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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준 / 유한한 형식의 체계와 무한에 대한 직관

이선영

유한한 형식의 체계와 무한에 대한 직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사각형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전시 공간과 그림도 대부분 사각형이다. 이교준의 작품은 이 기본적인 도형의 변주에 바탕 한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그려진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형태도 다양성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아니, 그는 다양함에 대한 실험으로 수직/수평이라는 기본적인 선들로 유희하는 듯하다. 예술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완화 시켜주는 다양성의 거처다. 그 점에서 예술은 자연과 비슷한 반열에 있다. 물론 이교준의 작품에서 자연은 발견되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날 것 같지 않은 평면들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은 아스팔트와 빌딩 숲으로 덮인 도시와 더욱 닮아있다. 이교준 작품의 기본을 이루는 직선은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수평선이나 구름을 뚫고 나오는 빛 등에서 유사한 선이 발견될 따름이다. 추상미술에서의 직선의 위상을 확실시한 작가는 말레비치로 평가된다. 선에 부여한 초기 추상화가의 입장은 현대의 추상 작품에도 참고가 될 만하다.


아론 샤프는 [절대주의]에서 말레비치의 직선이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기하학적 형태가 물질을 지배하는 정신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말레비치는 그것이 공허한 사각형이 아니라, ‘모든 물체의 부재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의미를 잉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 그 자체와 같이 의미 있는’ 새로운 실제들을 창조하려고 했던 말레비치에게 ‘채색된 평면은 곧 살아있는 실재 형태’가 되었다. 말레비치는 ‘우리의 공간은 수평의 고리에 의해 지나치게 억눌려 있다. 우리를 속박하는 수평선을 넘어 확장하는 새로운 우주 공간 연속체로의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여정은 정신주의로 귀결되었고, 그로 하여금 다시금 성모상 같은 이콘화로 돌아가게 했다. 기하적 추상미술은 초창기부터 초월에의 징후를 가지고 있었다. 이교준의 작품 또한 직선적이지만, 말레비치처럼 수평선을 지양하지는 않았다. 


이교준의 작품에서 말레비치가 자연적 요소라고 폄하했던 수평선은 수직선과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요소다. 자연이 아니면서, 또는 (재현을 통해) 자연을 흉내내지도 않으면서 다양성을 펼치기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것을 단순함에서 찾았다. 단순함을 위한 단순함이 아니라, 다양함을 펼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단순함이다. 이 조건을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40년 넘는 화력에서 꾸준히 관철시켜 왔다. 수직/수평은 그자체로도 명증하며 그 위에 놓인 것들의 맥락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이다. 얼마 전 대구미술관에서 그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전시의 부제 ‘Ratio’는 그리스어 logos를 번역한 라틴어라고 한다. 이성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물론 로고스나 이성은 현대만의 관념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로고스는 ‘말씀, 이성, 비율’ 등을 뜻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과 그노시스주의자들은 말씀이란 뜻으로, 철학자들은 이성이나 비율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신앙의 내용을 견고한 인식론으로 뒷받침하려는 투명하고 명석한 스콜라 철학이 그 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이성은 오성으로 격하되곤 했다. 근대 철학자 칸트에게 오성이나 이성은 양적이다. 칸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철학자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해서]에서 순수한 오성개념은 성질, 분량, 관계, 양상이라고 지적하며, 양의 관점에서 이성은 무한히 개념화할 수 있는 크기들의 연속을 추구한다고 본다. 칸트가 제시한 숭고는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추상 미술의 논리를 제공했지만, 숭고뿐 아니라 미 또한 그 역할을 했다. 말레비치나 바넷 뉴만 같은 작가의 기하적 추상이 숭고에 가까웠다면, 좌표라는 한계의 설정에 충실한 이교준의 작품은 미에 가깝다. 숭고 보다 미의 관점에 서 있는 미학은 예술이 가지는 질서화의 능력을 강조한다. 허버트 리드는 [도상과 사상]에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가시적인 세계의 어마어마한 혼돈에 인간의 척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상징적 논리의 발전은 추상적 공간을 생각해 내고 표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외양의 혼란을 정밀한 선적 상징들로 수렴시키는 척도’(피들러)로서 태어났다. 미의 관점에서 예술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신의 의식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행위의 특별한 형식인 것이다. 허버트 리드는 그리이스인들의 예를 들면서, 그들은 언제나 공간을 싸안아 그것을 합리적인 공식으로 수렴시켰다고 지적한다. 로고스에 바탕 한 이교준의 기하적 추상은 작가의 고집이나 취향이기보다는, 그러한 작업에서 발견한 것들이 계속 생겼음을 말한다. 작품의 기본 골조를 이루는 수직 수평선은 차이를 가늠하기 위한 좌표로 다가온다. 좌표는 수학이자 철학적인 개념으로 그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있다. 시오반 로버츠는 한 기하학자의 전기인 [무한 공간의 왕]에서 근대 철학의 출발에 놓여있는 데카르트와 수학의 관계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추론의 확실성과 명료함 때문에’ 수학에 만족했다. 데카르트 기하학은 공간을 서로 직각을 이루는 두 개의 축 사이에 놓았다. 


이 두 개의 축은 수평인 축과 수직인 축으로서의 2차원적인 평면을 형성하고 이 평면에 있는 모든 점은 좌표로 식별된다. 해석 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생각은 그라 바랐던 대로 ‘자연의 보물 창고를 열고 과학 전반의 진정한 기초를 가질 수 있게 할 마법의 열쇄’를 드러내는 꿈으로 다가왔다고 평가된다. 시오반 로버츠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죽기 전에 존재의 모든 측면을 해명하는 완전하고도 포괄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질병의 치료법뿐만 아니라 영생의 비밀까지도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하나의 전능한, 또는 결정적 좌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교준의 경우 작품마다 좌표, 또는 좌표를 설정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며, 그러한 차이들이 각 작품의 내용을 이룬다.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규정하기 위한 좌표가 아니라, 좌표 자체의 다양함이다. 좌표 자체가 없다는 무정부주의적 관점은 아니다.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후 좌표적 정의는 중요해졌다. 


좌표는 진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설정된다는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기하학도 어떤 기하학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에서 우리가 어떤 기하학을 선택하는지는 단순히 편의의 문제이고 규약의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법칙들을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게 해주는 기하학 체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막스 야머에 의하면 순수 공리적 기하학의 체계는 충분하지 못하다. 필요한 것은 추상적 체계의 기하학적 개념들과 물리적 대상들이나 물리적 과정들 사이를 서로 연결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기하학의 선택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경험이라는 주장이다. 직관 뿐 아니라 경험이 중시되는 관점에서 기하학과 예술은 매우 근접해진다. 좌표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실재화 된다. 상징을 실재화하는 것은 과학같은 분야에서는 문제시될 수 있지만, 미술은 다르다. 추상적일수록 구체적인 매개가 필요하며, 예술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예술과 과학은 심미적 차원을 공유한다. 


직관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오반 로버츠는 ‘기하학이란 이 사안에 대하여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과 직관적 느낌, 그리고 전통을 따라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의 일부’(오스월드 베블런)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기하학에서 직관의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형식주의는 이러한 직관을 배제한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수학적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불완전성을 도입한 괴델의 사상을 연구한 저서에서, 형식체계란 직관에 대한 호소를 완전히 제거한 공리계(axiomatic system)라고 비판한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형식주의가 도래한 이후 수학적 선험성과 확실성의 본질은 무의미한 형식체계를 운행하는 일정한 기계적 규칙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과정은 곧 발명될 전자식 기계에서도 복제될 수 있다고 말한다. 괴델 이론의 해석자는 유한한 형식의 체계와 무한에 대한 직관을 대조한 것이다. 수학에서조차 직관은 제거되지도 형식화되지도 않는다는 주장은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에 참고가 될 만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교준의 작품은 완전함을 맹신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추동해 왔던 것은 불완전함이며, 이는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초기 기하 추상과도 다른 지점이다. 모더니즘의 미학적 강령이 매우 엄밀했던 순간 ‘공리’에 가까운 정의가 지배하기도 했다. 엄격한 규범과 연관된 기하적 추상은 구성주의와 구체예술을 거쳐 끝끼지 불편했던 예술이라는 단어를 빼고 장식이나 디자인 등, 실용 부문으로 해소된다. 이교준은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자는 사용하지만 손수 긋고 측량하고 칠한다. 기하적 화면이어도 미세한 물성은 발견된다. 보일 듯 말 듯 그어진 선부터 3차원으로 튀어나올 듯한 입체적 사각형까지, 붓질의 흔적부터 경계의 극한까지 나아간 색 면까지 작가의 현존은 분명하다. 특히 선을 넘지는 않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칠해진 평면은 공간적 명료성 속에 시간성을 개입시킨다. 가령 1995년에 제작된 작품 [무제]는 연필 선을 보이게 하고 구획된 면을 칠한 경우인데, 연필 선 가까이까지 섬세하게 칠한 흔적들이 보인다. 


1998의 작품에는 구획된 사각형을 채우는 수채물감 자국이 남아있다. 붓질이 남아있는 화면에 내재된 시간적 요소는 서사와 관련된다. 하지만 기하학적 선과 면들의 조합과 유희가 있는 그의 작품은 큰 이야깃거리, 요컨대 자연이나 역사, 사회는 발견되지 않는다. 1980년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퍼포먼스에 찍혀 나온 자신의 모습, 또는 신체의 일부를 빼면 개인의 흔적도 미미하다. 재현도 표현도 아닌 극히 절제된 익명적인 작품들은 작품의 의미를 바깥에서 접근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추상미술의 특징을 공유한다. 마이어 샤피로는 추상미술에서 미적인 것의 자율성과 절대성이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평가한다. 이미 19세기 말에 회화에서의 평면성의 회복을 비평가들은 ‘회화가 순수성을 회복’이라고 설명하였다. 아폴리네르는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물을 표현하는 미술, 그것이 곧 순수미술’이라고 정의하였다. 


회화가 3차원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화가가 자신의 회화 수단에서 표현적 가능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때 캔버스는 중성적인 바탕이 아니라 적극적인 형식이자 내용으로 부각된다. 이교준의 작업에서 캔버스를 지탱하는 수직/수평은 중요한 형식적 요소다. 화면 위뿐 아니라, 얇은 리넨 천에 비춰지는 틀 또한 작품의 표면에서 상호작용한다. 화이트 큐브에 반듯반듯하게 전시된 작품들도 계산과 제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대개 관객은 차가운 메커니즘의 사회에서 억압된 내밀한 무엇을 예술에서 기대하는데, 이교준은 이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하지만 다양성이 가능하기 위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작가의 태도는 여전히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예시한다. 1980년대 초, 1955년생의 청년이 장발에 두꺼운 뿔테 안경, 그리고 ‘난닝구’라고 불리는 차림새로 강가 같은 곳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행위 하는 장면에 남아있을 따름이다. 


물론 작품의 배경으로 함께 찍힌 강가의 풍경이나 장소를 에워싼 공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여러모로 빈곤하고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온 이교준의 작업에는 놀라울만큼의 일관성이 발견된다. 수직/수평을 기본 축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기하적 추상도 평면을 구획하는 수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지 보여준다. 절제와 질서감이 두드러지지만, 시리즈 형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에는 순열과 조합의 극한이 펼쳐진다. 순열과 조합이라는 개념은 본질이 아니라 차이에 기초한다. 이러한 사유를 조형 언어를 포함한 언어까지 확장하면 단어는 사물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얻는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언어에 대한 현대적 관점을 미술에 적용한다. 그에 의하면 재현이란 그 안에서 경험이 발생하는 공간 배열, 곧 어떤 형성, 모형, 추상적인 기하학이다. 그 안에서 너와 나와 같은 주체와 이것과 저것과 같은 대상이 존재하며, 그러한 배열 안에서 이들 개념은 공간에 대한 어떤 효과나 차이로서 존재한다. 


수직/수평은 무엇보다도 차이적 관계다. 수직/수평 뿐 아니라 그 사이, 즉 허공과 그림자의 유희 또한 가세한다. 시리즈별로 제작된 작품에서는 잠재적인 동감이 있다. 이교준의 작품에서 잠재적인 또는 명시적인 수직/수평은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현대적 공간에서 보편적인 현실이다. 도시에 있다면, 조금만 의식하고 봐도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수직/수평이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살고자 할 때 수직/수평으로 이루어진 상자같은 건물은 필수적이다. 가구는 물론 빌트인 가구 또한 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최적화된 구획에 맞춰져 있다. 낡은 아파트의 반 지하층에 자리한 작업실에는 얼마 전 대구미술관에서의 작가의 40여년 작업을 돌아보는 큰 전시에 출품된 140여 점의 작품들을 빼고도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화면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반성과 실험이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은 손수 제작된 것이며, 바닥에서 수직으로 서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리라.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은 정보가 질서 있게 쟁여지는 기본 방식이 수직과 수평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집적은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기본 좌표를 형성하는 수직/수평은 가장 경제적이며 투명한 형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좌표가 경제적이거나 기능적이기만 하다면 보편적이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나 나침반, 시계 등등 정신적이거나 시공간적 기준점을 설정할 때 수직/수평은 필수적이다. 추상에서 수직/수평의 어법으로 가장 유명한 작가는 몬드리안이다. 몬드리안의 경우 색채와 형태의 추상, 다시 말해 직선과 명확히 한정된 3원색 안에서 그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기본요소들을 통해 ‘우주적 관계를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그럼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안나 모진스키는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몬드리안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처럼 예술이 고차원의 리얼리티, 혹은 자연을 초월하는 진리를 반영하기 원했다. 말레비치에게서도 선명했던 유심론(唯心論)적 경향이다. 


미술사는 몬드리안이 수직/수평에 부여한 의미가 신지학(神智學)에서 왔다고 정리한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에 의하면, 몬드리안은 신지학자 블라바츠키가 하늘의 수직성(활력성, 남성의 원칙)과 그와 동등한 땅의 수평적인 지평선(평온성, 여성의 원칙)을 언급하면서 직각의 이론을 설명했을 때, 이에 크게 공명한다. 이 두 개의 선이 상호교차하여 만들어 내는 십자가는 생명과 불멸에 대한 유일하고 신비적인 개념을 나타냈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역동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모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몬드리안의 수직, 수평선의 교차 형식은 평형을 유지함으로서 궁극적 보편자의 형식을 그려낸다. 알랭 봉팡의 [추상미술]에 적힌 표현에 의하면, ‘시간이 멈추고 모든 소음이 중단되며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도 없는 세상인 유토피아’이다. 이를 통해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보편적 언어의 실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반 되스부르크)이었다. 


이교준의 작품에서 수직/수평은 환원이 아니라 확장적 요소로 작동한다. 모든 것을 수직/수평으로 환원할 수 있거나 그래야 한다는 것은 관념론이다. 수직/수평을 비롯한 이항 대립은 조화보다는, 궁극적으로 피차 다를 바가 없는 양측의 영원한 공방전일 따름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킨다. 기본적인 좌표의 투명성은 점점 더 사라져 간다. 이교준은 바로 이 보이지 않은 좌표를 의식한다. 미술 또한 캔버스라는 수직/수평의 구조물에서 시작한다. 관객은 그림의 표면 즉 화면을 보지만, 그 화면이 가능하기 위해 틀이 있어야 하고 이 틀 위에 팽팽하게 당겨진 면이 있어야 한다. 화면에 무엇인가 그려지기 전에 화면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조건은 현대미술가들의 관심사였다. 바깥으로 뚫린 창이나 전방을 반영하는 거울도 그러한 틀이 작동한다. 현대미술은 재현이나 반영을 거부하는 가운데, 캔버스 틀 자체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교준의 경우 틀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틀은 이제 가장자리가 아니라, 작품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현대미술에서 틀 자체를 문제 삼는 경항은 결국 그림의 ‘종말’을 가져왔지만, 이교준의 작품에서 붓질을 비롯한 손작업의 흔적은 선명하다. 얼마 전 전시의 부제 ‘Ratio’처럼, 그의 작품은 감성보다는 이성에 바탕하지만, 철저히 손과 직관에 의지할 뿐, 기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2022년에 제작된 최근 작품은 그동안의 실험이 보다 깔끔한 형태로 가시화 된다. 작품 [무제 22-01](2022)는 가운데 사각형을 구멍을 뚫은 겹치는 사각형들의 형태인데, 여러 색의 버전이 있다. 화이트 버전에는 캔버스 틀이 하얀 리넨 천에 좀 더 두드러지게 비춰진다. 창문을 닮은 캔버스 틀은 재현주의에 충실했던 회화의 마지막 흔적을 보여준다. 가운데의 창구멍으로 보이는 화면 너머에는 전시장 조명 조건에 따른 그림자가 자리하여 복합적인 광학적 효과를 자아낸다. 


사각형 안의 또 다른 사각형들, 구멍 뒤로 덧댄 또 다른 표면은 조명 환경에 따라 명도가 달라지는 그림자들을 담아낸다. 정교하게 그려넣은 그라데이션 같은 그림자가 그려진 화면과   상호작용한다. 같은 크기로 시리즈로 제작되는 방식은 동질이상(同質異像)의 상황을 늘려나간다. 색칠한 캔버스에 알루미늄판을 붙이는 등의 복합매체 작품에서는 재료의 높이를 달리해서 그림자 또한 화면의 변주에 활용한다. 흰 리넨 천에 약하게 비춰지는 캔버스 틀과 화면 위에 그어진 색 선이 함께 작용하여 추상적인 원근감을 형성한다. [무제 21-03](2021)은 흰 리넨 천에 비치는 뒷면의 캔버스 틀이 주요 형태를 이룬다. 아크릴로 칠해진 선은 마치 틀처럼 외곽을 둘러친다. 그의 작품의 기조는 분할된 면과 그것을 채우는 평면적 색이다. 직사각형 패널에 내재된 4x4열의 보이지 않는 선은 여러 색면들이 형태와 바탕을 견주면서 배열되는 축이 된다. 작품마다 색의 선택과 배치가 다르다. 관객은 작품의 기본 단위를 이루는 큐브를 상상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볼 수 있다. 


2016년에 면천에 아크릴로 칠해진 시리즈에는 사각형으로 화면의 가장자리와 중심을 찍은 것들이 있는데, 작품마다 사각형 점이 여러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들은 운동감이 있다. 물감을 묻혀 찍은 사각형들이 수직/수평의 축을 따라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여러 색으로 자유롭게 화면 분할 한 작품들은 건축적 구조를 가진다. 무제라는 중성적 제목으로 일관하지만, 간혹 관객이 상상력을 전개할 수 있는 약간의 단초를 제공해 주는 제목도 있다. 작품 [창문](2012) 시리즈는 마치 창문의 구조를 무한하게 확장하는 듯한 평면이다. 테를 두른 색 면 위에 같은 비율로 구획된 선들은 추상적인 원근감이 있다. 최근 작품은 하얀 리넨 천에 섬세한 작업을 하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의 작품에서는 철 프레임에 합판, 납 판까지 거친 재료를 사용했다. 색도 모노 톤으로 칙칙하지만, 서양 장기판같은 화면부터 가로로 구획된 화면까지, 여러 가지 화면 분할이 있는 것은 연속적이다. 


그 시기에는 선 하나도 상감기법을 사용하는 등 금속 재질의 물성을 활용한다. 합판으로 짜여진 박스형 작품은 정사각형 안에 또 다른 면의 조합을 극대화하여 벽에 설치한다. 대구미술관 소장작품인 [빈공간](2011) 시리즈는 정사각형 박스 안에 다양한 방식으로 수직 수평의 합판을 교차하여 이어서 설치한다. 가운데 빈공간이 있다. 아크릴로 칠한 정방형 박스도 있다. 여러 겹으로 교차시킨 합판은 블랙/화이트의 배치 외에 그림자도 가세한다. 빈공간이라는 제목은 공간을 주변이 아닌 중심의 요소로 간주했음을 알려준다. 막스 야머는 [공간 개념]에서 모든 사물이 공간 안에 있지만 공간은 다른 것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 공간의 독특한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공간의 둘레들은 무한한 허공 자체이다. 공간의 물리적 성질은 공간 안에 있는 물체들에 경계나 한계를 정해주며, 이 물체들이 무한히 커지거나 작아지지 못하도록 한다는 성질이다. 


허공은 운동 가능성에 필요한 가정일 뿐 아니라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는 생성과 사멸의 과정을 설명해준다. 이교준의 작품은 빈공간 뿐 아니라 프레임이라는 부차적 요소 또한 중심에 놓는데, 이러한 관심은 1980년대 초기작부터 보여진다. 흑백 사진에 담긴 작품 [프레임 너머](1980)에는 탁 트인 넓은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프레임을 받치고 서 있는 작가가 보인다. 사진 자체가 프레임이다. 1년 후의 작품에는 사람 대신에 통나무가 보이지 않는 프레임에 기대어 서 있다. [무제](1981) 시리즈는 사진 프레임 바깥에 있는 돌멩이가 사진 안의 돌멩이가 한 작품에 공존하면서 틀에 대해 의식하게 한다. 틀의 안과 밖에 대한 사유는 미술 형식을 넘어선다. 이교준의 작품은 화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제시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안을 넘어선다. 내부로부터의 밀도 있는 실험은 경계에 대한 의식을 날카롭게 고양하면서, 바깥을 작품 한 가운데로 들여온다. 


출전; 데이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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