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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 / 의미하지 않고 존재하는 언어

이선영

의미하지 않고 존재하는 언어

  

이선영(미술평론가)


  

울퉁불퉁한 요철들이 작업의 리듬에 맞춰 배열되어있는 허윤희의 작품의 질감은 독특하다. 붓으로 그려서 내기는 힘든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효과가 있다. 작가는 물감 대신에 흙을, 붓 대신에 송곳과 망치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그린다’. 행위의 흔적들일 뿐, 그렸다고 할 수 없는 작품들을 여전히 그림처럼 보는 이유는 흔적 역시 이미지로 남아 다양한 연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관객의 면 전에 있는 사각형에는 그 무엇이 자리해도 의미와 연관될 이미지가 떠오른 것은 인류의 오래된 시각적 관습 때문이다.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상(icon)은 이미지의 가장 강력한 모델이 된다. 지금은 종교의 시대가 아니지만, 그림 말고도 다양한 스펙터클이 난무하는 현대에, 성상만큼은 아니어도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밀도 높은 상이 요구된다. 그저 흘러가는 이미지라고 보기에 그림, 또는 만들어진 이미지에 투입되어야 하는 물적, 심적 에너지는 크다. 


행위의 흔적을 사각 공간에 담는 허윤희의 작품은 시간성이 축적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흐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연상이 있기에 이미지를 극구 거부했던 추상화 또한 무엇인가의 재현, 최소한 무엇으로부터의 추상이라는 전제를 떨치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현대미술과 회화는 불편한 관계에 빠졌고 다양한 방식으로 회화의 지양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회화의 복귀나 복권이 주장되곤 했다. 현대회화는 회화가 원점으로부터 다시 시작된 자기반성의 결과로, 단순히 어떤 이미지와 의미를 등치시키는 방식을 벗어난다. 그림을 그리는 기본적인 도구를 거부하는 허윤희가 붓으로 그리기보다는 더 많은 육체적 노동력이 드는 이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는 이미지가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을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방을 주시하는 인간의 시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이미지는 극히 드물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허윤희의 몇몇 작품들은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병적 증상이 있는 환부의 사진을 진열장에 잔뜩 붙여 놓고 약 광고를 하던 약국 앞에서 그 징그러운 이미지를 자세히 뜯어보곤 했던 필자의 어린 시절도 떠오른다. 요즘도 금연을 권하는 담배광고에서 그런 식의 충격 요법을 쓴다. 누군가는 허윤희 작업을 가학적이라고 평가했다는데,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피학적인 면도 없지 않다. 부드러운 껍데기로 한풀 가려져야 할 것 같은 원초적인 모습에는 정확한 외곽선이 없으며, 작품 제목으로도 별 힌트를 주지 않는 의미의 표류가 있다. 작가는 특이한 재료와 작업 방식으로 그림 이전의 더 상태로 진입한다.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명확한 이미지는 곧장 어떤 의미와 연결 됨으로서 불확실한 것 앞에 서 있는 이의 불안감을 잠재운다. 하지만 그 댓가는 커서 회화를 다른 형식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게 한다. 이미지를 통해 무엇인가 말하고자 한다면 삽화나 만화, 영상 등이 더 확실할 것이다. 


허윤희의 방식은 의미-이미지가 아니라 행위-물성을 지향한다. 물성을 중시한다 함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 대상이나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존재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모리스 블랑쇼는 미술에도 해당될 수 있는 예술론을 담은 책 [문학의 공간]에서 ‘언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아무것도 의미하지도 밝히지도 않는다’고 정의 한 바 있다. [문학의 공간]은 ‘진정한 언어는..그 고유의 법칙에 충실한다는 조건 하에서 변형하고 창조하는 자유를 가진다...언어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유롭고 중단되지 않는 전개 속에서 그 언어의 진실을 생산할 것을 요구한다’는 스타로벵스키의 말을 인용한다. 이러한 사고는 근대 시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 이론에서도 친숙하다. 현대에 되살아난 ‘유용하지 않은 언어’(블랑쇼)에 대한 의미부여는 세계를 언어로 보는 철학의 대두와 함께 한다. [문학의 공간]은 유용한 말과 무용한 말을 구별한다. 


유용한 말은 ‘도구, 수단이며, 행동과 작업, 논리와 지식의 언어,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시와 문학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말한다는 것이 일시적이고 종속적이며, 통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본래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고 애쓰는 언어’라고 한 말라르메의 말을 인용한다. 바탕과 도구, 안료와 행위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허윤희의 작품 또한 무엇을 가리키지 않는다. 블랑쇼의 구별에 의하면 무용한 말이고 불투명한 말이며, 의미가 아닌 존재 그 자체다. 동어반복적이고도 자기지시적인 특성을 가지는 논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현대예술이 가지는 어떤 의미는 무의미의 의미라고 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근대적 개념은 허구의 몫이 커진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반향 된다. 퍼트리샤 워가 [메타 픽션]에서 ‘언어가 어떤 일관성을 가진 의미 있는 객관적인 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주장될 수 없다. 언어는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이다’라고 주장할 때, 의미가 아니라 존재하는 언어의 불투명성에 대한 이전 시대의 미학이 반향 된다. 


이전부터 작가는 흙 작업을 하긴 했지만, 얼마 전 참여했던 레지던시(클래이아크미술관)에서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흙을 선택하게 했다. 작가에게 흙은 자연에서 온 듯한 ‘물감’으로 생각되었다. 브라운과 레드 계열이 두드러지지만 흙 역시 나름 다양한 색상을 가지고 있고 점도도 다르다. 그렇지만 평면에 잘 붙지 않아서 흙을 물감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얇기가 적당하여 늘 사용하는 파브리아노 종이 위에 흙을 올리고 망치같은 도구로 작업을 하면 흙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움직이면서 흙의 농도와 두께가 달라진다.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결합 된 궤적이 남겨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흙으로 판을 만든 후 그것을 바닥에 던져 생겨난 우연한 효과를 세라믹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흙으로 무엇인가를 빚었다기 보다는 힘을 가해서 만들어진 형태를 구워서 고정시키고 이를 카페트처럼 연결하여 설치한 작품은 형태가 아니라 행위에 방점이 찍힌다. 


도구를 동반한 행위는 표면 위가 아니라 표면 안팎을 공략하는 것으로, 최종 산물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얇은 부조같은 느낌이다. 작품의 위와 아래는 있지만, 작품의 이면도 작품이라고 생각하여 뒤가 보여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품은 설치 등의 형식과 결합하여 공간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간혹 사용하는 천은 찍은 흔적만 남지만 종이는 다르다. 대개 종이를 사용하는 작품의 연약한 표면은 행위의 흔적을 더 적나라하게 받아낸다. 찍어서 생기는 구멍이나 찢어진 자국 사이로 물질이 오고 간다. 화가가 표현하려는 것에 따라 다양한 붓을 사용하듯이 허윤희 또한 송곳, 망치, 끌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를 가지고 한 행위의 흔적에 의한 작품이므로 작품의 물성은 도구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는 종이와 흙 사이에서 행해지는 무엇, 그 온전한 기록과 흔적을 중시한다. 스케치 같은 사전 각본은 없다. 작품 제목도 작업이 끝나고 붙여진다. 


이전에는 탁본 작업도 했다. 아스팔트를 탁본하여 나오는 이미지는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풍경같은 느낌을 주었다. 요즘 작업은 직접 대고 문지를 대상도 빼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얇은 종이에 힘이 가해지면 찢어지고 배면에 칠한 합성수지가 구멍으로 넘어와 표면의 색이 달라지기도 한다. 색이 없는 작품의 경우 질감만 남는다. 이러한 작품은 맹인이 점자판을 만지듯이 희끄무레한 평면에 시각적으로 접촉하여 표면의 굴곡 면을 따라가야 한다. 흙과 합성수지 등이 도포된 종이 앞 뒷면은 종이로서의 질도 잃어버린다. 그것은 둘둘 말리지 않아 수평 그대로 이동해야 하는 얇은 판이 되어 간다. 종이의 크기 뿐 아니라, 이러한 변형 때문에 큰 작업을 진행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물성을 중시하는 작품의 크기가 적어진다면 자칫 장식적이 될 위험이 있다. 표면뿐 아니라 이면도 함께 작동하는 이 민감한 판은 대상과 의미를 관객 앞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자체로부터 의미를 촉구한다.     

 

출전; 창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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