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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란 / 겹쳐진 시공간 속의 인간과 사물

이선영

겹쳐진 시공간 속의 인간과 사물

  

이선영(미술평론가)



여러 공간이 겹쳐있어 다채로운 최혜란의 작품은 많은 이미지가 다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불연속적인 시공간의 이음매가 자연스럽다. 최초의 소재는 현실이어도, 그 현실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은 출렁이는 얇은 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장면이나 자신이 손수 찍은 장면이 아닌 것을 그리지는 않는다. 상상은 현실 이후에 발생한다. 작품 속 인물이나 사물은 도시나 자연같이 대부분 공적 공간에 존재한다.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감도는 작품들은 개인의 내밀한 공간이 아니라, 공공영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들이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세계에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불연속적 공간을 간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작품 속 인물 또는 사물의 시선이나 머리의 방향이다. 보고 보이는 시각의 교환 속에 사회적 인간이 있다. 현대 심리학은 사회적 시각을 설명하는 기구로 거울의 예를 든다. 



최혜란, Relocation_37, oil on canvas, 40.3×75 ㎝, 2021



최혜란, Relocation_38, oil on canvas, 40.3×75 ㎝, 2021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내적 성찰을 일구는 도구로 쓰이기 전에 거울은 먼저 외관을 가꾸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그것은 사회적 적응과 조화의 도구였던 것이다. 보네는 ‘나는 보여졌다. 고로 존재한다’고 까지 말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외관, 역할, 인정을 거치면서 주체의 위상에 이르는 길을 조건 짓는다는 것이다. 보네에 의하면 평판이란 일종의 메아리, 거울의 반사상 같은 것으로, 실재와 반사상은 상호적으로 서로를 지탱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카페나 백화점, 유원지 등에서 그들의 여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 간에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만큼의 사회적 유대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은 한 공간에 있는 듯하지만 얇은 막의 구별에 의해 분리된다. 인간은 인간보다는 그 주변의 마네킹 같은 사물과 더 교감하는 듯이 보인다. 가짜는 자신의 지위를 감추기 위해 더 진짜인 듯하다. 인물 묘사의 경우 초상권 등의 문제가 있기에 실제의 이목구비의 생김새 등은 변형한다. 


사람이지만 목각인형과 다를 바 없다. 작가는 인물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인물이 들어간 공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일단 보여진 단면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선택한다. 없을지도 모를 순수한 본질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이미 현대적 시각 환경은 수많은 매개를 거치는 간접적인 것이다. 작품에는 보고/보여지는 관계 속의 사회적 존재들이 자리한다. 거기에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각 체험이 내재한다. 이미지를 수집하는데 사진을 활용하는 것도, 그림에 굳이 사진적 시점을 숨기지 않는 것도 사진에 기대되는 바의 객관성을 깔고 가는 것이다. 최혜란은 사진기를 늘 가지고 다닌다. 의식적인 선택뿐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 사진의 무의식적 공간도 활용한다. 사진에는 의도치 않은 것들 또한 함께 딸려오며, 이러한 세부는 색다른 조합에 요긴하다. 현실에서 취한 이미지에서 약간의 조율이 따를 뿐, 의도적으로 연출된 상상은 지양된다. 작가가 직면한 현실의 복잡도를 증가시켜가는 과정에서 출발부터 느슨할 필요는 없다. 



최혜란, Relocation_28, 29, 20 전시 전경



최혜란, Relocation_29, oil on canvas, 162.2×130.3 ㎝, 2020



최혜란, Relocation_33, oil on canvas, 116.8×91 ㎝, 2020 


현실에서 현실로, 환상에서 환상으로의 단순 이동이 아니라, 상호적 교차가 중요하다. 이러한 교차는 작가가 즐겨 하는 시각적 게임에 속한다. 명백히 보이는 것들의 허상적 측면이 강조된 작품들은 현실에서 선택한 것들을 다시 배치한 것이다. 가상현실에 대한 비중이 더욱 높아지는 현대에 회화를 비롯한 전통적인 매체는 도전받고, 대신에 이미 주어진 것들의 선택과 배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브 미쇼는 [예술의 위기]에서 배치가 하나의 경험을 낳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의 복제문화에서 본질은 사라져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기계 복제의 가능성은 작품 고유의 아우라, 즉 ‘유일한 시간과 공간의 짜임’를 파괴한다. 이브 미쇼는 우리는 아우라가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고 진단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속박 속에서 자유롭고 계보나 전통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으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별한 맥락 또한 상실하게 하는 복제 가능한 작품에 대해 논한다, 


현대미술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미술에서의 아우라를 대체하는 흐름이 있어왔다. 이브 미쇼는 뒤샹의 레디 메이드의 예를 들면서, 예술은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을 규정하는 절차들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작품보다는 그 맥락, 즉 미술 제도를 더 중시하는 흐름을 낳았지만, 그것이 꼭 개념미술의 형식일 필요는 없다. 시각성을 실험하는 회화를 통해서도 추적될 수 있다. 실제로 대형 유리창에 난반사되는 도시의 모습에서 환상적 풍경이 발견되곤 하며 최혜란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최근에도 발표되는 [Relocation] 시리즈의 초기작품(2012-2014)에는 카페의 창에 비치는 안과 밖의 풍경들을 비롯해서, 거리의 대형 유리창에 다층적으로 맺히는 상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반사하는 유리막은 관객들의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유리막 안의 공간들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이미지 중첩을 통해 프레임 안팎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이를 통해 ‘공간을 확장한다’고 말한다.



최혜란, Relocation_34, oil on canvas, 40.9×53 ㎝, 2021



최혜란, Relocation_32, oil on canvas, 53×40.9 ㎝, 2020



최혜란, Relocation_35, oil on canvas, 97×145.5 ㎝, 2021



최혜란, Relocation_26, oil on canvas, 80×200 ㎝, 2018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압축 렌즈로 안경알을 만드는 것처럼, 적게는 3겹 많게는 10겹까지 쌓이는 층들은 또 다른 현실을 비춘다. 이 또 다른 현실의 시점은 모호하다. 그것은 지나간 추억일까, 현재일까, 소망하는 미래일까. 이 고무줄 같은 시점은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상대성과 비교될 수 있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미술과 물리의 만남 Art & Physics]에서 현대미술의 압축적 공간과 현대물리학의 관점을 비교해서 서술한 바 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시각과 비교하면서, 관찰자가 고속의 기차를 타고 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제시한다. 만약 그 기차가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공간은 무한히 얇아질 때까지 공간의 축을 따라 압축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한히 얇게’는 그것이 사라져 왔다는 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이러한 시각의 구체적인 예로 제스퍼 존스의 [0에서 9까지](1961)를 든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0에서 9까지의 숫자들이 한 화면에 동시에 담겨있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모든 순간들의 진행이 동시에 이해될 수 있는 시간은 한가지 상태밖에 없는데 그것은 광선 위에 걸터앉아서 세상을 바라볼 때라고 말한다. 빛의 속도에서는 모든 물체들은 직선 줄 위에 서로 단조롭게 염주 모양처럼 꿰어져 있지 않고, 제스퍼 존스의 숫자들처럼 동시에 보여지도록 서로 겹쳐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근대 미술가로서는 모네의 예가 제시된다. 레오나드 쉴레인에 의하면, 모네는 시간의 쉼 없는 강을 한 이미지에 담고 싶어 했다. 모네는 연속적인 캔버스를 사용했으며 뒤샹은 연속적인 순간들을 서로 겹쳤다. 이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예술작품의 과거의 잔영을 인식하고 현재의 일반적인 희미한 안개를 통하여 얼핏 보게 만든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혜란의 겹쳐진 이미지들을 보자면, 레오나드 쉴레인이 모네나 제스퍼 존스의 작품을 그렇게 해석했듯이 광속에 비유될 만큼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과 관련된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최혜란, Relocation_25, oil on canvas, 90.9×60.6 ㎝, 2017



최혜란, Relocation_2, oil on canvas, 130.3×89.4 ㎝, 2012


실제로 전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거의 동시적으로 연결돼있다. 최혜란의 작품은 투명도를 다르게 하기에 층마다 미묘한 차이가 난다. 작가는 비대면 문화로 대세가 될 이미 다가온 현실에서 메타버스처럼 다층적인 시공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림을 주로 그리지만, 작업 과정에 컴퓨터 작업이 필수이기에 디지털 시각문화의 관습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2010년대 초의 작업에서는 핸드폰 이미지를 나무 액자 안에 담긴 캔버스 그림처럼 그리기도 했다. MDF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핸드폰 화면을 그린 것인데, 핸드폰에 사람이 비춰지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가 거울이나 창, 액자 같은 관습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탐구이다. 거울처럼 사용되는 스마트폰은 거울 흉내를 넘어선다. 사용자는 사이버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의 흔적을 끝없이 뒤쫓는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언제든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미디어 기기가 편재할수록 거울은 많아지는 셈이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반사상이 많아지면 주체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분산하고 흔들어놓는다고 본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거울에서 체험되듯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신기루처럼 붙잡고 그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성으로 환상이 조금씩 자리를 넓힌다는 것이다.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거울의 메커니즘에 의해 결국에는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보네의 주장이다. 현실에 가상이미지를 겹치는 증강현실이나 사물끼리 소통하는 사물인터넷 기술 등은 이미 와있는 현실이다. 콜린 엘러드는 [마음을 지배하는 공간의 비밀 places of the heart]에서 기술의 발달은 무엇이든 디스플레이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고 하면서, MIT 시각 미디어 연구소의 조셉 파라디소의 말을 인용한다; ‘광자가 곧바로 망막에 맺혀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보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질 수도 있다. 환경은 실제 보이는 이미지와 가상이미지의 조합이 될 것이다’ 



최혜란, relocation_13, oil on canvas, 117×182 ㎝, 2013



최혜란, Relocation_18, oil on canvas, 97×162.2 ㎝, 2014



최혜란, Relocation_22, oil on canvas, 32×32 ㎝, 2016,


하지만 비트와 픽셀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미디어 환경이 인간에게 우호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콜린 앨러드는 SNS의 예를 들면서, 미디어 관련 기업들은 ‘우리가 제공한 정보를 추적하고 관찰하고 자체적으로 빈틈없이 적정한 알고리즘으로 필터링하며, 심지어 우리를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하여 네트워크를 수정하고 수익을 낼 목적으로 우리의 일상에 최대한 파고든다’고 의심한다. 최혜란의 작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하며, 마네킹이나 인형 같은 무생물은 훨씬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모습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어떤 힘이 감지된다. 이러한 시대에 회화는 물질과 육체적 감각이 저장되어 있는 영역으로, 디지털 제국주의에 대한 길항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혜란의 작품은 간접적인 이미자를 많이 활용한다. 최초의 현실은 어딘가에 비춰지고 사진으로 찍혀지며 다른 장면들과 불연속적으로 합쳐진다. 


작가가 ‘유령의 막’으로 부르고 있는 투명도를 달리한 각각의 시공간은 한 장면처럼 절묘하게 다시 짜여진다. 미술사적인 전거로서는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1882)나 마네가 존경했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처럼, 액자, 거울, (창)문에 의해 복잡한 시각의 유희가 있는 작품들이 있다. 각각의 맥락을 맥락 떼어내 조우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 미학을 따른다. 분석적인 관객은 양파껍질 까듯이 화면을 나누어볼 수는 있겠지만, 작가가 장면들을 기계적으로 겹쳐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쉽지는 않다. 최근 작품에서는 더욱 그런데, 언뜻 실제의 한 장면 같은 최초의 인상을 배반하는 것은 복잡다단해진 현대적 시각환경과 관련된다. 그것은 대중의 관심을 기대하며 쏟아지는 수많은 이미지로 과포화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러한 환경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 또한 담겨있다. 근대 이후에 화가는 더 이상 자명한 직함은 아니다. 회화 또한 마찬가지다. 



최혜란, The Virtual Reality Area, mixed media, installation, 2020_



최혜란, The Virtual Reality Area, detail 2



최혜란, The Virtual Reality Area. detail 1


소비사회의 물신적 시스템에 의해 극소수만 조명받는 회화나 화가에 대한 정체성의 확보는 순진한 믿음이나 희망 고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특히 영상이 대세가 되는 대중문화에 대해 작가는 ‘영상에서 강요받는 시선’을 문제 삼는다. 최혜란의 작품은 영상이 시간의 축을 따라 펼치는 것을 공간을 통해서 하는 셈이다. 공간예술인 회화는 시간예술인 영상에 비해 정적이지만 다층적인 시공간을 공존하게 함으로써, 영상이라는 지배적인 시각 관습과는 다른 순서로 이미지를 읽게 한다. 다른 순서에 따라 각기 다른 상상이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 최혜란의 작품은 정보혁명을 통해 더욱 복잡해진 현대의 시각 환경을 염두에 둔다. 20세기 초부터 현대미술에서도 콜라주나 몽타주 같은 방식으로 현대적 환경을 반영해왔지만, 작가는 오려 붙이기보다는 면을 겹친다. 입체작품에서 집합된 면들은 보다 가시적이다. 설치 작품에서는 반투명한 재료의 평면들을 오려 공기의 흐름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그림을 입체로 벌리면 설치 작품이 되고, 설치 작품을 압축하면 그림이 된다. 최혜란의 작품에서 양자는 호환성이 있다. 가변 설치 작품 [The Virtual Reality Area]에서는 투명한 줄에 매단 각각의 장면들이 3차원 공간에서 마주한다. 작품 [The Virtual Window_1]는 32.2×32.2㎝ 크기의 아크릴판에 담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작품 [Reflected in the Virtual circle_6]처럼 원형 틀의 집합도 있다. 창(Window)은 장(Area)으로 확장된다. 가변 설치 작품 [The Virtual Reality Area]에서는 다양한 모양으로 오려진 오렌지색 반투명 판이 야외의 나무에 모빌처럼 달려있다. 작가는 줄에 매달려 있는 하나의 면이 하나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나무 기둥에도 수많은 공간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실내에 설치되는 경우 전시장 벽에 떨어지는 그림자도 다채로운 효과를 발휘한다. 겹침은 뜻밖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접거나 구기거나 구멍을 뚫는 방법도 있지만, 작가는 면과 면의 만남이라는 방식을 고수한다, 



최혜란, The Virtual Window 전시 전경



최혜란, The Virtual Window_1, Mixed media, 32.2×32.2 ㎝, 2020


작가의 직관에 의해 구별되는 현실이 수시로 만나는 것을 통해 시각적 효과와 의미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서사는 순간적이다.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없다. 순간적으로만 가능한 익명적 사회관계 속에서 전통같이 유유히 흐르는 서사는 가능하지 않다. 언뜻 한 장면처럼 보이는 눈속임이 있지만, 이내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겹쳐 만들어진 또 다른 시공간에서 미로와도 같은 연결망이 생성된다. 얇게 겹쳐진 면들 사이에 쑥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보인다. 관객은 이 복잡한 지형도에서 길을 잃지만, 낯선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주는 기회를 향유한다. 특히 마네킹이나 인형 같은 사물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조우하는 듯한 광경이 흥미롭다. 일련번호가 다르게 매겨진 [Relocation] 시리즈는 인간과 마네킹이 만나고 심지어는 상호 변신하는 듯한 모습이 있다. 마네킹과 사람이 근접해 있을 때 그런 효과가 두드러진다. 


작품 [Relocation_34]에서 금발 여성이 마주하는 듯이 보이는 마네킹이 자연스러운 것은 도시 환경이 주로 쇼핑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마네킹 뒤로 보이는 여성은 곧 마네킹 같은 사물로 변신할 듯하다. 작품 [Relocation_26]에서 쇼윈도를 바라보는 듯이 배치된 남성은 마네킹이 입은 옷을 곧 입게 될 수도 있다.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기표에 의해 구성/해체된다. 이러한 동일시가 아니라면 현대 소비사회가 유지, 발전되기 힘들기에, 사물과 인간의 혼동은 고무되며 편재한다. 작품 [Relocation_32]에서 장난감이 가득 진열되어있는 쇼핑몰에서 아이들이 모인 듯한 배치에서 아이와 인형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작품 [Relocation_25]에서 소풍 나온 아이들이 있는 공간 속의 마네킹이나 인형은 보다 자연스럽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품 [Relocation_29]에서 마네킹은 서로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듯이 보인다. 



최혜란, Reflected in the Virtual circle_6, mixed media, Ø55 ㎝, 2019


작품 [Relocation_26]에서 마네킹들은 전신으로 등장하여 지나가는 사람들과 뒤섞인다. 마네킹에서 인간의 영혼이 나오기도 하고 인간이 마네킹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으젠 앗제(Eugene Atget)의 사진이나 드 기리코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 같은 마네킹은 초현실주의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사물과 인간의 지위가 대대적으로 바뀌어 가는 시대의 풍경이 21세기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물과 인간은 동렬에서 섞인다. 더욱 인간화되고 있는 사물과 더욱 사물화되고 있는 인간이 불연속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공간에서 만난다. 외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물 중의 하나인 마네킹이나 인형이 서구인의 신체 규범에 맞게 제작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가는 인간과 사물에 극적인 차이를 두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경은 인간이 물화 되는 비판받아 마땅한 사회적 현실이지만, 최혜란의 작품은 철저히 중립적이다. 하지만 작가가 선택한 장면들이 완전히 무작위적이지는 않다. 


작가는 늘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조합되어 어울릴만한 시각적 레퍼토리를 찾는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복잡하게 짜여진 풍경의 그물망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이끄는 일종의 안내자가 된다. 요즘 작품은 이전보다 인물이 부각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배경이 단출해졌지만, 층을 겹쳐서 화면을 만드는 것은 연속적이다. 다양한 레이어의 중첩은 독특한 원근법을 낳는다. 미술에서의 재현은 르네상스 이후에 확립된 원근법을 따르지만, 일점 원근법 자체가 가상적이다. 원근법은 내파되어 자신의 가상적 측면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관객과 가까이에 있지만 뚜렷하지 않고, 맨 뒤에 있지만 경계가 선명하지만은 않다’고 하면서, ‘작품 가장 바깥쪽에 있는 투명한 유리막은 이러한 원근감을 이루는 이유가 되고 유령처럼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것은 어떤 매체를 사용하던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확장된 시각과 시야를 표현하려는 것’(최혜란)이다.


출전; 호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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