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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 빛과 어둠을 연결하는 통로

이선영

빛과 어둠을 연결하는 통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인디프레스에서 열리는 '木 林 相' 전은 92년 덕원 미술관에서의 초대전을 시작으로, 1988년에 한국에 돌아온 김명숙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알린 나무와 숲 그림 중의 일부이다. (첫개인전은 1989년 'Studies for Sisyphus') 그것들은 지금도 진화 중인 시리즈이다. 간혹 홍조를 띄거나 푸르스름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대개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가지는 나무와 숲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요즘의 시기를 알려주는 듯하다. 실제의 수령과 무관하게 해묵은 느낌이 있는 작품 속 식물들은 모나리자 초상의 어슴프레한 뒷배경처럼 오래된 공기를 머금고 있다. 미술 비평가 르네 위그는 모나리자의 초상을 분석하면서 여인과 오래된 바위를 비교한 바 있는데, 오래된, 또는 오래된 분위기의 작품은 비록 작품 안에 자리 잡은 것이 생물이라고 할지라도 광물질적인 시간성을 깔고 있다. 이러한 장구한 시간성은 원시나 고대 문화의 특징이며, 좀 더 짧은 주기로 모든 것이 순환하는 현대적 시간에서는 낯선 것이다. 




202x168cm mixed medium 1991



198x180cm 1992



154x112cm 1993



320x234cm 1994



실제로 깊은 바닷속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상어나 거북이는 거의 암석 같은 모양새가 특징적이다. 죽음과도 비교될 수 있는 주변 환경과의 동일화이다. 그러한 생물의 오랜 수명은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하는, 불교의 금욕 수행을 떠오르게 하는 삶의 방식 때문이다. 수백년 수천년의 세월을 살기도 하는 나무 또한 주변과의 최소한의 관계의 산물이다. 동물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기에,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환경에 적응하는 나무의 생태가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나무 역시 형태와 생태, 또는 안과 밖이 일치된 형식으로 흥미를 끈다. 더 나아가 나무는 물질과 사유의 모형이 된다. 나무는 ‘빛에너지를 끌어들이고 흙 속의 자양분과 수분을 길어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로베르 뒤마, [나무의 철학]) 나타난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위로는 줄기가 공기 중에 포함된 이산화탄소와 햇빛을 빨아들이기 위하여 가지와 잎을 확산시키는 나무의 기제를 묘사한다.


한편 나무 아래쪽에서는 수분을 흡수하고 단단해진 줄기를 받쳐주기 위해 뿌리가 갈래를 펴나간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삶이 동물의 삶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훨씬 적다는 점을 식물과 동물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식물들은 토양에서 직접 양분을 얻을 뿐 아니라, 번식을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요컨대 식물은 동물보다 훨씬 경제적인 기능체계를 갖추고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식물은 동물이 지니지 못한 엄청난 잠재적 내구력을 지닌다. 자크 브로스는 그 자신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나무의 내부에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태양과 더욱 가까이함과 동시에 지상에 안정감 있게 자리 잡으려는 나무들 간의 경쟁은 치열하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속에 품은 채 몸살을 앓는듯한 김명숙의 작품 속 나무와 숲들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에 각인된 흔적을 담고 있다. 재생과 순환을 약속하는 식물은 꽃이나 열매로 현실화되는 짧은 전성기와 그보다 더 긴 잠재적인 시기를 필요로 한다.



210x270cm 1994



200x270cm 2002




190x220cm 2002



인디프레스 2층에 나란히 자리한 벼락맞은 나무 시리즈는 시간의 축적이 주는 존재감을 한껏 뿜어낸다. 93년 맨 처음 그리기 시작해서 2005년까지 근 10년 넘게 그린 시리즈이다. 그것들은 독일의 숲 창고 다락방에서 벼락 맞은 수양버들을 본 경험의 산물이다. 굴곡 면이 복잡한 고목이 벼락까지 맞은 형태에서 여러 미묘한 표정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나무를 그릴 때, 그것은 풍경화가 아니라 초상화라고 강조한다. 이 시리즈는 비슷한 크기이며, 최초의 작품은 몰입해서 그리느라 종이를 덧대가며 그린 것이다. 번개로부터 영감을 보는 작가에게 최초로 그린 작품은 나중에 조형적으로 더 세련되게 정리된 작품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있다. 벼락 맞은 나무는 수억 볼트의 전류가 관통하면서 마치 가마에 들어간 흙처럼 속속들이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질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나무는 물에 넣으면 아래로 가라앉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벽조목으로 알려진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거의 돌만큼 강도가 강해져서 오랫동안 사용해도 닳지 않는 도장이나 염주 등의 재료로 사용되고, 가격도 비싸다고 한다. 또한 그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부적의 역할도 한다고 민간에 알려져 있다. 유기체로서는 죽음에 가까운 재난이 그 자체를 더 강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물리적 대상에는 없는 영험한 기운까지 획득하는 과정은 샤먼이나 예술가에게도 공통된다. 김명숙의 작품에는 삼계(三界)를 넘나드는 샤먼과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그리고 이러한 변신의 가시적 상징물인 나무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여 하늘-대지-지옥을 연결하는 생명의 나무에 대한 신화의 기원을 동양(메소포타미아)에서 찾는다. 굿판으로 나타나는 샤먼의 독특한 행위는 이러한 신화적 구조에서 생겨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샤먼이 신비적 여행 중에 하늘을 오를 때 그는 계단이 나 있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게 된다. 




207x170cm mixed medeium 1992



300x23ocm 1994



300x196cm 1994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서양의 예는 ‘야곱의 사다리’일 것이다. 나무는 무엇보다도 지지점이다. 따라서 하늘과의 소통은 나무를 중심으로 해야 만이, 또는 나무를 사용해야 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존재 양식의 변화,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 우주적 모태로의 회귀인 죽음은 우주적 생명의 원천과의 재접촉이다. 신화학자 진 쿠퍼도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 상징 사전]에서 나무타기는 지금의 존재 차원에서 다른 존재 차원으로의 이행이며, 속계를 초월해서 비의적 지식이나 그노시스 지각을 얻으려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이행은 다른 세계로의 뻗음, 마법의 지식이나 마력을 얻게 한다. 가령 십자가는 한가운데의 나무, 즉 하늘과 땅과 교류하는 수직축과 동일시된다. 인도 보리수도 성스러운 중심이다. 신화학자나 종교학자들이 예로 드는 수많은 인류학적인 증거는 인류의 상상계에서 인간이 지상의 조건을 벗어나 비상하고자 했을 때 나무는 자연스러운 매개가 되어 주었음을 알려준다. 


얼마 전에 열린 ‘카타바시스’ 전이 하계로의 여행을 상징한다면, 나무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번 전시는 상승하는 국면에 대한 상징이 있다. 그러나 예술 속의 나무는 신화나 종교에서처럼 매끄럽지 않다. 예술은 안정감보다는 안정감을 뒤흔드는 것과 더 관련된다. 작가는 나무를 충분히 많이 그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십수년간 그려온 나무 그림들의 상태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러한 판단은 주관적이기도 해서, 좋은 작품이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방치되기도 하고,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아닌 것들도 있는 등, 작가로 하여금 선택 장애에 빠지게 했다. 1, 2부로 나뉘어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16년간 그려온 수많은 나무와 숲 작품 중 무엇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은 바깥에 있던 것들이 작가라는 통로를 거쳐 다시 나온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무는 그 자체가 여러 차원을 연결 짓는 통로 아닌가.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 방치된 것이어서, 전시를 위해 보수하느라 덧붙여진 면들은 최초의 구도에서 예상치 못한 연결망을 만들어나간다. 




320x235cm 1992-1993



183x134cm 1993



320x234cm 1994



질 들뢰즈가 리좀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이래, 수목 모델이냐 뿌리줄기 모델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양자는 상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유스러운 횡적 연결망을 중시했던 탈주의 철학자는 하나의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계통을 이루는 수목의 모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모든 철학은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그 줄기는 물리학이며 그 가지들은 나머지 다른 과학들이다’라는 데카르트의 언명에는 나무와 형이상학을 연결 짓는 사고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합리적 체계인가 자유로운 탈주인가는 어느 국면을 보는가의 차이 아닐까. 오랫동안 김명숙이 그려온 나무와 숲에서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수직성과 미로와도 같이 복잡한 덤불이 공존한다. 우연히 만난 벼락 맞은 고목은 전체가 아니라 중간을 선택했기에 횡적 확장의 느낌이 더 강하다. 나무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나무는 기념비적인 위용을 가지며, 부분이 확대된 식물은 다양한 굵기와 방향성을 가지는 선의 유희가 현란하다. 


화면 가득히 담긴 미시적 차원의 대상/과정은 평면성이 강조되면서 투명한 창으로서의 역할 보다는 그림의 물리적 조건을 확인한다. 태양을 행해 뻗어 나가야 할 가지들이 산발한 머리처럼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다. 빛과 바람이 가세 하면 명과 암이 뒤섞여서 거의 추상화가 된다. 자연적 형태의 해체가 극에 달했을 때조차도 최초의 참조물에 대한 인상이나 물질적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나무와 숲은 자유로운 붓질을 보이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는 실재감의 원천이다. 김명숙의 복잡한 화면은 자연의 본질과 현상, 외관과 과정, 관념과 감성 모두를 아우르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차분한 방향성을 가지는 유일한 정적 요소는 간혹 나타나는 숲속의 오솔길이다. 저기로 가는 한 방향만 선명한 이러한 길(道)은 작업을 계속한다는 작가의 기본 태도만 확실히 할 뿐이다. 사방으로 뻗어 나온 잔가지들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더듬어가는 식물의 행동이 형태화된 것이다. 




 320x220cm 2001



240x230cm 2001



300x230cm 2001



편재하는 빛을 붙잡고 있는 신경 다발 같은 식물의 모양새는 여러 차원에서 (차이를 보유한 채) 반복된다. 나뭇가지들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듯한 모습이나 자극에 반응하는 신경다발, 또는 앞으로 촉수를 잔뜩 뻗은 듯한 모습으로 동물적인 역동성을 보여준다. 식물은 바람의 힘으로 소리를 내거나 동물을 이용해 씨앗을 퍼트리는 등의 전략을 통해 식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생에 대한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하나, 둘, 또는 여러 개의 가지의 관계가 있는 나무와 숲은 멜랑콜리를 비롯한 인간적 정념이 느껴진다. 크게 파여진 나무의 옹이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하고, 어떤 나무는 빛마저도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한 강력한 중력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강렬한 빛 때문에 그림자같이 보이는 나무부터 빛을 거스르는 가지의 움직임까지, 보는 이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연극적 동작이 있다. 이때 나무숲은 무대가 되고, 빛은 조명이 된다. 


나무 그림들로 가득한 전시장은 청주 산막리 야산 속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처럼 불 켜진 숲과 같다. 독일 숲에서의 벼락 맞은 나무뿐 아니라, 어디서부터 그림을 다시 시작할지 모르겠는 황망한 시절, 작업에 불을 붙여준 존재도 나무들이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작가가 접한 숲속의 신령한 기운들은 빛과 나무의 관계를 암시한다. 빛과 함께 나타난 나무는 그자체가 에피퍼니(Epiphany) 와도 같은 것이어서, 작가에게 존재에 대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계시를 가능케 했던 어떤 신비로운 출현을 말한다. 공현절이라는 의미가 있는 ‘에피퍼니’는 올 9월에 열린 ‘카타바시스’ 전처럼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현대예술에서 무의식만큼이나 핵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순간성과 영원성을 연결하면서 모더니즘을 정의한 보들레르 이래, 평범함을 통해 불현듯 본질을 깨닫는 현대 예술가의 방식이 되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제임스 조이스가 거론되지만, 근대에 와서 종교의 후예 역할을 맡은 것이 예술이라는 맥락을 무시할 수 없다. 




붉은나무,230x200cm,2003



320x230cm 2003



320x200cm 2005



빛을 등진 채 떼를 지어 다가오는 듯한 새벽 숲의 나무들을 그린 김명숙의 작품이 에피퍼니적인 장면이다. 빛은 나무라는 평범하고 정적인 존재를 드라마틱하게 하고, 나무는 빛과 반응하며 지상적 삶의 조건을 만들어간다. 그림을 다시 시작한 강력한 동인은 빛 속에서 스멀스멀 움직이는 나무, 나무에 내재한 빛과 같은 삶의 정수이다. 나무 떼들이 저기에서 빛을 등지고 리드미컬하게 걸어오는 느낌, 내가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교감, 이러한 원초적인 체험은 상당기간 동안 작가를 나무와 숲이라는 소재에 묶어 놓았다. 바람 속 수양버들을 표현하기 위해 홀린 듯이 한밤의 9시간을 한 시간처럼 보낸 밀도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한 것도 나무였다. 나무와 숲은 작가로 하여금 시공간 감각을 교란시켰다. 작가라면 언제라도 다시 빠지고 싶은 이 즐거운 혼돈 속에서 어떤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은 영구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래도 마침표는 찍어야 하며 작가가 없을 때에도 작동할 수 있을 만큼 자족적인 무엇으로 세워 놓아야 한다는 영원한 난제에 직면해 있다. 이 소재들만 모아놓은 인디프레스의 작품들은 작가의 기준에는 아직 미완성으로 간주되는 것들이지만 지금도 꿈틀거리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다. ‘모든 풍상을 견뎌낸 실핏줄’이라는 작가의 말대로, 표현은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번개가 칠 때 에너지가 분배되는 패턴은 식물의 잔가지나 뿌리의 그것과 동형적 구조를 이룬다. 만약에 누군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의 뇌리에 그 인상이 각인되었을 때 눈과 뇌를 연결하는 망 또한 번개/나뭇가지와 비슷하다. 그것은 프랙털 이론에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번쩍하며 떠오르는 영감 같은 번개는 창공을 가로질러 피뢰침 역할을 하는 나무로,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사건을 목도 하는 누군가의 신경계를 타고 스며드는 다차원적인 사건이다. 




자작나무숲 280x450cm 1995



320x230cm 2005



320x250cm 2007



230x230cm 2009



그리고 다시금 같은 과정을 화면에 뱉어내려는 또 하나의 움직임을 만든다. 그것은 결과가 반복되는 재현이 아니라, 과정이 반복되는 생성에 해당된다. 생성이 가능하기 위한 고뇌가 용트림하는 듯한 줄기나 생물학적 기제를 넘어서는 가지들의 표현에 실려있다. 나무나 숲을 포함한 자연적 대상은 주체에 의해 재현되기 보다는 비슷한 과정을 공유하며, 상호적으로 공명하는 관계인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사는 나무는 다른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생태계를 만들었다. 인간에게 최초의 식량을 제공한 것도 숲이다. 작가가 관찰하고 영감을 받았던 나무는 동네 야산의 잡목들에 불과하지만, 나무나 숲은 그자체로 의미깊고 생긴 것도 멋있어서 그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더할지 망설여진다. 거의 종교적인 체험이라 할만한 자연과의 조우, 그리고 이를 한정된 언어로 담아내야 한다는 갈등이 있다. 자연은 끝없는 과정 중에 있는데, 그저 한 단면을 물화시키는 편리한 방식이 아니라면 언제 어떻게 작품이 완성될 수 있겠는가. 


끝없이 그어지고 겹쳐서 때로는 무화되는 선들의 축적을 통해 식물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정확한 의미로 환원될 온전한 형태와 선명한 색보다는 무수히 많은 선들을 평면에 던져가며 형상을 구축/해체하는 김명숙의 형식과 식물의 표현은 어울린다. 자연 생태계 뿐 아니라, 대도시의 정리되지 못한 채 얽혀 있는 전선주 위의 전선 줄 뭉텅이들에서 보여지는 바처럼, 인공 생태계에서도 착종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김명숙의 작업 목록에는 식물 외에 자화상, 미술사적 도상, 동물, 물 등이 다양한 소재들이 포진해 있지만, 식물 자체가 섬유질, 목질소같은 선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내리그은 선들은 그만큼 오르내렸을 수분과 양분의 통로를 가시화한다. 기능이 바로 형태가 된 선들은 조형적 언어를 낳는 행위와 중첩된다. 광합성이라는 식물 고유의 활동은 빛과 식물의 내재적인 관계를 말한다. 땅속 어둠과 하늘의 빛을 연결하는 통로인 나무는 그에 걸맞는, 경계가 모호한 조형적 어법을 낳았다. 








인디프레스 갤러리 전시전경(사진 출전; 인디프레스갤러리)



어두운 숲속에서 지상적 존재의 세세함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빛이다. 빛은 화면 어디에서인가 유령처럼 출몰하여 화면 여기저기에서 폭발하게 한다. 빛은 나뭇가지들을 춤추게 하고, 절규하게 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다. 빛은 죽은 채, 또는 죽어가는 채 서 있는 몸체의 굴곡 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다양한 양태에도 불구하고 빛은 나무가 지상에 수직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 존재의 근거를 제공하는 원천이며, 작가는 이를 극적인 명암법으로 제시했다. 나무와 숲들은 배경과 밀도만 다른 선의 축적, 때로는 쓸어내림 등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상하의 운동성을 가진다. 변이를 낳는 시간성의 축적은 나무의 성장 과정과 김명숙의 작업과정에 공통된다. 이러한 수렴은 작업을 자연스럽게 함과 동시에 고통스럽게 한다. 작가가 즐겨 인용하는, ‘paint는 pain에 t를 붙여주는 것’이라는 루시앙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연이든 예술이든 모든 성장, 생성, 생산에 있어 고통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출전; 인디프레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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