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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들려주는 대안의 역사들

이선영


이방인이 들려주는 대안의 역사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전시 부제는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다는 상실감에 머물지 않고 당차게 치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부제는 ‘동아시아 근대화 역사’에 ‘비판적 젠더 의식’을 개입시키기 위해, ‘20세기 전반부 격동의 역사 속에 놓인 하위 주체 여성들의 역동적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 [파친코](이민진 작, 2017)의 첫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역사가 망쳐 놓은’ 대표적 사례는 제국주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아시아 근대국가가 자리 잡기 위한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 여성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역사나 국가라는 단어에 성이 있다면 그것은 남성이다. 여성이 남성의 일부에 속해서 경쟁했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역사의 희생자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들은 삶이라는 투기장에서 늘 있기 마련인 부류인가?




전시전경(사진제공; 아르코미술관)



참여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범주에 여성들이 속함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에 포함된 분파적 사고 또한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만약 그 때의 모순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면? 힘의 관계 그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는 약자를 망쳐 놓기에 충분하다. 당장 페미니즘이라는 이슈가 떠오르지만, 전시 작품들은 무엇인가를 강하게 주장하기 보다는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개인과 역사의 관계를 펼쳐 보인다. 가까운 전통과 근대 등, 일단 지나간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작품은 남아있는 몇몇 실증적 자료/인물과의 대화적 상상력이 중시되었다. 무릇 모든 자료/인물은 자신이 속한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예술이 객관적 재현이라는 과학에 보다 적합한 과제를 수행할 필요도 없다. 절실한 문제의식만이 흐릿한 시간의 흔적에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자료가 단순한 소재주의를 넘어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투입되어야 할 에너지가 막대하다. 


각 자료는 그자체로 이미 무엇인가 말할지 모르지만, 자료가 여러 개 만난다면 그것들은 각자의 주장으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물론 자료에 대한 상상력이 중요한 것이지 상상력 자체는 아니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작품에는 실험적 다큐멘타리(제인 진 카이젠), 아카이브(정은영, 남화영)가 받쳐준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양자의 관계, 독백이 아닌 대화가 중요하다. 이러한 대화에 시각적 형식의 효과를 살리는 것이 관건이다. 공연과 영상 등, 각 장르는 확장의 방식을 통해 만날 수 있지만, 공연장이나 극장이 아닌 미술관이라는 장소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내용 이해의 바탕이 되는 시간적 서술 뿐 아니라, 영상이 비춰지는 표면의 공간적 관계도 중시한다. 전시 작품들은 작가가 먼저 공감했으며 공감을 유도하려는 이야기--그때도 똑같았구나, 어떻게 저 상황을 이겨냈지 같은 문제의식--를 들려준다. 1층의 작품들은 영상설치, 2층의 작품은 영화에 가까운 형식이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 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촬영: 홍철기. ©남화연(사진 출전; 아르코 미술관)



작품마다 방점은 달리 찍혀 있지만,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게 공통적이고, 앉아서 찬찬히 볼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다. 그렇지만 각 작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를 따른 강제적 서사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이 시점 저 시점에서 이 지점 저 지점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역사가 이즘으로 고양되는 역사주의의 선형적 논리는 이러한 조형적 영화에서 해체된다. 히스토리라는 단어에 분명하듯, 그동안 여성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정치경제사는 물론 문예사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자는 연동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연인으로, 무한정 사랑을 퍼주는 어머니로 나타났다. 그러한 이상이 너무 크게 투사되기에 여성은 부정적 존재로 추락하기도 했다. 남성의 창조를 도와줄 뿐 자신은 창조할 수 없는, 여성의 창조를 가족의 재생산에 한정하는, 지금도 여전히 ‘보편적’인 불편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개인을 앞세우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삶의 재생산에 머무는 것을 넘어 삶을 창조하려는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주장과 조응하는 여성의 이해관계라고 할 수 있다.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여성 예술가의 역사를 복구하려는 시도는 페미니즘의 주요 과제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문제가 그렇듯이 현재와의 관련이 중요하다. 앎을 위한 앎은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동어반복적이다. 남화영의 작품에서 최승희는 여전히 힘의 역학관계가 선명한 시대에 ‘코스모폴리탄’ 여성/작가가 당면한 현실을, 정은영(siren eun young jung)의 작품에서 우리 주변에 그림자로 존재하는 다양한 성적 소수자들은 여성의 굴레를 함께 둘러쓰고 있기에 동지적 관계를 가진다.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의 작품에서 죽음(분리)과 삶(화합)을 연결하는 신화적 존재는 작가 자신의 실존과 겹쳐진다. 전시 감독(김현진)은 물론 참여 작가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꾸려진 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 전시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대안의 역사를 말하는 무대가 되었다. 페미니즘적 주제라 할 만한 내용을 다룬 한국 미술사상 가장 큰 무대이지 않았을까. 국제적 감각과 어법을 갖춘 작품들은 페미니즘이 보편과 특수가 긴밀하게 만나는 장임을 의식한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비디오 사운드 설치, 멀티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5.1 입체음향, 가변크기. 사진: 홍철기 © 정은영 



1,2 층으로 나뉜 전시장은 소리의 간섭을 피하고 화이트 큐브가 아닌 블랙박스의 어둠 속에서 관객의 동선을 유도하는 다양한 장치들도 볼거리가 되었다. 마당극처럼 바닥에 앉아서 볼 수 있는 정은영의 작품이 상연되는 공간 외벽에서 내려오는 반짝이 커튼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나풀거리며 축제 분위기를 고양한다. 그것은 영상의 주인공들이 모두 무대예술가라는 점과 조응한다. 남화진의 작품에서 메인 화면 양 옆으로 설치된 4개의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 또한 반짝이는 조명을 받았을 주인공과 어울린다. 둥글게 번지는 조명이 가득 포착된 화면은 아름다우면서도 덧없다. 꽃 또한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작가는 꽃의 관상적 아름다움 보다는 동적인 면과 힘을 강조한다. 연약한 것이 가지는 힘이다. 남화영의 작품에서는 꽃도 춤을 추는 듯하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꽃이지만, 그것은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생명력의 상징이며, 그때의 무용가든 지금의 무용가든 그 비밀을 알고 싶은 자연의 위대한 모델로 다가온다. 


꽃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펼쳐 보여 화면 한 가득히 강조할 수 있는 영상의 힘이 꽃-여성에 대한 대안적 서사를 가능하게 했다. 제인 진 카이젠의 작품에서는 메인 작품을 보고 나오는 관객에게 하나의 점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과 세계관이 담긴 작은 영상을 보여줌으로서, 여성의 역사가 펼쳐졌던 동아시아 각지에서 찍어온 영상들에 흐르는 기조를 부연한다. 군데군데 쌓인 눈과 하나가 된 작가의 모습은 타자들에게 피해를 끼치곤 하는 ‘인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라는 보다 큰 역사와 하나가 되려는 겸손한 존재를 전지적 시점에서 조망한다. 제인 진 카이젠의 영상에는 드론으로 촬영된 시점이 종종 나오는데, 그것은 초월적 관점이기 보다는 개인이 각자 부대끼는 현실, 즉 그것이 모이면 역사가 될 상황을 상대화한다. 김현진 전시감독이 모은 세 여성 작가는 대안의 역사를 재구성기 위해 또 다른 여성예술가들을 호명했는데, 그들이 미술가가 아니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프로젝션 이미지. 사진: 홍철기 © 제인 진 카이젠 



민족—이 전시의 필진들이 많이 인용하는 에릭 홉스봄의 논지에 의하면 ‘만들어진 전통’--이 국민으로 탈바꿈하려는 근대적 과도기에 여성 미술인도 드물었지만, 대개 회화에 한정된 양식(그것도 많은 부분 자료로 남아 있는)은 정적이다. 평면적 자료를 영상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점은 식민지 시대의 여성 무용가 최승희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남화진의 작품에서 절묘하게 처리된 부분이다. [반도의 무희](2019)에서 흐릿한 자료 사진들을 확대할 때 보이는 거친 인쇄 흔적을 고화질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대목은 정보와 무관한 흔적들이 심미화 한다. 초상화의 오점들 또한 영상적 탐닉의 대상이다. 영상은 육안으로는 간과할 부분들을 주목하게 한다. 여기에는 공간을 시간화 하는 기술이 있다. 최승희의 안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는 결기 있는 무용가의 동작들은 아름다움에 힘과 상징을 싣는다. 모두 2019년에 제작된 신작이지만, 작가들이 주목한 시기가 현재가 아닌 만큼 보다 살아있는 듯한 매개자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각 작품에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인물/나레이터가 존재한다. 그 점은 정은영에게 가장 두드러진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말하지 않지만 각자의 정념을 실어 강렬하게 움직인다. 작품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에는 생존하는 여성 국극 남역 배우 이등우 뿐 아니라 현재적 후예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품에는 이등우의 퍼포먼스 비디오들과 그 계보를 잇는 퀴어 공연이 펼쳐지며, 무선 헤드폰을 쓴 동시대 젊은이들도 박자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재연되었다. 무대 초입부에 배치된 국극 관련 영상은 박정희 정권 이전까지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지만, 그 후 쇠락을 길을 걸어 하위문화가 된 상황을 보여준다. 정은영의 작품에서 빈 무대 위에 서있는 국극 배우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트렌스 젠더, 레즈비언, 여성장애인 예술가 등이 함께 하는 이유이다. 지금과의 연결을 위해 등장하는 여성/예술가들 또한 영상에 어울릴 법하다. 각각의 작품에는 서사의 현재성을 위해 소수자 공연예술가들, 현대 무용가, 무당, 때로는 작가 자신 등이 등장하여 대화적 관계를 이끌어 간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 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촬영: 홍철기. ©남화연(사진 출전; 아르코 미술관)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비디오 사운드 설치, 멀티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5.1 입체음향, 가변크기. 사진: 홍철기 © 정은영 



민초의 애환을 달래주는 무당(제인 진 카이젠), 국극 배우들(정은영)과 여성 무용가 최승희(남화진)라는 주인공들 이야기는 모든 지나간 것들이 그러하듯 애수에 잠겨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바리의 신화를 불러낸 제인 진 카이젠의 작품에서 제주 무당의 행위(굿)와 목소리는 지배적인 역사의 서사에 흐르는 선형성을 끊어내고 다시 잇고자 한다.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는 화면에서 시각적인 연결고리들이 절묘하다. 제인 진 카이젠의 작품 [이별의 공동체](2019)는 ‘바리설화를 근대화 과정의 여성 디아스포라의 원형으로 해석’한다. 제주태생의 작가는 제주 무당의 퍼포먼스와 음성을 여러 다른 목소리와 함께 들려준다. 작품은 동아시아 역사와 관련된 여러 국가에서 촬영 되었는데, 특히 남한의 근대사에 중요한 역학 관계를 형성해온 북한에서 촬영된 부분은 이방인(제주 태생 덴마크 국적)의 장점이 드러난 대목이다. 단발성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관심과 조사가 망라되어야 가능한 작품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소간 복잡하다. 


어릴 때 해외로 입양된  제인 킨 카이젠은 자신의 실존과 무관하지 않은 이산(離散)의 드라마와 역사, 그리고 신화를 엮어 짰다. 최소한 불혹을 넘긴 시간이 깔려 있다. 작가는 역사보다 더 긴 시간대인 신화를 무대 삼아 역사가 신화를 극복한 단계가 아닌, 신화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바리의 신화는 역사가 준 상처를 치유하려는 작가에게 중요한 매개가 된다. 시공간을 편집하는 영상매체는 그자체가 균열이 많은데다, 여성/작가는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많기 때문에, 또는 전형적인 역사의 서술방식인 역사주의의 매끈한 논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 졌다. 게다가 어느 작가도 한 화면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무대예술이나 영화와도 다른 조형예술 특유의 공간적 감각이 더해진 영상설치 작업들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인간을 대표해왔던 남성에 비해 구성원들이 더 이질적이다. 여성이라는 우산 안에 다양한 주체들이 집합된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프로젝션 이미지. 사진: 홍철기 © 제인 진 카이젠 



인간의 반을 이루는 여성은 타자들의 대변자가 될 만하다. 일찍이 여성주의에 눈을 뜬 작가 정은영은 여성주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성소수자, 장애인 등 백인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역사에서 타자화 된 주체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두 예술가들인데, 그것은 예술 자체가 타자화 된 상황과도 맞물린다. 오늘날 예술가는 ‘그/녀들’처럼 고독한 소수자/타자인 것이다. 책으로도 발간 된 바 있는, 10여년 넘게 연구한 여성국극 배우와 비교될 수 있는 이들이 음지를 벗어나 무대 위에서 자신의 정동을 마음껏 발산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정은영의 작품에서 정동은 이성보다 더 중요하다. 현재의 이 다양한 주체에는 주변화 된 남성도 포함될 수 있을 만큼 포용력이 있다. 세 작품들에서 서사는 다층적이고 다성적이다. 무용가, 여성 국극, 무당 등 공연 예술가들이 주인공이며 여성/작가의 목소리도 강하게 개입되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고약한 속담도 있다.


그러나 깨져야 하는 접시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에, 여성주의는 지금도 한물 간 이슈가 될 수 없다. 전시 감독은 이제는 대서사의 담론에 포함된 페미니즘을 앞세우기 보다는 완곡하게 역사를 문제 삼았다. 작가들은 거시 역사 속에 숨겨진 미시 역사를 실증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복원하고 전면화 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왜 꼭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냐고도 물을 수도 있지만, 자연의 법칙이든 사회의 규칙이든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한정된 시공간을 점유하며 살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지상의 삶을 향유하는 것은 당위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실현되기 힘든 이상이다. 어떤 정치사상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운운하기도 했다지만, 어떤 평등이든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투쟁의 상황은 이 전시가 호출하는 전통과 근대에서 뿐 아니라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역사의 지배자가 숨겨왔다면, 그에 대한 도전자들은 그 비밀을 밝히려한다. 이때 예술은 다층적으로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적절한 분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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