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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초록을 만나다 전 / 초록(草綠)은 이색(異色)

이선영

초록(草綠)은 이색(異色)

  

이선영(미술평론가)

 

  

1. 뜻밖의 초록을 만나다

  

[뜻밖의 초록을 만나다] 전이 열린 11월말부터 3월말까지의 기간은 한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의 시작에 이르는 시기로, 자연을 기준으로 한다면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기 위한 휴지기에 해당된다. 마치 씨앗처럼, 앞으로 발현될 모든 것들이 응집되어 있는 잠재력이 풍부한 시기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11인은 이러한 잠재력을 현실화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초록은 4월부터나 가능하므로, 이 기간 중의 ‘초록과의 만남’은 ‘뜻밖’이다.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예술과 자연은 ‘뜻밖의’ 것 또한 공유한다. 무한히 반복하는 가운데 차이를 낳는 기제는 진화하는 자연과 삶속의 예술 모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속담에 ‘초록(草綠)은 동(同)색’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전시의 작품에서 초록은 자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계열의 색을 포괄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전시 기획의도에 포함되어 있듯이, ‘작가들의 다채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광교의 초록’은 이색(異色)적이다. 예술은 작가의 의지와 열정, 그 외의 많은 전략으로 진행되지만, 인위적 수단이나 계획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전시전경(이하 사진 출전;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



자연은 원래 인간이 필요 없는 자족적 존재였지만, 이제는 인간과 자연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인위적 개입이 절실한 단계에 있다. 이 전시가 열리는 광교라는 신도시는 자연과 문명의 조합을 말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자연에 할애된 몫도 상당히 크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특히 인근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공원 안팎의 생태계는 광교라는 소재를 새로운 작업에 접속시키는 이 전시의 작품들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광교는 방문할 때마다 건물이 하나씩 완공되는 듯한 계획도시로, 맹목적 자연과 그 이후 떠밀리듯 진행된 근대화와 다른 단계의 미래도시 같은 느낌이다. 특히 전시장이 포함된 컨벤션 센터로 대표되듯, 새 중심지의 건물들은 도시안의 도시같은, 그리고 그 도시에는 다시금 자연을 품은 구조들이 인상적이다. 소우주와 소우주가 만나는 사이에도 어김없이 자연은 자리한다. 자연은 완충재이자 연결망이 된다. 완충과 연결이 단절될 만큼 자연을 변형 또는 파괴시켰을 때 자연의 힘은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참여 작가들은 ‘뜻밖의 초록’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들른 관객들처럼 일신우일신하는 광교의 이전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있고, 처음 접하는 이도 있다. 전시가 그곳이 속한 장소를 반영하는 것은 작품들과의 교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전시의 키워드에 포함된 ‘만남’은 전시가 놓인 실제적 맥락과 소통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만남, 특히 뜻밖의 만남은 특정 상황에 밀어 넣어진 주체로 하여금 사유를 촉발시킨다. 사유는 자발적이기보다는 늘 어떤 압력에 대응하는 필연성을 가진다. 사유는 작업과 마찬가지로 내리막이 아니라 오르막이다. 에너지의 방출이 아니라 투입이다.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주장되듯이, 성, 죽음, 광기 같은 주제는 이와 맞딱뜨린 주체로 하여금 운명과도 같은 사유와 작업을 시작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특히 요즈음 창궐하는 전염병은 잊혀져가는 자연의 힘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전시된 작품들은 그 이전에 구상된 것들이지만, 충분히 포괄적이다. 그들은 이 전시의 주제에 공감하여 자연과 문명을 연동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시전경



초록이 시작되는 시기는 보통 3월 초로 생각되는데, 우연찮게도 얼마 전에 덮친 바이러스 여파로 개학이나 개강을 비롯한 많은 일정이 한 달 여 뒤로 미뤄지고 있는 추세이다 보니, 예기치 못한 재난을 포함한 휴지기가 연장된 셈이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존재지만, 변종 바이러스는 촘촘한 도미노로 엮여있는 ‘위험사회’를 배경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요즘 우리가 맞딱뜨린 재난은 자연과 문명 모두에 걸친 문제이다. 디지털 코드가 중심이 되는 현대 문명은 자연으로 대표될 수 있는 실재를 생략함으로서 코드가 코드를 지시할 따름인 동어반복적인, 또는 한계에 이른 ‘소통’만을 유통시킬 따름이다. 코드로 환원되어 차이가 무시된 자연과 예술, 그리고 도시 문명은 권태와 위험을 동시에 낳는다. 자연은 겉도는 문명의 소통에 실재의 감각을 충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그러나 자연은 그자체로 향수되기 힘들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 물론 이 매개가 방해물이 될 가능성 또한 있다.


11인의 참여 작가는 자연 생태에 기반 한 이전의 작업에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신도시로부터 받은 영감으로부터 출발한 새 작업을 함께 전시한다. 전시 공학적으로는 ‘초/록/만나다’라는 세가지 섹션으로 구별되어 있지만, 주제를 중심으로 할 때 또 다른 세가지 묶음이 가능하다. 설치미술의 특징인, 관객을 그 장으로 들어가게 하여 총체적인 체험을 야기하는 부류가 첫 번째이다. 여기에는 인근 호수공원의 갈대숲과 산책로를 구현한 김원정, 온실 유리창에 비친 듯한 따스하고 은은한 식물의 이미지를 그림과 설치로 표현한 박지현, 핏줄처럼 연결된 생태계를 연출한 박혜원의 작품이 속한다. 회화에 방점이 찍힌 작품들이 두 번째 분류로, 숲을 스펙터클하게 그린 변연미, 인공적 문명이라는 맥락 속의 식물들을 그리고 설치하기도 한 김유정, 곧 사라질 것같은 또는 사라진 자연에 대한 반성이 동양적인 필치로 표현된 임종길과 손채수의 작업이 포함된다. 마지막 그룹은 사진이나 가상현실, 유사 과학적 도구가 동원되어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접근한 구성수. 이명호, 김지수, 최수환의 작품이다.


 

2. 정원술과 예술 ; 김원정, 박지현, 박혜원


 


김원정 전시전경



김원정, 박지현, 박혜원의 작품은 마치 축소된 정원같은 연출이 특징적이다. 인간이 자연을 그토록 외치게 된 때는 자연을 많이 파괴한 후였다. 그 이전시대에 자연, 가령 숲은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였고, 농경을 통해 식물성 식량의 조달이 이전의 수렵 채집이라는 불확실성을 극복한 이후에야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미학이 구별하고자 한 숭고와 미는 자연과 인간의 거리감과 관계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풍경은 풍경화가 출발했던 시대부터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풍경에는 소유와 지배의 기호가 내재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신석기 시대 이래 전답과 방목지의 공간은 끊임없이 숲을 정복해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숲은 탈주의 선을 열고 지상의 구획된 질서의 한계를 폐기시키며, 농사일의 지루한 운율을 끊어버리고 농민들에게 무질서의 유혹을 던진다고 한다. 


로베르 뒤마의 논지에 의하면 숲과 전답이라는 구별되는 두 상태가 있다. 그러나 정원은 숲과 농경의 중간 단계에 해당된다. 어두침침한 숲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또는 신성함의 근원인 원초적 자연의 단계라면, 밭이나 논같은 농업의 장은 그 경계가 투명한다. 후자는 인간의 식량 생산력에 내맡겨진 도구적 대상에 해당된다. 공장식의 대규모 농법, 국제적 분업,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자연은 짜내질 때까지 착취된다. 인재(人災)가 포함된 원인에 의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숲은 사라지고 있다. 절대적 타자에의 순종이나 인간의 절대적 주체화 모두 맹목적이다. 그것은 합리주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대화가 아닌 명령에 바탕한다. 자연과 인간이 이상적으로 대화하는 정원술은 예술과 닮았다. 정원술과 예술이 중첩되는 작품들은 숲이라는 미지의 대상, 그리고 앎을 통해 정복되었다고 믿어지는 도구화된 자연과도 거리가 있다.   


   


박지현 전시전경



박지현 전시전경



김원정의 작품은 습지를 생태적 기반으로 하는 식물들을 군데군데 심어 놓았다. 이 또한 시간의 흐름을 타기에 볼 때마다 다른 상태로 나타난다. 끝없이 물결이 오고가는 둥근 화면은 자연에 내재된 순환의 법칙을 표현한다. 둥근 인터페이스는 바닷물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달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갈대와 물억새들 사이에 놓인 계단은 그러한 자연을 낀 길 위의 여정을 압축함과 동시에 나날이 고층 건물들이 자라나는 인공생태게 또한 포함한다. 수직의 상승계단은 순환적인 자연의 모델과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광교의 호수공원이 원초적 자연을 모델로 하는 축약된 자연이라면, 작품은 모델의 모델이며,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과정은 파도치는 바다처럼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박지현의 작품은 회화에 기반 하지만, 이미지가 얹히는 평면들은 작가가 설정한 단위로 작동하면서 조합되고 설치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전시장 모서리를 가로지르며 설치한 대작은 자연 속에서의 빛의 유희가 드러난다. 작가의 표현대로 작품들은 ‘빛의 무늬’가 된다. 산보자의 이동 시점에 따라서 자연은 매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잘 설계된 현대의 건축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건축이 유리 피막을 선택함으로서 실내 깊숙이 끌어들여진 자연광은 인공광과 어우러져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빛, 또는 조명과 상호작용하는 대상은 명확하지는 않다. 박지현의 작품 속 자연. 특히 식물의 패턴은 은은하고 부드럽다. 한지나 비단같은 매체는 영롱한 빛의 유희를 담아낸다. 




박혜원 전시전경



박혜원 전시전경



박혜원은 호수공원 주변에서 시민들과 함께한 결과물을 설치작품으로 표현했다. 작업의 목적과 과정을 공유한 시민들이 채집한 사물 하나하나를 비닐에 넣어 붉은 실로 메달아 놓은 공간은 그자체가 또 다른 영토를 이룬다. 채집한 것을 작은 패널에 담아낸 작품들이 벽화처럼 설치되어 있다. 작가의 표현으로는 ‘모수국(母水國)’, 즉 물의 나라이다. 채집된 것들에는 대체로 자연물이 많지만, 인공물, 특히 쓰레기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채집된 것들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한 시기 한 공간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미세하게 시간은 흐르며 투명한 껍질은 내용물의 변화를 보여준다. 박혜원의 작업을 특징짓는 붉은 실은 실핏줄처럼 엮여 있는 그물망을 상징한다. 좋은 효과도 나쁜 효과도 신속하게 공유되는 네트워크이다. 


 

3. 근대와 자연 ; 변연미, 김유정, 임종길, 손채수


 


변연미 전시전경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근대문명 속에서 자연은 더욱 대상화되었다.  기계주의의 파토스가 지배하던 1920년대 자연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잘 표현한 한 건축가의 말을 들어보자; ‘도시!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격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항한 인간의 행위이며 거주와 일을 위한 인간의 기관이다...현대라는 시대 전체는 무엇보다도 기하학으로 만들어 졌다.’(르 꼬르뷔제,1925) 보편적인 국제 문법을 낳은 이러한 근대적 발상은 도시라는 인공생태계를 획일화시켰다. 21세기에 건설되는 새로운 도시는 이러한 근대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타자화된 예술은 양자 간의 기울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도시의 확장으로 멸종되어가는 야생동물을 그린 손채수, 자연에 박혀있는 인공의 흔적을 상처낸 듯한 화면으로 표현한 김유정의 작품이 그렇다. 근대적 분업화 이전의 총체적 단계로서의 예술을 표현하는 임종길, 가장 보편화된 소비 식물인 커피를 원시림 같은 공간에 섞어 넣은 김유정의 작품은 자연과 일상의 상호적 관계가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표현한다. 자연스러운 선이 두드러지는 그들의 작품에는 자연과의 친화성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은 구별될 필요가 있는데, 이 전시의 작가들은 근대사회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었던 모더니즘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이전시대의 재현주의와 거리를 둔 그들의 화면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각 작가별로 화면의 질감을 살리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들은 자연의 실재감과 회화적 실재감을 수렴시킨다는 점에서, 평면성으로 물화되기 이전 모더니즘 초기의 생생한 시도들이 있다. 



김유정 전시전경



김유정 전시전경



손채수 전시전경



[스펙트럼 숲 Forêt spectrale] 이라는 제목이 붙은 변연미의 큰 그림들은 커피가루 들어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아크릴 물감으로 숲의 풍부한 녹색을 칠하고, 내린 커피가루로 나무 색과 질감을 동시에 만든다. 유럽 열강들로 하여금 ‘세계의 발견’을 촉진시켰던 값비싼 향신료가 보편화된 이래, 커피는 제3세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규모 농사의 산물이 되었지만, 변연미의 소우주에 중요한 요소로 섞여든다. 커피가루는 자연에 고유한 무수한 겹과 결을 더욱 늘리는 역할을 한다. 여러 굵기의 나무들은 상징주의 시인들이 노래했던 ‘자연이라는 신전’의 가둥같이 공간을 받쳐주며 빛과 그림자, 형태와 여백 간의 간격을 조율한다. 큰 화면이 전시 공간 입구 양편에 붙어있어 관객을 숲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준다. 


김유정은 모서리를 포함한 벽면에 설치되는 작품 [숨(Breath)_휴게와 대기]에서 인공식물을 인공조명 안에 넣어 그 실루엣을 보게 한다. 라이트 박스 표면에 비춰지는 실루엣은 입체적이다. 관객은 이 인공 숲을 거닐면서 볼 수 있다. 식물 그림자는 태양 속에서 한철 동안 그 전성기를 구가하는 자연의 순간을 고정시킨다. 자연이 가두어진 느낌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예술을 포함한 문명이 자연을 전유하는 과정이다. 맞은편에 붙여놓은 식물그림 또한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데, 식물원을 비롯한 인공 구조물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식생은 프레스코라는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회벽에 스크래치로 표현된 숲은 자연이 받았을 상처 또한 암시한다. 인간의 피부를 닮은 작품 표면은 자연의 상처가 스스로 회복될 시간을 빼앗는다면 그 부정적인 결과가 문명에게 돌아올 것임을 경고하는 듯하다.  




임종길 전시전경



임종길 전시전경



임종길은 사물이나 자연물로 탁본을 뜬듯한 질감의 이미지로 나무숲을 그린다. 벽에 걸린 대형작품들은 그리기와 만들기의 중간 정도에 해당된다. 이전 시대의 시서화의 전통을 살려서 작가의 상념을 담은 글자들도 있다. 그것은 협소한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삶 전체와 관련된다. 임종길의 작품은 자연과 사고의 재현이면서 동시에 회화의 평면적 속성이 드러난다. 사물과 자연물의 표면질감이 드러나는 기법, 무엇보다도 화면 속 글자들이 그것이다. 또하나의 작품군은 마치 그림일기처럼 제시된 작은 그림들인데, 그것은 전시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매일의 성찰이 스며있는 비망록같은 느낌이다. 그것들은 벽면을 가득 채울만큼 많지만,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자료이자 작품—출판도 생각하고 제작된—중에서 광교의 자연과 관련된 이번 전시주제와 맞는 것만 선별한 것이다.


깃발을 벽에 펼쳐 걸은 듯한 손채수의 작품은 광교의 산과 호수 주변의 동물을 소재로 한다. 깃대처럼 연출된 천에 고라니, 두루미, 올빼미, 구렁이, 개구리, 원앙 등이 하나씩 자리하고 가운데 화면에는 연극의 마지막 무대처럼 그 모두가 같이 등장한다.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 특히 멸종 위기종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낮에는 잘 볼 수 없는 야생동물들은 마치 특별한 장치를 단 기구로 포착된 듯 단색조이다. 달빛 아래에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을 야생동물들은 황토로 염색한 천에 붉게 채색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벽화 같은 느낌도 준다. 야생동물들은 동시대적이기 보다는 벽화가 있었던 오래된 시대, 황토로 상징되는 지구의 속살과 밀접한 존재들을 기념비적으로 표현한다.



4. 보이게 하는 기술 ; 구성수. 이명호, 김지수, 최수환


  


구성수 전시전경



구성수 전시전경



마지막 그룹의 작품들에서 문명의 전능한 도구인 과학기술의 비중은 높다. 사진술의 역사의 기술이 깔려있는 구성수와 이명호의 작품은 작은 풀 한포기 조차도 주목할만한 의미의 원천으로 격상시킨다. 과학기술자와의 협업을 해온 김지수의 작품에는 실험실적인 분위기가 있다. 최소한의 공간을 차지하는 최수한의 작품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구현된다. 이들의 작품에서 진보된 기술은 기법의 바탕이 된다. 그들에게 오랫동안 연구해온 기법은 형식을 위한 형식이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돋보기 같은 차원이 아니라 대상을 투시한다. 기술은 자연의 과정을 모사하면서 발전해왔다. 외재적인 모사가 아니라 내재적인 모사이다. ‘에코토피아’ 조차도 인공적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과학-기술-예술의 관계는 더욱 필수적이다. 


작품들 하나하나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기술은 두리뭉실한 낭만주의적 관념화를 거부한다. 21세기의 작가들은 자연과 기계가 원활하게 접속할 수 있는 영역을 무대로 작업한다. 과학기술은 통제와 지배를 위해서 뿐 아니라 색다른 유희를 위해서도 활용된다. 이 유희에 주어진 이름은 실험이다. 실험적 단계에서 과학기술과 예술의 관계는 더욱 긴밀할 수 있다. 그 관계가 고정되고 상품화되는 것은 그 이후의 다른 분야의 일이다.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연결시키는 매체계의 유동성은 예술에게 있어서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발판이 된다.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과학기술, 생물학, 컴퓨터 기술, 정보통신, 매체의 세계는 매일 우리의 정신적 좌표들을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새로움이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은 불안정함이다. 안정은 결국 존재의 퇴화와 소멸로 귀결될 안주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이명호 전시전경



이명호 전시전경



김지수 전시전경



김지수 전시전경



구성수의 포토제닉 드로잉은 부조와 사진, 회화가 결합된 작품으로, 한 화면에 하나씩 자리한 광교의 식물들은 마치 표본처럼 보이지만 색과 (얇은)입체감이 살아있는 사진작품이다. 광교를 찍은 흑백 사진들보다 더 생기 있어 보인다. 식물의 표본을 서고 시멘트로 만들고 채색하여 촬영한 작품들은 여러 장르에 걸쳐있으며, 역사적으로 사진이 출발했을 당시의 회화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사진의 역사에 대한 자의식적인 작업은 인덱스의 특징을 가지는 사진의 형식을 이용하여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미소한 존재들을 실감나게 재현한다. 거기에는 세계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사진의 특성과 조형예술 작품의 물성이 결합되어 있다. 대상에 부여된 실재감은 부재의 흔적인 사진을 또다른 차원으로 변주한다.   


이명호는 나무 뒤에다가 캔버스 천을 드리우고 사진을 찍어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나무와 더불어 풀도 같은 방식으로 찍었다. 나무나 풀이나 비슷한 구조이다. 태양 빛을 받아 합성된 원소와 지하로부터 빨아올리는 수분이 만나는 기제는 프랙털 도형처럼 구조적 동형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거대한 기구가 동원되곤 하는 나무사진과 달리 풀은 좀 더 작은 크기의 배경막이 설치되었다. 노트 한 장 크기의 밝은 면은 풀의 섬세한 분지 체계를 소묘처럼 보여준다. 빛으로 그려진 그림인 사진에 그림 같은 또 하나의 장치를 덧댐으로서 이름 없는 미소한 존재는 작품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작가는 전시장 구석에 사각형의 작은 정원을 조성하여 광교의 풀을 심어 놓기도 했다. 작품은 자연으로부터 떠내어진 작은 정원의 또 다른 판본이다.




최수환 전시전경



최수환 전시전경



실험실에서 볼법한 작은 투명용기들이 늘어선 김지수의 작품에는 냄새가 채집되어 있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지각된 냄새는 기억과 밀접하다. 기억은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나 정원냄새 뿐 아니라, 전시를 위해 광교에 처음 들렀을 때의 체험도 포함된다. 김지수가 생각하는 광교의 냄새는 ‘마음의 바닥에서 차올라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가듯 연결 된 냄새’이다. 이러한 시적인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작가에게 냄새 분석 작업과 글쓰기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이다. 냄새를 풍기는 [냄새 나무] 드로잉은 동식물이 결합된 듯한 환상적 존재이다. 모든 관객이 작가만큼 냄새에 민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많은 기록과 설치물을 통해 냄새를 시각화한다. 가령 들려 올려진 모양새로 설치된 작품은 냄새에 대한 공(共)감각적인 표현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예술적 표현을 추구하는 최수환은 락밴드 그룹 리더를 하기도 했던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관객이 눈에 착용하는 가상현실 장치에서 음악을 추상화시킨 듯한 이미지가 펼쳐진다. 보이지 않는 소실점을 향해 리드미컬하게 나아가는 색색의 막대들은 미술사에서 초기 추상 화가들이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작품은 음악처럼 흐르는 시간을 깔고 있다. 그림처럼 벽에 붙은 두 개의 작은 패드에서는 관객이 터치에 반응하여 변화무쌍하게 색을 바꾸는 풍경과 공기의 입자같이 미시적 차원의 원소가 움직이는 모습이 흘러 나온다. 사이버 스페이스에 구현된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세계는 다채로운 표면적 현상 뿐 아니라, 그 규칙에 대해서도 직관하게 한다.    

 

출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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