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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민경 / 보지 않으면서 보기

이선영

보지 않으면서 보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최근 열린 감민경의 전시 ‘잃어버린 밤’에서 이미지가 있는 두 개의 평면을 임의적으로 붙여놓은 듯한 작품은 ‘리넨에 목탄’, ‘종이에 수채’ 같이, 작품에 사용된 재료만 건조하게 드러나 있다. 크기의 차이가 있는 경우 큰 것은 작은 것을 감싸는 바탕 같은 효과가 나기도 한다. 작가는 평소에 많은 드로잉을 해놓고 서로 다른 시기, 소재, 재료로 작업한 것을 병치시키며 그 시공간적 간격에서 오는 차이와 유희한다. 이러한 조합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은 개방적 구조를 가진다. 주사위 놀이와도 같은 조합이 어떤 부조리한 결과를 낳을지라도 결국은 그 모두가 한 개인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의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작품들 대부분은 종이 위에 목탄으로 가벼운 터치로 그려진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두개를 겹쳐 놓든 액자를 해서 나란히 배열하든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만약에 어울리지 않으면, 안 어울리는대로 또 다른 의미가 파생된다. 




211x150cm, watercolor on paper /86x84cm charcoal on linen. 2018.



211x150cm, charcoal on paper. 2019.



이러한 매칭 작업은 의식의 산물인 작품들을 충돌시켜 무의식이 솟아나게 한다. 생각지 못한 것과의 만남은 기존에 있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 중첩된 작품의 경우, 한 작품은 일부가 가려질 수 있고, 특히 색은 대조를 통해서 강약이 달라지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변화는 일어난다.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맥락의 작품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작품을 그 앞에 놓아보는 작가를 상상해 본다. 1도 2도 아닌 제3의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현격하게 크기가 다른 두 작품의 조합은 마치 물 위에 던져진 것이 만들어내는 파문같은 또 다른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작가는 두 작품의 구조 사이에서 발생하는 무언가를 겨냥한다. 색을 잘 쓰지 않는 가운데, 얼룩진 색이 마치 액체같은 느낌을 주는 평면 위로 불길이 보이는 작은 표면이 조합된 작품에는 운동감이 있다. 물과 불, 또는 보다 유동적인 기체들 간의 잠재적인 운동감 때문이다.

 

마른 식물의 줄기를 빽빽하게 채워 넣은 작품 위에 액체적 움직임이 있는 작은 작품을 배치한 것에도 밀도나 농도의 차이에서 기인한 운동감이 있다. 크기의 차이로 인해 바탕처럼 보이는 목탄 드로잉은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식물잔해들이 목탄이 될 것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하나의 평면에 하나의 장면만 그린다해도 단편적 측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감민경의 작품은 이상적인 예술작품으로서의 필요 충분 조건인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 의미를 결정짓는데 방해가 되는 이러한 단편성은 악취미라기 보다는 연결을 위한 빈 곳이다. 일종의 수용기(receptor)처럼, 다른 것들과의 연결을 위한 접면이다. 전체의 변형을 야기할 수용기는 여러 군데 존재한다. 작품(들)으로의 입구와 출구는 결정적이지 않다. 종이에 목탄으로 어떤 장면을 그린 후 극히 일부분만 색을 칠하는 것도 조합의 방식처럼 보인다. 일부 색은 너무 이질적이어서 조금 칠해졌어도 눈에 띈다. 




120x150cm, charcoal on paper/19x27cm. watercolor on paper. 2018.



55x79cm. charcoal on paper. 2019.



91x121cm. charcoal on formboard. 2019.



마치 작업 중의 작품처럼 불완전해 보인다. 희끄무레한 바탕 면은 말 그대로 밑그림이 되어 곧 칠해질 것인가, 아니면 탈색되는 중인가. 자연물이 아닌 사물의 경우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두운 실내의 하얀 프로펠러 형태의 물건은 선풍기인지 조명기구인지 알 수 없다. 천정에 붙은 것인지 바닥에 서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객을 마주 보는 듯한 기이한 시선을 가진다. 그 물건 아래 다른 색으로 칠해져서 작지만 눈에 띄는 두 개의 구멍이 보이는데, 이렇게 난데없이 뚫려 있는 구멍은 대상을 직시하지 않은 채로 대상을 보게 한다. 그것은 일상에서 흔한 시선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행위는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앞에 있는 것을 안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안 보면서 보는 사회적 시선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스펙터클의 공습으로 웬만한 자극에 무딘 현대인은 보면서도 보지 않기도 한다. 


무관심하게 손끝을 스치는 인터페이스의 정보들은 어느덧 관성이 돼버린 무의식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보다 사물이나 정보에 의해 더 많이 둘러싸여 살게 된 현대에 이러한 어긋난 시선은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다. 감민경은 이전 개인전에서 ‘응시의 기술’(2016), ‘visible in invisible’(2013)이라는 전시 부제를 붙일 만큼 시선의 문제를 중시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보는 주체와 보이는 주체 사이에서 사회적 드라마가 생겨날 만큼, 인간의 시선에는 일치보다는 간극의 문제가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감민경의 작품에 나타나는 어긋남과 균열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 작가는 ‘본다는 주체는 나 자신이지만, 그 주체가 주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 보여지는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판단은 지속적인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미지를 해석하고 재생산해 내는 나에게 시각이란 눈멂과 같다’고 말한다. 






245x300cm, charcoal on paper. 2018.



필획이 거칠게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추상은 아니기에 대략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나오는지, 왜 그런 식으로 나오는지, 그 출처는 무엇인지가 불확실하다. 각각이 나온 맥락을 지워버리는 것은 새로운 맥락을 만들기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려진 감민경의 작품들은 종이에 연필로 쓰는 글자처럼 고쳐쓰기와 다시 쓰기의 용이함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가 그린 것을 자주 고치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드로잉이라는 방식은 최초의 호흡을 그대로 남겨두면서도 변화의 과정을 전달해준다. 완성, 또는 완성에 가까운 무엇은 미래에 있지 출발점에 있지 않다. 특히 작품의 ‘창조자’에 있지 않다. 감민경은 ‘나의 작품의 의미는 이것이다’라고 확정하지 않는다. 확언의 기피는 작가가 신념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신/작품에 대한 확정/확언이란 필연적이기 보다는 대개 우연적 순간이 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인간이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작동한다. 개인적 차원의 편견부터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상징적 우주까지,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인과론적 관념은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는 매우 좋은 바탕이 된다. 이러한 기조는 소소하게는 편견과 고집, 심각하게는 물신주의나 운명론적 사고와 연결되면서 스스로를 억압할 뿐 아니라 타자도 억압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면 현재의 우연성을 의식하는 것은 특히 현재가 바람직하지 않을 때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중요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모두 우연성의 기미를 띄고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더욱 가까울 수 있다. 자연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인간이다. 자연에 본래부터 내재 되어있던 의미는 없다. 전시 제목에는 작가의 의도 아닌 의도가 잘 드러난다. 2017년의 ‘지붕이 없는 기억’ 전(베를린)은 ‘발견된 자료나 물건의 출처가 뚜렷하지 않고 형태가 불완전한 상태를 비유’한다고 말한다. 




242x150cm. charcoal on paper. 2019.



42x29.7cm. charcoal on paper. 2018



42x29.7cm. charcoal on paper. 2018



42x29.7cm. charcoal on paper. 2018



42x29.7cm. charcoal on paper. 2018



2018-19년에 제작된 작품을 중심으로 꾸린 최근 전시 ‘잃어버린 밤’ 전은 ‘기억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식하고 있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민정의 작품은 지각 또는 기억의 사소한 단편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과 사물, 그리고 사람 이미지 모두가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공통적 위상을 가진다. 작품이 소통되는 과정은 어디선가 가져온 불완전한, 그래서 사소한 인상을 주는 단편을 단서로 떠나는 정처 없는 과정이다. 타자와의 협업이 필요한 반복적인 해석의 과정이다. 감민경의 작품 속 대상들은 유난히 시간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러한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퇴색된 사진처럼 종이에 목탄으로 그려진 모노 톤의 작품들은 이미 시간의 층을 둘러쓰고 나온다. 몇 년 전의 드로잉은 물론이고, 방금 그려진 것조차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모면하기 힘들 만큼 빈 곳이 많다. 그것은 불완전한 주체의 시선을 보충해서 의미를 형성해 나갈 타자의 자리일 것이다. 


비어 있음은 부재와 공허, 불완전과 허구 같은 부정적 용어보다는 열림, 또는 변화를 위한 여지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부정적인 것을 표현할 때조차 최선을 다해 표현하기 때문에, 작업 자체에는 허무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마땅한 작업실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를 막론하고 지금까지처럼 수십 년 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올 수 있었겠나. 오히려 작가의 실존적 불안정성은 더욱 의식을 깨어있게 할 수 있다. 삶의 방해가 없다면 예술은 그러한 강도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허무함은 아예 작업을 안 하거나 다른 행위로 대치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일 뿐이다. 감민정의 작품들은 회화에 기대되는 바의 의미와 존재감을 빼내고 있지만, 그 또한 회화에 대한 작가의 변화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럴듯한 이미지들이 회화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노동력과 기술력, 자본력으로 대량 제조되고 유통되는 상황을 화가는 무시할 수 없다. 




'잃어버린 밤' 전시전경, 2019, 갤러리 조선.



이익을 향한 집요한 방향성을 가지는 지배적 문화 속에서 예술은 짐짓 방향성의 부재, 또는 교란을 암시한다. 그것은 한 작품뿐 아니라 작품들의 설치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여름에 이루어진 최근 작품의 전시에는 작품들만큼이나 설치방식이 독특했다. 작은 공간을 크게 사용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실내외의 풍경, 인체, 인터넷에서 본 자료 등을 담은 작은 작품들은 마치 원자처럼 헤쳐 모이면서 순간적으로 각을 맞춘다. 물론 원자처럼 일률적인 크기는 아니었고 편차는 컸다. 중요한 것이 작게, 사소한 것이 크게 그려져 있는 듯한 역설도 찾아진다. 꼬고 있는 자기의 다리를 그린 듯한 큰 작품은 해부학적 정확성조차 갖추지 않는다. 몸을 관통하는 꽃이 있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인물상은 매우 작다. 각각의 화면은 나름의 서사를 가지는데, 각 서사의 단편들이 다시 또 다른 서사를 향하는 모양새다. 작가는 주변 사람과의 대화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하곤 하는데, 그것은 한 공간 속에 시간을 접어 넣어야 하는 마만치 않은 과제를 낳는다. 


서사의 통시성은 배치의 공시성에 의해 해체되며, 관객이 어떤 바늘부터 실을 꿰어 나갈지는 열려있다. 크고 작은 단편들이 상호작용하는 전시장에서 한 작품의 의미는 바로 그 작품 안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현대의 해체주의 철학이나 텍스트 이론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어긋남, 미끄러짐 또는 탈중심적인 속성은 감민경의 풍경에 공통적인 훵 한 공간감을 설명해 준다. 뭔가 가득 있어도 훵 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미가 불확실한 대상들은 모노 톤의 색감으로 우울한 느낌을 준다는 것도 공통적 기조다, 드로잉 중심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유목적인 방식이다. 큰 자리를 차지하는 캔버스 대신에 종이, 물감 대신에 목탄은 단촐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선다. 드로잉은 회화에 비해 작가의 인상에 남은 모든 것들을 순발력 있게 기록하게 한다. 전시는 평소의 생산물을 가지고 조합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지각하고 기억한 것을 추후에 생각하는 과정이다. 그린 다음 생각하기는 우연성에 보다 많은 기회를 준다.

 

출전; 아트센터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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