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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례 / 사건의 장으로서의 구조

이선영

사건의 장으로서의 구조

  

이선영(미술평론가)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강달례의 작품은 그림이라는 틀 및 현대인이 살고있는 공간을 반향하는  사각형 구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복은 차이를 추동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사각형의 구성요소인 수직/수평과 그 교차는 좌표를 만든다. 존재는 이 좌표 어딘가에 놓여있으며,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10_울렁울렁](2020)처럼 좌표화 되지 못할 때 추락한다. 이 추상적 공간 어딘가에 인간은 위치하며, 존재는 추상적 공간을 구체적인 자리로 만들고자 한다. 화가에게 주어지는 사각형 캔버스, 필자에게 주어지는 사각형 종이 또는 인터페이스는 중성적이다. 하지만 무대나 링에 오르는 배우 또는 선수 같은 입장에서 이 공간은 사건의 장이다. 사각형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같은 공간으로서의 그림뿐 아니라, 그림 속 그림같은 다차원적 공간 모두에 해당한다. 이러한 구조적 감각은 건물 같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인터페이스 또한 마찬가지다. 평면적, 또는 입체적 사각형들은 안팎의 현실 모두를 은유하는 장치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하늘과 땅을 원과 사각형으로 대비시켰는데, 사각형은 그만큼 물질적이고 구체적이다. 수렵이나 채취를 넘어서는 생산력의 단계에서 논과 밭으로 자신의 영역 구획했으며, 집, 방 등은 모두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은 자기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며, 물리적 공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수시로 가상의 방을 들락거린다. 현대의 대중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가상의 텐트를 펼치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가상공간의 설계자들은 어디에서도 접속을 통해서 개인별로 최적화된 옵션을 제공하여, 가상의 프라이버시를 사업 대상으로 삼는다. 강달례의 작품에서는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화면 속 주인공 격인 캐릭터 또한 사각형이다. 잘린 치즈 모양에서 나온 스폰지밥은 귀여움과 기괴함을 동시에 갖춘 캐릭터다. 맛있는 치즈가 만들어지기 위해 불가피하게 형성된 불규칙적 구멍들은 마치 곰보처럼 상처이자 개성의 표시일 것이다. 사각형 얼굴/몸체의 캐릭터는 다양한 사각형의 우주 여기저기를 넘나들며 이야기한다. 


작가는 작품명에 상황을 알리는 내용을 문장으로 압축하여 병기 한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 #B013_거대한 우주에 짧은 문장을 새기다](2020)는 화면 안에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 틀거리가 있지만 사방팔방으로 뚫려있다. 틀은 무한대의 공간 속에서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풍경 저편에 둥근 별들이 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우주에 대한 모델은 원보다 사각형이 더 압도적이다. 그것은 수직/수평에 근거한 근대적 좌표계가 그만큼 강력한 것임을 알려준다. 각 설탕 위의 치즈 조각처럼 육면체 위에 홀로선 캐릭터는 행성 위의 어린 왕자를 떠올린다. 그는 확고한 자리가 부재한 채 표류하지만, 이 일시적 존재도 ‘거대한 우주에 짧은 문장을’ 새기고 간다. 예술 또한 우주에 흔적을 남기는 작업 중의 하나이다. 시작도 끝도 모를 우주적 차원의 시공간 속에서 흔적들은 변화의 결과이자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힌다. 물론 원인과 결과는 선형적이지 않고 나비 효과같은 예상치 못한 관계를 가진다. 이 우주에서 도약과 비약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강달례의 작품에서 사각형 공간은 마치 마법의 원과 같이 그것이 속한 주변과 다른 규칙이 작동되는 곳이다. 마법의 원은 신화나 동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놀이하는 아이들이나 작업하는 작가들에게도 둘러쳐 있다. 이 원 안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놀 수 없고 작업도 진전될 수 없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5_애들아 초음파를 보내](2019)에서 서양 장기판 무늬로 도배된 사각 공간은 숫자로 둘러싸여 있다.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코끼리, 스펀지밥 캐릭터 등이 등장하는 이 우주는 놀이적 요소가 강하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놀이는 자유롭지만, 임의적이지는 않다. 놀이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정해져 있고 일련의 규칙을 따른다. 위반 또한 규칙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예술 또한 놀이와 같이 정해진 시공간과 규칙과 관련된다. 몰입은 그러한 경계 안에서 가능하다. 놀이와 예술에는 몰입이라는 공통적 경험이 깔려있다. 작가가 연출한 것은 저 안쪽으로 쭉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몰입적 시공간이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6_ 오늘은 나, 내일은 너](2019)에서 바닥은 서양 장기판같은 게임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는 블랙홀같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구멍은 함정같은 느낌이다. 팬데믹 이전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자못 심각한 제목은 요즘처럼 평범한 일상 자체가 단절된 상황에서 더 아슬아슬해진 삶의 게임판으로 다가온다. 개념을 포함하는 현대미술은 작품을 텍스트로 간주하게 하며, 여기에서도 유희는 중요한 요소이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4_제목 없는 이야기](2019)는 [동시시간, 동시공간] 시리즈에서 드물게도 현실 공간에 근접한다. 책이 가득 꽂혀있는 서고를 근접 포착한 장면이다. 도서관 자체가 추상적이며, 작가는 책의 제목들 대신에 코드화된 서지정보로 대신했다. 다른 작품들이 우주적 비전을 가지고 있던 맥락에서 보자면, 소설가 보르헤스처럼 도서관을 우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계를 텍스트로 보았던 현대철학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자들이 문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본다면, 자연과학자들은 숫자로 세계를 본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하던 새로운 물리학자들에 대항하여, 우주에 대한 리얼리즘적 관점을 고수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도 했지만, 숫자가 새겨진 정육면체가 던져진 주사위들을 생각나게 한다. 문자든 숫자든 세계는 확고한 토대보다는 변화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데리다가 차연이라고 표현한 바 있듯이, 텍스트는 차이에 의한 연기가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근본주의나 본질주의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가 중요하다. 변화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3_시간성](2019)에서 동화에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건물과 바코드같은 형태가 결합된 이미지의 중심에는 초승달 모양의 궤종을 달고 있는 시계가 놓여있다. 둥근 시계는 태양처럼도 보여서, 달과 짝패를 이루며 주기적으로 운동한다. 제목 ‘시간성’은 시간에 좌우되는 존재, 즉 유한한 존재를 떠올린다. 인간이 구축한 모든 상징적 우주 또한 변화한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을 규정하는 상징적 우주 또한 영원하지 않다. 다양한 시간대를 상징하는 건축적 양식이 공존하는 이 구축물은 상징적 우주의 이질성을 말한다. 가상공간 또한 시간성이 중요하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9]에서 다른 작품들에도 나타나는 장기판 무늬는 마름모 모양으로 변주된다. 그 아래에 앞/뒤/ 멈춤 등의 기호가 덧붙여져 있다. 한 손 안에 쥘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가 일발화된 시대에 놀이는 주로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그 시공간에서 주된 방식인 영상은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된다. 인기 있는 것은 반복 재생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간과된다. 작품 위아래가 같은 무늬이고 캐릭터 하나는 거꾸로 앉아있기도 한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12_수만 가지 이유로](2020)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위아래를 바꿀 수도 있을 법한 유연한 공간이 특징이다. 에셔가 그린 아무리 올라가도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순환하는 계단처럼, 무한을 암시하는 방식이다. 


공간 속 캐릭터는 그림 속의 그림으로 걸어 들어가고 검은 벽 위에 선으로 그려진 계단에 앉아있기도 한다. 그림은 어차피 환영의 공간이지만, 검은 벽 위에 하얀 선으로 그어진 계단은 환영 속의 환영이다. 강달례의 작품은 이러한 메타적 차원을 통해서 유희한다. 작품은 여러 차원의 텍스트가 짜이고 풀어지는 상호적 맥락을 가진다. 세계를 텍스트로 간주하는 것은 토대, 중심, 시점과 목적 등등 기존의 관념을 상대화한다. 작품 [동시시간, 동시공간#B010_울렁울렁](2020)의 제목처럼, 이러한 탈중심적 세계는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유동적 과정만이 있을 따름이다. 작품은 통로 앞과 위로 연결된 계단들, 그 위에 바코드처럼 새겨진 다양한 굵기의 수직 띠들, 그 위에 얹혀있는 숫자들 등 다양한 맥락이 그림이라는 하나의 장에서 짜여지고 상호작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모든 차원이 동일한 비중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공간과 가장 근접하게 표현된 통로는 하늘색으로 연결되어 있다. 겹겹의 환영의 시공간 속에서도 진정한 탈주로는 실재의 세계 향해 있는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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