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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 켜켜이 쟁여진 이야기들

이선영

켜켜이 쟁여진 이야기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자연의 최근 몇 년간의 주요 작업인 고요할 적(寂)과 붉은 촉(觸) 시리즈는 반인반수를 비롯한 경계 위의 존재들이 출몰하는 이전의 작품 분위기를 일소한다. 간결한 추상적 형태는 ‘감정의 가지치기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이자연을 처음 만난 때가 서른 무렵이고, 10여년이 흐른 지금, 보다 정리된 형식의 작업을 보면서 시간이 야기한 변화를 생각한다. 청년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보다 압축되고 절제된 표현으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 작업은 스스로의 평가대로 ‘표현보다는 관찰의 결과물’이다. 주체에서 객체로 방점이 이동한 것이다. [붉은 촉] 작업에 영감을 주었던 마디식물 같은 자연 관찰은 물론, 사회 또한 포함된다. 가령 폐가가 많은 오래된 마을—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전기는 안 들어오고 전선만 있는 마을’--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활용하여 잊혀진 시공간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지역 리서치에 기반 한 2015년의 작업이 그러하다. 




붉은 촉-어떤 상황적 풍경 2019.이응노의집 



붉은 촉-어떤 상황적 풍경 2019.이응노의집 



붉은 촉-어떤 상황적 풍경 2019.이응노의집 



작가만의 방은 공동체의 터전으로 확장된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역사가 고고학의 대상이 돼버린 한국적 상황에서 회상과 상상은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내가 빠진 상태에서 나를 표현하는 차원이다. 나라는 주어의 빈번한 때로는 유일한 사용이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빠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작업에 쏟아놓은 가운데 작가가 염려하는 부분도 그 점이다. 그러나 주체로부터 출발했든 객체로부터 출발했든, 끝까지 가면 뫼비우스 띠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한자어의 자자구구를 건조하게 나열한 제목을 가진 작품 형식도 단순하다. 반복적 작업으로 만들 수 있는 기본 단위를 설정하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바닥에서 또는 천정에서 출발하는 선을 만드는 것이다. [붉은 촉]은 한자어의 의미가 그러하듯, 촉각성을 일깨운다. 붉은 색 털 같은 형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간취한 이래 극복했다고 믿어지는 동물성을 끌어들인다. 


체모나 머리카락을 닮은 붉은 촉은 피부의 연장으로서의 미세한 감각기관을 상징한다. 이러한 조직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다. 즉 끝없이 갱신된다. 털은 우리도 모르게 빠지고 자라나면서 전신에 흩어져 있는 감각기관으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자연의 붉은 촉들은 감각모나 촉각 수용기를 떠오르게 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일반적으로 몸에서 털이 많은 부분이 압력에 예민한 것은 모근에 많은 감각 수용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털이 난 곳의 피부는 아주 얇으며 피부 아래쪽에서 감각이 작동한다. 털의 형태는 솜털에서 더듬이까지 다양하다. 붉은 촉은 훌륭한 촉각기관으로서의 털과 털이 자리하는 생태계를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재구성한다. 서로를 지지하며 자라나는 선들은 기하학적이기보다 유기적인 굴곡 면을 가진다. 그렇지만 광물질처럼 찌를 듯이 단단한 느낌도 가진다.


 


(참고) 붉은 촉(觸)_한지,파라핀왁스_가변설치 2018.(청주 시립 대청호미술관 설치전경)



(참고) 고요할 적(寂)_한지,파라핀왁스_가변설치_2015.청주 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그것들은 동식물 표면의 섬모 같은 미세한 차원을 가지기도 하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숲 속 같은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나무로부터 기원한 종이로 만든 숲은 그 속을 거닐 관객들에게 사유의 공간이 되어 준다. 추상어법으로의 전환은 직접적 표현에서 야기되는 그로테스크한 면모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추상은 관념의 도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이자연의 작업실에는 두툼한 동식물 도감이 있다. 언제라도 찾아볼 수 있도록 펼쳐져 있어야 한다. 정확한 생물학적 분류체계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참조대상이 확실해야 한다. 그래야 변형 또한 힘을 받는다. 고향 예산이나 현재 레지던시 중인 홍성의 이응노의 집은 자연이 가까이에 있는데다가, 농장에서 자란 유년기의 환경 또한 동식물과 가까운 이력을 반영한다. 이자연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수집인데, 여러 작업장을 옮겨 다니면서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녔던 것들이 있다. 


자연물, 자연물의 일부, 자연에 가까워진 물건 즉 사물 등등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오브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겹과 결을 가진 추상물은 자연만큼이나 사물의 존재 조건에 다가간다. 그러나 원초적 자연은 끝내 왜곡되고 훼손된다. 자연을 이야기하는 순간 추락이나 죽음을 향한 비극적 서사가 스멀스멀 끼어들기 시작한다. 물론 자연이 그렇듯이 상처의 치유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자연의 경우 반복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치유적이다. 작가는 반복을 통해 심리적 고요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반복의 치유적 속성은 수많은 종교적 수행의 방식에서 발견된다. 젊은 예술가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고통을 그 또한 앓고 있다. 작업 내부의 문제는 기본이고, 작업 외적인 문제들, 가령 작업의 지속성을 위해 해야 하는 일, 그 속에서 힘든 인간관계가 대표적이다. 도시에서의 소모적 삶을 접고 돌아온 고향에서도 가시방석이기는 마찬가지다. 




(참고) 고요할 적(寂)_한지,파라핀왁스_가변설치_2015.청주창작스튜디오 전시부분.



(참고) 고요할 적(寂)_한지,파라핀왁스_가변설치_2015. 청주창작스튜디오 전시부분.



‘어떤 상황적 풍경’이라는 비교적 해독 가능한 문장에 담긴 상황이란, 홀로 있어도 같이 있어도 힘든 상황이라고 추측된다. 그렇지만 작업이란 홀로 있음을 통해 같이할 수 있는 어려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이자연에게는 오직 그 통로를 통해서만 소위 말하는 주체와 객체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비명에 가깝다면 요즘의 작품은 침묵에 가깝다. 이자연의 작품에서 침묵과 비명은 반대된다기 보다는 비명과 비명 사이에 침묵이, 침묵과 침묵 사이에 비명이 자리한다고 봐야 한다. 비명을 내지를 힘도 없는 상황을 암시하는 침묵은 비명보다 더 강도 높은 고통의 표현일 수 있다. 표현의 강도는 이전의 작품들보다 더 쎄진 느낌이다. 공간에 따라 설치방식이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화이트 큐브의 바닥 또는 천정에서 삐져나오는 뾰족한 형태는 마치 영화 [큐브]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고문 받는 현대인의 상황을 떠올리기도 한다. 영화 [큐브]로 상징될 수 있는 것은 한 감옥을 빠져나가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악무한의 시공간이다. 


물론 극단적 상황에서도 한술 더 뜨기 전략을 써온 이자연에게 고통과 희열은 연결되어 있다. 보다 완전한 표현을 얻은 고통은 희열을 자아낼 것이다. 희열로 전환된 고통이 예술이다. 예술가들의 희열은 고통을 기본으로 한다. 자기 탐구적 작업의 여정에서 보다 근원적 차원의 불안과 고통을 조명하는 것이다. 이자연에게 침묵은 ‘목구멍까지 가득 찬 검은 실뱀을 머금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나의 상태’(2014년 작업노트)를 말한다. 뭉크의 [비명]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그림 속 소리가 노을 진 하늘을 가로지는 강렬한 선적 표현으로 나타났듯이, 고통과 침묵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소리는 밖으로 빠져 나와 근대인/예술가의 소외와 고통을 성공적으로 전달해 주지 않았는가. 사회에서 하지 못한 말을 개인적으로 토해낸 숲이 등장하는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충실한 작품 또한 개인적 상황의 사회적 맥락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참고) 그녀의방-세가지 징후_혼합재료_가변설치.2008 청주 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참고) 그녀의방-세가지 징후_혼합재료_가변설치.2008 청주 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참고) 그녀의방-세가지 징후_백자토 테라코타_가변설치.2008



(참고) 그녀의방-세가지 징후_라텍스,머리망_가변설치.2008



(참고) 그녀의방-세가지 징후_라텍스,머리망_가변설치.2008



(참고) 사물의 영역_수집한 오브제_가변설치_2017-2018. 뮤지엄 산 설치전경



침묵이든 비명이든 그것은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 ‘붉은 촉-어떤 상황적 풍경’ 전을 위해 쓴 작가노트에는 ‘날카로운. 부러지기 쉬운. 시작과 끝. 미세함. 성장점. 시간. 증오. 마디식물. 치유. 긴장감. 두려움. 다가 설 수 없는. 자화상. 경계. 숲. 살아있는. 부드러운. 불안한. 거울.... 붉은 촉.’(필자가 임의적으로 발췌함) 등의 단어만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가 이미 재현이나 미(美)같은 한계에 충실한 방식을 벗어나 있음을 알려준다. 확정적 메시지를 향할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너무 많아서 키워드라고도 할 수 없는 일련의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어서, 관객/독자는 그 간격에서 의미를 생성시켜야 한다. 그것은 딱딱 떨어지는 단위 구조로 구성/해체하는 작품제작 방식과도 닮아있다. 이전 작업 [침묵의 비명]은 밧줄과 망사 천을 계속 연결해서 침묵/비명을 표현했는데, 무엇인가를 포획하려는 그물망 구조에는 구멍이 많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포획해서 확실하게 내놓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그물망인 것이다. 이 작품은 문장이 가능하기 위한 간격,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등, 말해지지 않은(또는 말해질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작가의 주목을 알려준다. 현대예술이 말할 수 없는 것, 재현될 수 없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언어에 중심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텍스트 이론이나 후기 구조주의 이론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것이다. 종이를 말아서 만든 이자연의 형태소들은 중심이 비어있다. 그것은 분절화 되어 이리저리 조합되는 방식으로 다양한 상황을 말하고 있지만, ‘양파껍질처럼 까도까도 핵심이 없는 언어’(롤랑 바르트)와 유사하다. 씨앗 및 열매와 비교될 수 있는 ‘작품’보다는 양파껍질 같은 ‘텍스트’를 통해서 언어 및 현대예술을 본 바르트의 관점에 의하면, ‘무한한 겉껍데기들을 제외하면 결국에는 어떤 핵심도 비밀도 불변의 원칙도  없다’. 




(참고) 사물의 영역_수집한 오브제_가변설치_2017-2018. 뮤지엄 산 설치전경



(참고) 사물의 영역_수집한 오브제_가변설치_2017-2018. 뮤지엄 산 설치전경



(참고) 사물의 영역_수집한 오브제_가변설치_2017-2018. 뮤지엄 산 설치전경



텍스트에는 원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불완전한 원초적인 것을 대신하는 보충’(데리다)만이 있다. 주관/객관이라는 이분법도 해체된다. 이제 예술은 나의 표현도 외부의 반영도 아니라 구성요소의 조합에서 드러나는 바를 말한다. 현대 철학 및 예술이 핵심과 본질을 거부(해체)하는 것은 허무주의나 불가지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작품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작가는 의미를 말하지 않고, 의미가 있는 장소를 말할 뿐이다. 작업은 ‘예견되지 않았던 한 언어를 책임지는 미지의 것’(바르트)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 자신을 가두면서, 작가는 ‘왜 세상인가, 사물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보다 열려진 질문을 제기한다고 덧붙인다. 연결된 마디들을 통해 계속 자라남을 암시하는 이자연의 작품은 ‘구조가 아닌 구조화’(테리 이글튼)를 보여준다. 이러한 식으로 작동되는 언어는 개인을 ‘주체로서 구성’(루이 알튀세)한다. 


이자연의 작품에서 지배적 요소인 선은 가로선이든 새로선이든 무엇인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서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붉은 촉]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공원]에서 썼듯이, ‘떨어진 점들 간의 관계 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점들의 접합접속이나 묶음을 통해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떤 형태를 둘러싸는 기능, 즉 재현적 기능을 잃어버린 선들은 회상보다는 환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유기적인 것은 재현된 무엇인가가 아니라, 재현의 형식이며 나아가 재현을 주체에 결합시켜 주는 감정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침묵이 감도는 작품 속 촉수들은 비명지르기보다 더한 상황에서 촉수를 뽑아내 더듬는다. 맹목적(盲目的)이지만, 시각에 전제되는 거리감이 무력화 되었을 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어떤 상황적 풍경’이 집약되는 고통 받는 몸의 일부인 촉수는 부분으로 전체를 비유한다. 촉수라는 환유적 대상은 모든 것이 끝난, 또는 시작되기 이전의 불안한 고요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참고) 사물의 기억-폐 전선_가변설치_2015.익산 수리수리전 야외설치



(참고) 침묵의 비명.마닐라 로프, 망사천_가변설치. 2014.스페이스A 설치전경



[붉은 촉]에서 전시 공간의 바닥을 뚫고 나와 자라나는 듯한 섬유형 조직은 감정과 생각을 뾰족한 말단에 집중시킨다. 힘차게 뻗어있지만 수직은 아니고 마치 피부를 뚫고 자라난 동물의 털처럼 자연스럽게 세워져 있다. 굵기는 비슷하지만 길이와 밀도는 다르다. 붉은 촉은 전시장 바닥 뿐 아니라 화분 형태의 디자인 블록에 세워 놓아 식물적 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 두 가닥이 다수가 되어 시공간을 장악할 수 있다. 증식과 분열의 이미지는 적당한 한도의 개념을 무너뜨리곤 한다. [고요할 적]은 색이 빠져 있고 고깔의 반대 방향인 깔대기 방식으로 쌓아 열을 이루게 하여 와이어를 이용하여 천정에 매달았다. 바닥과는 약간 떨어져 있어서 그곳을 거니는 관객의 움직임에서 만들어지는 공기의 흐름이 미세한 움직임을 만드는 기둥들은  대나무나 자작나무의 숲같은 분위기가 있다. [붉은 촉]에서 붉은 색은 마치 대나무 방식으로 자라나는 듯한 식물적 형태에 동물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이자연의 많은 작품처럼 그것은 한 종류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성이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불안과 매혹이라는 양면성을 야기한다. 젊은 예술가 특유의 존재방식을 반영하는 양가감정은 구상/추상을 막론한 그녀의 작품 특성이다. 한지를 말아서 파라핀으로 코팅을 한 고깔(반대방향이면 깔대기) 모양은 일종의 형태소가 되어서 겹쳐서 구성된다. 그것들은 바닥에서 솟구치듯 자라거나 천정에서 내려온다. 이전 작업의 목록에 자신의 이야기를 한 가득 써놓은 종이를 뒤집어 놓았던 작품이 있었듯이, 종이는 단순한 재료적 의미를 넘어 무엇인가 채워질 잠재적 평면으로 다가온다.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려진 자국이 간혹 얼룩진 색깔과 어우러져 오묘한 무늬를 이루는 작품의 단위를 이루는 수많은 종이들에는 무엇인가가 쓰여졌으나 지워졌고, 또는 휘발되고, 또는 태워졌을 것 같다. 각각의 사연은 보이지 않지만, 종이들을 말면서 스쳤을 갖가지 상념이 켜켜이 쟁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전; 이응노의 집 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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