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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원 / 바람결을 품은 공간

이선영

바람결을 품은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양승원의 작품 안에서는 바람이 분다. 때로 연한 색으로 칠해져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동양화의 여백같이 연출된 바탕은 바람이 통과하는 장(場)이다. 바람은 살랑거리는 미풍부터 그 안의 모든 것들을 휘젓는 광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도를 가졌다. 동그라미, 쐐기형,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긴 띠들 등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공통의 요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그것은 일종의 조형적 언어가 된다. 많은 작품이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정한 어휘는 충분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나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질적 요소가 개입될 때 새로운 시리즈가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작가가 열심히 해왔던 드로잉을 반영하는 이질적 형태가 끼어들기도 한다. 연필로 그어진 선의 뭉치, 즉 경계로만 이루어져 오히려 경계가 없는 형상은 형태와 형태 사이에 먼지처럼 스며든다. 그것은 도시/구조를 떠도는, 그러나 그자체는 구조가 아닌 존재다. 




1. 운동하는 감각 no.1_ 97.0 X 130.3cm_ Mixed media on canvas_ 2020



2. 운동하는 감각 no.2_ 97.0 X 130.3cm_ Mixed media on canvas_ 2020



도시가 아무리 복잡해도 형태라면 이 미지의 것은 아무리 단순해도 형상이다. 형태와 구별될 수 있는 이 형상은 자연에 더 근접한다. [운동하는 감각] 시리즈는 먼지처럼 나풀거리는 존재가 떠도는 우주를 보여준다. 같은 크기와 비율로 그려진 시리즈는 여러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여러 공간을 떠도는 확장된 운동감이 있다. [운동하는 감각 no.1,2,3](2020) 시리즈에서는 노란 색조의 크고 작은 원들은 도시의 불빛이 감지된다. 같은 형태의 크기 차이를 통해 추상적 원근법이 구사됨으로서,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빛들이 표현된다. 여러 굵기와 색채, 방향성을 가지는 선의 흐름은 바람결이 느껴진다. 먼지 또는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는 형상은 인공적 환경과 함께 흐르고 표류한다. 구성 요소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듯한 도시 생태계를 보여주는 양승원의 작품은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도시의 공기는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물론 도시는 중세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 진면목을 발휘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장구한 세월의 전근대 시기 동안 시공간은 긴밀히 얽혀 있었고, 따라서 거의 구분 불가능한 삶의 경험으로서 견고하고도 외관상 침입 불가능한 일대일 교신 속에 봉쇄되어 있었지만, 더이상 그렇지 않게 된 순간부터 근대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도시의 유동성을 반영하는 화면의 유동성은 실재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호의 지배와 관련된다. 근대도시는 ‘뿌리의 결여에서 발생하는 활력’(장 보드리야르)을 보여주었고, ‘극장’(데이비드 하비)과도 비교되었다. 양승원의 작품에서 도시는 움직임, 특히 이동하는 시점이 두드러진다. 자유롭게 활보하는 이의 입장에서 본 거리두기,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기분전환이 있다. 다양한 구경거리가 배치된 도시는 시각적이다. 바네사 슈와르츠는 도시 생활의 구경거리화와 대중문화 출현의 상호 관련에 주목하는 [구경꾼의 탄생]에서, 도시는 인간의 감각 중에서 유독 시각을 자극함을 지적한다. 




3. 운동하는 감각 no.3_ 97.0 X 130.3cm_ Mixed media on canvas_ 2020



4. 유연함 그리고 첨예함 no.1_ 45.5 X 37.9cm_ Mixed media on canvas_ 2019



이러한 도시연구자들의 관점을 참고하자면, 양승원의 작품에는 도시에 편재하는 순간 속에 고정된 시각 이미지의 향연이 있다. 순간적 시각성과 추상미술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양승원의 작품에서 쐐기 같은 형태들은 화면에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의 균형을 만들어준다. 마치 그림으로 그려진 악보같이 리듬과 박자, 하모니와 악센트 등을 시각화한다. 도시에서는 단순한 소음이든, 시선을 끄는 광고를 위해서든 매력적 분위기를 위해서든 늘 음으로 가득하며 그것들은 어우러지거나 충돌한다. 도시적 공간 속에서의 운동은 실제적인 움직임뿐 아니라, 소리와 소음, 음악 등이 시간의 축을 함께 타고 가는 것이기에 전후가 있다. 기억과 지각은 연동된다. 바람을 연상시키는 작품 안의 유동적 요소들은 양승원의 작품이 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풍경의 느낌으로 남게 한다. 추상적이지만 위와 아래가 구별되고 중력감도 느껴진다. 분리된 요소들의 겹침을 통해 추상적인 원근감도 표현된다. 


라인 테이프를 사용하는 섬세한 꼴라주는 화면 위에 쌓이면서 그려진 것들과 상호작용한다. 작품 [유연함 그리고 첨예함 no.1](2019)은 캔버스 위에 꼴라주 된 선과 기하학적 형태가 더욱 강렬한 템포를 보여준다. 꼴라주는 그자체가 도시의 특징이다. 각각의 맥락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들은 도시라는, 스크린이라는, 화면이라는 압축적 시공간에서 병치 된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서 대도시에 존재하는 것들은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원근법을 부정한다고 지적하면서, 사진과 영화가 재현의 모델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대 대도시의 경험, 즉 단편적이고 시각적이며 충격적인 것의 우위를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양승원의 작품 [When I saw yellow no.2](2019)에서 겹쳐짐을 통해 표현된 공간은 더욱 압축적이며, 바탕에 칠해진 색이 산산이 흩어지려는 요소들을 붙잡아 준다. 작품 [왜곡된 공간](2020)에서 여러 조형 요소를 묶어주는 것은 분홍색 바탕이다. 




5. When I saw the yellow no.2_ 37.9 X 45.5cm_ Mixed media on canvas_ 2019



6. When I saw the yellow no.1_ 37.9 X 45.5cm_ Mixed media on canvas_ 2019



작품 [When I saw yellow no.1](2019)에서 바탕색은 [-no.2]보다 더 짙어지며,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먼지/포자 형상이 가세한다. 그것은 직선과 곡선, 쐐기형의 색들이 자유롭게 춤추고 소리 내는 공간에서 심리적으로 중심을 이룬다. 상호작용은 차원을 달리해서도 일어난다. 2차원 평면과 3차원 오브제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설치작품이 그것이다. [하나의 공간 속 세 개의 조각](2020)은 높이로만 크기가 기재되는 변형 캔버스들이다. 원과 사각형 사이에 두 개의 면모를 동시에 가진 호 형태가 배치된다. 3원색을 생각하게 하는 색조가 다채로움 가운데 질서감을 준다. 어떤 평면-형태는 수다스럽고 어떤 것은 명상적이다. 공간을 통과했을 때의 느낌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정지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유동적 측면이 강조된 작품은 근대도시의 특징을 반영한다.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이제 으뜸가는 힘의 기술은 도망가기, 미끄러지기, 생략하고 피하기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이제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자본 자체가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와 달리 예술은 ‘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유목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양승원의 경우는 이미지 뿐 아니라 이야기도 한다. 단어의 조합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이 되듯이, 몇 가지 구성요소를 통해 말한다. 효율적인 어법은 단어 수가 너무 많지 않은 것이다. 그 극단적 예가 과학이지만, 예술은 어느 순간 자신의 미학적 의도에 의해 과학에 다가간 적이 있으며, 추상을 넘어서는 구성주의가 그 예이다. 양승원의 작품 또한 환영과 실제, 관념과 물질 사이에서 게임 한다. 타원형 캔버스 안에 들어있는 조형 언어가 그림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듯 타원형 캔버스 그림과 함께 설치된 작품 [유연함 그리고 첨예함 no.2](2020)은 같은 제목의 평면작품이 있다. 




7. 왜곡된 공간_ 30.0 X 24.0cm_ Mixed media on canvas_ 2020



8. 하나의 공간 속 세 개의 조각_높이 76.0cm_Mixed media on canvas_2020



둘을 같이 보면 그림은 단순한 환영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져왔음을 알려준다. 타원형 캔버스는 보다 큰 전체의 일부분만을 샘플로 보여주는 듯한 확장성이 느껴진다. 양승원의 작품이 풍경이라면 장소는 자연이기보다는 도시다. 자연의 주조 색인 녹색은 늘 열에 들떠 있기 마련인 도시적 분위기에서 균형추 역할을 한다. 도시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뜨거움과 차가움의 대조에서 뜨거움에 해당한다. 그가 말하는 뜨거운 사회란 급진적인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고취하는 사회로 현대자본주의가 그 예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것을 역사와 신화의 대조로도 설명했다. 신화가 자연의 주기에 적응하는 변화를 감지하기 힘든 느릿한 시간이라면, 역사는 한껏 달구어진 채 변화를 고무한다. 근대에 들어서 변화는 무엇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변화로 생각될 만큼 맹목적인 추동력을 보여준다. 


양승원은 도시의 면모를 일일이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면면은 세련되고 화려한 장소와 그 안에서의 어떤 행동, 즉 축제적 활기를 느끼게 한다. 일상과 비교해서 축제는 뜨겁다. 물론 존재의 근본적 변모를 야기하는 전통적 축제에 비한다면 흉내내기에 불과하지만, 도시는 늘 즐거운/고통스러운 사건이 터지는 활기찬/번잡한 곳이다. 구조주의에서 정의한 뜨거움/차가움의 대조는 변화의 주기와 관련된다. 물론 자연도 변하지만 자연의 진화는 문명의 발전 속도와 큰 차이가 있다. 문명에 비하면 자연은 거의 변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주기와 일치하는 삶은 현대사회보다 차갑다. 불과 몇 십 년 전 사진도 격세지감이 드는 것이 도시다. 속도와 가속도는 자본이 선호하는 것이다. 양승원의 작품에서 형광빛까지 발하는 화려한 색과 외곽선이 깔끔한 형태들은 도시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연에는 칼 같은 직선이 없고 색에 빛까지 포함하는 형광색 또한 대중의 눈에 더 잘 띄기 위해 개발된 현대 문명의 산물이다. 화면에서 종종 보이는 금색이나 은색도 같은 맥락이다. 




9. 유연함 그리고 첨예함 no.2_ 50.0 X 40.0cm_ Mixed media on canvas_ 2020



그것은 벤야민이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고 말한 요술 환등의 면모다.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19세기 파리에 대한 벤야민의 연구는 도시연구에 대한 선구적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가스등이 희미하게 켜진 도시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을 보고 읽었다는 점이 놀랍다.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문화의 판타스고마리아 속에서 부르주아는 물건을 사기 위해 파사주로 오고 부르주아가 아닌 사람들은 살 수 없는 물건을 구경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그에게 도시는 꿈꾸는 세계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21세기 양승원의 도시에서 바람은 실제 기후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홀가분하게 도시를 쏘다니는 이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에서 높은 건물 사이의 협곡을 통과하면서 거세지는 빌딩풍이 불기도 한다. 도시환경도 움직이고 그 안팎의 산책자도 움직인다. 작가는 조각과 조각 사이를 계속 운동하는 느낌, 즉 ‘운동하는 감각’을 표현했다. 


양승원은 자신의 작품 테마를 ‘무빙 스페이스’라고 정리한다. ‘스페이스’는 비슷한 의미의 ‘플레이스’ 보다 추상적이다. 추상일 때 속도는 가속도가 될 수 있다. 사물로부터 취해졌지만 사물은 아닌 추상적인 기호들은 점 선 면과 그 변주를 통해 순환하는 공간을 표현한다. ‘부유, 응집, 이동하는 조각들’은 도시 변화의 리듬을 반영한다. 요소들은 각기 분리되어 있지만, 양승원의 작품에서 분리는 연결의 조건이다. 각기 다른 형태와 색채, 그리고 속도를 가지는 다양한 요소들은 부딪히며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고 교향곡같이 조율되기도 한다. 분리와 연결의 역설적인 조합은 캔버스 안에 그려진 것들이 3차원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 듯이 연출된 설치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이 경우 캔버스는 무엇인가를 담는 상자나 방, 집 같은 비유가 성립된다.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 캔버스 또한 환영이 아닌 오브제로서 작동하며, 다른 사물들과 함께 3차원 공간에서 구성된다. 이러한 조합에서 계산과 유희는 함께 한다.

  

출전; 아트허브-모리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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