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미술과 장식 (1)

이선영

미술과 장식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는 말


공예를 포함한 미술 현장에서 분야에서 공예전공자들이 산업인가 예술인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작업이라는 것이 어차피 끝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유달리 공예 분야의 정체성 문제는 강한 듯하다. 공예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들도 있다. 공예는 작가가 선택하는 여러 기법 중의 하나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고민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을 개념만 가지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작품에는 작가의 노동과 솜씨가 필요하며, 그중 어떤 것은 전통을 통해서 매뉴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도 있을 따름이다. 공예 분야에 관련된 비엔날레 급의 행사는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금 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9년 청주 공예비엔날레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몽유도원도]는 전통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전통은 산업화의 아이템이 될 수 있고, 풍부한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 청주 공예비엔날레가 추구하는 바는 당연히 후자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현대미술과 공예, 또는 현대와 전통의 관계를 건드리는 문제이며, 현대 미술가나 공예가들이 모두 고민하는 절박한 문제이다. 현대 미술가들은 자신의 개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법—전통적 공예기법을 포함한--이 필요하고, 공예가들은 현대적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술이든 공예든 모두 디지털 문화나 첨단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생겼다. 장식(공예, 디자인)의 역사에서 새로움의 기준은 예술적인 것이다. 예술은 반복되었던 것이 차이를 보여주는 순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의 기원과 바탕은 장식이다. 현대는 상징이 제거된 장식, 기법이 사라진 예술이 특징적이다. 장식과 예술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기계문명에 충분히 대응할 수 없게 했으며,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야기했다. 필요한 것은 상징적 우주의 회복, 또는 재구성을 위한 미술과 장식의 만남이다. 필자는 이번 강의를 통해서 장식이라는 키워드로 공예와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장식의 발생


역사는 미술이 ‘순수함’을 획득한 때가 근대라고 본다. 그 전에 미술은 어떤 기능을 하는 수행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식이었다. 장식은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속해 있으면서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 장식은 소소한 생활 도구의 꾸밈부터 당대의 지배적 사상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두루 담당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도 장식이 미술을 떠난 적은 없다. 그 위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손으로 제작하는 미술은 기법의 문제를 초월할 수 없고, 기계로 한다고 해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매뉴얼을 확립해야 한다. 구별은 우위를 평가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미술을 장식과 구별하는 것은 미술에 우위를 부여하려는 경향과 밀접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나’ 하는 원초적인 물음이 그것이다. 기예를 무시하곤 하는 현대예술 작품들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사람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게 한다. 


예술과 장식을 구별하는 것은 기법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스스로 잘라내는 것이며, 그 결과는 관념으로의 경도였다. 그러나 관념 또한 철학같이 자신의 전문분야가 있지 않은가. 생활터전이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원시인들이 생활용품에서 제의용 물품까지, 악기에서 무기까지 모든 물건들을 장식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단순한 무늬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상징했다. 인간은 자연과 직접 마주하지 않고 상징적 우주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식의 발생에 대한 서로 다른 가설이 있다. 유심론자들은 장식이 공허한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본다. 한편 유물론자들은 장식을 생산력의 진보로 설명한다. 가령 그들은 수렵 생활로부터 농경 생활로의 변천을 동물 장식으로부터 식물장식으로의 변화로부터 읽어낸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심미적인 취향도 변화한다. 굳이 유물론적 가설이 아니더라도, 장식의 원천이 자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는 [인간과 성(聖)]에서, 각 문화 전통의 보편적인 공통기반은 바로 자연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적인 것이 감추고 있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그것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로제 카이유와는 예술로 자연의 형상을 모방하거나 반대로 그 형상들을 거부하려 하며, 형상들의 숨겨진 법칙을 복원하려고 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인간이 일부러 만들어 이 세계에 추가한 아름다움으로, 자연과 예술은 다양성의 진정한 모델이 된다. 자연적 형태가 아닌 기하학적 장식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프리카의 역사 문화재 미술’을 다루는 책 [아프리카 미술]의 저자 프랭크 윌레트(Frank Willett)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이후의 장식은 형태와 재료와 제작공정으로부터 발생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식은 재료의 자연적 특질, 또는 재료의 가공에 기초한 우연적 효과의 모방이나 전개에 의해 얻어진 것들이다. 예를 들어 바구니나 자리를 엮으면서 발달 된 기술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장식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형식이다, 프랭크 윌레트는 그것을 ‘기능에 바탕을 둔 생김새’(technomorphs)로 부른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기원이 잊혀지고 기하학적, 추상적 패턴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문화는 추상적 장식이 특징이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살아있는 생물을 묘사하는 것이 억제되는 반면에, 정교한 장식적 문양이 발전하였다. 신화학자 진 쿠퍼(Jin Cooper)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 상징사전]에 의하면, 마호메트가 ‘신이든 인간이든 그림으로 재현하는 경우에는 나무, 꽃, 생명이 없는 대상들로만 그리도록 하라’고 말한 이래, 예술이 명상을 돕는 수단, 혹은 만다라의 일종, 곧 무한으로의 개방, 혹은 정신적 기호들로 구성된 언어형식이 된다. 이슬람의 장식들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로는 구름, 잎, 다각형, 아라베스크, 알파벳 문자들, 히아신스나 튤립, 혹은 들장미나 일부 가상적 동물을 들 수 있다. 


신화학자들은 장식이 광대한 상징적 그물을 형성하면서 물질적 혼돈으로부터 탈출하고 무한에의 열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장식이 보여주는 요소나 반복적 단위들의 누진적인 발전, 곧 점진적으로 질서를 갖추는 양상은 우주의 진화나 발전이 암시하는 점진적인 단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류는 척박한 환경에 맞서서 부족의 번성과 곡식의 풍성함, 가축의 증가를 기원하였다. [아프리카 미술]에 의하면, 동물의 뿔이나 달팽이의 껍질에 나타나는 지속적인 증가율의 곡선 장식은 이러한 풍요의 기원이 담겨있다. 어떤 형태는 어떤 내용을 담기에 더 적절할 수 있다. 무질서/질서에 대한 감각 또한 형태(gestalt) 심리학으로 설명된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예술심리학]에서 배열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또 그 구조를 분할해서 세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질서가 있다고 본다. [예술심리학]에 의하면 질서 있는 형태는 대립적인 힘들의 균형에서 나오며,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배열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질서는 좋은 기능의 충분조건이고, 같은 이유에서 유기적인 자연과 인간은 질서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에 내재한 질서를 파악함으로서 자신이 놓여 있는 환경을 통제하고자 했다. 추상적 장식은 그러한 의지가 담긴 시각적 주술이라고 할 만하다. 추상적 장식에는 노동의 흔적은 물론 언어적 운율이 깔려있다. 문자 이전의 인류의 전통은 구술성(orality)에 뿌리박고 있다. 월터 옹(Walter J. Ong)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구술문화에 속한 인식체계는 정형구적 사고의 조립에 의지한다고 본다. 구술문화에서는 일단 획득된 지식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기억의 용이함을 위해, 고정되고 형식화된 사고패턴이 요구된다. 구술문화적 전통 속에서 장식은 원시인들의 사고와 표현 방식처럼, 분석적이기보다는 첨가적, 집합적이다. 원시적 장식들은 일정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되어 있다. 원시인들의 장식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이란 자유로운 창작이 아니라 관례에 따른다. 


관례에 충실한 장식은 놀이처럼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장식이 확립하는 질서는 관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필연적 질서(법칙)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모델들에 의한 장식, 그리고 그들의 불안정한 결합 관계가 장식의 세계를 특징짓는다. 이러한 기호의 망은 언어의 추상적인 구조가 아니라, 의례의 무분별한 전개 속에서 다른 기호에 연결되어 있다. 보드리야르는 놀이 이론을 장식에 적용하면서, 장식이 관례적인 반복과 차단된 우연에 도취되고, 결정적인 연속에 사로잡힌 현기증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장식의 환각이다. 장식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법칙과 규칙의 대조에서, 규칙에 해당한다. 그에 의하면, 법칙에 대립되는 것은 법칙의 부재나 자유가 아니라, 규칙이다. 규칙은 법칙과 달리 자신의 기원과 목적이 없다. 그렇지만 놀이의 규칙처럼 참여자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의 규칙은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의 체계 및 객관성을 추구하는 법칙과 무관하다. 법칙과 달리 규칙은 임의적이고 근거와 기준이 없으며, 규칙의 준수에 따른 광적인 현기증이 있을 뿐이다. 계획된 질서나 우연의 질서가 아니라, 규칙에 따르기 위해 법칙에서 벗어난 것, 즉 의례적인 질서는 사회성보다 우월하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성과 의례성을 대조한다. 사회성은 인간 사이에서 생각해낸 조직과 교환으로 구성된 것이며, 매력이 없는 최근의 형태이다. 반면에 의례성은 훨씬 더 거대한 체계라고 본다. 즉 의례성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을 포함하고, 자연을 배제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유적에 남아있는 풍부한 장식의 유산은 그 상징적 뿌리가 잊혀졌기 때문에 무의미한 패턴으로 보일 뿐이다. 장식이 다시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삶의 총체적 맥락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2. 다양한 장식 ; 문신, 마스크, 화장


장식은 무엇보다도 과잉의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은 늘 필요를 넘어서는 무엇에 매혹 당했다고 본다. 그것은 때로 삶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가치로 교환되지 않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처에서 억압당하는 것, 즉 성, 죽음, 광기, 폭력만이 매혹적이라고 주장한다. 삶에서 억압되는 것이 회귀하는 무대가 바로 예술이다. 철학자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에로티시즘]에서 금기에 의해 억압됨으로서 위반에의 충동을 야기하는 삶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했다. 바타이유는 노동, 세속, 과학의 세계인 삶의 영역과 파괴, 신성, 예술, 종교, 축제의 세계인 죽음의 영역을 대별 한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를 갈라놓는 것은 노동이다. 바타이유는 노동이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라고 본다. 자연과의 투쟁인 노동의 세계 저편에는, 노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신성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삶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에 불과한 것이라면, 소멸은 대가 없는 사치라고 할 수 있다. 예술과 장식은 사치라는 점에서 축제나 전쟁에 버금가는 분야일 것이다. 바타이유는 ‘생명체가 완성을 욕구할수록 낭비는 더욱 강해진다. 장식과 관능과 죽음은 연결된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낭비와 큰 위험을 추구한다. 축제 중에는 고뇌와 환희, 폭력과 죽음이 범람했으며, 소비와 소진만이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죽음과 성욕은 적대적인 원칙으로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원 안에서 교환된다’(보드리야르) 인체에 가하는 장식의 양상은 문신이나 가면, 화장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원시인뿐 아니라 현대인도 문신이나 그리기를 통한 장식, 깍기와 자르기, 뚫거나 상처 내기 등으로 신체 변형을 한다. ‘문신(tattoo)’이란 말은 폴리네시아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빈 성과학연구소가 편집한 [성학 사전]에 의하면, 문신은 송곳니나 바늘로, 혹은 조개껍질이나 이빨로 피부에 상처를 내고, 일정한 물질을 피부에 넣는 관습으로, 예전에는 거의 남자만 하고, 여자들 사이에선 매춘부만 했다. [성학사전]에 인용된 많은 전승에 의하면, 문신이 인간과 신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이런 의미에서 문신은 부적, 또는 효험이 확실한 마력의 표시로서 그려진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플레하노프(Plekhanov)는 [주소 없는 편지]에서 북아메리카 몇몇 부족은 문신으로 부족의 시조 동물을 그려 넣음으로서, 선조와의 신비적 관계와 씨족 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체장식은 출생증명, 통행증, 비망록 등의 유용한 역할과 심미성을 지닌 것이다. 몸에 하는 장식은 원시 민족들만의 관습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하위문화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현대를 거슬러 원초적인 것과 직접 접속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과시적 효과도 있다.


이이자와 코타로(飯沢耕太郎)는 [사진과 페티시즘]에서 살아있는 피부에 새기는 문신의 불가사의한 매력, 그리고 현대의 사도마조히즘적인 패션의 꼭 맞는 가죽옷이나 고무 의상은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자기 증식되는 성적 욕망을, 질서가 부여된 통로를 따라서 쾌락의 게임으로 조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사진을 통해 많은 예를 들고 있듯이, 현대의 하위문화에서 달군 쇠로 몸에 기호를 새겨 넣는 브랜딩(branding)이나 몸에 구멍을 뚫는 피어싱(piercing)은 신체의 훼손을 통해 폭력적인 관능성을 자극하는 장식이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장식은 범죄와도 연결된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의 공개처형에 대한 글 중에서, ‘모반을 일으킨 자는 빨간 속옷을 입히고, 가슴과 등에는 반역자라는 말을 써 붙이도록 한다. 그가 존속 살해자라면 그 속옷에는 단검 또는 사용된 흉기를 수놓도록 한다. 독살범일 경우에는 붉은 셔츠에 뱀과 기타 독성이 있는 동물의 장식을 붙이도록 한다’고 기록된 19세기의 공안법전을 인용한 바 있다. 


과거에 죄수들은 그가 지은 죄를 몸에 새기곤 하였듯이, 잔인한 장식은 사회적 처벌의 흔적이며, 주홍글씨처럼 강력한 낙인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실제적 뿌리가 제거된 채 과시적 장식이 되기도 한다. 몸에 새겨졌던 장식으로서의 문신은 이제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쉽게 없앨 수도 있는 것이 됐다. 가면을 쓰는 것도 인류학적 장식문화의 거대한 일부분이다. 시제어 퍼피(Cesare Poppi)는 [가면, 또 하나의 얼굴]에서 가면은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위계적인 체계의 상징이거나, 축제의 의식용 장비들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가면이 갖는 근본적인 힘은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그것을 고정시키는 능력’(시제어 퍼피)에 있으며, 아울러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시인이자 비평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가면을 축제라는 과도적 시기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 시론]에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가면, 또는 이름, 즉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 우리의 얼굴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화장술 또한 가면만큼이나 오래된 몸 장식의 기술이다. 원시 부족의 경우 과도한 안면 장식은 거의 가면과도 같은 면모를 가진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는 [슬픈 열대]에서 원주민들의 안면도식은 개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준엄을 부여하였고, 자연에서 문화로, 무(無)정신의 동물로부터 문명화된 인간에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경계선이라고 말한다. 브라질의 카두베오족의 분장은 상징적 형식을 부여하려 했던 한 사회의 환상으로 설명된다. 화장으로서 그 문화의 꿈, 즉 황금시대를 서술하는 상형문자를 장식하는 것이다. [슬픈 열대]에 등장하는 카두베오족에게 존재란 장식하는 것이며, 장식이란 그들이 지능도 창의력도 인간성도 없다고 간주한 무(無)장식적 존재에 대한 우월감의 확인이다. [슬픈 열대]에 등장하는 므비야 족은 자연에 대한 공포를 안면문양과 낙태, 그리고 영아살해라는 관습으로 표시하였다.


도미니크 파케(Dominique Paquet)는 [화장술의 역사]에서 고대인의 이상은 몸단장이나 인위적인 장식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균형에서 비롯되는 조화였다고 말한다.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화장술은 창녀나 소문난 성도착자들의 전유물로 간주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중세에도 신체에 변형을 주는 것은 음란함과 교만함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신의 섭리는 자연스럽고, 악마의 소행은 작위적’이라는 믿음이다. 헛된 겉치레는 죄악의 온상이었다. 도미니크 파케는 ‘화장으로 만들어낸 가면은 신이 빚어낸 얼굴 위에 칠한 악마의 모습이다’라고 한 성(聖) 제롬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조물주는 인간을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했으므로, 겉치레는 신의 작품을 손상하는 일이다. [화장술의 역사]는 17세기 궁정에서 화려한 궁정문화 속의 인위적인 기교가 번성했지만, 18세기의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의 인위적인 색채보다는 자연스러운 질서, 또는 무질서를 선호하였다고 전한다. 


부르주아가 요구했던 근대적 평등에는 몸의 진실성에 대한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화장술의 역사]에 의하면 낭만적 풍조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향을 바꾼다. 낭만주의에서는 질병을 모방하는 창백한 화장법이 유행했다. 낭만주의자들의 병적 초췌함에 대한 선호는 중산계급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자연스러움)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것이다. 후기 낭만주의자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화장예찬](1863)에서 아름다움의 이상을 자연에서 인위적인 기교로 옮겨 놓았다. ‘아름답고 고귀한 모든 것은 이성과 계산의 결과물이다. 자연이 만든 모든 것은 끔찍하다’(보들레르)고 말하는 모더니스트들은, 인위적인 기교로 자연을 초월하고자 했다. 19세기 말 퇴폐주의 예술가들은 현대성을 추구했는데, 화장은 그 상징의 하나였다. 그들은 기괴함을 찬양하면서, 인위적인 기교의 의미를 진실을 모방하는 허위에서, 허위를 모방하는 진실로 변화시킨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화장을 비롯하여, 의례화하는 것, 의식화하는 것, 괴상한 옷을 입는 것, 가면을 씌우는 것, 팔다리를 자르는 것, 모양을 그리는 것, 고문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장식을 추동하는 유혹은 자연적이지 않다. 미(美)나 장식은 반(反) 자연적이다. 사실,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경제적이다. 그러나 미와 장식은 자연스러움 대신에 강렬함을 추구한다. 강렬한 미학을 위해 폭력과 잔혹도 동원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 폭력이나 잔혹이 아니라 의례적인 것이다. 실제의 상해가 아니라 강렬한 미학을 실행한다. 보드리야르의 논지를 응용하자면, 장식은 유혹을 통해 실재의 체계를 종결짓는다. 그것은 육체를 가상으로, 속임수로, 덫으로, 동물적인 모방으로, 제의적인 모사로 덮어씌우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의 열정은 놀이의 순수한 형태이며 형식적인 한술 더 뜨기이다. 기호의 현혹적인 매력과 지배인 의례적 장식은 강렬함을 넘어 현기증을 초래한다.  

    

3. 근대디자인과 장식


근대가 한창이던 19세기에 고딕 복고운동을 펼친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은 모두가 어느 장소엔가 부합되어 있다. 즉 어떠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장식성이 없는 최고급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식은 근대적 기능주의자들에게는 제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19세기 중반 기능주의의 선구인 호레이쇼 그리노(Horatio Greenough)는 장식이란, 가식이고 자신의 불완전성을 가장하려고 하는 유치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는 장식과 기능을 대조시키고 전자는 인위적인 것,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라 평가한다. 그리노는 장식을 비유기적이고 비기능적인 요소의 도입이라고 본다. 유기적인 조직체에 비유기체를 도입하는 것은 파괴행위요, 퇴락의 징조라는 것이다. 장식을 좋아하는 것은 야만적이고, 자신과 같은 근대인은 ‘벌거숭이’, 즉 본질적인 것의 당당함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특히 기능주의자들은 ‘장미꽃 무늬가 새겨진 엔진같은 물건’ 같이 새로운 재료에 구시대적인 장식을 하는 경우를 혐오하였다. 아르누보는 ‘장식적인 질병’(월터 크레인Walter Crane)이라고 매도되었다. 장식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의 개척자였던 아돌프 로스(Adolf Loos)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제목도 의미심장한 [장식과 죄악](1908)이라는 논문에서, 장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것을 천명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문화의 진보는 실용적인 물건에서 장식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장식은 현대문화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며, 현대문화의 표현도 아니다. 따라서 장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정신적인 힘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을 극단적으로 배제함으로서 급진적인 미적 순수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에게도 장식을 하려는 충동은 조형예술의 기원이 된다. 장식은 에로틱한 것--그는 최초의 장식인 십자가의 에로틱한 기원을 지적한 바 있다—이며, 문화적인 배설 충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아돌프 로스는 죄인의 80%가 문신을 하고 있는 감옥의 예를 들면서, 비록 지금 감옥에 있지 않더라도 문신을 한 자는 잠재적인 범죄인이거나 퇴행적인 귀족주의자로 간주할 만하다고 본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범죄자에 의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과 나라의 건강과 재정, 따라서 문화적 발전에 커다란 손실을 끼침으로서, 죄를 범한다고 본다. 인간의 노동이나 물자가 소모되어 가는 것은 국민경제에 대한 죄악인 것이다. 그는 문화발전의 속도가 장식을 애호하는 낙오자들 때문에 느려진다고 본다. 장식은 이미 현대문화의 자연스러운 생산물이 아니라,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식은 노동력의 소비이며, 따라서 건강의 낭비이고 파손된 재료를 의미한다. 기능주의자들은 과도한 문화위생학—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눔으로서 문화적 질서가 생겨난다는 인류학적 가설에 의하면, 문화 또한 위생학이다--을 가지고서, 장식을 제거해야 할 할 병균처럼 여겼다. 


그들의 논조는 거의 종교적인 울림까지 지니고 있다. 데 스틸(De Stijl)그룹은 ‘최초의 말은 순수성이다. 즉 백색의 세계로 갈색의 세계를 대체하자’고 주장했으며, 아돌프 로스는 ‘이제 도시의 가로는 흰 벽처럼 빛날 것이다. 성스러운 도시, 천상의 도시 시온처럼...그러면 완성은 곧 올 것이다’ 고 말했다. 그들은 마치 곰팡이 같은 장식을 세척하고, 투명하고 맑고 순수한 것을 되찾고자 하였다. 장식은 형태와 기능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기능주의자들이 장식에 부여한 역할이다. 기능주의자들에게 장식은 이미 존재하는 미의 윤곽을 한층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응용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건축에 있어서의 장식]에서 모든 장식의 추방이 급선무지만, 그다음 단계는 유기적인 장식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돌프 로스가 허용했던 유일한 장식적 요소는 그 주어진 성질을 위해 펼쳐지는 재료뿐이었다. 여하한 상징적이거나 표현적인 변형은 용납되지 않았다.


1920년대의 ‘새로운 정신’은 기하적 추상을 추구하였다. 르 꼬르뷔제(Le Corbusier) 와 오장팡(Amédée Ozanfant)은 기계시대의 새로운 미학을 대변하면서, 순수한 추상적 형태와 색채에 의한 순수주의와 기계미학을 주장하였다. 1920년대의 순수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를 찬미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는 훈련과 논리, 명쾌함과 질서의 동의어였다. 앙리 반 데 벨데(Henry Clemens van de Velde)는 그리스인의 정신과 논리를 가지고 물질의 바른 형태, 그 완전함을 추구하자고 말한 바 있다. 근대 디자이너들은 미의 보편성, 객관성, 표준성을 주장함으로서, 장식의 침투를 원초적으로 배제하였다. 근대 디자인의 보편적인 어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이다. ‘기능으로서의 미’를 주장하는 막스 빌(Max Bill)은 ‘형태는 최소의 재료로 최대한의 효용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산업디자인의 미는 형식의 정확성을 보여주며, 그것은 기능의 기호가 투명한 것을 의미한다. 기능주의의 완벽한 모델은 기계이다. 


여기에서 기계 미학이 발생한다. 엔지니어들에게는 기술과 재료가 미의 원천이자 구조가 된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진실’을 추구했던 것이다. 피터 웰렌(Peter Wellen)은 [순수주의의 종언]에서 아돌프 로스(Adolf Loos)와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은 모더니즘에 대한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공리가 장식을, 엔지니어가 유한계급을, 생산이 소비를 대신할 것이었다.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정치에 있어서까지 부르주아적인 것이 귀족적인 것을 대신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장식주의를 표방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나 바우하우스 운동, 기능주의의 선구자들은 역사주의에 반발하여, 세계는 우선 엄청난 상징의 폐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그 잡동사니들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양식모방이나 재료 속에 포함된 위장된 상징가치로부터 세계를 구해내기 위해, 재료, 기술, 기능의 진실성을 내건 것이다.   


피터 웰렌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의 첫 파도는 기계의 형식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장식과 잉여의 유혹을 물리친 엔지니어의 미학이었다.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의 표현을 사용하면, 과시적인 낭비나 전시의 성격을 지닌 유한계급의 예술이, 정밀하고 노동자답고 생산지향적인 엔지니어의 예술에 굴복한 것이다. 기계 미학은 기계의 형식과 닮은 예술을 추구하는 기능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 순수주의(Purism), 에스프리 누보 등이 그 예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위대한 남성적 절제’, 단순성과 무장식, 생산 노동에의 적응성을 높이 평가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라는 구호는, 그린버그적 환원주의, 즉 회화의 모든 특성은, 더이상 환원될 수 없는 시각적 요소만 남을 때까지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는 미학적 교조주의를 예시한다. 그러나 미는 물론이거니와 기술의 국제성이나 보편성조차도 근대성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에서 근대성의 신화에서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본다. 그는 생산과 유혹을 대립시키면서, 유혹을 복잡한 의례나 놀이(장식도 해당)로 본다. 유혹은 생산과 욕망의 논리를 거부하고, 사상과 기호와 매혹의 차원에서 자신의 미적 내기를 추구한다. 유혹은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기호들의 작용을 즐길 뿐이다. 유혹은 가상으로서 실재의 모든 깊이를 뒤집는다. 이 세계는 변별적인 구조와 대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적인 가역성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유혹은 내용 없는 형태를 끝없이 재현하는 망상조직이 된다. 유혹은 축적, 진보, 성장, 생산, 가치, 에너지, 욕망과는 달리 유희와 도전의 공간, 불확정적인 질서이다. 생산은 대상들, 즉 축적되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는 실제적인 기호들만 생산하지만, 유혹은 속임수 및 표면이고, 불필요한 과정에 불과하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부르주아의 시대는 생산과 본능의 시대였다. 생산의 차원에 대립 되는 것은 ‘기호와 의례의 차원’인 유혹의 귀족적인 차원이다. 


[생산의 거울]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은 귀족적 유혹을 끝장냈다. 유혹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본능의 해방 및 생산, 리얼리즘의 질서에 도전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유혹이 조형예술의 하나로, 욕망의 소박함이나 자연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기호들의 놀이이고 기교라고 본다. 장식적 유희의 목적은 쾌락을 통해 쾌락의 끝이나 그 너머로 나아가는 데 있으며, 유희의 논리는 현기증 나는 열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제한 없는 형태와 기호들의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진정한 존재, 절대성에 이르려는 욕망이 없다면, 어떤 개인이나 행위이든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며, 오직 유용성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장식의 거부는 흘러넘치는 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고, 남아돌고 불필요한 것을 혐오하는 간결 절약의 정신이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의례적 규칙을 사회적 법칙과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사회적인 것에는 유혹이 없다. 놀이와 의례성의 세계를 사로잡는 죽음과 유혹의 내기에 비한다면, 현대의 사회성과 그것이 확립하는 의사소통과 교환의 방식은 추상적이고 빈약하다. (--->2부로 이어짐)


출전;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세미나 강의록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