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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라X김형규 / 계산 불가능한 것의 계산

이선영

계산 불가능한 것의 계산

  

이선영(미술평론가)

  

‘X 사랑’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전시의 작가 김기라X김형규는 근 5년째 국내외에서 발표된 다양한 작품에서 함께 했던 이들로, 이번 전시는 개별작품에서의 협업을 넘어서 둘이 하는 첫 번째 개인전이다. 조각, 회화, 문화이론 등을 전공했던 김기라의 작품이 전방위적으로 예술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면 김형규는 신문방송학과 및 미디어아트를 전공하고 뮤직비디오와 영화, 광고, 기획 등의 영역에서 활동해 왔다.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만남이 적지 않은 현대적 사회관계 속에서 각자 개성이 강한 이들이 5년 이상 작업을 같이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시너지 효과가 있었음을 말한다. 현대미술이 여타의 스펙터클과 경쟁하면서 필수 요건이 되다시피 한 규모나 차원의 확장은 가시적, 비가시적 협업을 고무해왔다. 그렇지만 그만큼의 성과는 그만큼의 희생도 같이 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 시점에서 ‘사랑’을 생각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 














이 전시에서 사랑은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에는 철학적인 것이 있다. 사랑이라는 실존적 경험은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든다. 동시에 사랑은 ‘격렬한 실존적 위기’인데, 그것은 ‘진리의 모든 과정’(알랭 바디우)과 마찬가지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사랑이 사유’인 이유는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할 것’(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이 또한 철학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물론 예술은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경험과 감각, 그리고 기술만으로 작업을 지속하기는 힘들다. 개인적인 ‘사랑 타령’부터 인류애의 호소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가장 많이 언급되곤 하지만, 그만큼 남발되기도 한다. 참신함과 파격을 앞세워야 할 현대미술의 장에서 그들은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는 듯한 진부한 주제를 호출한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다원예술 성격을 가지는 이 전시는 냉소적 세태 풍자부터 철학적 사색에 이르는 범위를 가진다. 새삼스러운 질문에 의해 알쏭달쏭한 삶과 예술의 어떤 진면목이 조금씩 드러난다. 확실한 것은, 작가들로 하여금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한 원인이 사랑, 특히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예술 활동으로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다 피폐해진 상황에 빠져 있음을 목도했다. 물론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은 아니고, 위기에 대한 완충재 역할을 했던 젊음, 즉 시간이라는 자원이 점차 고갈되는 시점에 놓이면서부터 일 것이다. 그들이 이 작품을 진행하면서 어떤 결론에 이르든 간에 작업은 계속할 것이라 믿어지지만, 작품은 또한 작가를 변화시킬 것이다. 자기 주도적인 일이 많지 않은 삶에서의 예술은 스스로의 변화를 이끈다. 시간의 시험이 가혹한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도 지속적인 내공이 필요하다.










진지한 질문은 그 자체가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지만, 일상적 삶에서 대답 될 수 없는 질문은 억압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생존활동을 벗어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되는 엄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낭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X 철학’이라는 비속어도 나왔을 것이고, 방송가에서 회자되는 ‘예능’이라는 말처럼 ‘예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벼워지는 경향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 X-라는 접두어는 가려져야 할 모자이크 화면같은 불온해 보이지만 동시에 미지의 영역을 암시한다. 그것은 사랑이 비천함부터 숭고함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를 뛰어넘는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사랑의 역사]에서 말하듯이, 사랑은 ‘예법, 금기를 뛰어넘는다는 두려움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의 경계선을 넘어선다는 공포/욕망’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무의미와 부조리 또한 피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에 관련된 또다른 책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사랑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존재의 무의미의 증인이 되고 인간관계와 존재들의 부조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질문하는 자의 절박함이나 자질에 따라서 대답 될 수 있을 따름인 내용이다 보니 이러한 양면성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어떤 결론을 이미 내리고 나서 그것을 증명하고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여자들로 하여금 질문에 동참하게 한다. 비록 명확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어도 적절한 맥락에서 제기된 올바른 질문에는 이미 답이 내재해 있다. 작가들은 이 전시를 통해 그 맥락을 제공하려 한다. 그래서 전시는 불가피하게 연극무대같은 속성을 띄게 되었다. 관객은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야 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배우 중 하나가 인용하는 철학자 중 하나인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연극과 사랑을 연결한다. 그에 의하면 ‘연극은 이미 저에게는 훗날 사랑이 될 어떤 모습’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연극은 사유와 육체의 구분이 불가능한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누군가에게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처럼 둘의 혼합, 언어에 의한 육체의 포착’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연극을 ‘몸으로 이루어진 사유’라고 정의하면서 사랑은 재연을 요구한다고 본다. 보안여관 신관과 구관 여기저기에 배치된 퍼포먼스 배우들은 한 주제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들로, 정지화면이 아닌 시간적 과정을 요구한다. 관객의 동선은 질문/답이 반복되면서 심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에서 쉽게 대답 될 수 없는 질문들을 다루는 작가의 방식이다. 이 두 작가의 경우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인 남자 가장이면서 기혼자이며 누군가에겐 자식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랑에는 여러 결이 있겠지만, 그들이 당면한 삶의 고민과 경험하는 사랑에 대해 전시라는 공론의 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차오른 문제를 작품이라는 행위와 노동으로 풀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그들이 여태 다루어왔던 수많은 사회적 이슈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실존적 물음, 즉 자문에 가깝다. 예술적 작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렇듯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할 수 있겠나. 그들은 ‘사랑에 정의가 없고 결론도 없다’고 하면서, ‘과학이나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관점으로 분석과 해석해 보려는 시도를 보았지만 정의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가치관과 사회변화와 더불어 변해온 것’이라면서, 어떤 가치의 절대성을 의심한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도 불확실성만이 확실하다는 설득력 있는 가설이 있는 만큼, 예술이나 사랑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투입과 생산의 관계가 모호한 예술 활동은 그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문하게 한다. 누군가 예술 활동에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면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계산하는데 익숙한 이가 아니라면,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대에 올려놓는 행위에는 잔인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이미 그 관계가 끝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미술과는 이질적인 분야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여러 변수에 노출되어있는 이 전시 아닌 전시는 냉정한 사고와 열정적 실행력을 요구한다. 계산은 나중의 일이며, 그러한 과정은 매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반복될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질적 결과물로 남지 않는 이번 작품은 일종의 열린 작품인데,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물질과 에너지가 투입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시주제인 사랑이 물질성보다는 비물질성, 정형성보다는 비정형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의 비정형성은 그것의 정의 불가능성과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이유를 암시한다. 그것은 예술이 그토록 현실과 조화되거나 화해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유 아닐까.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시인들이 노래해 왔지만,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좀 더 이론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말한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에서 라깡의 이론을 사랑의 분석에 활용한 바 있다. 사랑하는 대상은 사랑하는 자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암흑지점]에 의하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한편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사랑의 드라마에서 주체와 객체의 합일은커녕, 불일치가 더 필연적임을 말한다. 미란 보조비치는 라캉의 가설을 적용하면서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사랑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김기라와 김형규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불가산적이며 비물질적인 정신과 교감의 형태’로 간주하며, 공연, 퍼포먼스, 미디어 작업 등, 다양한 매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과 고민’까지를 포괄하는, 즉 수년간 그들이 견지해온 ‘사유, 공유, 향유’라는 예술적 맥락에다 사랑의 여러 국면을 배치하려 한다. 판소리와 랩, 레게 등 동서양의 하위문화 공연을 포함한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와 조각, 설치는 물론이고, 그들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영상 작품도 없다. 다만 전시 기간 동안 실제 공연은 단 두 번(10월 10일, 24일)이고, 나머지 기간에 전시장 곳곳에, 각 무대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이 나온다는 것과 퍼포먼스의 부대 장치인 CCTV 등이 전부다.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을 가지는, 오디션을 통해 뽑은 전문 배우들과 음악 공연자(판소리, 랩, 레게 분야)는 10여 명이며 이들은 짜여진 각본에 의해 정확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여느 미술 전시회처럼 완성된 무엇을 가져다 놓는 방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변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작가들의 실존적 상황과도 관계되지만, 작품이 놓이는 장소적 특수성과도 관련된다. 1942년부터 있었던 보안여관은 연인은 물론, 문인부터 정치인까지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으로, 지금도 근대문화유산 급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구관과 신관에 걸쳐 있는 장소 곳곳에서 진행되는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위한 자연스러운 동선이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관객의 입장에 따라 각 퍼포먼스가 주는 울림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작품 [사랑을 믿으세요?_사랑의 기술]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에 대한 도입부가 되기 충분하다. 관객은 10대 초반의 소녀(배우; 문주빈)가 사랑에 대한 동서고금의 언명들을 줄줄이 꿰는 대사를 듣게 된다. A4 1장 정도 분량의 대사를 강의하듯이 늘어놓는 아이의 입에서는 앞서 인용한 알랭 바디우를 포함한 유명한 철학자, 극작가, 신학자, 미술가 등이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목록들은 과연 그 아이가 사랑을 알고나 말하는지 의심하게 한다. 소녀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이론들이 자신의 실존적인 조건이나 경험, 감성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앵무새처럼 외워서 말하는 사랑이다. 아이의 입을 통해서 훌륭한 이론들을 늘어놓는 것은 풍자적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비밀이 풀렸는가. 그러나 이론이 이론으로 확립된 것은 그동안 그 이론이 보편적 공감대를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관객은 소녀가 읊조리는 사랑에 관련된 담론 중 이 전시에 흐르는 기조와 공명하는 내용을 얼마 간은 발견할 지도 모른다. 20대 후반의 여자(배우; 이선주)가 연기하는 작품 [미친 X_기억]은 울다가 웃다가 하는 연기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거의 미친X같은 그녀의 모습은 ‘사랑은 광기’--사랑은 가장 이성적인 광기이다‘(로미오의 대사 중에서)--라는 고전적 정의, 그중에서도 조울증을 떠올린다. 그녀는 앞의 소녀와 달리 사랑이라는 것을 겪었을 것이며, 사랑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참이다. 


감미로운 사랑의 기억에 잠겼다가 깼다가를 반복하는 그녀에게 향수란 ‘회귀(nostro)이고 고통(algos)’(크리스테바)이기도 하다. 무엇이 그녀의 본 모습인가. 타자를 염두에 두는 사랑에서 주체의 통일성은 위기에 빠진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개체가 분할 불가능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타자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신을 파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불안한 상태를 암시한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주체가 자신을 이상적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서 존재한다고 보는데, 울증과 조증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정동장애(affective disorder)를 앓고 있는 이 여자는 그러한 동일시가 안정적이지 못함을 보여준다. 즉 [사랑의 역사]가 말하듯이, 사랑에 내재한 온갖 이상화의 기반이 되는 나르시시즘과 또한 그것이 지닌 공허, 겉치레, 불가능한 것의 후광에 의존하고 있는 주체의 기반은 취약하다. 실성한 듯이 혼자 울고 웃는 주인공에게 사랑의 관계가 제공하는 나르시스적인 만족감과 이상화는 공존하는 것이다. 










작품 [사랑ㅁ_개]의 연기자(배우; 김용식)는 메가폰을 들고서 ‘사랑합니다’와 ‘멍멍멍’ 소리를 반복한다. 이 말은 한국어 표현에 ‘옳은 X소리’라는 말을 떠올린다. 한입으로 두말 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은 사랑의 이중성에 내재되어 있다. 40대 후반 나이대의 배우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의 시점을 말한다. 작품 [늘 새로운 세계_지나온 삶이 현재에 멈춘 지금을 위한 변명]에서 배우는 보안여관 2층에 묶인 채 매달려 있다. 눈가리개를 한 채 양복을 입은 50대 남자(배우; 김선동)은 경주마처럼 눈가리개를 한 채 앞만 보고 달려왔을 법한 중년 남자의 상황을 압축한다. 그의 맹목적 경주를 이끈 동력은 일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두 사랑은 공식적으로는 연동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일(작가의 경우에는 작업 포함)과 가족 관계가 진부한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순간, 이를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작가라는 존재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만]에서 ‘세계는 사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신 속에서 취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보면서,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알랭 바디우는 ‘반동은 언제나 동일성의 이름으로 차이를 의심한다’고 본다. 그는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이며, ‘사랑의 절차’를 ‘차이의 창조적 놀이’로 정의하는데, 그것은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김기라와 김형규가 곧잘 기준점으로 삼는 사유와 향유 뿐 아니라 공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알랭 바디우에게 사랑은 사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알랭 바디우는 정치의 목표를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지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차이가 없기에 공동체도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진다.








2층 카운터 옆방의 작품 [다른 세계의 끝없는 욕심]을 연기하는 60대 남자(배우; 박경용)는 남을 관찰하기 위한 구멍을 계속 뚫는다. SNS의 보편화는 관음적 행위가 일상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자신이 먹는 것이 자신의 몸이 되듯, 본 것은 정신이 된다. cctv나 스마트폰 같은 전자 소통매체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만남을 배제한다. 이러한 간접적 소통의 편재는 중심이 없으면서도 유아론적인 주체를 양산한다. 그는 타인에게서 자신을 볼 따름이다. 전자전달 매체가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고무한다는 주장은 비디오를 비롯한 매체이론에서 일찍이 개진된 바 있다. 이 작품은 또 다른 거울이 되고있는 상호반영적 매체와 자기만을 향할 뿐인 유아론적 사랑을 연결시킨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내가 너에게서 사랑한 것, 그것에 대해 착각하지는 마라. 그건 네가 아니야. 나는 오직 사랑만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에서도 사랑하기의 불안만을 사랑한다’(라 로슈푸코)는 잠언을 인용한 바 있다. 


1층 카운터의 작품 [사랑박사들]을 연기하는 60대 후반의 남녀(배우; 이천희, 정미경)는 보안여관의 장소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일 것이다. 관객은 여인숙에 들어선 손님처럼 그들이 제공하는 요구르트를 받음으로서 달작지근하면서도 텁텁한 발효의 시간으로서의 사랑을  떠올린다. 부부로 보이는 둘은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밥 먹는데만 열중하고 수십년간 해온 관성대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자기식대로 현실 속에 자리를 잡은 캐릭터들이 ‘사랑박사’로 명명된 이유는 그들이 이미 사랑 따위는 초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보다는 이제 정과 의리로 사는 노부부에게도 ‘사랑’은 무시 못한다. 그래도 사랑이란 것이 있기에 여인숙은 운영되고 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들에게 어떤 캐릭터보다도 큰 비중을 두었는데, 그들이 문을 열어야 전시/무대 자체가 개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음악 공연 [사랑 잡가_리플렉션_늘 새로운 언어들]이 열리는 장소로 관객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형문화재 창가 전수자인 정은헤는 30대 후반이지만 소리 경력만 30년이 넘는다. 공연에서 정은혜는 춘향전 중에서 [이별가] 부분과 심청전 중에서 [심봉사와 심청의 재회] 부분을 창으로, 아날로그 소년은 잘 알려진 사랑 이야기인 ‘이수일과 심순애’의 [장한몽]을 랩으로 들려준다. 세대에 따라 다를테지만, 판소리나 랩의 가사를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형식에 주목할 수 있다. 음악에 실린 동서양의 사랑 이야기는 권력과 돈이 얽혀 있으며, 그 착종된 관계를 선한 마음이나 기적 등으로 극복하는 해피 엔딩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번 무대를 위해 편곡한 원곡들은 시대에 따라 강조되는 부분이 달랐다. 그것은 앞으로도 달라질 것임을 예견한다. 춘향전이나 심청전, 장한몽 등은 현대에도 변주되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인데, 작가들은 노래의 형식을 선택함으로서 사랑이 노래와 밀접함을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래라는 형식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가수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배반당한 사랑을 노래한다. 뭔가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이들의 영혼에 노래가 차지할 부분은 협소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보편적인 가치도 없다. 사랑은 가장 원초적으로는 종(種)의 영속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유전자의 책략’(리처드 도킨스)이 전부일까. 사랑의 결과물은 너무나 큰 책임을 요하는 것이어서 사랑은 그토록 강렬한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사건은 명시적인 사건보다 주체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 작으면서도 큰 것, 크면서도 작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누구나가 갖고있는 공통된 취향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사랑은 삶에 밀도와 의미를 부여한다고 본다. 그것은 사랑을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현대미술이 보편적 소통을 위해 차용할 만한 주제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의 사랑에 대한 대담에서 이 전시와 조응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랑의 우연성을 지속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요구이다. 









알랭 바디우에 의하면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며, 그것은 ‘항상 만남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자는 ‘나는 이 우연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원하며 떠맡는다’. 또한 사랑은 ‘두 개인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다. 사랑은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무의미해 보이지만 소소한 삶의 근본적인 사건은 끈질기게 지속됨으로서 보편적인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김기라와 김형규는 이 전시/무대에서 우연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만남을 기획한다. 한 대상을 여러 각도와 배율로 촬영한 듯한 탐구적 태도가 돋보이는 ‘X 사랑’ 전은 삶의 의미와 본질을 묻게 하는 사랑만큼이나 예술 또한 사랑과 내재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전시가 사랑을 소재나 주제로 삼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예술 자체가 사랑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전시에 의하면 예술은 사랑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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