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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구조를 뒤흔드는 타자의 힘

이선영


안정된 구조를 뒤흔드는 타자의 힘

  

이선영(미술평론가)

  

  

종종 오가는 길목에 내걸린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축하 플래카드는 전염병 때문에 졸업 입학식도 생략해서 썰렁해진 캠퍼스 한켠을 환하게 비춰주는 듯하다. 전염병은 누군가를 즉시 타자로 지목하는 생물학적 재난이지만, 문화에서 타자화는 교묘하다. 지난해 칸느 영화제에 이어 올해 오스카의 주요 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쾌거는 아카데미가 ‘#Oscars So White’라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백인 남성중심주의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92회에 와서야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비영어권 영화로 작품상을 받은 것이다. 봉준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영화계의 중심지인 헐리우드가 내건 ‘글로벌’이라는 기치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아카데미를 ‘로컬 영화제’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수상한 ‘국제 장편 영화상’이 얼마 전까지도 ‘외국어영화상’으로 불렸던 것은 중심과 주변에 대한 달라진 관계설정을 암시한다. 그가 한국어로 영화를 만들었다든가 세계적 무대에서 한국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다든가 등도 가십거리가 될 정도였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축하 플래카드가 모교에 걸려 있다.


다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정을 받는 수상제도는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많은 문화적 징후를 내포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뤄지는 불리한 경기에서 거둔 값진 성과는 앞으로 대세가 될 소수자 문화의 상징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봉준호는 문화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배제돼야 할 예술가 중의 하나였다. 우리 문화 예술 판에서의 수상제도는 어떠한가? 올 1월 중 KBS 뉴스가 연속 보도했던 수상한 상들의 예를 들고 싶다. 첫째는 문학 분야에서의 중요한 상인 이상문학상 수상자들이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는 뉴스이다. 보도(1월 8일)에 의하면, 시상자는 수상자에게 '작품의 저작권을 출판사에 3년간 양도해야 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집을 낼 때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쓰지 못한다' 는 등의 갑질 계약서를 강요했다. 수상자에게 명예 및 상금 얼마를 준 후 작가로 하여금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표지가 달린 작품집 판매를 독점한다는 독소조항에 대해, 수상자는 물론 많은 동료 문인들이 수상 거부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연속 보도(1월 7일)에 의하면, ‘순수예술’이 아닌 대중문화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돌 스타를 탄생시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투표 조작 사건의 전모가 얼마 전에 드러났다. 미래의 스타에게는 여러 통과의례가 있었지만, 이미 뽑힐 사람이 정해져 있었으며, 더 충격적인 것은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그룹의 멤버가 수억 원 상당의 프로그램 제작비를 부담했다는 보도내용이다. 결국 스타를 꿈꾼 젊은이들은 자기 돈 내고 데뷔를 한 셈이며, 땅집고 헤엄친 주최 측은 이 추악한 거래가 들통나고 책임 소재가 문제시되자 기획사 쪽에 외주를 주었다는 식으로 발을 뺐다. 굴뚝 산업에서 흔한 ‘위험의 외주화’는 문화 쪽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요절한 근대의 천재예술가로 대변될 수 있는 이상과 관련된 상은 소수만 이해해도 어쩔 수 없는 고도의 예술성이 기준이겠지만, 대중문화는 대중의 취향이 집약된 결과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주최 측의 갑질이 발견되고 예술이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주최 측만 배를 불리는 마케팅이 벌어지고 있었다. 


KBS 연속 보도의 세 번째(1월 6일)가 가장 희극적이었다. 그것은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상인데, 수상자가 하도 많아서 프레스 센터에서 여러 날에 걸쳐 열리는 시상식에는 ‘모범 국회의원 대상’, ‘우수 모범 국회의원 대상’, ‘최고 우수 모범 국회의원 대상’이 수여되었고, 이 상을 수 십 개 받은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제대로 된 기사 하나 없는 사이비 언론사가 상을 필요로 하는 명망가들에게 상을 매매하는 경우였다. 연말연시 매년 열리는 이 시상식에서 지난해에 썼던 화환들과 상장이 재활용되어 대신 상패를 받으러 온 보좌관에게 연도를 수정해 택배로 다시 부쳐준다는 촌극이 포착되기도 했다. 작가 지망생이나 연예인 지망생과 달리, 국회의원은 이미 기득권이지만, 국민을 위해 뭔가 뾰족하게 일을 하지 못한 이들에겐 장식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학가에게 출판사, 연예인에게 기획사, 이미 확보한 기득권에 명예를 더 추가하고 싶은 명망가들과 사이비 언론의 관계는 적나라한 착취부터 은밀한 공생같은 여러 단계가 있었다. 시스템이 정비 되면 새로운 도전자에게 더 많은 준비가 요구된다. 


중심과 주변의 차이는 더욱 현격해지고 고정되며, 점차 넘어서지 못하는 벽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대한 실제적 도전은 이제 체계가 제시하는 여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대체된다. 앞서 예시한 순수예술 분야부터 연예계, 그리고 정치판에 번져있는 수상한 수상제도는 좁은 땅에서 그나마 이리저리 갈려서 자기 정체성의 각을 세우는 문화적 토양에서 번성한다. 그 배경에는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사회에, 자연과 역사라는 보다 광대한 지평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경쟁으로 축약된 협소한 세상을 지배적 현실로 등치 시키는 가치체계가 있다. 여기에 타인의 시선과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가 가세하면 허울뿐인 순위 다툼에 매달리는 레드오션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여기에서 일등이라는 점이 모든 것이 정당화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에도 열심히 하는데, 자유롭지 못한 부류가 많은 이유이다. 시상자는 수상자를 중심으로 끌어 올려주기보다는, 수상자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재능과 자원을 자기 것으로 취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에는 뽑은 사람은 뽑힌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믿음이 작동한다. 또한 그것은 시스템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자기지시적 행위에 기반한다. 결국 누군가에게 상을 주는 것도 결국은 체계를 위한 것이며, 체계에 진입한, 또는 진입하려는 타자들을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이 이어진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지배/억압의 모델이 아니라, 자신이 기득권에 있다는 착각을 통해서 행사된다. 많은 철학자들이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한끝 차이로 쉽게 뒤집어지는 역설에 경악했고,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 사회가 나름 체계화되었다는 증거를, 모두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외에, 법률가 출신의 정치가들이 많다는 점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법의 근거가 확실한가? 특히 한국 사회에서 법이 작동되는 방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에서 정의로]에서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파스칼의 단상을 인용한다. 


법과 폭력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데리다는 법의 토대 또는 자기 권위 부여(auto-autorisation)의 구조를 분석한다. 그렇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법의 구조가 해체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이 구조의 궁극적 토대가 정초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법이 해체 가능하다는 것은 불운이 아니며, 역사적 진보와 정치적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서 비판받았던 해체주의에 대해 데리다는 ‘해체는 정의’라고 강하게 맞섰다.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오면, 정치력이 발휘되어야 할 국면에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서 법률 전공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법전을 달달 외워 기득권이 된 후 자신은 그 법을 초월할 수 있는 위치에 놓는다, 무법, 탈법적 사건이 드러날 때 그들은 결국 여러 정치적 거래와 협잡을 통해 법의 초월을 관철시키곤 한다. 법 그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고무줄 잣대이다 보니, 과도한 정치화가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노인들부터 검찰에 이르기까지 편재한다. 이를 정치적 활력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지만 법, 또는 체계의 유동성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형식주의의 가정과 달리, 변화는 구조에서 구조로 일어나지 않는다. 구조를 만드는 것은 힘(권력)이고, 해체하는 것도 힘(권력)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관철되었던 규칙을 수정하려는 혁명적 움직임이 생겨난다. 역사는 이러한 순간들을 기록한다. 현재의 기득권 또한 어느 순간에는 도전자였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자신을 유지, 확대하려는 거의 본능적이라 할 만큼의 자기중심주의가 경계를 만들고, 자의적인 원칙을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칙인 양 선포한다. 체계를 형성하는 힘이 강고하면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권위는 보장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에, 다른 게임 원칙에 그렇게도 배타적인 것이다. 그러나 구조는 안정될 수 없다. 바깥으로부터의 특별한 도전이 없다 해도, 시간이라는 변수가 있다. 그것은 구조의 일부분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체계 밖의 타자는 완만한 변화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 체계의 경계에 놓인 타자들은 체계의 정당성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시험대가 된다. 근대 이후 사회로부터 체계적으로 주변화되었던 예술은 여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이 모호한 영역은 예술과 가장 많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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