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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 바닥을 일으켜 세우다

이선영

바닥을 일으켜 세우다

김정우 전(2021. 9.24—10.8, 고색뉴지엄)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정우 전이 열렸던 고색뉴지엄은 폐수처리장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으로 근처에는 공장들이 많이 있다. 코로나 국면이 아직 진행 중이어서일까, 한낮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문 공장지대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고층아파트 등으로 재개발되었을지도 모를 산업화 시대의 유물은 그렇게 살아남아서 삶과 예술의 관계를 묻는 청년 작가의 발표의 장이 되었다. 작가는 미술관급의 너른 전시장은 물론, 본 전시장 측면의 복도까지 활용하여 최근 작품들뿐 아니라 이전의 작품까지 가득 걸었다. 자리가 모자라서인지 기둥에 걸쳐 놓거나 접이식으로 설치해 놓기도 한 평면들도 보인다. 메인 공간에서는 신작인 [등가교환] 시리즈들이, 가장자리 공간에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의 만들어진 작품들이 함께 전시됐다. 노출 콘크리트를 살린 실내는 벽 또는 바닥의 마감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김정우의 작품과 어울렸다. 너른 공간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어울림보다는 경쟁처럼도 보였다. 





전시전경


실제의 벽과 바닥은 다른 스타일, 즉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진 평면으로 온통 뒤덮여야 했다. 그것은 동일 인물이 같은 재료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것이지만 어떤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 차이는 가치의 문제다. 작가는 이번 전시 [등가교환]을 통해 작업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가치는 어떻게 책정되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점차 확대되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짓고 있는가’까지 묻게 된다. 예술작품 발표를 통해 제기되는 가치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에 한정될 수는 없다. 가치는 보다 광범위 한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술적 접근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에서 여러 가치를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경제적 가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의 정도. 특히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얼마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에 의해 측정되는 욕망의 정도’이다. 


사회학적 가치들은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며 타당한 것들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경제 사회적인 차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술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분류에 의하면 언어학적 가치에 속한다. 언어학적 가치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인한 개념으로, ‘의미상의 차이를 낳는 최소한의 차이’로 규정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의하면 차이에 대한 이론은 사회를 개인들과 연결시키고 의미를 욕망의 문제로 번역함으로써 양자 간의 간극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가치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분배하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결론 내린다. 이러한 분배의 문제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가늠된다. 인류학에 비해 현대미술사의 대답은 빈약하다. 작가는 노동 현장에서 사용했던 재료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왔지만, 물리적인 성질은 변하지 않고 단지 관념적 성격이 변화함을 주목한다. 






전시전경



그것은 개념미술의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나 행위를 예술작품이라고 인정받아서 그것이 가치로 교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술계’(아서 단토)의 인정이라는 동어반복적 의견이 있다. 아서 단토가 헤겔의 ‘역사의 종말’을 참고삼아 ‘예술의 종말’을 말하는 부분은 어색하지 않다. 물론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은 미학의 오랜 근거가 되었던 미메시스 이론의 근거인 내러티브의 종말을 말하며, 이러한 ‘종말 이후’를 통해서 예술은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예견으로 요약되지만, 종말에 대한 관념 또한 결국은 내러티브다. 결국 현대미술사는 빈약해 보이는 외적 결과물을 대신하는 다양한 이론적 담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개념미술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언어이론에 기반한 엄격한 철학적 결론치고 너무 싱거운 ‘예술 제도론’(조지 디키)적 관념은 결국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형식주의의 한계이다. 


김정우의 작품이 취하는 형식인 추상미술 또한 미메시스를 벗어나려는 미학적 운동으로 발생되고 지지된 유파였지만, 그 또한 이론적 담론으로 가득하다. 설사 추상미술이 내러티브로부터 벗어났다 해도 그것이 미학자들의 예견대로 자유인 것은 아니다. 현대예술이 극복하고자 했던 미메시스, 즉 재현은 결국 개인의 의지와 열정, 노동이 얼마만큼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미메시스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은 빙빙 돌기만 할 뿐 결정적 대답은 영원히 유예된다. 예술은 이러한 대답 될 수 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장임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공장지대 산업사회의 흔적을 문화적으로 보존한 장소는 노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기에 적당해 보인다. 지하에 자리 잡은 전시실, 복도에 그대로 노출된 배관까지 거칠고 야생적인 공간은 수원 외곽의 공장 밀집지대라는 분위기를 또 한 번 떠오르게 한다. 




등가교환_163x130cm_패널에 혼합재료_2021



등가교환9_91x91cm_패널에 혼합재료_2021



등가교환18_91x65cm_패널에 혼합재료_2021



등가교환36_130x130cm_패널에 혼합재료_2021



김정우의 작품들은 칸딘스키나 폴록같은 ‘뜨거운 추상’에 속하지만, [등가교환]이라는 딱딱해 보이는 경제 용어는 작품이 밥으로 교환되지 못한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과 불만, 희망 사항 등이 담겨있다. 작품을 팔지 못하는 작가가 그러하듯 그도 노동력을 팔아왔다. 마침 작품 스타일과 노동 현장에서의 일이 비슷하다 보니 양자의 관계는 더욱 의문시되었다. 아니, 그러한 질문을 작품을 통해 하기 위한 선택이 강하다. 넓은 전시실은 물론이고 복도까지 가득 채운 그의 작품들은 그가 거의 노동 하듯이 열심히 작업해온 작가임을 알려준다. 김정우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벽화, 도색, 조형물 제작 등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며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예술이 대체 무엇인지, 왜 이것을 나는 지속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한다. 이 근본적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벽에 직면에서 어떤 이는 예술만은 순수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수주의를 끝까지 지켜나가기는 힘들다. 분열은 자본주의의 정신적 물질적 조건이 되었다. 김정우의 [등가교환] 전은 다르다. 무엇과 무엇이 등가이며, 교환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예술은 하나의 항목으로 설정된다. 그는 노동과 예술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 일부러 같은 재료와 상당히 비슷한 작업 과정을 관철시켰다. 작가는 ‘노동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진 롤러질과 붓질들을 통해’ 작품을 제작했다고 밝힌다. ‘시멘트를 반복적으로 긁어대며 노동행위와 예술 행위 간의 경계를 애매하게 했다’고도 말한다. 벽이나 바닥과 구별되는 예술작품은 좀 더 밀도 있고 다양하며 유희적인 층위의 화면을 내장하고 프레임을 갖춘 평면들이다. 공사장 알림판 같이 생긴 작품은 평면작품을 설치적 방식으로 운용한 예이며, 삶과 예술 사이의 좁다란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고 있는 작가의 상황을 표현해 준다. 




등가교환34_163x130cm_패널에 혼합재료_2021







전시전경



악다구니같은 개발이익으로부터 배제되어 나름 초월적 입지를 차지한, 시멘트 냄새 물씬 풍기는, 도심 한가운데의 야생적 공간들은 매력적이다. 그런 틈새들이 아니면 예술이 현실 속에 자리할 여지는 많지 않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지배문화의 무관심 때문에 그나마 예술이 존속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물질적 성장에 목매달고 한길로만 달려왔던 한국 사회가 그나마 중산층적 속물 의식이 생겨나 예술이니 전통이니 자연이니 하는 것이 조금씩 배려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예술의 입지가 조금씩 넓어진다면 좋지만, 원초적 한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줌의 미술계를 벗어나면 예술은 어떤 존재 의미와 설득력을 가지는가? 미술계에 막 진입한 젊은 작가는 나무판자를 화판 삼고, 실리콘을 유화물감 삼아 작업했다. 맨 처음 작품에 사용한 재료는 실리콘으로, 마감 질을 위해 사용했던 이 재료가 유화물감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실리콘 위에 먹물 등을 뿌려서 안착시켜 독특한 화면을 만들었다. 미장질이나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등은 그대로 화면에 붙여지기도 하면서 ‘컴바인 페인팅’이 되기도 했다. 그가 활용한 공업재료들은 일용직 노동자일 때의 그에게 돌을 벌어준 재료들이다. 외관상으로는 주체의 정념을 잘 표현한 추상적 작품, 미술사적 분류로는 추상표현주의에 속한다. 미술사의 무슨 파에 속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노동과 예술을 병행해야 하는 청년 작가로서, 매 순간 실존적 물음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비슷한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는 예술, 또 다른 맥락에서는 ‘노가다’인 상황에서 자신의 작품이 역사적, 미학적, 심지어는 사회적 의미까지 담아내기를 바란다. 그가 노동할 때 사용하는 재료를 예술에도 사용하는 것은 생업과 부업 간에 놓인 거리를 최소화하면서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 예술이 가지는 위상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함이다. 비망록처럼 길게 쓰여진 그의 작가 노트에는 온통 그러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전시전경



복도 전경



여기에 삶이 있고, 저기에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양자를 딱 붙여놓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위 한다. 고가의 재료인 물감과 캔버스 대신에 공업용 마감 재료들이 다수 사용된 김정우의 작품은 ‘예술 의지(kunstwollen)’(알로이 리글)라는 ‘내적 필연성’(칸딘스키)이 뿌리고 흘리고 긁는 작가의 행위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작품은 작가의 고뇌와 실존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기념비화 한다. 하지만 재료적 측면에서 보면,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던 미니멀리즘이나 포스트미니멀리즘의 계열에 속한다. 주체의 신화에 기반하는 추상미술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바깥에 놓고자 했던 흐름이다. 그러한 흐름의 대표자 중의 하나인 프랭크 스텔라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추상미술의 정신적 지향이 미술을 그르쳤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의 추상미술은 종말론이나 신지학같은 종교를 이어받은 정신주의와 매우 가까웠다. 이에 반대되는 흐름은 예술이 ‘벽에 박힌 못처럼’ 단단한 지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진영은 일견 유심론과 유물론의 대결처럼도 보였지만,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강경한 흐름 또한 미술계 내의 혁명에 머물며, 대중의 불신을 걷어내지 못했다. 추상미술의 원류에 내재한 분열적 경향은 김정우의 작품에 내재된 완강한 물질성과 그러한 물질로 노동과 유희를 동시에 행하는 주체의 의지가 공존한다. 노동하면서 작가는 전체 공정의 일부로 부속품처럼 작업하지만, 예술을 하면서 작가는 전체의 향방을 주도한다. 예술이 자신의 전면적 능력을 요구한다면 노동은 일부만을 요구한다. 하나는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단이다. 작가는 이 수단을 통해 삶과 예술을 지속하고 싶어한다. 놀이처럼 예술의 세계는 매번 다시 시작된다. 거기에 규칙은 있지만, 규칙은 작가가 정하며 시작과 끝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자기 주도성이 몰입을 자아낸다. 노동 또한 자기 주도적으로 행해지면 예술의 경지와 다를 게 없다. 예술을 하면서도 몰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은 노동에서의 소외와 같은 맥락이다. 예술은 시스템 속의 개인이 탈주를 감행할 수 있는 작은 영역이기에 생존에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  


출전;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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