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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영 / 변화하는 구조의 단면

이선영

변화하는 구조의 단면

  

이선영(미술평론가)


  

한지에 먹과 콩테로 그린, 간혹 채색을 하기도 하는 윤준영의 작품은 절제된 화면 중에도 서사를 풍부하게 이끌어 나간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없지만 관객에게 말을 걸고, 기하학적 구조가 다수 등장하지만 추상화는 아니다. 정교하게 고안된 구조들은 구조를 위한 구조, 또는 장식적 구조가 아니라 의지, 욕망, 정념 등이 흐르는 통로의 단면으로 변화의 지점이 예고되어 있다. 꽉 막힌듯한 통로에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문들이 뚫려 있거나 그러한 이동을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 대목에서 선조적 진행은 단절되고 도약과 비약이 일어날 수 있다. 작가에게는 예술 자체가 기성의 단선적 논리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이다. 윤준영의 작품은 색조마저 모노톤이어서 다소간 딱딱해 보이지만, 그것은 작가가 표현하려는 현실 자체의 구조적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이게 하는 것, 그 뒤에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지향점이다.




반짝이는 빛 속에 있기를 바랐는데 매일 까만 어둠을 헤맨다. 2018 한지에 먹 콩테 채색97x130.3cm



home 2016 한지에 먹, 채색, 콩테 110.2x130.2x3cm



haven 2016 한지에 먹, 채색, 콩테 80.3x116.8x3cm



다소간 건조하고도 냉랭한 작품은 그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표현적이면서 장황하면서도 ‘나는 나다’라는 메시지 외에 특별한 내용이 없는 과장된 화법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 믿을 것을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지만, 귀결점 또한 자신에만 국한된다면 무의미하다. 그런 것들은 이미 그림보다 훨씬 대중적인 소통 방식으로 자리 잡은 SNS에서 차고 넘치는 ‘콘텐츠’ 아닌가. 타인에게 말하는 듯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는 무늬만 소통인 방식을 예술은 극복해야 할 것이다. 윤준영 또한 전업 작가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불안과 고독을 감내하고 있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의 존재에만 온통 몰두하는 절제되지 않은 작업의 풍토를 피해간다. 물론 개인이 처한 현실을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자신은 작품으로 모든 것을 배설해서 시원하겠지만, 보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 결코 성공적인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이려는 거짓된 승화나 관념적 초월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윤준영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 문명과 자연에 대한 메시지를 스스로 정한 몇 가지 상징적 도상의 조합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림에 일련의 문법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사회의 상징적 구조로서의 언어보다는 개인에 의해 새롭게 생성된 문법이다. 요소들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식에서 야기될 수 있는 장식성이나 상투성을 벗어나고자 한다. 자연 생태계와 인공 생태계로부터 선택된 상징은 보편성을 가진다. 바다와 함께 등장하는 달, 작은 집이나 빌딩 숲 등은 난해할 이유가 없다. 요소들 간의 어울리거나 부딪히는 관계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윤준영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화에는 낯선 날 선 직선들이 그림의 구조를 이루고 그 안팎으로 물, 나무, 달, 새, 개 같은 자연물이 배치된다. 직선들은 집, 방, 초소, 빌딩 숲, 벽, 미로 등 건축적인 요소를 이루고, 형태가 아닌 배경에서는 수평선이나 지평선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둔 밤의 정원 2018 한지에 먹, 콩테,채색  97x130.3cm



inner  2018 한지에 먹, 콩테, 채색 70x150cm



이러한 구조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시간과 공간이 불확실하다. 밤인지 낮인지, 어느 계절인지, 한국인지 외국인지 특정하기 힘들다. 작가가 처한 개별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보편적 상황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역사, 특히 현대의 역사는 ‘새로움의 전통’이 지배하는 ‘영원한 과도기’로 규정되곤 했지만, 그 와중에도 뼈대는 있다. 지엽적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동반하다. ‘패러다임의 변화’ 등으로 말해지는 사건들이 그 예이다. 역사와 인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전 시대의 사상을 거부하는 현대철학의 한 분파는 이 뼈대를 ‘구조’라고 표현했다. 인간 삶에 과학기술 및 관료주의를 비롯한 체계의 힘이 더욱 커지면서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에도 힘이 실렸다. 그러나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닌 예술가에게 구조 그자체 보다는 구조가 말하는, 구조를 통하여 표현하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많은 다수가 대입시킬 수 있는 보편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개인이 사회를 살아가며 느끼는 고독감, 사회적 유대의 상실감,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 대한 불안, 복잡한 사회체계 앞에서의 무력감 등의 비가시적인 사유를 가시화하고자’ 했다. 


최근 10여 년 간의 대표 작품을 살펴볼 때,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작은 기와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성장의 과정은 실낙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조군을 통한 의미의 전개가 특징적이다. 진짜 집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지평선에 서 있는 작은 집이 보이는 작품 [반짝이는 빛 속에 있기를 바랐는데 매일 까만 어둠을 헤맨다](2018)에서 비현실적 좌표에 위치한 집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듯하다. 바슐라르나 하이데거 같은 형이상학자들이 집의 존재 의미에 대해 심오하게 성찰한 대목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에게 집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집 옆에 나무나 오솔길이라도 있으면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 진다. 그러나 작가는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또는 집이 멀어지는 이 박탈적인 이야기를 시각 테스트용 화면처럼 무덤덤하게 표현했다. 이 작은집은 계속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작품 [제4의 벽](2018)에서도 새들과 푸른 나무, 그리고 만월이 있는 작은 집은 화면 위쪽에 아슬아슬하게 훅 사라질 듯 매달려 있다. [home]이라는 제목의 몇몇 작품에서 작은 집은 겹겹의 미로에 둘러싸여 있다. 




이방인의 집 2016  한지에 먹, 콩테, 흑연 132x97.5cm



parallelworld-2013 한지에 채색 콩테 120X100cm



parallel world 2013 한지에 채색 콩테 120X100cm



미로의 안쪽에 존재하는 집은 어릴 때 살던 한옥집이 모델이며, ‘사회에 대한 불안이 없었던 그때’를 상징한다.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애써 찾아내야 하는 ‘나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경험적이기도 하고 원형적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작업은 충만했던 시공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작품 [가둔 밤의 정원](2018)에서는 집 자리에 초소가 보이는데, 그것은 초소가 집과 같은 위치에 있음을 알려준다. 나의 연장인 집, 나의 축소판인 초소로 이해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내가 있는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불확실하다. 작품 [wall](2018)은 미로로 가득한 공간이다. 작가는 악(惡)무한의 장소에 희망적 요소도 심어 놓았는데 그것은 중간중간 보이는 푸른 물이나 달, 식물 같은 존재이다. 벽이나 바닥에 뚫린 창은 게임의 규칙이 급작스럽게 바뀌는 지점들이다. 이때 선형적 움직임은 예견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도약할 것이다. 작품 [낯선 구조](2016)는 지붕 없는 연속된 구조물이 미로로 나타난다. 미로에서의 방황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을 수 있는 새들뿐이다. 


새는 작가에게 ‘경계 없이 안과 밖을 드나드는 존재, 그 자체로 자유로움의 상징이며 인간 육체가 가진 한계를 벗어난 무한(無限)함 상징’한다. 발인하는 날 나타난 새가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키우던 새같이 보였던 작가에게 새는 물질적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영혼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새가 떼로 나타나는 경우 멀리서 보면 마치 와이파이 기호처럼 송수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벽돌이 빼곡이 쌓인 담도 미로를 이루지만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검은 바닷물 또한 미로이다. 작품 [소란한 침묵](2018)에서는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다리가 가는 초소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존재들인 새떼들이 모여 있는 초소는 드넓지만 동시에 미로인 바다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유한다. 문도 계단도 없는 이 초소같은 구조물은 밑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눈구멍처럼 뚫린 검은 사각형은 직접 만나지 않고 서로를 보려 하는 현대적 사회관계를 압축한다. 정보사회의 인간들은 육안보다는 손바닥 안의 작은 창들을 통해 본다. 이러한 상호적 인정을 통해 세계는 점차 그 작은 창들로 환원되어 간다. 네트워킹이 가속될수록 더 외로워지는 역설은 이러한 부당한 환원의 결과일 것이다.  


sample  2011 한지에 채색, 콩테 59x73cm



관측의 대상 2015 한지에 먹 콩테100x78cm



광활한적막 2016 한지에 먹, 콩테 73x91cm



2018년 작품 제목처럼 ‘광활한 적막’ 속의 하얀 초소는 어두운 바다를 비춰주는 등대같이 든든한 존재가 아니다. 최근 작품 [달과 검은 바다](2019)에서 달의 영향력 아래 있는 바닷물은 이 미약한 존재를 침수시켜 버린다. 초소는 집의 형태를 취하고 섬에 세워져 있기도 한데, 그것은 아놀드 뵈클린의 [죽음의 섬](1880)을 차용한 작품 [haven](2016)처럼 유토피아이자 죽음인 장소로 나타난다. 죽어서야 들어갈 수 있는 이 섬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의 특징을 알려준다. 윤준영의 작품에서 바다가 미로에 해당하는 도상이라는 것은 이 작품에서 확실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을 상징하는 검은 바다는 대자연을 대표한다. 작가에게 자연은 ‘감히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 그 안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측 불가능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존재’이다. 최근의 작품에서 이러한 자연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작가는 대자연에서처럼 사회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낀다. 


작가는 집의 최소한의 형태인 사각형을 과도하게 쌓는 방식으로 도시를 표현한다. 그러한 도시는 위태로운 배나 기화되고 있는 고체같은 취약한 면도 드러낸다. 작가는 작업의 주된 형식으로 가져온 ‘공간을 이루는 기본 형태인 사각형(벽)’이 ‘획일화된 구조물’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작품 [공존의 질감](2015)에 나타나듯이 이러한 집적체들은 허공에 붕 뜬 채 아무런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작품 [laputa](2010)에서는 산동네 전체가 들려있는 듯한 모습이고 바닥은 구름이 깔려 있다. 작품 [parallel world](2013)에서 작가는 밀집된 구조물을 강조하기 위해 도시의 풍경을 줌인(zoom in)했으며, 이때 땅과 하늘은 사라진다. 어떤 기준이 사라진 인간의 규칙은 작품 [breathe](2013)에서처럼 스모그, 미세먼지, 화재, 테러, 재난 등으로 혼란스러운 대도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준영에게 도시는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공간이 아닌, 현 사회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공간’이다. 




담 2016 한지에 채색, 먹, 콩테 100x70x3cm



곳 2018 한지에 먹, 콩테 채색116.8x72.7cm



최대한의 경제성을 위해서 사각 그리드 구조에 바탕 한 도시는 호환성 있는 보편적 단위가 되기 위해 잘려진다. 그것이 단면이 있는 사각 공간이라는 도상을 낳는다. 그것은 작품 [sample](2011)처럼 거대한 현실의 단편은 수조에 담겨진 채 속속들이 분석된다. 그 내부에 현실원리가 새겨져 있는 의미심장한 단편이다. 구조적 단위들이 종적으로 횡적으로 연결되면서 권력이 구축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윤준영의 작품은 공시성(synchronity)이 특징이다. 그것은 어떤 흐름의 단면이다. 윤준영의 작품에서 명확하듯, 다닥다닥 붙은 집, 또는 건물의 지붕을 모조리 제거하면 미로가 나온다. 조셉 칠더즈와 게리 헨치가 편집한 [문화비평 용어사전]에 의하면, 공시(共時)론은 언어의 역사적 요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대체적, 동시적 요소들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는 언어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창설한 기호에 관한 학문, 즉 기호론과 연관된 한 쌍의 용어 중의 하나이다. 지금 그렇게 펼쳐진 상황에 대한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언어 체계처럼 ‘어느 시점에 구성되어있는 모습대로’(소쉬르) 연구한다. 


[사전]의 편집자에 의하면, 그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의미의 전달에 있어서 동시적 요소들의 관계가 그 요소들의 역사적 파생보다 중요하다는 믿음’이 있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체계’(소쉬르)라는 것이다. 가령 윤준영의 작품 속 기와집은 유년기와 관련된 구구절절한 추억을 담은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벽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미로 또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마치 현대의 언어학처럼 ‘한 단어의 의미는 통시적으로, 즉 그 어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시적으로, 즉 구조상 인접한 단어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소쉬르)되는 것이다. 기원과 목적을 말하기에는 현대인은 너무나 찰나적인 시공간에 매달려 있다. 윤준영의 작품에서 미로의 핵심에 존재하는 집의 모양새를 보면 행복이 시작되었던 작은 집이라는 전형성만을 취한다. 그녀의 작품은 핵심적인 대목을 식물학자가 관찰을 위해 줄기의 단면을 잘라내듯, 의사가 환자의 육신을 단층 촬영하듯이 분석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Laputa 2010 한지에 채색콩테 92x182cm



집적된 공간 2015 한지에 먹 콩테 100x110cm



breathe 2013 한지에 채색 콩테 162X130cm



공시적(synchronic)/ 통시적(diachronic)이라는 개념은 구조주의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그 점은 구조적인 특성이 강한 윤준영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최근 작품에 미로에 해당되는 출렁이는 바다 등의 표현은 명료한 분석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과정 또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소나 망루같은 인공 구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바다가 의미화되는 방식은 여전하다. 이러한 구조적 방식에서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서 주체는 어떤 실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 속에 편재해 있다. 주체가 어떤 대상으로 은유 되는 순간에도 그 대상은 구조적이다. 즉 윤준영의 작품에서 초소이든 기와집이든 구조적 형식을 가진 무엇으로 주체가 표현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의 배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간이 배제된 구조는 구조 자체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침묵한다. 그렇지만 인간 주체가 노동이나 혁명을 통해 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이전의 인간주의(humanism)적 가정이 체계화가 가속되고 있는 현대에도 유효한 것인가. 


다수를 소외에 빠트리는 이 구조적 현실을 개인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 점 또한 의문이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하는 구조적 차원에 대한 관심과 분석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윤준영의 최근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물은 미세한 관점의 변화를 예시한다. 벽 대신에 출렁이는 바다가 등장하는 것은 어느 시점에 굳어진 구조가 아니라 변형의 차원을 강조한다. 구조주의의 반(反)역사주의적 경향을 지적하는 철학자 장 삐아제는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무엇보다도 변형(transformation)의 체계라고 강조한다. 즉 구조는 체계이고 요소나 요소특성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 삐아제는 전체가 구성되는 논리적 절차나 자연적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체계구성의 법칙이나 구성요소에 의해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전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태적 형태의 체계라기보다는 변형의 체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구조의 또 다른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내려놓음의 공간13.22314m2 2010 한지에 채색콩테 92x182cm



광원의 반대쪽  2011 한지에 채색, 콩테 190X122cm



다름없이,별은 반짝인다 2015 한지에 채색, 콩테 110x200cm



특히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의 재현이 아니라 변형과 생성이다. 작품 [Inner](2018)에서 초소가 있는 상자 같은 곳은 문명이 개인에게 할당한 공간처럼 보인다. 검은 구멍이 눈구멍같이 보이는 초소는 상대를 보지만 상대는 그것을 볼 수 없는 비대칭성이 특징이다. 권력은 이러한 비대칭성을 통해 작동한다. 애초에 개인을 추상적 공간 속에 좌표화시키는 시스템의 방식 자체가 권력이 작동한 결과이다. 윤준영은 신용카드를 발급받고자 하는 예술가를 평가하는 시스템 매뉴얼의 예를 든다. 이러한 곤혹스러운 심판대에 오른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남들과 같이 월급을 받아 신용등급을 쌓는 것이기보다는, 시스템과 그것이 돌아가는 과정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들은 체계 밖의 주변인이기 때문에 다수가 법칙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거리감이 있다. 윤준영의 작품에서 그러한 주변적 존재는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작품 [inner](2018)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새떼들은 주어진 자리에서도 탈주하는 방식이다. 윤준영의 작품에서는 두부처럼 잘려나간 대지들, 컨테이너나 아파트같은 사각 공간의 모델은 자주 발견된다. 그것들이 모여 미로가 된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푸른 자연은 회색빛 문명을 상대화한다. 작품 [다름없이, 별은 반짝인다](2015)에서 컨테이너 같은 집들이 있는 사람 사는 곳을 사막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별이 가득한 원경의 푸르른 하늘이다. 하늘 또는 바다로 나타나는 광활한 공간은 인간의 규칙이 도출된 더 근본적인 법칙의 장이다. 위태롭게 쌓인 건축들이 과적 선박처럼 푸른 공간에 떠있는 작품 [선](2008)이나 밀집 도시구조를 떠받쳐 주는 나무들을 그린 작품 [섬](2012)은 문명에 대한 자연의 선재성을 말한다. 똑같으면서도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에 대해 이방인이다. 작품 [이방인](2015)은 밀집된 사각 공간으로 나타나는 도시가 덩어리째 붕 떠 있는 모습이다. 




소란한 침묵 2018한지에 먹, 콩테, 채색 97x130.3cm



광활한 적막 2018  한지에 먹, 콩테72.7x53cm



달과 검은 바다_2019_한지에 먹, 콩테_97×130.3cm



그 안에 속하지 못하는 전경의 개 한 마리는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다. 윤준영의 작품에서 푸른색이 차지하는 희망적 내용을 생각할 때, 이방인의 시점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빈 의자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거대 도시가 있는 작품 [광원의 반대쪽](2011) 음지에 있다고 믿는 소외된 인간이 내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사각형 구조물들만으로 이루어진 집합체가 있는 작품 [이방인의 집](2016)에서 각 개인을 상징하는 사각 구조물들 사이는 그자체가 미로가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념과 이해관계의 대립,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부재와 무관심이 불러온 단절, 그리고 이 문제들의 고착’이 원인이다. 사회를 ‘욕망의 집합체’로 보는 작가에게 구조는 욕망의 산물이다. 구조에서 구조가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구조가 그리고 구조가 욕망을 다시 낳는 방식이다. 가까이 있어도 먼 존재들은 미로를 통해서 만난다. 미로는 건축같이 가시적 존재뿐 아니라 원격 통신같은 비가시적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윤준영의 작업에서 이 보이지 않은 세계의 몫은 더 커지고 있다. 

 

출전; 남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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