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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중 / 파문의 확산

이선영

파문의 확산

  

이선영(미술평론가)


  

화면 가장자리를 길쭉한 상자와 일치시킨 경계 안에 수많은 선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조형 요소가 아닌 이 선들은 길쭉한 상자에 담아놓은 귀중한 무엇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가상의 상자를 넘어서 확장성을 가진다. 음이나 소리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과 관련된 수렴이나 발산의 운동이다. 현악기의 비례를 가지는 가상의 상자는 선율을 담는다. 시간을 타고 공간으로 흩어지는 선율을 하나로 모은다면 이런 형상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시간의 공간화이다. 만약 음악이 공간의 시간화라면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파문(波紋)이 확산 중이다. 한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를 내포하는 반복은 매번 다른 파동으로 울려 퍼진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빛이 편재하는 화면은 선의 집적이 만든 면들이 다양하게 만나는 방식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섬세한 선들에 떨어지는 또는 스며 나오는 빛 또한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 




Coherence,160x120, 장지에 연필, 2021



파동으로서의 빛은 간섭현상을 야기한다. 이러한 간섭현상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추상 화법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명암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명암법은 추상에 구체적 대상 못지않은 실재감을 부여한다. 가운데 축을 기준으로 긴장감 있는 대치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고, 내부에 무엇인가를 품은 듯 도드라지는 명암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상하, 또는 좌우의 대칭성을 보여주는 작품의 경우 거울반사나 평행이론 같은 심리학적이고도 물리적인 학설들로 확장된다. 작가는 같은 크기의 여러 작품을 나란히 걸어서 그 사이의 여백 또한 파동이 주파하는 장으로 삼는다. 작품을 이루는 섬세한 구성 요소들은 파도처럼 밀고 밀리면서 작동하지만, 여백이 없다면 (잠재적)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그의 작품이 고대의 원자론이나 동양의 화론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영겁회귀의 사상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매개 고리가 될 수 있다. 


영겁회귀는 동일한 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둔 회귀를 말한다. 중심이 아니라 탈중심으로의 회귀이다.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영겁회귀는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철학자 니체가 자신의 시대에 성행하고 있는 직선적 진보를 믿는 소박한 개념에 대한 해독제로, 역사를 순환운동이나 영겁회귀의 운동으로 서술했다고 말한다. 니체에게 영겁회귀란 ‘이미 무한히 그 자신을 반복하고 유희하고 순환적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알렉산더 네하메스는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에서 영겁회귀는 우주란 진보하지도 지향하는 특별한 목적도 없으며 현재와 마찬가지로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상이라고 해석한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재차 중요성을 가지는 니체를 인용하자면, ‘존재했던 것이나 존재하는 것이 영원히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 가장 정신적이고 활기 있으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이다. 


니체가 ‘우리는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삶의 가장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을 정도의 성취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언명했을 때 반복은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리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무한한 횟수로 존재했다’고 언명했을 때, 반복은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된다. 반복과 차이의 관계는 간섭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서로 다른 강도와 방향성을 가진 파들은 서로의 근접성을 통해 간섭현상을 일으킨다. 이번 전시의 부제 [coherence]는 동조(同調), 즉 ‘ 시공간적으로 위상이 일치한 두 개 이상의 파의 특성’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포함한다. 작가는 이 부제가 ‘일관된 파장/계산된 증폭/도플갱어/양가성/사회현상의 반복, 보이지 않는 질서...’ 등의 개념어로 파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소들 간의 긴밀한 연결보다는 병치를 통해서 상호적 울림을 자아내는 것은 전시 컨셉의 제시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Basso, 160x120, 장지에 연필, 2019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Coherence]는 마치 블럭들이 맞물려 있는 모습이며, 명도 차이로 인해 접 면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타페스트리 처럼 짜여진 표면을 보여주는 작품 [Basso]는 저음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연상케 한다. 하나하나 그은 선이기에 일률적일 수 없는 명암이지만, 밀도는 비슷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듯한, 전원이 들어오면서 작동할 것 같은 태세다. 자로 그은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간격을 가지는 가로줄과 세로줄은 일종의 좌표를 만든다. 그저 가로 또는 세로로 병렬되어 있을 뿐인데 마치 촘촘하게 짜여진 것처럼 톡톡한 밀도를 가진다. 수직선의 경우 마치 실을 꿴 바늘이 지나간 자리가 만든 협곡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두운 부분은 선은 아니지만 선처럼 보인다. 반복적으로 들고나는 선은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 좌표축이 되는 것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좌표는 시작이 아니라 추후에 생겨난다. 


영겁회귀의 가설처럼 처음과 끝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는 듯한 선적인 작품은 나중에야 최초의 비전을 확인한다. 사실 그것은 관념주의나 재현주의를 벗어나는 모든 예술작품에 깔린 전제이며, 예술의 장점이자 단점을 이룬다. 그에게도 예술은 역설적이다. 팽팽하게 맞서는 이 두 갈래 길에서 가는 선 하나만큼의 차이에도 파장은 커질 수 있다. 동어반복의 삶을 이겨내고 차이를 길어낼 수 있는 작업은 애써 수행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물론 들뢰즈가 강조하듯이 반복과 차이는 연동된다. 차이를 가늠하기 위한 무수한 반복은 김범중의 게임 원리다. 그것은 경전이나 주문을 외거나 위대한 성전을 필사하는 수도승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작가에게는 이전 시대의 상징주의와 달리 최초의 중심과 최종의 목적지가 감춰져 있다는 차이가 있다. 가로로 길거나 세로로 긴 작품들인 [Phrase] 시리즈는 잠재적이든 현재적이든 좌표축 자체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자유로워 보인다. 


‘〖樂〗 작은 악절(樂節), 〖댄스〗 연속 동작의 한 단위’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는 ‘Phrase’는 기교를 부린 노래나 춤 등을 연상시킨다. 작품 [Phrase](2020)는 양 끝이 뾰족하게 빠진 끈이 일정한 리듬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완전한 대칭은 아니다. 비대칭은 평형을 향한 운동성이 잠재되어 있다. 만약 어떤 에너지가 투입된 운동의 결과라면 짧은 시간 매우 강하게 움직인 결과이리라. 반대로 미묘한 명암법이 적용된 끈 형상은 오랫동안 접혀있던 것이 펼쳐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접혀있었던 용수철같은 잠재적 에너지를 가진다. 잠재적 용수철은 튀긴 튀겠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다. 여기에도 반복과 차이의 개념이 관통한다. 각 패널마다 복잡한 굴곡 면을 가진 [Phrase] 시리즈는 무한한 변형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의 주사위]에서 영겁회귀가 차이, 즉 변형과 연결된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영원회귀는 일관성을 다르게 이해한다. 



Phrase, 장지에 펜슬, 50x10cm, 2020~202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클로소브스키를 인용하면서, 영원회귀는 나의 고유한 일관성, 나의 고유한 동일성, 자아의 동일성, 세계의 동일성과 신의 동일성을 배제하면서 성립하는 비밀스런 일관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관성은 카오스, 카오스모스(Chaosmos)와 다르지 않다. 니체는 카오스와 영원회귀를 서로 다른 두 사태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카오스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영겁회귀에서 정지화면은 새롭게 살아 움직인다. 여기에서 시간의 직선은 다시 이상한 고리를 형성한다. 이제 생각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은 빗장이 풀린 시간이다. 시간의 형식 끝에 오는 비형식의 내용이다. 작품 [Phrase](2021)은 여러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김범중의 작품은 비슷한 비율과 크기로 제작되기 때문에 설치형식을 통해 다양하게 조합, 확장될 수 있다. 다양한 파장을 표현하는 띠는 복잡한 굴곡 면을 가진다. 어느 작품보다도 소리를 형태로 표현하는 공감각성이 있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춤사위나 악기 소리를, 또는 노랫소리나 말 소리 같은 발성(發聲)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만약 길이라면 진동 폭이 큰 이런 복잡한 굴곡 면을 통과하는 운전자는 엄청난 고수여야 할 것이다. ‘Oscillo’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파장과 파고들, 그리고 가정된 중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준다. 작품 [Oscillo](2018)는 같은 크기의 패널이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가운데에 동심원 구성의 형상이 놓여있다. 각 패널의 가로세로 비율을 현악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내부를 빼곡이 채우는 선들은 악기의 섬세한 현들과 비교될 수 있다.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수많은 연습을 거칠 현악기 주자의 행위에 상응하는 드로잉의 집적체다. 어디선가 오는 빛을 반사하는 세로 기둥을 빼곡하게 채우는 가로 선들은 음의 하모니와 선율을 시각화한다. 최근 작품 [Oscillo One](2021)은 소리의 반향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날렵한 볼록렌즈 모양의 막대기가 동심원 구조의 받침대 위에 수직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아니 서 있기 보다는 떠 있는 느낌이다. 가죽을 바느질하여 만든 동심원 구조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나무를 깍아 만든 봉이 서(떠) 있다. 재료의 측면에서 볼 때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모두 파장을 내장한다. 그의 작품에서 모든 것은 고유의 진동수를 가진다는 것이 드러나며, 이는 파장으로 시각화된다. 부드럽게 깍아 낸 굴곡 면을 따라 나이테가 선명한 중심의 봉은 동심원의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내부에도 파장을 각인한다. 나무 봉은 북을 울리는 채가 될 수도 있고, 이미지로 소리를 내기 위해 작가가 늘 손에 들고 있는 연필 또한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무엇인가 돌돌 말린 형태, 특히 바닥에 펼쳐져 있는 둥근 형태와 연동되어 접힘과 펼침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주름이 펼쳐진 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돌돌 말려져 있을 때 신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Oscillo, 20x100cm, 2018



작가는 [Oscillo One]을 제작하면서 ‘파장이 시작되는 근원’이나 ‘발생 증폭 소멸 이후의 파장의 근원을 표현’을,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일자와 타자의 관계’ 또한 생각했다. 일자의 이미지 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의 불일치성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겁회귀의 주체는 같은 것이 아니라 차이 나는 것이다. 그 주체는 일자가 아니라 다자이고,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이다. 영원회귀는 같음의 회귀, 유사성이나 동등성의 회귀가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떠한 동일성도 전제하지 않는다. 영원회귀는 동일성 없는 어떤 세계, 즉 모든 것이 어떤 불균등성에 의존하고 무한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차이들의 차이들에 의존하는 세계이다. 들뢰즈는 이를 강도의 세계라고도 말한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영원회귀는 다양한 모든 것, 차이 나는 모든 것, 우연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일자는 결정적인 어떤 한순간 다양한 것에 종속되어 있다. 순수한 차이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영원회귀는 지정 가능한 기원의 부재를 말한다. 


만일 영겁회귀가 어떤 기원을 지정한다면 그 기원은 바로 차이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재현은 보수적 질서를, 반복은 창조적 무질서를 말하며 양자는 차이가 있다. [차이와 반복]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반복과 재현의 대립이며, 그 점이 철학을 미학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이다. [차이와 반복]은 영겁회귀의 반복 안에서 나타나는 절대적 차이로서의 운동을 연출하면서 그 내부를 메워야 한다고 말한다. 반복이 자기 안에 차이들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특이점에서 또 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나가는 방식이다. 반복과 재현, 운동과 재현이 대조된다. 반복의 연출은 순수한 힘들과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역동적인 궤적들을 체험하게 한다. 운동을 만든다, 혹은 반복한다는 것이 의미는 도약(키에르케고르)일 수도 춤추는 것(니체) 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든 영겁회귀는 현기증 나는 운동이지, 원형의 모사가 아니다.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벗어날 때 모사는 원형의 그림자를 벗어나 표면으로 떠오른다. 


현대철학에서는 깊이보다는 표면을 더 주목한다. 이원론에 바탕한 재현주의를 탈피하려는 현대예술 또한 같은 길을 간다. 표면으로 방점이 찍혀지며 떠오르는 시뮬라크르는 본질이 없다. 모사에서 모사로 이어지는 운동 안에서 모든 것의 본질은 변질된다. 여기서는 모상 자체가 허상으로 전도된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영원회귀 안에서 카오스-유량은 재현의 일관성에 대립한다. 이 유랑은 재현대상의 일관성은 물론이고 재현 주체의 일관성을 배제한다. 작품 [Oscillo One]에서 어떤 동물이 남긴 가죽이나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으며, 이는 장지에 연필로 그어 만들어진 또 다른 주름에 상응한다. 들뢰즈는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자연과 정신, 신체와 영혼을 가득 채워야 할 것은 보다 많은 주름이라고 말한다. 주름의 운동방식은 접힘과 펼침이다. [주름]의 비전에 의하면 우주는 무한히 다양한 곡률을 가진 곡선과 같으며, 원초적 형상들의 무한한 집합이 바로 신이다. 




Oscillo One, 혼합재료,85x85x115,2021



라이프니츠와 바로크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것이 고전적 사유에 대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견고한 본질의 세계를 지지했던 데카르트와 유동성을 지지했던 라이프니츠를 대조한다. 문예 사조사로 비교한다면 고전주의와 마니에리슴의 대조이다. [주름]에 의하면 고전주의는 실체에 대해 견고하고 항구적인 하나의 속성을 필요로 하지만, 마니에리슴은 유체이다. 그것은 진동과 파장, 간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의 유동적 이미지에 대한 철학적 배경을 이룬다. 마니에리슴은 하나의 본질적 속성보다는 자발적 양태를 중시한다. [주름]의 대조에 의하면, 형상의 밝음과 대립하는 어두운 심연의 편재성이다, 김범중의 작품 또한 심연으로부터 탄생하는 계열들이다. 들뢰즈는 추상적인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계열들을 복원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추상적 원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계열들의 발산말이다. [주름]이 해석한 바로크적 관념에 의하면, 세계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다. 


‘수렴 또는 발산하는 무한한 계열들을 가지고, 또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시간의 직조를 형성하는 것’(들뢰즈)이다. [주름]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어인 계열, 발산, 유동성 등은 다양함을 긍정하는 사상으로 종합된다. 질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만 발견되는 유례없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심연밖에는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정도에 따라 구별된다...’ 그것은 유일한 세계를 긍정하면서도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김범중의 작품은 무한 계열로서의 차이적 관계를 말한다. 그의 공감각적인 작품들은 음악과 비교될 수 있는데, 작품 [Basso]에서 보이듯이 미묘하게 조율된 음의 이미지가 있다. [주름]에 의하면 음악은 ‘초감성적인 질서와 척도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면서 그와 동시에 물체적인 진동들로부터 나오는 감성적인 쾌락’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또 다른 책 [차이와 반복]은 음악의 관점에서 두 가지 반복을 구별한다. 하나는 박자고 다른 하나는 리듬이다. 그에 의하면 박자로서의 반복은 시간의 규칙적인 분할이며 동일한 요소들의 등시간적 회귀다. 반면 리듬으로서의 반복은 강세와 강도를 지닌 음가들을 창조한다. 다양한 리듬을 가리키는 특이점의 창조이다. 오늘날 반복은 기계의 영역으로 흡수되고 있다. 재현은 기계적이다. 인간, 특히 예술에 있어서의 반복은 ‘동등하지 않은 점들, 굴절하는 점들, 율동적인 사건들의 되풀이’(들뢰즈)라는 특징을 가진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반복은 차이의 역량이자 분화의 역량이다. 김범중은 반복하지만 재현하지 않는다. 재현은 동일성을 전제로 하며 이때 차이는 부정적이다. 즉 가짜이며 주변적으로 간주 된다. 그의 작품은 차이를 부단한 탈중심화와 발산의 운동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자유의 특성을 띄는 공존하는 반복’(들뢰즈)이다. 장지 위에 연필로 그어지는 영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반복은 동조(同調, coherence)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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