천은 작가의 크고 작은 고민을 받아주는 장이 되었다. 얇고 작지만 솜과 종이, 천과 글자, 문양 등이 함께하는 이 장은 공책 크기부터 깃발 크기까지 다양한 크기를 가진다. 큰 작품에서는 붉은색을 포함한 물감 얼룩 자국이 산재해 있어 천의 치유적 측면을 드러낸다. 


2016년 세월호 사건 때의 전시도 그랬지만, 이영희의 작품 속 치유적 측면은 늘 사회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바느질은 분열된 것을 잇고, 천은 쏟아낸 것을 받아낸다. 노트 크기의 작품들에 여러 종류의 필기구로 써 있는 문장들 또한 심리적인 해소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이러한 치유적 행위가 소통되기를 바란다. 이영희 또래의 여성이 겪는 삶의 압박이 예술적 통로를 거쳐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노동자-예술가들은 그렇게 삶에 녹아났다. 물론 이 상황은 여성만의 것이 아닌 타자화된 모든 주체의 몫이다. 페미니즘은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인 것이다. 전일 노동인 육아와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으로 여성의 문화와 예술을 대신하는 것이 되었다. 현대의 여성은 공적 사적 영역 모두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요즘 60대가 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202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45x12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65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70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하지만 일과 가족 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점에서 진정한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에서의 몰입이 여전히 희망 사항이다. 이 희망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여태 해왔던 것처럼 또 다른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이 이번 전시에 반영되었다. 능력만 넘친다면 ‘호구’라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여성이면서 노인이라는 조건이 이 주제를 더욱 묵직하게 만든다. 이전 작품에서 여성의 몸이 그려진 배접 광목천에는 몸에서 나온 말들로 채워졌다. 천과 종이의 중간 느낌의 판판한 표면이 글자나 자수 문양들이 새겨지는 바탕이 된다. 수 십 년 된 이불의 목화솜이 재활용되었고 황토로 염색한 거즈 같은 천도 올린 배접 광목천을 재봉질한 작품은 누비옷 같은 따스한 느낌이다. 재료 자체와 기법에 온기가 있다. 바느질에 의해 올록볼록한 부조가 되는 배접 광목천은 싸인펜, 유성펜, 수성펜, 잉크펜, 목탄과 파스텔, 심지어는 물파스까지 다양하고 이질적인 재료를 자연스럽게 받아낸다. 


오래된 이불에 있었던 유치찬란한 꽃무늬는 상징적인 꿈을 내포한다. 잉크를 직접 찍어 쓰는 펜글씨는 작가에게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지만, 작품에 담긴 메시지와 연결시켜 본다면 체액을 찍어 쓴듯한 처절함도 있다.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한 엘렌 식수는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모성적 육체와 텍스트의 연결이다. [메두사의 웃음]에 의하면 그동안 글쓰기는 여성의 억압이 재생산되는 장소였다. 성적 차이가 아닌 성적 대립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여성은 자기 말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엘렌 식수는 글쓰기를 변화의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한다. ‘사람들은 여성의 육체를 광장의 불안한 이방인, 환자 혹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줄 것이다’고 말한다.



202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85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2022, Flag for the elderly wemen in ‘Hogu’ detail  70x27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pasting korean paper, cotton, sewing



몸과 언어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만난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글쓰기는 분리된 것들 사이에서의 작업과 연결된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크게 들려오던 ‘발빠짐 주의’같은 일상의 소리를 비롯하여, 토로 형식의 내용도 있지만 독서의 결과물도 있다. 그 출처가 어디든 경전을 필사하듯이 정성껏 쓴다. 작업은 무엇보다도 수행이다. 하지만 이영희의 수행은 관념적이 아니라 역동적이다. 그녀의 필사는 드로잉이나 재봉질과 마찬가지로 손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영희가 구사하는 언어에서 몸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몸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던 페미니즘 저자들의 담론과 접속할 수 있게 한다. 이영희가 혼자 작업실에서 수행하는 바느질은 결코 사소한 사적인 행위가 아니다. 재봉질로 수많은 굴곡을 만들어내고 유성펜으로 쓰고 물파스 바른 글자들은 ‘타들어 가는 가슴처럼’ 번진다. 


작가는 1987년 이래 많은 전시에 참여해 오면서 출판의 형식을 가지는 책자를 동시에 발간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작업에서 쓰기의 비중을 가늠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쓰기의 주체로서 여성-노인을 호명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발언한다. 무엇보다도 공책 크기로 마련된 배접 광목천 작품이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혼수이불이나 농기는 개인적/공동체의 행사 때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옛스러운 것이며, 그래서 상징적이다. 이 오래된 물건들은 여성의 문제가 오래된 것임을 말한다. 농기에 있는 지네 발과 용 꼬리는 천정에 설치한 작품들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 되게 한다. 바닥의 진실을 승화하고픈, 멀리 보내고 싶은 작가의 희망이 남겨있다. 강제된 봉합이 아닌 제대로 된 애도가 엉킨 감정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이영희에게 작업은 무엇보다는 잘 사라지기 위해 푸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사라짐으로서 보다 분명해지는 정체성의 정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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