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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다양한 세계의 저장소

이선영

다양한 세계의 저장소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지은의 작품은 가장 기본적인 필기구라고 할 종이와 연필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늘 곁에 있는 이 평범한 도구로 이질적인 별천지를 만든다. 형태가 좀 크고 두꺼워지면 목탄, 3차원까지 이어질 때는 실까지 확장되는 드로잉에 바탕하는 작품에는 지우면서 나오는 흔적이나 보풀도 포함된다. 그녀의 작업에서 지우기가 중요한 것은 작품 속 많은 형태들이 미완성된 듯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드로잉을 설치형식으로 푼 이번 전시에서, 몸은 이 작품에 머리는 저 작품에 산재해 있곤 한다. 손도 발도 예상치 못한 국면에서 불쑥불쑥 나와 어떤 행동을 하는 중이다. 모서리에 걸쳐도 놓고 다닥다닥 붙여도 놓고 천정 위에서 내려뜨린 것도 있는 다양한 크기의 종이들은 야생적인 전시공간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한다. 종이 속 공간에는 3차원 전시공간처럼 어두운 바닥이 있고 밝은 벽이 있으며, 그것들이 만나는 모서리도 보인다. 그렇지만 그 모두는 관객을 향해 한 면이 비어있는 연극 무대같이 모종의 행위들이 연기되는 장이다. 



인디프레스갤러리 전시전경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개성을 표현할 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막극 속의 인물들은 인형처럼 실에 조종당하기도 하고 실을 조정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무엇인가 몰입해서 하는 행동들이 일순간 고정된 것이며, 비슷한 형태들의 다른 자세를 통해 잠재적인 운동감을 보여줄 따름이다. 가령 나란히 붙여진 6장의 종이에 그려진 손들, 빨래처럼 7장의 종이를 막대기에 나란히 걸어 놓고 여기저기 위치한 머리통들이 있는 작품이 그것이다. 머리들과 손들을 각기 다른 시공간에 놓여있지만, 그 둘의 결합이 수시로 일어났기에 작품이 가능한 것이리라. 이렇게 잃어버린 시공간이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모를 만큼 김지은의 작품은 불확정적이다. 작품 속 부분적 신체들은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조합을 위한 절단이다. 단편들의 배치와 간격은 가상적 통합이나 섣부른 종합보다 더 중요하다. 작가는 작품 속 부분적으로 재연된 자세들이 작업실에서의 여러 몸동작이라고 말한다. 


작업실에서의 모습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빵모자를 눌러 쓴 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능숙하게 붓을 놀리는 화가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실제의 작가는 거의 중노동 하는 작업자에 가깝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부분만으로 재연된 몸짓에서, 작업이란 엄청나게 몸이 축나는 일임을 생각한다. 예술은 단편화된 사회에서 뭔가 총체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예술론도 있지만, 이미 총체성에의 가상은 사라졌다. 집약된 일순간들이 불연속적으로 모여 이러한 시간성을 공간화한다면 그것은 단편들이다. 김지은의 전시는 단편들이 집합된 것이다. 지운 것도, 애초에 안 그린 것도 있을 것이다. ‘storage’라는 부제는 무엇인가를 저장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밀봉된 채 영구저장 하는 것이 아닌 경우, 비우기와 채우기는 거듭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넣기 위해서는 또는 새로운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 근본적인 저장소는 역동적인 출입이 가능해야 한다. 즉 저장은 한시적이다. 











이 출입 관계 속에서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기본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저장장치는 뇌의 메커니즘을 흉내 낸 컴퓨터 기기를 통해 일상화되었는데, 그 용량과 재현 속도가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벽의 모서리와 만나는 바닥에서 무엇인가 서 있고 또는 떠 있고 또는 솟아있는 인체들이 있는 작품은 꺼내도 계속 채워지는, 또는 계속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마술의 용기(容器)를 닮았다. 작업이 수행되는 공간이나 그 결과물이 전시되는 장, 무엇보다도 여러 크기로 잘라 놓고서 매일 오랫동안 무엇인가 그리는 종이도 그러한 마술의 용기와 비교될 수 있다. 작품들은 수없이 그렸던 시공간들이 부분적으로 재연되고 조합된 것이다. 작가는 화면이 크든작든 한 화면에 무엇인가를 많이 그려 넣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암시가 있다. 김지은이 주로 사용하는 장지는 다른 종이나 캔버스와 달리 스며드는 느낌이 있다. 그 종이 위에 그려진 바닥 평면들 또한 그렇다. 


어떤 관객은 여기에서 수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무엇이 연상되든 그 표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들고나는 것에 융통성이 있는 민감한 표면이다. 유기체의 막(membrane), 기계의 인터페이스와 비교될 수 있는 면이다. 최근 뉴스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저장장치 ‘프로젝트 실리카’는 ‘오븐이나 끓는 물에 넣어도 수백년 끄떡없는 유리 저장장치’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 광고가 사실이라면, 중요한 데이터를 매번 백업시켜야 하는 수고를 덜어줄 경이로운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지은이 주로 사용하는 종이 또한 동양에서 처음 발명될 당시 최첨단 매체였다. 마샬 맥루한을 비롯해서 미디어의 역사를 다루는 이들은 종이의 발명과 인쇄의 시작이 중세 말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종이는 변질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안정적인 매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이 한 장에 뭘 얼마큼 담겠는가. 











조그만 장치에 영화 수백 편을 저장할 수 있는 시대에 말이다. 그래서 현대미술가들은 더 이상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작은 연극무대를 닮은 공간 속 부분적 신체를 가진 캐릭터들은 생략되었지만, 되찾을 수 있는 시공간을 암시하는 상징이다. 거기에는 자타가 인정할만한 절묘한 표현들도 적지 않지만, 작업하며 고민했던 시간을, 작업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던 시간들도 깔려있다. 그 시공간에서 어떤 것은 드러나고 어떤 것은 가라앉는다. 모든 것은 그 과정 중에 있다. 구체성이 지워진 시공간 속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적 전체 속에서 탈구된 불완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접합을 위해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다. 절단은 피흘리는 상처나 죽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미지의 작업에 내재 된 강렬한 단편들이다. 거의 공책 크기의 작은 작품들뿐 아니라, 천정에서 내려오는 큰 스크린 같은 작품에도 동양화의 여백같은 시공간이 있다. 다양한 시공간의 좌표를 가진 것들이 병렬되어 있고, 공존하며, 일순간의 바람결에도 자극을 받아 상호작용한다. 


작가는 큰 작품을 위해서 작업실뿐 아니라 거실에도 빈 종이를 걸어놓고 씨름했다. 매일 오랫동안 작업해왔기에 이미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컴퓨터를 활용하여 그럴듯한 서사로 이어지는 구성을 시도해도 좋지 않냐고 물었더니, 화면 앞에서 힘든 것이 좋다고 말한다. 화면과 같이 보내는 힘든 시간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화면 안에 접혀 있으며, 누군가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공백공포를 자아낼 만한 창백한 평면과의 무수한 대화와 그 속에서의 방황은 르네상스식의 위대한 종합이 아니라, 각각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 섬같은 존재들의 산재를 만들어냈다. 이 산재된 것들을 잇기 위한 선들이 평면을 넘어서 3차원 공간까지 삐져 나오곤 한다. 작가는 천정에서 내려오는 대형 작품 뒤편에 작은 크기의 드로잉을 모서리를 포함한 공간에 4x13열로 배치했다. 명도가 각기 다른 그것들은 한 장의 종이처럼 보이는 면이 접히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전개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접지술은 접기와 펼치기의 유희를 통해 다양한 세계의 양태를 상징한다.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펼침은 결코 접힘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주름들에서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세계는 다양화된다. 작은 종이 위에 그린 작은 드로잉을 벽면 한가득 붙여 놓은 작품에서 각각의 시공간들 모자이크처럼 엮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주름]에 빗댄다면,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 같은 세계이다. 들뢰즈는 모나드 이론이 ‘어떠한 철학도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의 긍정, 그리고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의 긍정을 이토록 멀리 밀고 나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다양성의 사고는 예술과 가장 밀접하다. 다양성의 모델인 예술과 비견할 만한 것은 자연 정도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러한 생각은 이번 ‘저장소’ 전에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출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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