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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형 / 색의 폭발과 흐름 속에 드러나는 형상

이선영

색의 폭발과 흐름 속에 드러나는 형상

  

이선영(미술평론가)


  

손진형의 작품은 언뜻 자유로운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추상화 같지만, 숨은그림찾기처럼 말의 형상이 잠재해 있다. 100호 크기의 작품 [Decalcomanie–2](2015)는 빛과 어둠의 싸움, 또는 어우러짐같이 보이는 추상화지만, 화면 왼편에 어두운 색의 말이 뛰어오른다. 그 위에 뿌려진 화려한 색들, 얼룩과 선들이 상호작용한다. 다양한 색의 얼룩과 선으로 이루어진 말의 머리가 있는 작품 [dreamer](2016)는 말로 은유화된 작가의 생각이 유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형상은 조형언어의 자유도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자세와 각도의 말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모두는 역동적인 맥락에 놓여있다.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전화(轉化)하는 정도는 다양해서, 어떤 작품은 배경과 형태의 관계가 비교적 명확하고, 어떤 작품은 완전히 잠재적인 단계에 머무른다.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배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배경으로 사라지거나 배경으로부터 출현한다. 


작품 [return](2016)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말의 형상이 잘 안보이며, 다채로운 색과 선의 움직임 그자체로 가득한 추상화에 가깝다. 말을 이루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화면의 한 켠에서 덩어리지며, 그것은 곧 어떤 구체적 형태가 된다. 작품은 명확한 형태가 아니라 형태가 되어가는, 또는 해체되는 과정이다. 형성과 해체의 정도에 따라 그림의 온도감이 달라진다. 가령 끓는 물과도 같이 고체/액체/기체의 경계를 넘어서, 또는 넘나드는 유동적인 입자가 많은 작품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그 열기가 식어서 보다 안정된 형태로 변해가는 작품도 있다. 이러한 유동성은 한순간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는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서 대상의 움직임을 주는 화가의 방식이기도 하다. 자유로움이 중요했다면 잠재적이든 현실적이든 굳이 어떤 형태가 필요한가 싶지만, 손진형의 작품에서 말은 생동감의 상징으로, 의미의 중심을 이룬다. 실재감이 전무한 허구, 완전한 무(無)로부터의 새 출발, 구속 없는 자유 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손진형에게는 도약과 비약이 중요한데, 그 디딤대 역할을 하는 중력감은 필수적이다. 도약대 없는 초월을 추구하는 이와 예술가는 크게 다르다. 예술가는 거의 육화 되다시피한 자신의 도구와 함께 사고하기 마련이다. 작업 과정과 유리된 사고, 더 정확히는 작업에 몰입하지 못해서 빠져든 사고는 겉도는 수가 많다. 이때 사고(특히 타인의 사고)는 자신의 길을 더 풍부하게 보충하기 보다는 논점을 흐린다. 관념적인 언어의 나열은 동어반복적인 장식물에 머무는 것이다. 독은 그 자신을 중독시키고 독선과 맹목을 결합시킨다. 이 우울하고 축축한 영혼에게서 예술은 자유가 아니라 신경증적 강박관념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은 ‘생의 비약’이 극복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물감이라는 물리적 대상과 화가의 움직임이 만나 물질은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형태를 암시하는 잠재적 외곽선 안팎의 움직임은 형태가 발산하는 에너지, 동양적 표현으로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 


200호 크기의 [elan vital](2018)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생의 약동’를 보여준다. 생의 약동을 상징하는 매개체인 말은 대상의 고유색과는 무관한 화려한 색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멈춰서 정면을 주시하는 순간에도 움직임을 내포한다. 작품 [Greatest Beginning](2019)은 사색하듯이 아래로 숙인 말의 머리를 보여주는데, 화려한 붓질은 그 사색이 정적이지는 않을 것임을 예시한다. 그것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최초의 시작과 최종의 목적을 잊게 하는 정신의 유희를 표현한다. 결말이 아닌 계속되는 시작이 있을 뿐인 예술의 운명이다. 흑백 계열의 차분한 색조지만, 여전히 활기찬 붓질이 있는 작품[monologue-4](2017)는 정신의 유희인 대화가 결국은 자신과의 대화임을 보여준다. 작가에게는 수많은 자아, 즉 자아같지 않는 타자같은 자아들이 포진해 있다. 이때 독백은 대화일 수 있다. 손진형의 작품에서 칠해졌다기 보다는 터지거나 흐르는 듯한 색색의 물감은 물질과 에너지가 호환되는 과정이다.


[Decalcomanie](2015) 시리즈는 그 제목에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어떤 힘이 발현되어 만들어진 우연적인 흔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연으로 완전히 와해되지는 않는다. 말이라는 기본 형태보다는 말을 이루는 안팎의 색이 더욱 다양하며, 각 작품에 차이를 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그림에서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른 상대적인 것이다. 묵직한 존재감 보다는 유연함을 향한다. 이때 작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진리의 재현이 아니라, 맥락을 조율하여 매 순간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이다. 사회의 지배적인 규칙인 상징계에 전형적이듯 동일성의 반복적 재현이 아니라, 차이를 둔 순환,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그것은 니체가 주목한 놀이와 예술의 접점이다. 놀이하는 자는 가볍다. 놀이하는 자는 존재의 무게로 가라앉지 않는다. 또는 그 반대급부로 기적 같은 초월 또한 지향하지 않는다. 베르그송이 유명하게 만든 ‘elan vital’은 생명과 도약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당대의 기계론적 철학에 대항하는 생철학적 관념이다.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물리학자들은 추상화를 통해 획일적이고 생명이 없고 구별이 없으며 중단도 없는 하나의 시간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수학자들에게 있어서 연속성은 현실적 성격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가능성의 도식’에 불과하다. 물론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적인 지속에 대해 순간을 지지했지만, 예술을 추상적 시간에 고정시키지 않으려한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의 단순한 대조법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의 생물학은 연속적인 시간의 축적으로서의 진화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 또한 도약과 비약의 장인 것이다. 물론 완전한 임의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진화를 생명의 창조적인 전개과정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진화는 모든 살아 있는 시스템들의 고유한 특징인 다양성과 복잡성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형식으로 이해된다. 


진화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단순히 ‘자연의 선택이나 적응이 아니라, 창조성, 즉 생물이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달하려는 움직임’(카프라)이다. 적응보다는 창조를 중시하는 진화론은 예술과 공유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동일성의 재현이 노동과 생산이라면, 차이를 둔 반복은 유희적 활동의 특징이다. 놀면서 한다고 마냥 느슨한 것은 아니다. 예술이란 노동과 달리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행하기에 더 밀도 있게 수행할 수 있고, 그래서 지속가능하다. 양화될 수 없는 이러한 질적 성격에 의해 예술은 노동과 달리 대체될 수 없다. 분업화된 노동에 특징적인 호환성은 생산력을 가능하게 하지만,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을 도구화한다. 이 합리적 도구에 무엇에 쓰이는지는 모르는 채 유일한 합법성으로 군림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기 전까지 말이다. 합리화란 제한된 조건에서의 게임에 한정된다. 예술은 자신이 극도로 제한적 상황에 놓였을 때라도 어떤 여지를 만들어내는 창조성을 요구한다. 그렇게 발견된 것은 이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의 혁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자유와도 비견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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