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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장식 (2)

이선영

4. 모더니즘과 장식


20세기 초의 모더니즘은 순수와 정화를 내세우면서, 세기말의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했다. 모더니즘 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는 아르누보를 ‘전세계 스튜디오의 작업장에 퍼져있는 습진’이라고 비난하였다. S.K. 틸야드(S.K.Tiyard)의 [모더니즘의 충격]에 의하면, 비본질적인 호사스러움과 대비되는 순수성의 개념은 모더니스트와 미술공예 운동 양자에서 중심이 되는 이념이었다. 틸야드에 의하면 미술공예의 작가들처럼, 초창기 영국의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적인 사실의 재현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단순성과 순수형식을 선호하였다. 장식은 당시의 지배적인 회화의 서술성을 벗어나, 리듬과 박자같은 추상적인 패턴을 사용한다. 또한 오웬 존스(Owen Jones)가 [장식의 문법]에서 주장하듯이, 디자인은 자연형식에서 벗어날수록 장식적이 된다. 그에 의하면 디자이너의 모델을 차라리 음악이나 수학이 된다. 장식미술은 단순한 자연모방이 아니라, 구성과 조화라는 추상적 법칙을 통해 고양되는 것이다. 


틸야드는 장식이라는 단어가 미술공예의 용어들 가운데 가장 고무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미학적 근간을 마련한 비평가 로저 프라이의 초창기 용어에서, 장식은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표현과 정서를 함축한다. 또한 로저 프라이는 형식적인 실험으로서 공예의 가능성을 논하였다. 그는 비잔틴 에나멜의 예를 들면서, 여기에서 색상과 형식의 추상적인 관계, 그리고 순수 디자인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로저 프라이의 비평적 어휘들인 장식, 총합, 디자인, 리듬, 선, 패턴 등은 근대디자인과 근대미술에 함께 적용될 수 있는 용어였다. 그는 후기 인상주의에 대해, ‘탁월한 장식적 요소들 안에서 미술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고 평가했다. 근대 예술인들이 회화의 장식적 가능성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모더니즘 조각과 관련된 대부분의 작가들이 훈련받은 공예인이었음도 아울러 지적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화려한 패턴, 그리고 서술적 요소보다는 장식적 요소에 집중하였던 고갱(Paul Gauguin)이나, 페르시아 카펫의 직조를 연상케 하는 세잔(Paul Cézanne)의 화면들 및 모네(Claude Monet)의 수련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모더니스트에게 장식은 단지 형식적인 요소는 아니었고, 그들 자신의 취향과 세계관이 녹아 있는 것이었다. 모더니즘에서 차용된 장식에는 원시주의가 깔려 있다. 고갱은 페르시아, 캄보디아 그리고 이집트 미술을 항상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 미술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원시주의를 통해 ‘아주 먼 옛날의 야만스러운 호사스러움’을 표현하려 했다. 고갱에 의하면 이 호사스러움을 낳는 것은 비단도, 벨벳도 아마포도 황금도 아니라, 다만 화가의 손길로 풍요로워진 색채일 따름이었다. 고갱은 ‘미술은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의 누이로서 형태와 색채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고갱은 자기 그림의 음악적 요소가 ‘물결치는 수평선,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연결된 주황색과 청색의 조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느낌, 푸르스름한 스파크의 광휘’라고 표현한다. 그는 파랗고 가는 선을 이용한 윤곽처리와 선명한 색채를 스테인드글라스, 법랑세공, 도예에서 차용하여 양식화시켰다. 마티스(Henri Matisse)의 캔버스는 자주색, 야자나무 잎, 무화과 나뭇잎으로 장식된 평면으로 되어있다. 그라비에 지라르(Gravier Girard)는 [마티스]에서, 마티스는 세밀화에서 양탄자에 이르는 이슬람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섭렵하였다. 뒤얽힌 식물 모양과 추상적인 곡선을 이용한 아라베스크 줄무늬는 사실적으로 관찰된 모티브에 국한되었던 답답한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장식적 테두리, 겹쳐지는 무늬가 낙원의 무한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앙리 마티스는 자신의 방을 꽃무늬 직물, 벽걸이 장식, 카펫, 튀어나온 격자창을 완비한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극장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작품 속의 동양적 장식 커튼과 양탄자의 배열, 화려한 의상은 조형적 긴장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야기된, 특수한 그림의 질서가 낳는 긴장이다. ‘나의 계시는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마티스는, 서구에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장식적 문양을 만들기 위해 아랍적인 장식 선을 사용해 소묘한 뒤, 그 위에 높은 명도와 채도의 색으로 칠하는 기법을 동방으로부터 배웠다. 마티스는 과잉이나 방탕, 사치를 배제하면서, 장식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생기를 이젤화에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마티스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얼굴이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 표현적’이다. ‘인물이나 사물이 점하고 있는 면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빈 공간, 비례 등 이 모든 것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한다. 구성이란 화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인 방법으로 임의로 배열하는 기술이다’(마티스) 


마티스는 하나의 구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균형에 이를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바야흐로 모든 부분이 자기에게 걸 맞는 관계를 찾아내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는 드로잉, 색채, 명암, 구도 같은 그림의 구성요소의 내재적 가치, 수단의 순수성을 존중하고자 하였다. ‘기분 좋은 팔걸이 의자’와 같은 작용을 하는 예술을 추구했던 마티스에게  ‘장식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이 되었다. 마티스는 깔개나 막, 태피스트리같은 장식물을 그림의 모티브로서 자주 사용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커다란 장식벽화에 몰두했고, 만년에는 자른 종이를 풀로 붙인 그림을 통해 장식과의 친근성을 보여준다. 노르마 부르드(Norma Broude)는 [미술과 페미니즘]에서 마티스가 장식예술을 통해 고급예술의 형식을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평론가나 미술사가들도 마티스의 예술을 ‘단순한 장식’에서 ‘의미 깊은 추상’으로 힘차게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마티스의 절장지 그림은 그린버그에 의해 ‘장식이라기 보다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회화’라고 평가되었다. 대상을 원근법 없이 그려내는 마티스지만, 그에게 추상화가들은 대부분 허공에서 출발하는 ‘장식화가’로 비판된다. 추상화가들은 근거와 힘, 영감과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추상화가들과는 달리 현실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고갱에 있어 장식은 상징이었다. 알베르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의 특징의 하나를 장식이라고 본다. 오리에(Georges Albert Aurier)는 ‘장식적인 그림은 동시에 주관적이며 종합적이고 상징적이며, 관념적인 예술의 형상화이다. 장식적인 그림이야말로 참다운 그림이다. 그림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진부한 벽면을 사상, 꿈, 관념으로 장식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원시사회에서 최초의 그림은 장식이었다고 하면서, 장식적인 미술은 단순하고 자연발생적이며, 시원적인 미술의 형태로 귀결된다고 본다. 


오리에는 고갱은 천재적인 장식가로 평가한다. 고갱이 자신의 상징주의와 그림의 조건을 일치시키고자 한 것처럼, 근대 디자인에 대해서도 ‘재료’에의 충실을 요구했다. 고갱은 근대의 상징인 에펠탑에 공감하면서 건축 공학자는 자기 고유의 새로운 장식수단을 가지고 있으므로, 철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장식의 형식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기가 전환될 무렵, 아르누보와 국제적인 미술공예 운동은 추상예술의 출현을 싹트게 했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유겐트 스틸은 ‘장식적’ 미술의 측면에서 추상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즉 일체의 재현의 요구에서 벗어나 조형요소들 자체의 발전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경우, 유겐트 슈틸을 통해 패턴과 면이라는 초기 실험을 재촉하고, 마침내는 절대적인 추상으로 향했다고 지적된다. 칸딘스키는 양복이나 핸드백, 보석, 가구, 자수 벽걸이 디자인 등 여러 장식예술에 몰두한 바 있다. 


노르마 부르드는 마티스의 곡선 리듬 및 평면적인 형태의 장식적 배치가 국제적 미술공예 운동에 참가한 예술가들이 디자인했던 직물, 태피스트리, 자수 벽걸이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1912년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단순한 장식’을 거부했다; ‘만약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얽어매고 있는 끈을 타파하고, 순수한 색채와 독립된 형태를 순수하게 결합시키는데 몰두한다면, 넥타이라든가 카펫과 닮은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형과 색의 아름다움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식은 그것에 반응하여 불러일으키는 정신의 설레임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더니즘은 장식과 추상과의 기본적인 구별을 지지하였다. ‘단순한 장식을 의미심장한 추상으로 옮겨놓는 것’이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재능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한편 칸딘스키는 음악과 미술의 유사성에 주목함으로서, 앞서 말한 고갱의 예처럼, 장식미술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은 장식미술이라고 하였으며, 세기말의 나비파는 장식미술이야말로 진정한 회화라고 본다. 그들에게 회화란, 인간이 만든 건물의 평범한 벽면을 시와 꿈과 이념에 의해서 장식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드니(Maurice Denis), 보나르(Pierre Bonnard), 뷔야르 (Jean-Édouard Vuillard) 등이 포함된 나비파의 화가들은 벽면, 천장화, 장식용 못, 판화, 벽걸이, 무대장치, 포스터 작업을 하였다. 1912년 브라크(Georges Braque)와 피카소(Pablo Picasso)가 꼴라주를 시작함으로서, 실재와 재현된 것과의 거리를 없앴다. 입체파 작품은 조형적인 순수성에 기초한다. 입체파로부터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신조형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새로운 조형은 회화적인 것도 장식적인 것도 모두 지양하고자 하였다. 기하적 추상미술은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를 지양하면서, 디자인이나 건축 등으로 해소되곤 했다. 서구와 소련의 구성주의가 대표적이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20세기 주류 미술이 점차 추상화되어감에 따라, 예술가와 비평가는 추상과 ‘다만 장식적인 것’과의 명확한 구분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고급예술로서의 추상예술이란 위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급예술이란, 요컨대 장식미술품, 혹은 상업예술가나 여성, 농민, 미개인들의 손에 의한 가내 공예품 등이다. 그러나 장식예술이나 장식 충동이 20세기 초기의 주요한 모더니스트 양식을 형성하거나, 그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원시미술이나 동양, 회교 미술의 ‘발견’으로 화가들은 그림의 구성적 요소들이 갖는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힘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술의 자기 동일성을 확립하려는 순간에 스며든 타자의 몫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 이후의 일이다. 사실 ‘장식은 모더니즘 회화를 괴롭히며 떠나지 않는 유령’(그린버그)이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회화의 공식 임무는 ‘장식을 장식에 대항해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는 것’(그린버그)이다. 피터 웰렌은 [순수주의의 종언]에서 그린버그가 주장한 회화적인 것(the pictorial)과 장식적인 것(the decorative) 사이의 대립은, 기능적인 것(the functional)과 장식품적인 것(the ornamental) 사이의 대립처럼 모더니즘 미학의 기반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일련의 대립 쌍 중의 하나이다. 엔지니어/ 유한계급, 현실원칙/ 쾌락원칙, 생산/ 소비, 능동적/ 수동적, 남성적/ 여성적, 기계/ 신체, 서구/ 동방 등. 이런 대립 쌍들은 정확히 동격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서로를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순수주의의 종언]에 의하면 그린버그는 시각상의 이미지를 회화의 물적 지지대(material support)--이젤화에서는 캔버스, 벽화에서는 벽이 회화의 물적 지지대—속에 용해시킴으로만 장식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입체파가 그림을 하나의 장식된 오브제로 변형시켰다고 하면서, 더이상 캔버스에 장식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식과 캔버스의 초월적 통일이 이루어짐을 예시한다. 그리하여 장식성은 더 높은 가치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모더니스트에게 회화는 과학과 유사한 법칙을 가진다. 그린버그에게 ‘순수성이란 자기규정(self-definition)’을 말한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은 ‘기능 없는 기능주의’로 바뀌었다. 그림만이 가지는 독특한 점은 ‘회화적인 것(pictorial)’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린버그에게 장식성과 대조되는 회화성(painterliness)란, ’느슨하면서도 빠른 붓놀림, 선명하게 자리 잡은 형상 대신에 얼룩지고 혼융된 양감, 그리고 커다랗고 뚜렷한 율동 감, 분할된 색채, 물감의 불균등한 채도와 밀도, 붓 자국, 나이프 자국, 혹은 손가락의 흔적 등’이다. 


이것이 그린버그가 끊임없이 되물었던 ‘예술의 가치나 특질의 궁극적인 원천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의견이 추상회화와 장식성의 논란에 대한 잠정적인 답이 될 것으로 믿는다. 베이컨에게 이미지는 가련한 장식의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추상과 구별된다. 그는 미셸 아셍보(Michel Archimbaud)와의 대담에서, ‘그림을 그리는 재료 자체가 추상물이다. 그런데 회화란 단지 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주체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긴장의 결과이다. 그런데 추상화가들은 이러한 갈등을 처음부터 제거 한다...추상은 근본적으로 회화를 순수하게 장식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하는 듯이 보인다’고 말한다. 이때 베이컨이 지적한 장식성은 실재나 상징과는 분리된 껍데기 같은 패턴을 말하는 듯하다. 베이컨이 보기에 장식적 추상화의 문제점은 ‘매력적이고 예쁘기는 하지만 인간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5. 포스트모더니즘과 장식


알브레이트 벨머(Albrecht Wellmer)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에 의하면, 기능주의의 공리들은 하나의 도덕적, 미학적인 순화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능주의의 기술편향은 획일성을 낳았다. 통속적 기능주의는 공학적인 환원주의, 자본과 관료주의적 계획에 복종하는 근대화 과정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비합리주의와 더불어 장식은 부활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러한 경향을 기능주의의 황폐함과 시야가 짧은 총체성, 보편성이란 미명 하의 획일성을 거부하는 시도로 본다. 부활한 리듬, 패턴, 그리고 장식적인 예술은 다시금 환경과의 융합을 추구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다 많은 파괴와 오염을 가져왔던 근대적인 문화 위생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계가 근대적 조형의 원형이 되었다면, 전자 미디어는 탈근대적 조형의 원형이 된다. 


전자공학 시대의 생산물들은 산업시대의 생산물과는 달리 밋밋한 표면으로만 가시화된다. CD같은 디지털 방식의 표면은 내용물들을 감쪽같이 숨긴다. 그 비어있는 표면 위에 새로운 장식들이 덧붙여질 수 있다. 움직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물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환경 자체가 장식적이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은 기술의 포기가 아니라, 기술의 심화일 수도 있다. 즉 기술의 발전이 근대적 획일성을 다양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것도 패턴을 분석해 보면, 고도로 질서 잡힌 것임이 현대 과학 이론에서 주장되고 있다. 예컨대 프랙털 기하학은 장식예술의 다양한 형식들을 예시한다. 만델브로트(Benoît Mandelbrot)가 1975년에 주장한 프랙털 이론은, 해안선이나 구릉 등 자연계의 복잡하고 불규칙적인 현상들을 아무리 확대하더라도 다소 전체와 같은 불규칙적인 모양이 나타나는 자기 상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다.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미학 에세이]에서 장식은 전체적인 조화로부터 임의로 떨어져 나간 세부의 해체와 대치에 의해서, 직관보다는 지적인 표상에 의해서 작업이 진행된다. 레비 스트로스는 춤을 보조하는 음악은 오브제의 장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구나 절, 되풀이되는 모티브 등과 같은 간단한 요소들의 혼합이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공허한 것(내용이 없기에)이기도 하지만, 장식의 본래적 기능, 즉 공허함을 메꾼다. 장식에 대한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은 공간 공포증의 해소를 위해 장식이 생겨났다는 심리학적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의상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장식적인 리듬, 즉 규칙적인 순환은 무용의 리듬이나 기술적 활동의 전개에서 반복적인 행위의 리듬, 운동의 규칙적인 리듬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장식은 무엇보다도 기능과 필요보다는 욕망과 감성이 소비를 주도하는 대중문화에서 부각된다. 


아브라함 몰르(Abraham Moles)는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대중문화의 사물(대부분 키치)은 넘쳐흐르는 장식으로 우리의 기분을 전환 시켜준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욕구보다도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고, 그 결과 장식이나 부록과 같은 무상행위가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키치적 사물의 표면은 항상 다양한 형태와 문양으로 가득 차 있다. 키치를 지배하는 것은 이리저리 짜 맞추고 배열하는 유희이며, 그 결과가 장식이다. 키치가 소재를 원상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무에는 대리석 모양이 칠해지고 플라스틱 표면에는 자연소재의 무늬가 덧붙여지는 등 재료의 눈속임이 만연한다. 유선형의 유행에서 보여지듯 기능주의조차도 장식화 된다. 쏟아져 나오는 희한한 상품들은 어디서부터 여분의 것(장식)이고, 어디서부터 필요(기능)인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 하위문화에서의 장식문화는 더욱 다채롭다.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의 [카오스의 아이들]에 의하면, 청년 하위문화에서 나타나는 신체장식들은 고도로 위계화 된 체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풍속이다. 이들이 즐겨 하는 문신이나 피어싱은 육체의 표면적을 넓히는 효과를 지닌다. 인간의 육체는 옮기고 떼어내고 늘려서 의도하는 새로운 모양을 가질 수 있다. 피부는 예술을 위한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하위문화는 70년대 말의 펑크스타일처럼 일부러 무질서하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한데 모아놓기도 하고, 성적 소수자들의 이상야릇한 패션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눈에 띄는 화려함이 특징적인 하위문화의 장식은 이종교배의 미학을 보여준다. 피터 웰렌은 바타이유의 논지를 빌어 하위문화의 장식이, 저항의 기표로서 아래로부터의 현란한 과시라고 해석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장식의 재등장은 모더니즘이 쇠퇴하는 증후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장식은 부활한다. 


피터 웰렌에 의하면 모더니즘을 구성하는 여러 대립 항들, 즉 기능/ 장식, 유용/ 무용, 자연/ 인공, 기계/ 신체, 남성/ 여성, 서구/ 동방의 대립 항들의 얽힘을 풀어내는 해체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해체가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 타자, 즉 그동안 보완적 가치만을 인정받았던 장식적이고 무용하고, 쾌락적이고, 여성적이고 동방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타자적 예술은 혼성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다. 타자의 부활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주제에서 페미니즘은 대표적인 담론이다. 노르마 부르드는 [미술과 페미니즘]에서 장식을 20세기 미술의 하층으로 쫒아낸 섹시스트의 편견을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고발한다. 장식을 취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섹시즘이 제기한 현대미술에서의 장식과 추상 사이의 인위적인 벽을 부수고자 한다. 신비적이고 자기 언급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장식을 추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장식이 예술로서 존재하는 권리를 계속 부정하는 형식주의의 주류 담론에 대항하여, 페미니스트 예술은 장식을 그 자체로 옹호한다. 노르마 부르드는 ‘여러가지 소재로부터 긁어모은’ 미리엄 샤피로(Miriam Schapiro)의 휘메지(Femmage)의 예를 들면서, 그녀의 작품이 이미 몇 세기 동안 이루어졌던 여성의 전통적인 수공예 예술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미리엄 샤피로는 마티스나 칸딘스키와는 달리, 소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질을 없애거나 변용시키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여성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과 합작 등, 원천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긍정적인 정신이야말로 샤피로의 페미니스트 아트를 특징짓는다고 해석한다. 차라리 페미니스트 아트는 장식과 조형의 위계적 이분법을 벗어나서, ‘단순한 장식’으로 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6. 결론을 대신하여; 장 보드리야르의 가상에 의한 유혹의 전략으로서의 장식


가상과 실재라는 이분법은 장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보화 사회가 추동하는 전면적인 코드화에 의해 실재가 소멸되어 가는 시대의 미술과 장식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그러한 변화를 암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또한 그의 다른 책 [유혹에 대하여]는 장식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그 책은 이성으로 무장된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의 심기를 긁으면서, 새로운(?) 페미니즘을 제시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여성의 고유한 전략은 유혹이라고 단언한다. 여성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생산되지 않은 존재, 표면의 깊이가 불분명한 존재로 그녀의 유혹은 상징적인 세계의 지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욕망이나 본능이 아니라, 인위적인 기교와 의례의 초상으로, 유혹을 대변하고 있다. 이 위대한 유혹자들은 기호와 이미지의 반짝이는 망으로 우리의 감각 세계를 공략한다. 


이러한 가상의 순수한 유희 속에서, 순식간에 의미와 권력의 모든 체계가 무너진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모든 실재는 죽은 물질, 죽은 육체, 죽은 언어가 저장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존재를 존재에 대항하거나 진리를 진리에 맞서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장식과 전략의 연결이 중요하다. 그에 의하면 현실과 현실의 복제 사이의 거리, 즉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재현은 불가능하고 가상에 의한 유혹만이 남는다. 이러한 유혹에는 어떤 전략을 지배하는 주체나 대상도 없고, 내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도 없으며, 자연과 문화의 구별도 사라졌다. 모든 심급과 본질은 소멸되었기에, 인위적인 기호의 완전함만 남는다는 논리이다. 장식은 유혹적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은 유혹처럼, 의례화 된 가상에 따르는 기호의 순수함, 순수한 가상의 지배이다.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가상의 위상은 유례없이 높아진다. 따라서 가상의 상징인 장식의 위상 또한 높아진다.   

  

출전;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세미나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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