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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효진 / 광란의 속도가 버린 것들에 대해

이선영

광란의 속도가 버린 것들에 대해

  

이선영(미술평론가)

  

육효진의 전시 부제인 [portal : slenfonia]는 소설 과학도 출신의 소설가 김초엽의 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영감 받은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는 지상에서의 속도는 큰 의미가 없고,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처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이들이 문제다. 그들은 시대의 요구에 뒤처지고 만다. 전시 부제 속 슬렌포니아는 웜홀의 발견으로 퇴락한 가상의 행성 이름이다. 소설의 주제를 조형적으로 반향하는 육효진은 이 전시가 ‘빛의 속도로 도달하려는 열망에 우리의 버려지고 포기되어 버린 꿈, 방향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헌정 작업’이라고 밝힌다. 낯선 이름의 이 가상의 행성은 누구나 다 빠른 길로 가려는 욕망에 부응하지 못하게 된, 요컨대 변화된 상황에서 태세 전환이 느린 곳을 상징한다. 시간과 공간이 연동되어 있다면 그곳은 빨라진 시간이 무시하는 곳, 주변화된 곳이다. 




포털 슬렌포니아_내부전경(소마미술관)



포털슬렌포니아_측면



중심은 새로운 지름길이 닿는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공상 과학의 배경인 먼 우주가 아닌 지상과 비교하자면, 지금도 고속 열차에 의해 유령화 된 간이역이 많다. 그러한 간이역에 정차하는 ‘저속’ 열차도 적자를 핑계로 사라질 운명이다. 고속 열차가 정차하는 곳만 활성화되고 나머지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고속 열차 또한 초고속 열차에 의해 밀려날 것이다. 속도의 요구가 커질수록 교체 주기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역사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근대 이후 역사는 끝을 모르는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운송 수단이 아니어도 빠르게 발전하는 각종 기계들에 맞춰 스스로를 업데이트 하지 못하면 슬렌포니아의 탈락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 지상에서 더 빠른 속도를 보장하는 미래의 운송 수단은 풍경이 보이는 창도 무력화하는 튜브 형태로 그려진다. 느린 열차를 타고 봤던 정겨운 풍경들은 이미 고속 열차에서 상당 부분 시커먼 터널들로 대체되었는데, 이제 속도는 점에서 점의 이동만 중시할 뿐 선을 포기한다.

 

선이 있다 해도 우회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시골에 갈 때 기차의 창문을 열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 고속 열차의 승객들은 대부분 창이 아닌 손바닥 안의 윈도에 집중한다. 빛의 속도를 보장하는 웜홀같은 지름길이 전제되는 우주여행에서 창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육효진의 작품에 창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슬렌포니아는 먼 우주에 있기에 은유로서만 상상가능한 곳이지만, 작가는 집이라는, 한국 사회에서는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미가 강한 장소 또한 같은 맥락에 놓는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발언 강도는 매우 세진다. 은유가 아니라 폭로다. 창으로 만들어진 집은 창의 크기와 개수로 집의 규모와 가치를 가늠하는 사회적 기준이 반영된 작가의 고안물로, 육효진의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작품 [무담시폴리스]는 거울의 방 같은 입체구조물의 한 면에 홀로그램 필름을 붙여서 허공에 둥 떠 있는 황금빛 집의 상징물을 보게 한다. 








푸른 조명으로 장식된 초고층 거주지는 지상에 뿌리를 내린 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지만, 작가가 직접 본 것에 바탕한다. 주거지 지붕에 조명을 다는 다소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한국에서 흔히 발견된다. 명품 주거지를 선전하기 위한 경관조명은 한국사회에서 집에 대한 기대치를 상징한다. 구조물 앞에 상영되는 영상은 우리 사회에서 집의 위상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를 담는다. 거품으로 가득 차오르는 집의 영상 맞은편에 황금색 집이 서서히 공전한다. 관객이 센서 스피커 영역에 들어오면 작가의 말이 해설하는 식으로 들려온다. 작가가 한국의 럭셔리 아파트에 문제 삼은 부분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영상 설치작품 [비상구는 없다]는 아래층의 임대 아파트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비상구를 막아 놓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아파트에 대한 고발이다. 그것은 계층을 이동하는 사다리가 상당 부분 작동하지 않은 한국 사회를 반영한다. 


창이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매개라면 그러한 창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작가는 ‘사회적 구별짓기’의 정점을 집에서 본다. 하기야 최근에 폭로된, 대규모 택지개발에 얽힌 정치-법-관료 등이 연합된 비리를 보면 집 없는 서민이 영원히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뒤로 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작품 [비상구는 없다]는 그러한 차단은 비상구를 막아 놓은 것과 같은 위험을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한다. 영상은 맞은편에 설치된 거울의 방에도 비춰지면서 집에 대한 물신주의를 표현한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여러 폭력적 사건들을 직접 마주하기 힘들어서 영화나 소설같은 장치를 빌어오곤 하지만, 어떤 현실은 공상과학보다 더 황당하다. 공상과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면, 현실 또한 공상과학적이다. 홀로그램이나 거울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집에 대한 물신주의의 신기루 같은 느낌을 강조했지만, 허상과 현실의 거리는 앞으로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무담시폴리스



허구 또한 현실이 될 수 있다.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전환 가능성을 활용한다. 예술작품 또한 현실화 된 허구이며, 동종어법으로 허구적 현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 이 전시는 집으로 상징되는 구체적 공간이 있는가 하면, 공상과학 소설에서 영감 받은 보다 추상적인 공간이 있다. 추상적 공간에도 창은 필수적이다. 아니 그 공간 자체가 창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집이 소우주라면, 가상 행성은 그보다 더 큰 우주를 상징하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미래에 더 확연히 갈라질 계급적 삶에서 첨단 우주선 같은 집이 있을 수 있으며, 손바닥 안의 윈도 창에 만족하고 평생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어떤 SF 영화에서는 실제의 창이 없는 인터페이스로만 이루어진 3면의 벽에 갇힌 미래인을 그리기도 한다. 별 볼 일 없거나 부재하는 창 대신에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현실은 이미 도래하고 있다. 현대인은 대부분 쇼핑, 놀이, 일, 공부 등등을 한자리에서 해결한다.


이때 뭐든 빨라야 경쟁력 있다. P.C가 잘 세팅된 의자에 앉을 때 실제로 이동 수단에 앉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실제의 이동 수단에 착석해서 하는 일도 비슷하다. 갖가지 인터페이스는 무기력해진 육체를 현실에 남겨두고 가상의 여행을 떠나기를 원한다. 기능성이 좋은 스마트폰은 여기에서 저기를 빠르게 연결시켜줄 것이다. 좋은 집은 실내와 실외를 연결시켜줄 큰 창을 가질 것이다. 창구멍 하나 없는 집은 감옥소와 다를 바 없다. 부재 하는 창은 가난해서 죄인인 인간을 한곳에 묶어둘 것이다. 그런데 빛의 속도든 아니든 왜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야만 할까. 지금 여기를 좋게 만들면 될텐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미래의 몫은 과도하게 커졌다. 발전에 필요한 욕망은 달리는 말의 한 뼘 앞에 매달려 거리를 끝내 좁혀주지 않는 당근같은 역할을 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으로 간주된다. 발전지상주의에 필수적인 것은 속도다. 




무담시폴리스 전경



무담시폴리스_내부디테일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시간과 속도의 여행]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최고로 빠른 속도의 능력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을 속도의 전쟁으로 파악하면서 ‘속도는 전쟁의 정수’라는 손자병법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전쟁사는 최후의 형이상학적 신기록을 향한 초고속 돌진과 같은 탈국지화, 즉 소리의 벽을 넘고 곧바로 빛의 벽을 넘어서 우리의 현존과 물질의 마지막 망각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신속한 기계는 늘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 하지만 폴 비릴리오는 속도는 사고과 느낌을 멈추게 하고 무관심에 도달하게 한다고 하며, 죽음의 원인이라고도 말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류의 숙명은 소멸이다. 즉 그동안 살던 세계에서 추방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폴 비릴리오은 공상과학에 자주 등장하는 빠른 이동에 대해, 강렬한 빛의 속도를 위해서 몸의 속도를 포기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시간을 벗어난 작은 감방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라고 본다. 


‘이 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동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장 내밀한 생명 리듬의 조직을 기술 도구들에 내맡길 것이다. 작은 방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빛의 영상은 개인의 모든 움직임을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기계의 속도가 더욱 신속해지면서 의식을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폴 비릴리오) 폴 비릴리오는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면서 피크노렙시(기억 부재증)의 효과를 강화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한다. 기억은 속도를 저해한다. 한국전쟁 이후 수십년간 발전지상주의의 열차를 타고 달려온 한국 사회는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빨리 도달한 발전에서 물질주의의 비중은 매우 크다.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희한할 정도다. 물질이건 정신이건 한쪽이라도 발전되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사회적 만족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계층 간 간극을 바탕으로 하는 발전은 다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작가는 단선적 발전주의에서 억압된 기억을 호출한다. 



무담시폴리스_내부



무담시폴리스 세부



어둑한 공간 속에 배열한 슬렌포니아의 상징물들은 잊혀진 기능을 상상하게 한다. 육효진의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창은 속도를 단축시켜 줄 수 있는 상징이다. 드넓고 빛나고 이리저리 접속지점을 확보한 전능한 창은 이미 최고의 속도에 편승한 이들이 누리는 장관을 보장한다. 하지만 앞만 보는 맹목적 상황에서 놓친 것들이 많은데, 작가는 슬렌포니아에서 그것들을 발견한다. 작가는 ‘정신없이 달리느라 외면해야 했던 수많은 슬렌포니아는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웜홀에서 내려와 소외되어 버린 것들을 돌아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소설 제목처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빛의 속도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속도에 의해 간과된 것들을 되짚어 보는 대안적 삶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미래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도 문제 삼는 예술은 속도 지상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적 가치를 담고 있는 해방구같은 역할을 한다. 


전시장의 물속같이 어둑한 분위기는 저감된 속도를 요구한다. 물속같이 어두운 통로를 지나서 어떤 문턱을 지나면 실내외를 연결하는 창들의 연속이 있는 밝은 방으로 진입하는 구조의 첫 단계다. 분리되면서 연결되는 작품 전체가 길과 문턱, 창문 등 통로로 설계되었다. 작품 [상처로 숨쉬기]에서 물속같이 어두운 길 양쪽의 설치물들을 보며 나아가야하기에 관객의 발걸음을 평소보다 늦어진다. 오래전에 물 밖으로 나와서 진화한 종이 물 안에서 빠를 수가 없다. 천정에 어항들을 설치하여 일렁이는 물결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물의 이미지는 퇴행이나 익사를 떠오르게도 한다. 특수조명을 설치하여 움직이는 물의 그림자를 빛나게 한 어항 3개는 빛과 물을 만나게 한다. 양 가장자리에 홀로그램 필름을 깔아 주변 빛에 영롱하게 반향 된다. 천정에 설치된 어항은 분수처럼 아래서 솟아오르는 물줄기와 조명이 만나 공간 전체에 어른어른한 효과를 준다. 




상처로숨쉬기_내부전경



상처로숨쉬기_어항디테일



통로 가장자리에는 다양한 세라믹 기물들이 놓여 있다. 그것들은 중력에만 반응하여 수동성을 탈피하여 아래의 모터들에 의해 움직인다. 주변의 조명을 난반사하는 홀로그램 표면에 놓여지는 것들은 언뜻 용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들은 생긴 것은 제각각이어도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지 않는 자연은 버려지지도 않지만, 인공물은 버려질 수 있다. 빠른 속도에 부응하지 못해 낙오된 것들은 오래된 매체인 세라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직접 만들거나 수집한 500-600여개의 세라믹 작품들은 용도의 불분명성이 이중의 역할을 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대상들은 초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쓸모없는 쓰레기일 수 있다. 홀로그램 필름이나 조명, 음악같은 다양한 장치는 작가가 이 사물들에 부여한 긍정적인 역할을 추측하게 한다. 30개의 감속 모터를 바닥에 깔아 작동시켜 수백개의 세라믹 기물들을 들썩이게 해서 숨 쉬는 존재같이 연출했다. 


속도의 사회가 그것들을 버렸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다. 또는 기물들을 감싸는 영묘한 빛이 상징하듯, 다른 힘을 받아서 부활하는 중이다. 여러 기물들이 있지만 낚시 할 때 방향을 잡아주는 다양한 형태의 봉돌들이 재미있다. 이 방향 추들은 잃어버린 방향의 상징물로 설정된 것이다. 작가는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기물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포기하고 외면해 버린 꿈, 버려져야만 했던 것들 그리고 방향을 잃어버린 것들을 상징하는 메타포’라고 말한다.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모두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슬렌포니아’이다. 또한 그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상처’이기도 하다. 그것에 현대적 느낌을 부여하는 것은 밑에 깔린 홀로그램 필름이다. 홀로그램 필름은 표면 가득 빛을 반사하면서 배후의 것을 숨긴다. 밑에 설치된 모터는 필름 위에 놓인 세라믹 오브제들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소리를 낸다. 




상처로숨쉬기_디테일



어두운 공간에서 필름이 빛에 반응하여 어른거리는 효과도 덧붙여진다. 물속을 연상시키는 이 느릿한 공간은 속도를 향한 진화가 아니라 그 역방향을 가리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진화론를 수정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진화론에 의하면 진화는 덜 분화한 것에서 더 분화한 것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소통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인 계통적 진화이기를 그친다. 그들은 이질적인 것들 간에 나타나는 진화형태를 역행(involution)이라고 부른다. 역행은 퇴행이 아니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덜 분화된 것은 동시에 더 많은 잠재성을 가진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운동은 오직 또는 주로 계통적 생산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개체군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천정에 설치된 어항들을 제외하고 물은 없다. 물 대신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이번 전시의 협업자인 강신욱의 우주적이고도 자연적인 분위기의 음악이다. [Eternal Time], [Metaphor], [Rainscape] 등이 나오는 음악은 어디서부터 들어도 상관없는 미니멀스타일이며, 물소리 같기도 하고 모닥불소리 같기도 한 설치물의 실제 음향과 어우러진다. 전자 음악의 미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미래에 저당 잡힌 삶이 놓친 것들이 있다고 간주되는 자연을 연상시키는 부분 또한 많이 들려온다. 이 공간을 지나 암막 커튼이 처진 또 다른 문턱에 진입할 때 통로 양쪽에 설치된 홀로그램 필름은 더 파르르 떨린다. 그것은 오랜 여행을 압축한 여로의 끝에서 임박한 어떤 또 다른 영역을 예시한다. 모터가 연결된 홀로그램 필름은 벽과 바닥 모두를 일렁이는 빛의 장으로 변화시킨다. 육효진의 작품에서 빛은 영역이자 매개물이다. 우리는 빛을 통해 빛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상처로숨쉬기_세라믹기물_디테일



암순응했던 관객은 밝은 방에 진입하면서 잠시 또 다른 적응을 해야 한다. 어슷한 마름모꼴 금속 프레임은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에서 움직임을 주기 위해 모터로 천천히 한 방향으로 돈다. 마치 다이얼을 돌려야 열리는 금고처럼 안팎에 매달린 여러 개의 창이 서로 조응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창밖으로 일정 거리를 두고 매달린 창들 아래에 물을 설치해서 공간의 확장을 꾀했다. 홀로그램 표면으로 덮인 창틀은 창으로서의 물질성을 최소화하고 공중에 뚫린 문 같은 느낌을 강조한다. 바깥바람의 공기 흐름에 따라 움직여. 창의 구멍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우연적 순간도 있을 것이다. 여기와 저기를 잇는 창은 전시장의 실제 창을 활용함으로서 창의 역할을 극대화한다. 공간 어딘가에 뚫려있을 시공간 이동장치는 창들의 연쇄로 가시화된다. 육효진의 작품에서 그 창들이 자연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자연은 속도 지상주의에 의해 배제된 가치들이 자리하는 대안의 장소로 재평가된다.  


출전; 아트허브평론지원 프로젝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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