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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태 / 매번 다시 짜여지는 세계

이선영

매번 다시 짜여지는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새로 지은 작업실에 가본지가 엇그제 같은데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고양시 작업실 앞마당은 그동안 해온 작품들 및 모형들이 서 있는 작은 야외 미술관이다.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마당 여기저기에서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주요 작품을 세워놓고 오다가다 늘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작품에 이미 있었지만 잠재된 상태였던 것이 일깨워질 수도 있고, 저때와 이때의 생산물을 새롭게 조합해 볼 수도 있다. 그것은 김인태의 작품이 통시적이기보다는 공시적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자기 복제나 절충주의에 매몰될 위험이 있지만, 지금은 단선적 진보의 패러다임이 무색해진 탈 모던의 시대, 새로움과 이질성은 항목과 항목 사이에서 생성된다. 그의 작업은 기하학적이든 유기적이든 경계를 넘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모더니즘 시대에 기하학과 유기적인 것은 종합되었지만, 김인태는 종합과 병치라는 어법을 동시에 사용한다.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옛것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중의 작가에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수십 년의 작품목록에도 겹쳐지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미듯이 받은 영감의 명확한 출처와 목적은 정해질 수 없다. 끝없는 변주가 있을 따름이다. 이번 전시에도 출품될, 2000년대 초반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변주를 보여주는 수직의 기념비인 [무한주]와 [상승하는 기둥]은 최근 작품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유희라고 보기에는 돌, 브론즈, 도자, 여기에 흑피옥 등으로 만들어진 유물 오브제 등의 재료들은 너무 강고하다. 재료의 저항을 이겨내고 만들어지는 복합적 작품은 본질이 아닌 차이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다양한 시도를 싸안는 사유는 (후기)구조주의같은 현대철학이다.

 

구조주의를 시작한 언어학자 소쉬르가 언어를 차이의 체계로 정의한 이래, 기호들을 개방되었으며 의미 또한 결정되지 않는다. 언어가 주체의 형성에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주체 또한 언어처럼 불완전하고 불확정적이다. 기호든 주체든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격동의 시대인 1980년대 한국에서 미대를 다녔고 유학 후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펼치던 시기에 IMF 등으로 우울한 시대를 통과한 세대인 그는 이전 시대의 총체적 지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삶의 다양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종합 대신 복합이 선택된 듯하다. 하지만 그가 꾸준히 해온 작업 그자체에 회의한 적은 없다. 총체성을 넘어선 ‘차이의 체계’같은 언어학에 기반한 현대적 사유가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부문이 예술이기도 하다. 탈 모던의 시대가 되자 철학자들의 어조는 그 어느 시대보다 심미적이고 수사학적이 되었고, 개념화된 현대미술과의 접점도 보다 긴밀해졌다. 


김인태가 유학했던 미국에서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를 비평에 널리 적용시킨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과 데리다를 총체성/차이를 대변하는 철학자로 압축한다. 전자가 필연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우연성에 경도된다. 김인태의 작품에는 자의적이라고 보일만큼의 복합적인 형식에 실린 시대정신의 변화가 읽혀진다. 어떤 재료를 쓰든 깔끔한 단면을 유지한 채 작가가 고안한 형태를 모듈 삼아 반복하면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념비적 구조이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상승하는 기둥]은 다른 시기의 다른 재료와 형태로 만든 것들을 접목하면서 지금도 자라는 중이다. 여기에 다른 재료로 단위구조를 반복하거나 세월에 닳은 듯한 표면, 심지어는 돌에 모터를 달아서 움직임을 부여하는 등의 변화가 가미됐다. 기하학적 형태들이 조합된 단위들이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오래된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이 조각상은 그자체로도 인체와 다른 동물들이 조합된 상상의 동물이다. 


동양의 고전 산해경에 나오는 기이한 생물체들을 입체화한 듯한 존재들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맥락에 수시로 파고든다. 김인태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원시적 형태가 만난다. 근대에 원시적인 것이나 이국적인 것은 새로움의 원천으로 활용되었다. 그에게 고풍스러운 것은 모더니즘처럼 조형적 요소로 흡수되기 보다는 병치된다. 그는 차이를 보존하거나 ‘말소하에 보존’(데리다)하며 이질적인 것의 접목을 강조한다. 다양한 각도를 가져 이미 잠재적 역동성을 가지는 형태인데 한술 더 뜨기가 행해진다. 이번에 전시될 최근 작품에는 유물 형태의 오브제까지 가세하면서 복잡성은 증가한다. 작가는 오래되어 보이는 오브제의 출처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용, 또는 전유 된 것이다. 자신의 이전 작품이나 (유사)유물이 기호라면, 작가는 그것을 전유하고 반복하며 재인용 한다. 그것은 원래의 그것들이 자리했던 맥락에 한정되지 않는다. 







원저자의 의도이든 본래의 역사이든, 전래된 관습이든 모든 기호들은 ‘인용적 접목’(데리다)의 대상이 된다. 김인태의 작품은 ‘기호의 반복가능성’(데리다)을 활용하며 때로는 남용한다. 기호는 구성된 것이기에 재구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의미는 ‘시작도 끝도 없는 인용의 연쇄 위에 발생한 사건’(데리다)이다. 사라 살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에서 인용과 전용에 대한 후기구조주의 언어 이론의 핵심 사상들을 소개하면서, 후기 구조주의는 통합보다는 차이가 종결보다는 개방성이 강조된다고 지적한다. 김인태의 작품에서 입체화된 삼각형, 사각형, 원이 여러 방식으로 조합된 기하학적 형태는 작가의 의도가 관철된 투명한 구조를 가진 한편, 근본을 알 수 없는 돌멩이같은 (가짜)유물은 불투명성을 도입한다. 작업실 한 벽을 가득 채운 십 수 년 간 그가 수집해온 것들은 홍산문화, 요하문명 등으로 불리워지며 우리의 먼 선조(동이족)의 무대라고 추정되는 선사시대의 유물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진 것이다. 


검게 물든 돌(黑皮玉)로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기기묘묘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흑피옥은 말 그대로 검은색 안료를 침착시킨 돌로 선사시대에 제작된 조각상들이다. 수만점이 출토되었고 유럽에서는 이미 전시회까지 열렸다고 한다. 작아도 묵직한 이 밀도 높은 돌을 상징적인 형태로 가공하는 솜씨는 수천년 전 제대로 된 공구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다. 물론 현재의 흑피옥 조각품은 값싼 노동력으로 뭐든 주문자의 요구가 있다면 솜씨 있는 기술로 만들어지는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지만, 진품이든 가품이든 무명의 장인이 제작한 점에서 유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가짜 유물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한때 널리 퍼져있다가 시간의 시험을 거친 것들은 원본/복제가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속성을 가진다. 만약 어떤 것을 최초의 것이라 그것은 우연을 필연화 하는 것일 따름이다. 시조나 원조, 또는 영향 관계 같은 자리바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유물의 경우 완전한 정보게임이 아니라 새로 발굴될 때마다 기존의 매트릭스는 출렁대며 다시 짜여지는 가변성이 있다. 김인태는 역사적 유물뿐 아니라, 현실도 작품도 심지어는 인간의 정체성도 그렇게 가변적이고 열려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가 참고하고 활용하는 만주 벌판에 흩어져 있는 선사시대의 유물은 수 천 년 동안 거듭해서 만들어져 왔으며 (지금은)중국에서 관광상품이나 개인 수집품 용으로 재생산된다. 타제 석기가 사용되던 시절에 현대의 첨단 공구들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 불가사의한 조각상들은 아직 정식 역사로 등재되려면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실증과 상상을 더 하여 수많은 설을 낳고 있는, 그래서 역사가 아닌 예술가들도 관심이 있을 만한 매력적인 고물(古物)이며, 수 만 점이 출토된 이후에도 지금도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제의에 사용되었을 상징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사물들은 여러 동물들이 복합된 하이브리드 형태로, 작가가 그것을 접하지 못했던 시기에도 자신의 작품 유전자에 내재 되어 있던 것이다.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듯이 한 작가의 상상력에도 문화적 유전자가 발현된다. 김인태는 그 존재 양식이 다른 예술과 사물을 결합한다. 그의 작품은 역사가 아니라 계보학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대상을 실증적 차원에서 그 기원과 목적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과학자와 역사가의 몫이며, 그조차도 철저히 상대적일 따름이다. 미셀 푸코의 사상에 공감하면서 역사나 주체에 대한 급진적 해석을 계승한 주디스 버틀러는 니이체와 푸코의 계보학이 ‘진리, 또는 심지어 지식조차 목표로 하지 않는 역사탐구 양식’이라고 본다. 이러한 계보학은 ‘사건들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출현하는 조건들, 즉 결국에는 짜임과 구별되지 않는 출현의 순간을 탐구하는 것’(주디스 버틀러)이다. 실천들 또한 ‘이미 담론적으로 조정되고 구성된 장소(site)에서 일어난다’(주디스 버틀러). 육체나 성적 정체성 또한 계보학적으로 파악되는데, 그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사라 살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에서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를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육체는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경계, 고정성, 표면의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정화하는 물질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정체성을 해체한 나머지 ‘행동(deed) 뒤에 행위자(doer)가 없다’(버틀러)는 상식에 반하는 급진적 주장은 퀴어 운동 등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 파장은 사회 운동에 한정되지 않는 풍부한 생산성을 가진다. 김인태는 유희에 가까운 복잡한 조합을 통해 어떤 대상, 담론, 심지어는 주체가 구성/해체되는 과정을 실험한다. 돌이나 브론즈가 아닌, 흙으로 만들어 구운 작품은 더 유연하게 형태의 조합이 행해진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들을 이루는 도자 작품은 관의 형태를 기본으로 다양한 굵기와 길이, 단면, 형태로 엉켜지며, 그 사이사이에 옥조룡같은 오브제를 끼워 넣기도 한다. 


석기시대의 유물인 옥조룡은 용모양의 옥기로 돼지나 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에서 발굴 중인 요하문명(홍산문화)은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와 있는 동이족, 즉 한민족의 역사와 관련된다는 가설이 있다. 기원전 4,500년경 홍산 우하량 유적지에서 쏟아져 나온 곰 토템이나 옥(玉)유물 등은 [한단고기]에서 등장하는 환인과 환웅, 즉 단군조선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가설에 따르면, 중국의 중원문명보다 3,000년 이상 앞선 이 문화들은 잃어버렸던 동이족의 고대 역사였다. 이러한 주장이 주변의 다른 민족과의 경쟁 속에서 자민족의 자부심을 고양할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계보학으로 대체해서 보는 관점은 기원에 얽힌 근본주의나 본질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자연이나 규범에 대한 확고한 가정 또한 베제한다. 작가는 근본이나 본질 또한 구성(해체)되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의 다시 쓰기는 단순한 재현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역사와 관련된 정체성들은 ‘단지 거기에 있으며, 고정되었고, 최종적인 것이라고 가정’(주디스 버틀러)하지만 계보학은 보다 개방적이다. 후기 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은 이러한 개방성이 궁극적 해결을 장담하는 기존의 정치 지형을 상대화한다. 무엇인가를 담는 도자기를 대량으로 제작할 때 사용되는 기구에서 가래떡 뽑히듯 나오는 여러 모양의 관들을 그릇 제작이 아닌 조형적 실험에 활용한다. 관들은 수직 수평으로 켜켜이 쌓기도 하고 예측될 수 없는 방향으로 조합되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한 작품에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가마에서 나온 최종적인 형태는 어떤 조합이든 일체화된 형태이다. 과정 중의 형태를 일순간 응결시킨 형태들은 서로 다른 구조들을 융합한다. 벽에 거는 부조적 형태는 마치 장기처럼 복잡하게 얽힌 관의 흐름을 보여준다. 무엇인가 통과시키는 관은 원래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 그것들은 연결되어있는 만큼 단절되어 있다. 


아니 단절은 연결의 전제조건이 된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관의 뭉치들은 다른 굵기, 다른 단면, 다른 질감들이 공존한다. 가마에서 소화되는 규모가 유일한 한계일 따름이다. 김인태의 작품은 구조적이지만 견고한 구조가 아니라 ‘변형(trasformation)의 체계’(장 피아제)로서의 구조를 중시한다. 어디론가 향하는 관의 형태를 모델로 한 작품들은 구조만큼이나 구조를 변형시키는 ‘사건(시간성, 우연성)’(레비 스트로스)을 강조한다. 조각가가 바라보는 도자의 매력은 일체감이다. 용접으로도 어색한 복잡한 조합도 결국은 불가마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어떤 기능을 향해서 내달리는지 알 수 없는 다양한 관들은 깨지기 전까지는 일체형 구조로 거듭난다. 일시적인 것을 반영구화 하는 효과는 지금 지배적인 것들 또한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돌이나 브론즈,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 같이 단단한 구조물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실제성(facticity)을 강조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변주를 통해 이전의 행위를 다시 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실험을 정크 아트 식으로 얼기설기 할 수도 있겠지만, 김인태는 도자 작업을 통해서 이질적 요소들을 반영구적으로 결합시켰다. 가마의 열기가 결합시킨 것일 뿐 요소들의 조합은 돌조각이나 용접 조각에 비해 느슨하게 보인다. 구성주의 조각에 내재한 ‘합리적 질서’, 가령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조각사의 흐름]에서 말한, 중심과 주변, 내부와 외부 사이의 투명한 연결 관계를 해체시킨다. 현대조각사에서 그러한 해체를 논리적으로 완료시킨 사조는 미니멀리즘이다. [현대조각사의 흐름]에 인용되어 있듯이 ‘그 질서는 합리적이며 내재적인 질서가 아니라, 하나 뒤에 다른 것이 뒤따르면서 연속되는 단순한 순서와 같은 것’(도날드 저드)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현대조각의 흐름에서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되는 과정’이 완결된다고 해석한다. 


내용이 형식을 낳는다면 형식 또한 내용을 낳는다. 사뭇 과도해 보이기까지 한 이러한 유희는 조각가로서 그가 다루는 재료들이 결코 연필이나 붓처럼 유연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무모해 보인다. 수직의 반듯한 형태와 그 변주가 공공 조형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미술관 전시에서는 맘껏 실험적인 시도, 즉 엄격한 수직의 기념비에 내재 된 억제적 요소를 풀어헤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1991년 첫 개인전이래 하이브리드 형식을 기본으로 해왔던 그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돌연변이 괴물같은 형상들은 잘라낸 배추나 사과같은 평범한 소재조차도 기괴한 모습으로 변화시켰던 그는 오래된 물건의 수집에도 괴물 형상에 대한 애호를 드러냈다.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은 그 내부가 충분히 비워있어야 가능하다. 또한 접속의 지점들도 필요하다. 현대철학에서의 텍스트, 정보사회의 코드 등은 그러한 위상을 가진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수집물의 대부분은 모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디엔가 걸었던 기물의 흔적이 역력하다. 생각될 수 없는 동물의 조합인 괴물은 또 다른 맥락과 연결되기 위한 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인태가 한때 몰두했던 텍스트 작업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간주한 현대철학을 반향함과 동시에, 텍스트가 가지는 이데올로기나 물성 또한 가시화했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유명한 작품 [love]를 패러디 한 최근 작품은 한글로 만들어진 ‘사랑’이며, 그자체의 물성을 가지고 서 있다. 한글도 영어와 같은 알파벳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디자인되기에는 좀 더 까다롭다. 작가는 한글 철자의 일부를 살짝 바꿔 놓는다. 뒤집어진 시옷이 있는 ‘사랑’은 배반과 위반을 넘나드는 약간의 차이를 통해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글자 작업은 그가 해왔던 텍스트 작업의 한 줄기이다. 책의 페이지들을 한데 뭉쳐서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변형시킨 오브제 작업은 신성화된 텍스트를 붙이고 잘라낸 다음 화폐를 나타내는 기호로 붙이기도 했다. 


거의 종교의 위상을 가지는 모택동 전기를 비롯하여 종교적 대상과 다름없는 텍스트를 또다른 텍스트들로 뒤덮거나 달러화 기호로 변형시키는 등의 작품은 담론에 내재한 권력을 드러냄과 동시에 해체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십자가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여러 기원을 가지는 이미지들을 중층적으로 배열하기도 했다. 하나하나 알아볼 수는 없지만 흔적들이 남아있는 텍스트들은 순수함을 오염시키는 불경한 행위로, 종(種)적인 순수함을 어지럽힌 괴물의 양상과 같다. 본질로 간주된 것은 사라지고 변주만이 남는다. 그것은 세상을 텍스트로 보는 현대철학의 관점과 닿아있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구조주의와 예술은 모두 ‘자르기와 결합’이라는 두 가지 조작에 의해서 정의된다. 김인태의 이전의 책 작업이나 근래의 도자작업에는 ‘짜여진 것, 얽힘, 짜여진 방식’(바르트)으로서의 텍스트가 있다. 








텍스트 이론은 텍스트 뒤에 가려진 하나의 의미나 진리를 강조하기 보다는 텍스트가 상호 엮어져 가며 만들어지는 생성을 중요시한다. 예술은 물론 세상마저도 텍스트로 보는 관점은 매우 확장적이다. 그것은 텍스트가 기존의 텍스트들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연결된다. 서로를 참조하고 반영하는 텍스트들은 진리/허구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텍스트는 원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불완전한 원초적인 것을 대신하는 보충’(데리다)만이 있을 따름이다. 김인태의 작품은 라깡이라면 이미 구성되어 있는 기표라고 표현했을 상징적 우주에서 주체도 대상도 세계도 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은 모든 것을 다시 쓰면서 ‘창조’한다. 여기서 작가는 ‘지고한 창조자라기보다는, 단지 변화시키는 기술과 결합의 기술’(바르트)만을 가진다. 김인태의 최근 작품들은 ‘텍스트를 짜고 있는 코드들을 계속 늘려 나가면서 ‘존재의 통일성이나 의미의 통일성이 아니라, 작품들의 다양성과 측정 불가능성’(리오타르)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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