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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늦봄 전 / 은유가 아닌 현실의 막장에서 (2부)

이선영

은유가 아닌 현실의 막장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1부에서 이어짐)

임만혁; 광부와 가족

임만혁의 최근 작품 [광부]에서 전방을 주시하는 남자의 퀭한 눈이 거의 헤드라이트처럼 보인다. 광부의 황당한 표정은 물화된 신체 일부처럼 엄혹한 삶의 조건에 경악해 굳어버렸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선으로 인간을 표현하는 임만혁은 그가 주로 사용하는 목탄이 광부의 표현에 어울린다. 그의 작품에서 광부는 혼자가 아니다. 광부의 봉기를 이론적으로 지지해줄 지식인이나 선동적인 정치가가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가족들이 있었을 따름이다. 작품 [가족 이야기 17-1]는 ‘가정의 달’ 등을 기념하는 서로를 마주보는 그런 가족이 아니라, 같이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을 함께 바라보는 진취적 가족이다. 화사한 색으로 칠해진 가족은 무조건 밝고 따뜻해야 했다. 가장은 광부다. 개만도 못한 인간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작품 [인간과 개]에서 거대한 개 아래에 무릎 꿇은 넥타이 맨 남자는 광부의 조건을 보편화한다. 40년 세월이 흘렀다해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모순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광부가 막장에서 들고 작업했을 기계는 가족의 미래를 위한 길을 뚫고 있었을 것이다. 사북항쟁은 사측에 맞서 싸운 광부들이 당시 동원탄좌에 고용된 3천여 명의 남성들이었지만, 여기에 가족들이 가세해서 6천여 명으로 불어난, 가족까지 가세한 거의 유일무이한 노동 항쟁으로 기록된다. 1980년 당시의 문건에서 노동자는 ‘종업원’으로, 여성들은 ‘부녀자’로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 ‘부녀자’들은 행주대첩처럼 적(경찰들)과의 투석전에서 돌을 함께 날랐고, 투쟁하는 광부를 위해 따스한 국밥을 제공했다. 도망친 어용 노조 위원장 부인을 잡아온 것도 여자들이었다. 어용 노조 위원장의 아내와 광부의 아내가 대조된 것은 가족이 공동 운명체였기 때문이다. 막장에서의 투쟁은 사택 촌에서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가족공동체와 노동자공동체에 대한 서사가 미화 될 수는 없다. 빨갱이 가족으로 매도되곤 하던 광부 2세들과 광부들은 일치된 정치적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존재와 의식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안용선; 탄광촌에 대한 아이의 기억

작품 [사북의 꿈]에서 도시의 산동네처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소녀가 화면 밖을 바라본다. 집들은 자연을 배경으로 서 있다기 보다는 마치 자연물처럼 산과 일체화되어 있다. 80년 사북에서 광부들은 인간들이 마음껏 이용하고 착취하는 자연으로 대상화되었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인 인간은 협소하게 규정되었다. 사북항쟁이 일어난 것은 광부와 그 가족들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자료들을 보면 ‘문둥이 다음 광부’ ‘두더지같은 삶’이라는 자조어린 표현이 나온다. 사북의 소녀 머리 위에 떠 있는 달은 ‘인간 본성’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달나라처럼 먼 곳의 일처럼 보인다. 사북항쟁은 80년에 일어났지만, 90년대부터 사양길에 접어든 광산/촌은 미래의 세대가 기억해야 할 가깝고도 먼 과거이다. 안용선의 작품에서 산이라는 배경에 스며든 듯 표현된 집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70-80년대 한국의 산업 사회를 견인했던 에너지 공급자들의 주거지들이 취약성은 드러난다. 


해발 800미터 지장산 일대에 자리잡은 사북읍은 1980년 당시 인구 5만 명으로 아이들도 아주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포장도 되지 않아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길과 송판으로 칸막이를 한 가건물 수준의 사택은 겨울에는 수돗물이, 휴일에는 전기가 끊겼고, 10가구가 사용하는 단 1개의 공동화장실은 아침마다 긴 줄이 늘어섰다. 광산촌의 생활환경은 작업장 안전은 신경 안 쓰는 회사 측의 무신경으로 ‘한 달에 광부 2-3명은 죽어나간’ 노동환경의 연장인 셈이다. 초라한 집들이지만 곁에 있는 나무들은 촘촘하다. 무엇보다 작가는 하늘에 많은 공간을 할애했다. 압제에 대한 봉기는 평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종교적 사상에 의하면 하늘 아래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아니 평등해야 한다. 작품 속 소녀의 슬픈 눈과 꼭 다문 입은 그렇지 않았던 현실을 암시한다. 잘 꾸미지 못한 탄광촌 소녀는 당면한 현실에 얼어붙은 듯하다.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다. 당시 탄광촌 아이들의 시 중 하나는 실태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북 초교 어린이가 쓴 시 [막장]에는 ‘나는 지옥이 어떤 곳인 줄 알아요. 좁은 길에다 모두가 컴컴해요. 오직 온갖 소리만 나는 곳이어요’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자료 중에서)  

 

최승선; 현실의 초현실성

사북항쟁 40주년 기념전을 기획한 최승선은 정선 출신이다. 1980년 당시 두 살이었던 그는 사건을 직접 격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을 사북에서 보냈다. 항쟁은 4일이었지만, 사건 이후의 삶은 온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자의 몫이었다. 그는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쇠락해 가는 광산촌을 보았다. 어릴 적 염원대로 산골을 떠났지만, 작가가 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작품 [병반의 시간]은 하루 3교대로 일하던 탄광노동자들 중 밤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근무하던 `병반'의 시간을 표현한다. 새벽과 이어지는 깊은 밤은 억압을 뚫고 일어난 사건과 어울리는 시공간대이다. [병반의 시간]은 당시의 탄광마을을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컬러텔레비전이 아직 보편화되기 이전인 1980년, 온통 흑백 사진으로만 기록되어 있던 당시의 장면들이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총천연색 이미지로 환생했다. 90년대 쇠락해 가는 고향마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겠지만, 꼬불꼬불한 길 사이로 빼곡이 있는 마을의 집들은 정겹기 까지 하다. 


80년대 ‘산업사회의 역군’이었던 광부들은 국가에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실핏줄 같은 존재였다. 사북항쟁 당시 보도지침을 따르던 주요 일간지들은 ‘평화로운 산골마을에 유혈 난동’하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 [병반의 시간] 속 마을도 평화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평화는 이 작품의 시점처럼 거의 초월적 차원이어야 가능하다. 최승선의 작품은 어떤 비극도 멀리서 보면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알레고리 풍의 작품 [파수꾼]은 새와 시계를 들고 있는 민머리 소년이 등장한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새와 가혹한 운명의 시간을 알리는 시계는 위기감을 조성한다. 빈 콘크리트 건물과 방호복 입은 사람들, 까마귀 등, 배경을 이루는 도상들 또한 묵시록적이다. 수수께끼같은 장면이지만, 사람 살던 곳이 폐허가 된 이유가 수수께끼만은 아닌, 재난이 상시화된 시대가 도래 했다. 작품 [별 헤는 밤]에서 수레 위에 실린 집들은 자못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산업구조의 변화에 의해 삶의 터전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빈자의 애환이 표현된다. 빈곤한 광산촌마저도 사라지는 시대의 풍경이다. 

 

백중기; 현재와 과거의 연결고리

강원도 영월 출신의 작가 백중기의 풍경은 파스텔 톤이 화사한 색으로 덮여있다. ‘모든 것이 검었다’는 탄광촌 아이들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그곳에도 꽃이 피고 졌을 것이다. 작품 [春四月]은 춘삼월이 아니라 춘사월의 늦은 봄을 맞이한 80년 4월을 상징한다. 전경에 가득 피어 있는 꽃나무는 인간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자연은 순리대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태양 빛을 가득 받기 위해 쫙 펼쳐진 가지들은 뒤편에 자리한 작은 집에게도 같은 축복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작은 울타리 안에 널린 빨래들은 다시 탄가루로 더럽혀지겠지만, 이듬해에 다시 피는 꽃처럼 다시 시작되는 삶/몸과 함께 할 것이다. 큰 나무 아래에 작은 나무가 자라고 언덕 너머 저편으로 향한 길이 보이는 작품 [버들]은 아름다우면서도 희망적인 풍경이다. 백중기의 작품에서 꽃은 화면을 환하게 비춘다. 색이면서 빛이다. 한 번에 활짝 피고 지는 꽃은 사북항쟁의 과정을 은유한다. 작가는 ‘밝아야 할 날에 어둠이 강제되면 횃불을 들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빛의 은유는 80년대 첩첩산중이 아니라 현재 서울 한복판에서도 반복된다. 비슷한 모순은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다. 작품 [서초 아리랑]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 관련 개혁 입법을 지켜내려는 민초들의 집회현장을 그린 것이다. 법기관들이 즐비한 서초동에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인파로 가득한 사거리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는 촛불 인파를 ‘아스팔트위에 찬란히 피어난 아름다운 꽃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는 점에서 40년 전의 민초들의 집단적 움직임과 동일시된다. 노사정 합의가 배반된 80년 사북과 촛불혁명이 배반당할 위기에 처한 현재와의 연결이다. 당시에도 민초들의 움직임은 자발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조직화된 반동세력에 대한 조직화되지 않은 민초들의 저항이다. 이러한 저항은 위대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한 화면 하단에서 부엉이가 관객을 마주보면서 수 십 년 세월의 간극을 ‘멈추지 않는 의지’로 연결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진주영; 빛과 어둠의 드라마

색이 빠지고 명암의 대조만 있는 진주영의 작품은 흑과 백, 어둠과 빛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두 항으로 80년 사북에서 일어난 저항의 서사를 들려준다. 모노톤의 작품들은 석탄이 생산지의 특성을 조형적으로 반영한다. 석탄 산업은 산업자본주의를 추동하는 힘이었지만, 검은색을 잔인함과 연결시키게 했다. 19세기에 세계자본주의의 맨 앞에 서 있던 런던의 빛깔이기도 했던 검은 색에 대해 디킨스부터 마르크스까지 많은 예술가와 혁명가가 주목 한 바 있다. 진주영의 작품은 추상적이니 만큼 그 사건에만 해당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닌다. 역사가 아닌 신화의 차원까지 포함한다. 작품 [가려진 빛]은 어둠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드러난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나뉘기 전 원초적 혼돈 가운데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 위한 운동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으로 보이는지는 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느 입장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작업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일상이라는 사적영역에서는 동향 감시까지 받았던 광부들에게 억압의 지속은 어둠일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은 빛일 것이다. 하지만 광부들의 몸짓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작이라는 상징성만 남긴 채 어둠에 잠겼다. 그 어둠을 조명하는 것은 이제 예술을 통해서이다. 잠재적 의미를 발굴하고 현실화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 [숨 기둥]은 구멍에서 기체가 올라오는 이미지로, 꽉 막힌 구멍을 뚫고 나오는 어떤 힘을 가시화한다. 그것은 지하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의 호흡일 것이다. 그러나 불붙은 가스처럼 타오르면서 사라지는 모습은 비장하다. 작품 [잠들지 않은 시간]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무정형 패턴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검은 원이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사회 운동이 생성 전개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면, 사회적 차원의 운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다를 바 없다. 사북항쟁은 순리, 또는 필연과 관련된다.

  

이민혁; 막장과 막창

이민혁의 작품 [검은 무리가 지나간 곱창 집]은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축도이다. 폐소공포증을 자아내는 어두컴컴한 공간은 노동자들이 고된 하루의 일을 끝내고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가끔 몰려갔을 곱창 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막장과 막창이 겹쳐진다. 곱창이 다른 생명체의 일부이라면, 타자의 창자를 꺼내 자기 창자를 채우는 잔인한 게임이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동물계를 초월했다고 믿어지는 인간계에도 적용된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은 곱창을 제공했던 동물처럼 죽임을 당하고 매달리고 창자가 꺼내지는 것이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이곳저곳에 포진한 잔인한 장면들에는 식인적 환상이 있다. 죽음과 열락이 결합된 장면들은 살을 먹는 축제(카니발)의 양가적 측면이다. 곱창을 굽는 불빛에 의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무리들은 누군가는 가해자고 누군가는 피해자지만,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곱창 파티를 벌이는 실루엣으로만 나타나는 얼굴 없는 익명의 무리들에서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자연이 아닌 인간 사회, 즉 적정 필요인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선 무한한 욕망의 세계이기에 피해자의 규모는 더욱 크고 끝이 없다. 곱창을 제공하거나 만들거나 먹기 위해 밀집된 사람들 사이로 고기/살타는 냄새가 날 것 같은 풍경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먹는 생지옥 같은 현장이다. 역동성이라는 측면서 지옥은 천상보다 현실사회와 더 닮았다, 천상이 관념이라면 지옥은 실제다. 그의 작품은 탄광촌의 극한 조건이 술과 도박, 가정 폭력 같은 어두운 여가 또한 만들어 냈음도 암시한다. 어둠 속의 빛으로 드러나는 형태와 행위는 이제 카지노 도시로 변한 사북과도 겹쳐진다. 열심히 일해도, 또는 일 할 할수록 가난함을 면치 못하는 제로섬 게임은 여전하다. 막장으로 상징되는 생산의 사회나 카지노로 상징되는 소비의 사회나 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5.18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사태에 대한 대가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강원랜드는 사북항쟁으로 드러난 지역 경제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공기업이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생각이다.   

  

나가며; 민중의 자치와 예술의 자발성




 대규모 충돌이 발생한 안경다리 철로변의 모습.  © 사북항쟁동지회



 1980년 4월 23일 동원탄좌 예비군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광부들. © 박노연씨 제공


이제 사북의 광부들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는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 [혁명의 시간]에서 근대 인간의 금욕적 노동윤리에 대해 말한다. 네그리는 근대인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고 시민적 양식으로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이며, 노동자가 됨으로서 시민이 되는 사람이라고 보지만, 이 모든 것은 끔찍한 비밀 속에서 전개된다고 본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는 가운데 권력을 원하는 자의 비밀, 사법적 틀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에 따라 공적인 것을 구성하고 착취를 통해서만 자신을 고양시키는 사적 영역의 비밀’(네그리)이다. 쌀 3가마 정도의 임금으로 한 달 월급을 주면서 금욕적 노동윤리를 강요하는 이들의 지배는 어두운 막장에 한정되지 않았다. 막장이 공적 영역이라면 광부들의 판잣집은 사적영역이었다. 광부들은 가족을 위해 일했고, 가족은 이들과 함께 투쟁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 외에 크게 원하는 것이 없었던 80년 4월 사북의 광산 노동자를 공적 사적 영역을 두루 에워싼 세력은 자본가와 정치가, 군부와 경찰, 그리고 이들과 연결된 끄나풀들(어용노조위원장, 노동자를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변장한 경찰 프락치 등)이었다. 


80년대의 많은 사회운동 중에서 사북 항쟁이 중요한 것은 어떤 외부세력도 개입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절박한 동기에 의한 자발성에 있다. 노동자 대표 선거에 대한 사측의 불법적 과정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짚 차로 치고 달아난 경찰에 분노하여 사북 지서를 접수하고 사북으로 오가는 철로를 막아선 노동자들에게는 함께하는 몸뚱아리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미숙한 경찰과 군의 대처에 의한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동원탄좌 예비군의 무기고와 광산의 화약고를 지킨 것은 광부들이었다. 그해 4월 사북에서의 봉기는 5월 광주에서의 봉기보다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혁명적 과정은 동일하다. 4월 사북에서의 봉기 역시 안토니오 네그리가 [혁명의 시간]에서 말한, ‘생산자들의 다중(多衆) 내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다중은 어떻게 저항과 반란의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사북 동원탄광 소장 및 근로자들과 만나 악수를 나누는 당시의 관계부처 장관



 멸공통일이라는 표어가 붙은 사북지서의 모습. 노동자들은 사건 이후에 자발적으로 지서 앞을 청소하고 노동현장으로 복귀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불법체포와 고문이었다. 


이러한 봉기의 현재적 의미는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가 목격되는 국면에서, 모든 형태의 죽은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승리를 가난한 자가 결정한다’(네그리)는 점이다. 세계 10 위권의 경제대국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위치를 가능하게 한 광부나 광산과 같은 극단적 노동조건이 사라졌는가? 80년대 보다 더 양극화된 사회인 지금, 4월 사북항쟁처럼 모순은 다른 차원에서 편재하고 다중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비밀은 유지되고 있다. 예술가가 광부의 현실을 대변해 줄만큼 삶을 초월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노동자만큼이나 주변적 존재이다. ‘사북, 늦은 봄’ 전은 예술이 혁명을 소재로 한다기 보다는 양자의 수렴점을 암시한다. 요컨대 혼돈과 질서를 오가는 예술과 혁명은 ‘주체를 자체의 재창조나 재 발명으로 이끌어 나간다’(들뢰즈와 가타리, [카오스모제])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전시의 주제인 사북항쟁은 자본의 전횡에 대한 계획되지 않았던 민중의 자발적 봉기였지만, 이후에 일어났던 자본과 국가의 기만, 잊혀짐의 고리를 끊는 또 다른 사건이 되기를 바란다. 

 

출전; 시북민주항쟁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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