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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가창 창작스튜디오 작가와의 만남

이선영

2021년 가창 창작스튜디오 작가와의 만남

  

이선영(미술평론가)


  

1. 대중문화와의 길항작용; 원선금, 권효민, 김상덕

  

원선금 작업실의 사탕 봉지들과 빈 컵들은 방치된 쓰레기가 아니라 작품 재료이기도 하다. 매일 접하고 먹고 마시는 상품의 패키지가 작품의 소재로 쓰인다. 개인적 수집만으로는 벅차서 주변에 부탁하거나 대량구매 하는 경우도 있다. 규격화된 포장재들을 하나의 단위로 삼아 평면이나 입체로 확장 시킨다. 대량생산된 제품은 오랫동안 소비자에게 사랑받으며 검증된 것들로 포장재만으로도 예쁘다. 때깔 좋은 껍데기들은 보기만 해도 단내가 나는 듯하다. 흔히들 히트 상품광고에 지구 몇바퀴를 돌았다는 표현이 있다. 작품 속 수많은 봉지들은 작은 사탕 한 알도 세계화된 상품이 되어 대량 생산 소비되는 것과 관련된다. 포장재들은 여러 종류가 조합되고 짜여 다른 사물들과 만나 이야기를 만든다. 포장재들은 걸개 겸 카페트로 짜여져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와 설치된다. 일회용 컵의 경우 투명해서 다양한 조명과 결합 되어 숲이나 또 다른 우주 같은 모습으로 연출된다. 대량 생산과 소비는 규격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관련된 개인의 취향 또한 코드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원선금, [재생된 권위](2020)



권효민 [gllstone #6](2020)(부분 장면)



김상덕,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2020)

 

권효민은 ‘내 눈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재료’들을 활용한다. 상품의 경우 대중의 눈에 띄기 쉽게 디자인된 것이고, 기존의 코드에 대한 약간의 변주 또한 본래의 팝적 속성을 내재한다. 수집물 또는 그에 대한 변주 오브제들은 빤짝거리고 화려해서 ‘환타지 공간으로 연출’하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대개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작가가 ‘환타지 공간’을 생각하는 것으로 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울 법도 하지만,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정제된 평면에 안치된 색색의 반짝이는 여러 크기의 구슬들은 애써 그 영역을 축소한다. 반짝이는 것들의 가장자리는 보다 고상한 화면을 위해 단호하게 잘려져 있다. 그것은 예술가로서 대량생산된 상품에 미혹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일까. 고급예술에 대한 금욕주의적 정서와 끝없는 구매 욕구를 자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상품의 무절제함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맥락에서 존재와 의미를 견준다. 근대에 오랫동안 장식이었던 시각예술의 전통에 대한 단절이 시도되었지만, 장식과 예술은 한번도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캔버스 천을 그대로 벽에 붙여 작업하고, 그대로 전시도 하는 김상덕의 작품은 낙서화 같은 자유로움이 있다. 캐릭터 형상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이 녹아내리거나 실루엣으로만 표현된 인물상 등은 화면의 열기 속에서 부딪힌다. 작품 제목 중 하나인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는 충돌과 폭발 등이 횡행하는 김상덕의 화면을 잘 표현한다. 그의 작품은 전쟁을 떠올린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전쟁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축제다. 축제 또한 터트리기에 바탕한다. 엔트로피가 극대화되어 의미를 결정짓기 힘든 상황에서 간간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의 단편들은 작가가 좋아한다는 ‘군인적인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군사적 패러다임은 억압적이면서도 생산적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보면 철저히 규범적이어야 하는 군사적 패러다임은 역설적으로 무질서를 낳는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질서 자체가 취약함을 암시한다.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역으로 경계가 필요한 상황, 요컨대 금기와 그 위반이라는 방식은 놀이와 예술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2. 예술의 사회적 맥락; 나동석, 이승희, 현수하 

  

나동석의 주제는 ‘공장-노동자’나 ‘시스템’같은 거대한 사회적 문제다. 사회는 사회고 개인은 개인같지만, 그의 작품에서 양자의 연결고리는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한 문제들이 개인한테 가하는 압박은 ‘수면제-불면’을 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정교한 장치들로 이루어진다. 작가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할 정도로 정리가 잘되어 있다. 사진, 영상, 텍스트, 라이트박스 등으로 관객에게 객관적 상황을 보고하거나 현상을 분석해주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도면화 시키는 작업’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작품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오래된 관심이 깊이 자리한다. 예술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선명하다.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의 역할이라는 대서사를 포기하는 순간에도 예술은 부정적으로나마 언급된다. 심적으로나 물적으로 거대한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희생으로서의 예술은 조그만 일상에 만족하는 소시민적 삶과는 달라야 하는 명분과 당위를 가지는 것이다.  

 


나동석, [공장-노동자](2020) 중의 하나.



이승희, [사회적 버튼](2020)



현수하, [덕영탕](2020)

 

이승희의 작업실 칠판에는 작업의 화두라 할만한 문장들이 가득 써있다. 그것은 수시로 바뀌는지 지웠다 썼다 할 수 있는 칠판은 효율적이다. 작품에도 메시지와 연관된 문장들이 발견된다. ‘우리가 남이가’, ‘바르게 살자’,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등. 문장 외에 깃발 등, 발신되지 마자 바로 결과가 나와야 할 사회적 기호들이 등장한다. 거대한 우상처럼 세워진 황금색의 [사회적 버튼]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의 강압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작품 속 메시지는 물질적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가령 작품 [우리가 남이가]에서의 그 문장은 거대한 간판처럼 전시장에 붙어있다. 망국적 지역감정과 관련된 잘 알려진 그 문장은 암암리의 소통을 넘어서 공적으로 까발려진다. 즉 낯설게 된다. 이승희의 작품은 낯설게 하기의 정치적 기능을 잘 보여준다. 낯설게 하기는 일단 낯익은 것에 의지해야 한다. 부정/긍정적인 것은 보존된 후 지양/지향되는 것이다. 작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에서 주어에 해당 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반쯤 지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수하의 작품에서 대상은 심하게 흔들리는 듯이 보인다. 대상과 연동되는 의식이나 무의식도 흔들린다. 도시풍경을 이루는 수직 수평의 축을 증식시킴으로서 생겨난 결과다. 그것은 공간을 보는 작가의 관점이기도 하다. 공간은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좌표에 의해 규정된다. 현수하의 작품에서 흔들리는 것은 풍경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좌표 그자체다. 우리를 추상적 좌표 어딘가에 지속적으로 재배치하는 권력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게 한다. 이러한 좌표들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쯤 와있는가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제공하려 한다. 마치 주식시장의 전광판처럼 매 순간 가치는 다르게 매겨질 것이다. 집이든, 놀이터든, 목욕탕같이 오래된 건물이든, 작품 속 공간은 급격하게 사라진다. 그렇지만 사라질 것을 대체하는 새로움은 명확하지 않다. 변화는 새로움에의 기대가 아니라, 불안하게 다가온다. 코로나로 운행을 멈춘 시외버스들이 한 가득 정차되어 있는 터미널을 그린 [선과 선이 만나면 면이 되지 않는다]처럼 말이다.


  

3. 모든 것을 먹고 토해내는 회화; 진서용, 박규석, 최윤경  

  

진서용의 그림은 통상적인 캔버스 틀을 벗어나곤 한다. 입 간판이나 사다리, 차창 모양도 있고, 연작처럼 같은 크기의 그림을 여러 방식으로 붙이거나, 전시장 모서리에 걸쳐 놓기도 한다. 그림들은 설치적인 방식으로 운용된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틀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추상적 화면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현대미술사는 지시대상을 벗어난 추상화가 프레임의 실험을 통해 그 스스로가 구체적인 대상이 되려는 시도들을 보여준다. ‘경계를 흐리며 경계를 보게 하는 유한한 시간성에 대한 의미 탐구’라는 방향성을 담은 작품은 경계의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의미의 불확실성에 대해 소통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고민이 담겨있다. 새벽녘을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을 듣다 보니, 새벽의 바람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화면 가득한 운동감은 재현적 대상을 생략함으로서 생겨난 효과이다. 시각성보다는 촉각성이 강한 화면들은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끝없는 과정이 바로 회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진서용, [dawn standing by me](2020)



박규석, [cloudy love](2021)



최윤경, [덩어리](2018)

  

기이한 분위기가 가득한 박규석의 작품들은 ‘꿈에서 시작된 흔적’들이다. 대상이 나타나긴 하지만 몽롱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은 개인의 무의식을 투사한다. 합리성을 벗어난 뜬금없음은 꿈과 무의식의 특징이다. 또는 작품 무대로 등장하는 쓰레기장처럼 온통 뒤죽박죽이다. 거기에는 잃어버린 고리들이 있다. 일어나서 아예 꿈의 내용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느낌은 남는다. 꿈과 무의식은 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작가는 ‘무의식에서 수집된 나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나라는 세계의 서사가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미술을 꿈과 무의식 그 자체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광기와 예술이 같은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가 작품이라는 언어로 표현될 일종의 대상이라면, 대상과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꿈과 무의식 자체에 내장된 간격에 또 다른 간격이 가세하는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에 벌어진 이 간격에서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최윤경의 작품목록은 한 작가의 작품일까 싶을 정도의 다양함이 특징이다. 작업실에서는 주로 회화를 보았지만, 목록에는 책을 변형시켜 조형적으로 설치하거나 기하학적 단편을 벽면에 설치하는 식의 작품들도 있다. 책이든 기하학적 단편이든 그것들은 딱 떨어진다. 그것들의 외곽은 아무리 복잡해도 분명하다. 하지만 회화 작품에서의 풍경이나 몸은 불확실하다. 어떤 풍경에 [목탄과 묽은 베이지]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작가는 거기에서 이런저런 지형학적 정보가 담긴 풍경보다는 물감이라는 물질과 붓질이라는 몸의 자취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몸일 경우에는 단편화되거나 해체된다. 남성의 국부를 그린 다소간 충격적인 작품은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남성도 여성만큼 (성적으로)대상화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러나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성적 자세를 취한 여성의 몸에서 썩은 물이 줄줄 흐른다. 비천함(abjection)이편재하는 몸뚱이는 명확한 정체성, 즉 자기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최윤경의 그림에서 물질(물감)과 육체(화가)는 투쟁하고 있다.     

  

출전; 가창창작스튜디오 작가와의 만남(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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