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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기의 작품을 통해 본 80년대 도시와 삶

이선영

손상기의 작품을 통해 본 80년대 도시와 삶
--1980년대 공작도시 시리즈를 중심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1. 안에서 본 바깥 

손상기(孫詳基, 1949~1988)는 서른 무렵 고향 여수를 떠나 서울의 서쪽인 아현동 자락에 자리를 잡는다. 어릴 때 구루병을 앓은 후 사고로 인해 꼽추가 된 된 온전하지 못한 몸이었지만 20대 후반까지 지역 화단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화업을 펼치기 위해 ‘중심으로의’ 진출을 도모한 셈이다. 아현동 자락은 손상기의 작품 중 [재개발을 바랍니다]라는 제목이 있을 만큼, 서울의 중심가에 있으면서도 낙후된 상황이 방치되어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인근에 대학이 다섯 개나 포진해 있었으며 서울의 중심부인 시청과도 멀지 않은 그곳은 이후 30여 년이 지날 때까지도 달동네의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했던 독특한 지형도를 가진다. 흉물로 남아있던 아현 고가도로 철거 전후로 해서 지금은 재개발이 더욱 탄력을 받은 듯, 우후죽순처럼 고층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아현동은 채 4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 작가가 마지막으로 머문 장소, 즉 생애의 마지막 1/4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아현동 1986

고향을 떠나 머문 이 동네는 영원히 낯선 동네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외계에 불시착한 듯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낯설음은 예술의 조건이기도 하다. 청소년기에 하루종일 창밖 하늘만 쳐다보았다고 회고하는 손상기는 1969년 홍익대 주최로 전국 남녀 중고교 학생 실기대회에 수채화로 특선을 받은 경력이 있을 만큼, 어릴 때부터 그림에 몰입했다. 1970년에는 수채화로 첫 개인전을 했다.(주1) 고향에서의 작업과 원광대학교 재학 및 지역 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작업한 초창기 작과 비교한다면, 80년대 아현동에서의 작업은 도시적 현실을 담고 있다. 전 인구의 반 이상이 수도권에 머물고 있는 남한 사회라는 보다 보편적 공감대를 이룰 만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1980년대의 도시와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웃사이더의 관점은 그 시공간을 더욱 객관적으로 드러내준다. 

손상기는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 화가 중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처럼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삶을 그림으로 붙태우다 스러진 요절 (때로 천재라는 수식어도 추가)화가로 평가되곤 한다. 로트렉이 귀족 출신이라서 세기말 풍요와 퇴폐를 넘나들던 부르주아 내부의 풍속도를 그려낸 반면,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시기’(주2)였다고 평가받던 시대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손상기의 경우 시대의 피폐함이 주로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1949년생의 작가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중 초토화 되다시피한 이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를 평생 불행하게 한 사고 역시 그러한 혼란과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나갔지만 성장의 그늘은 짙었고, 몸까지 불편한 가난한 ‘지역의’ 화가는 이중삼중의 굴레를 쓰고 있었다. 물론 불행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압축 성장을 하고 있던 한국의 모더니티 또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아방가르드라는 예술적 주체를 생산했다. 

손상기는 1980년대 전개된 한국의 모더니티에 내향적으로 반응했지만, 그 솔직함으로 인해 리얼리즘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미술사가 서영희는 이를 ‘자기반영의 리얼리즘’(주3)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자기지시적이고 자기비판적인 모더니즘에 현실반영이 함께하는 손상기의 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초기 작업이 향토적 미감에 충실한 평범한 구상에 머물러 있다면, 서른 이후 서울에서의 작업은 그 도시적 삶에 대한 현실성으로 주목할 만하다. 역사에서 가정은 금물이지만, 그가 요절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한국의 도시적 현실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변화상에 대한 예술적 기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50 여점의 작품은 작가의 눈에 비친 그 시대를 안팎을 보여준다.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10년을 머무르며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낸 대도시 서울은 작가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작품 [아현동](1986)은 집의 거주자가 문을 열고 나온 듯한 풍경으로, 맞은 편 산동네 풍경은 세상에 대한 축도처럼 다가온다. 집이 상징적으로 자아의 연장이라면 열린 문앞 저편으로 솟아있는 대상은 주체와 마주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이편 또한 저편 만큼이나 고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편과 저편, 즉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은 큰 차이가 없다. 그것은 집 안에서 본 바깥의 시점이지만 저편의 한 집에서 이곳을 봐도 비슷한 풍경, 즉 낮은 지붕들로 가득한 산동네일 것이다. 주체와 대상은 큰 차이가 없었고,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대한 직시가 시대의 불행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중첩되는 시공간에 작가가 서 있었다. 1980년대 내내 반독재 투쟁으로 시민과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역동적이었던 시대,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기이한 침묵이 감돈다. 그러나 그 또한 시대상에 대한 또 다른 태도라고 보여진다. 불편한 몸 때문에 보다 자의식적 태도를 가지게 된 작가에게 시대정신은 그 내부로 스며들었으며, 우리는 그 내면 풍경 속에서 시대의 또 다른 반향을 본다.  
 
2. 공작도시

손상기는 자신이 살던 아현동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도시를 ‘공작도시’라 칭했다. 공작도시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들이 모두 아현동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모델을 둔 부정적 함의를 내포한다. 그가 선택한 ‘공작’이라는 단어는 예외적인 비밀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에 편재하는 불공정 게임에 대한 예감과 분석이 깔려있다. 가파른 계단이 있는 산동네를 그린 [공작도시-無番地](1984)는 번짓수가 없는, 말하자면 합법화되지 못한 장소를 말한다. 작품 [공작도시-아현동에서](1985)는 전경의 계단과 후경의 다닥다닥붙은 집들을 맞붙여 놓은 회색빛 슬럼가를 표현한다. 누군가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높은 담벼락과 그늘에 감춰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은 빈곤한 도시 구조물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인간이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모양새에 더 가깝다. 이러한 물화(物化)의 결과는 사람보다 사물이 더 설득력 있게 말을 건넨다. 

공작도시-아현동에서 1985

나의집골목 1985

손수레가 세워진 골목길 뒤로 산동네가 보이는 [공작도시–아현동](1986)처럼, 사람보다 물건이 더 그 장소의 전형성을 드러내 준다. 행상이나 노동 등, 손수레를 활용하는 일도 힘들겠지만, 날품팔이 삶에서 그런 일거리도 없는 날들은 더 큰 고통을 줄 것이다. 도시가 ‘공작’의 산물이라는 작가의 판단은 도시의 빈곤이 자연적이지 않고 구조적임을 암시한다. 어촌마을인 고향의 바위 위에 붙은 따개비들처럼 붙은 집들, 때로는 밀집된 지붕들의 겹치는 선들이 마치 파도처럼도 보이는 풍경은 생존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만, 적정한 밀도를 유지하는 자연과 달리, 성장을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한 인간 사회의 규칙을 따른다. 대체로 공생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과 달리, 인간의 규칙은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위해 다수의 희생을 요구하곤 한다. 도시의 산동네 풍경은 성장의 조건과 그 결과물이 응축된 상징적인 장소로 나타난다. 손상기 자신을 포함하여 생계, 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온 사람들이 대중, 특히 빈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불행했던 삶을 생각할 때 종교를 가졌을 법도 하다. 그러나 작품 [달빛은 어디에](1986)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마치 묘비처럼도 보이는 많은 교회의 십자가들 또한 풍자적으로 다가온다. 아마 서울에 막 올라온 이방인에게 붉은 십자가들의 무리는 기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특정 종교보다는 예술로서 세계를 재창조하는 권력을 가지는 예술종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낭만주의에서의 숭고의 미학은 이전 시대의 종교적 감수성의 산물이다. 화면의 3/4을 차지하는 차가운 푸른 하늘과 지상의 낮은 풍경을 대조한 작품 [공작도시-겨울하늘](1985)은 낭만적 숭고의 분위기가 있다. 거기에는 삶과 예술에 대해 진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감수성이 느껴진다. 겨울 하늘은 추운 삶을 더욱 춥게 할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넘어서는 숭고가 미학의 차원을 넘어서 직접 삶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쾌가 아니라 불쾌를 자아낼 것이다. 가난한 자의 삶은 삶에 대한 적절한 거리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몸도 불편하고 서울에 특정한 연고도 없는 작가가 80년대의 정치적 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4) 그러나 우리는 그의 80년대 작품에서 집단적 운동의 차원이 놓친 세목들도 발견하게 된다. 작품 [잘린 산](1986)은 절개지 아래에 조성된 마을은 마치 큰 파도가 덮칠듯한 모습이다. 그것은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위기의 생태계를 보여준다.

땅에 대한 불평등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산동네 주민에게도 재개발의 이익이 돌아올 수 있는 시대가 있었는데, 아마도 80년대가 그랬을 것이다. 작품 [재개발을 바랍니다](1986)는 재개발에 대한 희망 사항을 담은 작품이지만, 80년대 말에 죽은 작가는 재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이 작품에는 산동네 벽의 질감이 살아 있다. 원근감이 최소화되고 화면의 표면이 강조된 작품에서 도시적 삶을 회화 고유의 언어로 번역한 모더니즘의 어법이 발견된다. 색감과 질감의 조화는 비루한 삶의 조건과 미학적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러한 방식은 인적이 없는 좁은 골목길의 집을 그린 작품 [나의 집 골목](1985)이나 계단이 있는 골목길에 위치 한 연통이 삐져나온 밝은 벽을 화면 가득히 포착한 작품 [공작도시-따스한빛](1984)에서도 나타난다. 이 서민들의 둥지에는 공작 도시의 음험한 기운을 찾을 수 없다. 한순간 멈춘 듯한 도시의 단편은 물화의 한 양상이기도 하지만, 단편이 가득 머금은 빛은 근대 작가 카프카 등도 느꼈던 순간 속에 담겨진 영원의 모습이다.

3. 그밖의 도시와 고향 풍경  

그러나 벽은, 특히 자신의 동네가 아닌 경우에 높은 장벽처럼 나타난다. 작품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1984)는 작가의 작은 키의 시점이 드러나는(주5) 높은 벽 앞에 철조망까지 쳐있다. 그의 도시풍경에는 진입을 방해하는 구조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지하철 공사 등, 늘 상 공사판이었던 도시가 장애인에게 주었던 불편함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자연 또한 마찬가지여서 작품 [공작도시-인왕산 만개](1986)는 꽃이 만개한 인왕산 앞의 인공적 엄폐물들이 눈에 먼저 들어오며, 작품 [공작도시-원당리에서](1986)도 엄폐물이 풍경 전경에 배치되어 있다. 작품 [放置](1986)에서 인적없는 풍경의 주인공은 전경의 철조망이다. 작품 [공작도시-잔설](1986)에서 하얀 눈은 배제와 경계를 나타내는 기호들을 충분히 덮어주지 못한다. 작품 [이태원에서](1986)에서의 벽은 아현동과 대조되는 부촌, 가령 사적 공간이 잘 보호되어 있는 높은 담벼락들이 많은 동네의 잘 정비된 구조물을 보여준다, 

공작도시-원당리에서 1986

고향해변 1986

197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나름 지식인이었지만, 거의 빈민—일자를 알 수 없는 작가노트에는 구걸의 경험이 나타나기도 한다—인 그가 마주한 서울의 부촌 풍경에는 이방인의 시점이 있다. 이러한 광경에서 빈익빈부익부에 가속화가 붙기 시작한 80년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다소간 따스하게 포착된 도시풍경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시점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마을 이름이나 본 위치가 드러나 있지만, 거의 전지적 시점의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작품 [금호동에서](1985)에서 작가는 기와지붕들을 평면으로 펼치는데, 계단이나 나무의 시점과는 맞지 않는다. 작품 [고층빌딩에서](1985)에서 원근법은 제각각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뾰족한 지붕의 작은 집들에는 동화 속 동네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것들은 실제에서 출발했지만 그림이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에 의해 가감된 현실, 즉 상상의 힘을 보여준다. 고향은 그러한 상상이 곧잘 피어나는 장소이다. 실제의 고향은 척박했을지 모르지만 시공간의 거리에 따른 화해, 그리고 지금여기와 대조되는 시공간으로서의 고향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사고가 평생의 불구로 이어진 작가에게 고향(전남 여천군 출생)은 마냥 따스하게 윤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 [고향 해변](1986)은 해안을 낀 마을의 바위들을 보여준다. 시멘트빛 구조물인 방파제 같기도 하지만 방파제라고 하기에는 외곽선들이 불규칙하다. 이 불규칙적인 선에서 필자는 해변에서 노동하는 여인의 환영을 본다. 밀레가 지평선 아래에 노동자를 배치함으로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상의 운명을 암시했듯이, 물살 아래의 거친 바위들에 갇혀 있는 인간의 암시이다. 고향 해변에서 탁 터진 바다 풍경이 아니라, 어두운색으로 칠해진 엉킨 선들의 형태(gestalt)에서 고향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탄생한다. 고향은 아니지만 비슷한 항구도시를 그린 작품 [항구도시 황해](1986)에서 바다보다는 지붕이 많은 동네가 전경화된다, 이러한 특이한 시점에서 우리는 자연보다는 삶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작품 [고향 풍경 중에서](1985)는 전경의 집들 뒤로 완만한 산이 보인다. 

여기에서도 산과 낮은 지붕의 집들이 등장하지만, 도시와 달리 집들은 많지 않다. 작품 [이른 봄](1987)이나 ‘한창 더운 여름’을 뜻하는 제목의 작품 [盛夏](1985)는 장소가 아닌 시간대로 어떤 공간을 표현했다. 시골풍경처럼 한적해 보이는 작품 [성하]의 실제 소재지는 난지도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의 배경이기도 한 난지도는 지금은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의 쓰레기 하치장이었던 장소였다. [성하]는 황량하고 쓸쓸한 광경 가운데로 난 저 멀리로 향한 길은 여름 햇빛을 받아 뜨겁지만 하나로 쭉 뻗은 길은 단순함이 주는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작가는 최악의 장소에서조차 아름다움을 길어 올린다. 전형적인 도시풍경, 가령 작품 [공작도시-아현동에서](1985)의 도저히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을 만큼 미로같은 도시의 계단 길과 비교해 보라. 작품 [8월](1987)은 한적한 해수욕장 풍경같은 이미지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말린 뒷면이 살짝 보이는 벽에 붙은 한 장의 그림 또는 사진에 불과하다. 작가에게 고향을 포함한 이상적인 시공간은 그 앞에 놓인 책처럼 그림의 공간, 또는 문학의 공간에서나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그것이 죽기 한해 전에 그려진 것이라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4. 도시의 민초  

밀집된 공작도시에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자신의 집을 표현하는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마을 또는 도시 단위로 표현하기에 그 안의 사람들은 대개 생략되어 있거나 서사를 위해 한두 명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없는 경우에는 햇빛, 또는 가로등같은 인공광원을 받는 사물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활기 없는 공작도시라는 텅 빈 무대 위에서 무언극을 하듯이 그렇게 배치되어 있었다. 가파른 계단이나 좁은 골목길을 오가는 그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들이었다. 그들은 공작도시에서 살법한 사람들이며, 일하고 있거나 일을 하러 오고 간다. 그들은 익명의 대중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관객의 면전에 사람처럼 세워지는 화면이란 선택의 장이다. 그는 도시의 민초들을 화면으로 호출한 것이다. 그것은 손상기가 1980년대 화단의 집단적 움직임으로부터 분리된 채 홀로 작업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감정이입을 넘어서 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공작도시-외침 1984

작품 [공작도시-외침](1984)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골목길의 상인으로, 한쪽 손은 확성기를 들고 있다. 행상인은 무거운 짐을 끌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좁은 길을 수없이 걸었을 것이다. 몸에 비해 매우 두껍게 그려진 두 다리는 그의 고단한 하루 여정을 압축함과 동시에, 인물의 기념비적인 위상을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시멘트 도시의 칙칙한 배경에 상체 부분 만 밝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인물이 잡고있는 확성기는 더욱 강조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메시지와 동시에 시대를 향한 발언과 겹쳐질 수 있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것은 소리 없는 외침이다. 행동과 물건들은 있지만 얼굴이 없으며, 몸 전체가 어두운 실루엣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물질적 성장을 위해 함께 애썼지만, 그림자나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이들에 대한 표현이다. 요즘은 자동차나 녹음기 등이 대신할 물건들이다. 삶의 구체적 좌표가 생략된 거의 실존적 인물이지만, 그 와중에도 당대의 현실이 묻어난다. 

80년대 전반기면 민중미술로 대표되는 현실참여적 미술진영에서도 도시적 삶을 소재로 한 비판적 리얼리즘이 강세였다고 볼 때, 고립된 채 작업했던 손상기도 공유했던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있다.(주4) 그러나 그 또한 1981년에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을 동덕미술관에서 시작했고, 1983년에 미술평론가가 선정한 문제작가에 선정되었다는 점, 그리고 1984년부터는 당시에 유수의 화랑이었던 샘터화랑에서의 전시를 시작한 80년대의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원광대(1973-1978)를 졸업한 후 지역의 화단과의 밀접한 교류 시기에 구상계열의 화풍을 자기화하였다. 서울로 이동하면서 향토색 대신에 도시적 현실이 작가의 실존과 결합 된다. [공작도시-외침]과 같은 해에 그려진 작품 [日沒](1984)은 짝을 이룬다. [외침]이 낮이라면 [일몰]은 밤이다. 밤의 배경은 좀 더 틔여 있지만, 비슷하게 누추하다. 이 작품의 인물 또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릿하여 성과 나이가 분명하지 않다. 떨이를 외치고 있는 아버지와 아이가 있는 석양 무렵의 모습이 담긴 이 작품은 [외침]과 더불어 밤낮으로 일하는 또는 일해야 하는 민초들의 모습이 있다.

작품 [공작도시-오역](1984)도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손수레에 물건을 가득 싣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의 모습이다. 뒤로는 근대 스타일의 사각형 빌딩들이 첩첩이 있는 가운데, 전통 스타일의 도자기를 팔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대조했다. 손수레 위의 도자기는 현대에 만들어진 전통일 것이다. 말 그대로 한 화면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다. 그런데 작가는 거기에 ‘오역’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 모두가 민초들의 고단한 삶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단절된 과거와 앞당겨진 미래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한 직시이다. 작품 [炎天](1986)은 한여름 뜨거운 햇빛을 가리는 양산 아래의 작업자를 보여준다. 노동자의 생산수단은 초라하며, 염천의 열사를 막는 수단 또한 빈약하다. 1980년대 진보진영에서 강조하던 생산과 혁명의 주체로서의 노동자 상과는 거리가 있는, 소위 말해 ‘전망’과는 요원한 인물이다. 층층으로 구성된 배경의 구조물은 성장하는 가운데 계층, 또는 게급화 또한 선명해지는 시대를 반영한다. 
 

5. 어머니 

[염천]과 짝을 이루는 작품 [공작도시-좌판](1984)에는 행상하는 여인과 아이를 가리는 양산이 등장한다. 웅크리고 앉은 사람의 성(性)을 알려주는 것은 딸린 아이이다. 그 사람은 생계를 위한 고된 일 뿐 아니라 아이도 돌봐야 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공작도시-아현동에서](1986)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행상하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이런 설정의 모자상을 다수 제작했다. 그 자신이 두 딸아이의 아버지로, 때로 스스로 어머니 역할을 했어야 했으며, 그 자신도 행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상황을 반영한다. 그의 작품에서 민초들은 저 멀리에 있는 작품 소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작품 [나의 어머니](1984)(주6)는 머리에 삶의 무게를 이고 있는 한 여인과 무게를 더 보태고 있는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얼굴은 익명이며 특정인이기 보다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민초이자 어머니 상으로 나타난다.  

나의 어머니 1986

새우젓장수 1986

작품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모친 김정례는 가난한 남편(직업은 어부)--그러나 손상기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거의 부재한다--과 함께 2남 4녀(손상기는 장남)를 키운 전후(戰後)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손상기의 어머니상은 가난한 시대를 헤쳐 나온 시대의 전형적인 어머니 라 할만하다. 2년 후에 그린 동명의 작품 [나의 어머니](1986)는 어둠이 아니라 밝은 빛 아래 거의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산동네를 무대로 행상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하얀 저고리에 몸빼를 입었는데, 그 또한 이제는 사라진 옷차림이다. 당시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입었던 몸빼는 한복 속에 입었던 속바지를 떠올리는데, 그녀들은 전통사회보다 오히려 일이 더 많아져 거추장스럽기만 한 치마를 걷어버려야 했다. 안팎이 따로 없었던 전통사회가 외세로 인해 강제로 종료된 이후, 여성은 공적/사적 영역 할 것 없이 두루 일을 해야만 했다. 산동네를 이루는 배경이 고단한 삶의 질곡을 반향하는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면, 여인의 머리 위의 보따리가 만들어내는 능선 또한 같은 리듬을 탄다. 

전해에 그린 [공작도시-행상](1985)에서 바깥에서의 일 때문에 까맣게 탄 얼굴과 하얀 의상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는 어느 작품의 인물상에도 얼굴 표정을 집어 넣지 않지만 몇 번의 붓질만으로도 인물의 고통을 전달한다. 아니 그냥 어둡게만 칠해도 표정이 짐작된다. 일일이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하는 설득력 있는 표현력이다. 작품 [새우젓 장수](1986)는 묵직한 새우젓 통에 아이까지 업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생활력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아이를 강조한다. 80년대에 청년기였던 필자도 당시에 행상하는 여성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저런 상황을 누군가 다시 실제로 구현한다면 엄청난 일일 듯 싶다. 그때의 어머니/노동자는 가히 초인이라고 해야 맞다. 1984년에 제작된 [겨울 강변] 시리즈는 하얀 저고리에 몸빼를 입은 여인이 한기를 가리기 위해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서 있다. 그러나 손상기의 작품에서 어머니를 원형으로 하는 고난 속의 여성은 세계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처럼 나타난다. 

전후의 어려웠던 시기에 안팎으로 가족을 책임졌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또는 영원한 모성에 대한 기대치와 달리, 병약한 화가였던 작가가 이루었던 현실적 가족은 위태로웠다. 서른이 되는 해(1979년)에 화실 제자였던 스무살의 연인에게 첫딸을 얻었지만 곧 헤어지고, 1984년에 둘째 딸을 얻은 작가의 작품에는 가족 관계가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첫딸의 생모가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헤어지는 순간에 남자가 아이를 맡은 것은 그만큼의 강한 애착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작품 [가족](1984)은 아이를 둘러싼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작가가 마치 어머니처럼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작품 [아빠와 딸](1983)에서 딸과 놀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사망할 무렵의 작품 [병상에서](1988)는 딸 둘 및 부인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했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가족제도에 대한 위기와 비판이 있지만, 가족 간의 유대가 (상대적으로)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래도 가난한 이들이다. 다만 작가가 부모, 특히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딸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기에는 그의 생이 너무 짧았다.   

6. 모든 것을 사고파는 근대도시  

8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아현동 사창가의 여성들은 남성이 가지는 두 가지 여성상 중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남성에게는 어머니로 대표되는 성스러운 여성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 창녀가 있다. 둘 다 남성의 욕망을 채워주고, 둘 다 비천(abject)하다. 둘 다 매혹적이고 둘 다 거부감이 있다. 이 두 가지 원초적 여성상에 내재한 양가의 감정이 어디로 기울어지는 가의 여부는 남자의 상황에 달려있다. 남성 주체에게 여성은 대상이다. 주체의 또 다른 대상으로는 세상이 있는데, 때로 여성과 세상은 겹쳐질 수 있다. 물론 여성에게 남성 또한 그러한 위상을 가질 수 있다. 손상기의 작품 속 매춘부들은 세상에 대한 압축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대로변에 늘어선 아현동의 사창가는 지금도 기묘한 풍경을 이룬다. 모두 다 알고도 비밀인 카페처럼 보이는 매춘업소들이 있고, 바로 옆 라인부터는 웨딩드레스 상가가 늘어서 있다. 아현동은 현재 재개발로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지만, 아마 사창가는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이며 최후로 사라지는 장소가 될 것이다. 


사랑가 1984

열 1984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가족제도에 냉소적인 분석가에게는 결혼제도와 매춘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그 공간적 배치를 작가가 놓쳤을 리가 없다. 작품 [사랑가](1984)는 아현동 산동네 근처 사창가로 추정된다. 아마도 공공의 감시를 받기 위해 쓸데없이 뚫린 창문을 가진 유흥업소의 문밖으로 몸을 내민 하얀 드레스의 여자가 보인다. 유흥업소의 여자는 손님을 유혹하는 노출 의상이 아니라, 몇 발자국 더 가면 쇼윈도에 화려하게 전시된 하얀 웨딩드레스 닮은 옷을 입었다. 빨간 벽돌집의 하얀 치마를 입은 여자는 동화 속의 가정주부, 또는 현모양처를 준비하고 있는 순결한 여성이어야 맞지만, 이 ‘직업여성들’--공적 영역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은 창녀가 대부분이었던 시대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은 깨지기 쉬운 가족 로맨스에 대한 음화이자, 모든 것을 팔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현실이다. 1980년대에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많이 등장하는 도상이 창녀, 또는 창녀에 준하는 여성 이미지들이다.

물론 그러한 풍경은 특히 남성/작가에게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문화였고, 자신의 주변 환경을 작업의 주된 소재로 삼았던 손상기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서울에 올라오기 이전 ‘향토적 소재를 서정적으로’(주7) 표현하던 작가의 환경이 도시로 변했다면, 이제 변화된 환경은 도시적 소재를 멜랑콜리하게 표현하게 한 것이다. 마치 연작처럼 같은 해에 그려진 작품 [포즈-望](1984)은 유흥업소의 안쪽 풍경인 셈이다. 하늘하늘한 커튼을 배경으로 육감적인 여자가 욕망의 시선에 대답하듯 자세를 취한다. 몸은 빛을 받고 있으나 얼굴은 어둡게 삭제되어 있다. 남성의 욕망에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 버리는 것이다. 작품 [공작도시-취녀](1984)에서 화면 바깥으로 밀려난 양손과 발은 마치 결박된 듯한 모습이다. 취녀, 즉 취한 여자는 인간으로서 가장 적극적일 수 있는 손발과 얼굴이 생략된 고깃덩어리로서의 육체로 환원된다. 소통이 아니라 소모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체는 작품 [熱](1985)과 [공작도시-취녀](1986)에서 스타킹만 신고 자위하는 여자로 변주된다. 밝은 배경과 어두운 배경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그것은 배경이 어떻든 어두운 몸뚱이들이다. 

가난하지만 강인한 모성의 보살핌을 받았고, 사랑하는 두 여인으로부터 두 딸을 얻은 작가였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몸에 대한 자의식을 평생 가졌을 작가에게 자본주의의 밑바닥 현실과 관계된 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작품에 나타난 셈이다. 그가 외설적이다 싶을 정도의 도상에 자주 사용한 제목인 [熱]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혼자만의 열정과 사랑을 압축한다. 조각적인 단단함을 갖춘 작품 [누드](1984)는 짐짓 조형예술의 기본인 누드를 다룬 듯 하지만, 욕망의 대상을 전면화하고 불필요한 부분인 손과 발 얼굴들을 소극적으로 표현한 방식은 이 시기 이 소재를 그린 작품들에 나타나는 성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다. 사람이라고도 동물이라고도 사물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대상들은 피학적인 여성의 자세와 가학적인 남성의 응시가 관철되어 있다. 그런데 왜 자위하는 여성일까. 그것은 스스로 부풀렸다가 스러지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모든 열정에 대한 상징인가. 그는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는 매우 솔직한 작가였지만, 불구의 관계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화자로 남성이 아닌 여성을 내세웠다. 자신의 은밀한 경계를 다 까발리고 있는 이 비천한 대상은 현실 그 자체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7. 은유적 대상 

아현동 자락의 매춘가는 [공작도시-썩은 생선](1984)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 도시의 축도였다. 남성을 유혹하지만, 욕망을 충분히 돌려주지 않는 창녀 또는 여성은 그가 당면한 세상의 대변자라고 할 만했으며, 성욕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도발하는 모든 욕망으로부터 좌절된 자기성애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누드라는 제목을 자화상에도 적용했다. 1985년 폐울혈성 신부전증이 발병하여 병원을 들락거리던 시기, 죽기 바로 1년 전에 그려진 작품 [좌절](1987)은 둥근 등을 가진 인물이 엎드린 채 좌절하는 모습을 담았다. 마치 구걸하는 사람같은 비참한 자세다. 도상도 도상이지만 칙칙한 색감에 어지러운 선의 표현이 좌절 그자체를 표현한다. 긁듯이 그은 선은 온몸에 새겨진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추락한 존재는 언제 자신의 본 모습—서양의 경우 신, 동양의 경우 자연을 원형으로 하는--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육체는 그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변신함으로서 착종된 현실로부터 탈주를 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라지 않는 나무 1985

그러나 손상기의 작품에서 은유는 모호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식물이나 정물은 몸에 대한 은유적 대상으로 자주 나타난다. [자라지 않는 나무]와 [시들지 않는 꽃]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매우 커서,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손상기 작고 20주기 전의 부제가 ‘시들지 않는 꽃’으로 정해지기도 했다.(주8) 나무나 (화병의)꽃 등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식물과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도시적 풍경에서는 장애물이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여러 풍경화에서 하늘을 향해 자연스럽게 가지를 뻗은 모습이 아니라 흉하게 가치 처진 모습의 나무로 비유했다. 작품 [자라지 않는 나무](1985)는 몸통 일부가 잘린 단면이 트라우마를 나타낸다. 작품 [군산에서](1985)에서의 가로수들은 객관적인 정경이라기 보다는 감정이입이 강하게 된 표현주의의 산물이다. 자라는 것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나무가 자랄 수 없을 때, 그것들은 움직일 수 없는 그곳에서 열병을 앓을 수 밖에 없다. 

이 나무는 사람들과 같이 나타날 때 더욱 대조적이다. 작품 [공작도시-휴일 ](1986)에서 전경의 작은 나무는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작품 [쇼윈도-虛像](1986)에서 여자와 함께 진열된 물건을 바라보는 나무는 그것을 ‘허상’이라고 여겨야만 한다. 나무가 아닌 꽃은 대개 화병에 담긴 정물로 나타나며, 작품 [시들지 않는 꽃-연밥](1985)에 나타나 있듯이, 푹 꺽어 놓아 가치치기된 나무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꺽여있는 듯한 몸을 암시한다. 화병 속에서 꺽여 있는 식물들은 이미 시들었기에 시들지 않는다. 이 역설적 표현에는 장애나 병을 가진 이가 산 채로 죽은 듯한 절망감에 빠진 그 느낌을 담는다. 1987년에 그려진 정물에는 어지럽게 굴곡진 화병과 식물이 실루엣으로만 나타나 있어 표현의 강도를 높인다. 그가 그린 식물 중 온전한 형태가 유지된 것은 [담장 속의 장미](1987)인데, 이조차도 제작연도를 떠올릴 때 붉은 선혈이 뿌려진 듯한 느낌이다. 나무로 만든 사물 중에서 인체와 가장 밀접한 것이 지팡이나 목발일 것이다. 

8. 마치며  

작품 [영원한 퇴원](1985)은 죽죽 내리그은 붓자국이 그대로 드러난 바탕 면을 배경으로 병상과 지팡이가 놓여 있다. 침대의 다리는 더이상 지상에 닿아있지 않고 붕 떠 있다. 퇴원이라는 희망적 제목과 달리, 작가의 불길한 예감이 투사되어 있다. 39세면 요즘 기준으로는 젊은 작가 축에 끼는 세대이며,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기 때문에 날카로우면서도 감성적이었던 그의 시선이 그러한 변화를 작품에 어떻게 반영했을지에 대한 궁금함이 남아있다. 화가 자체가 현대사회의 타자일 수 밖에 없는데, 가난에 장애까지 안은 작가는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나마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서울의 유수의 화랑과 함께 몇 년을 같이 작업 한 점(주9)은 행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기회는 병약한 그를 더 위기에 몰아넣은 무리한 작업 일정을 낳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는 고립으로 인해 불행하지만, 동시에 불행과 연관된 행운아라는 기대치를 받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이루는 지배적 삶 또한 소외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소외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을 대표하는 예술적 캐릭터는 예술적 상상력 또는 광기를 수단으로 현실에 대해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다.(주10) 그들을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에게 접근조차 불가능한 창조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적 생산체계에 속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가난하지만 저주받은 예술가의 신화가 고착된 근대 시기에 그들은 희생자이며 영웅이었다. 이러한 신화에서 불구나 요절은 더욱 극적인 요소가 된다. 손상기의 때 이른 죽음 이후 열렸던 회고전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사들에는 ‘천재’라는 칭호 또한 종종 붙여진다. 근대의 저주받은 화가를 유형화하는 그러한 표현들은 일찍 죽지 않으면 천재가 될 수 없는 근대적 물신 체계를 연상시키지만, 그만큼 이른 죽음이 아쉽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근대의 전통이 쌓인 한국에도 그러한 신화가 적용되는 작가들이 꽤 있다. 손상기의 경우, 화려한 물질적 성장과 폭력이 공존하던 1980년대, 서울 중심부의 빈민촌에서 당대의 삶을 화폭에 담은 고독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주석 


(주1) 손상기의 생애와 주요 경력에 대한 기본 연보는 손상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sonsangki.com를 참고로 했다.

(주2) 손상기 사망 20주년 기념 도록 내용 중에서,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주3) 서영희, [손상기 회화, 자기반영의 리얼리즘], 2011.(손상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재수록되어 있음)

(주4) 그러나 손상기는 ‘83 문제작가’전 (서울 미술관)에 출품하는 등 진보적 미술운동과의 간접적 교류가 확인된다.

또한 민중미술 이론을 정립한 평론가 중 하나인 원동석은 손상기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원동석, <새로운 서정적 현실세계의 만남>, 게재지와 년도 미상, 서영희, [손상기 회화, 자기반영의 리얼리즘], 2011에서 재인용.

(주5) 조상인의 예(藝)-88, 손상기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 서울경제신문, 2018.11.23.기사.

(주6) [나의 어머니]라는 작품 제목은 작가가 아니라, 샘터화랑에서 작품구분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이다.


(7) 초기 작품의 향토적이면서 서정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손상기 회화의 초기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1979년 서울로 올라오기 이전의 때를 말한다, 특히 1979구상전의 입상으로 최영림, 황유엽 등 구상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속적인 이미지, 향토적인 색조와 넉넉한 질료감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참고한다.

손상기 25주기 전 고통과 절망을 끌어안은 영혼’ (2013, GS칼텍스 예울마루 전남 여수시 시전동) 도록 중에서

(주8) 전체 4부로 구성된 20주기 전에서 제 1부가 ‘자라지 않는나무’, 2부가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필자가 이글에서 주목한 시기는 3부 ‘공작도시’의 시대로, ‘서울로 상경한 1979년부터 작고한 1988년까지 10년간’을 말한다.

손상기 사망 20주년 기념도록 내용 중에서,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주9) 손상기의 생전 전시 이력에서 중요한 샘터화랑과의 인연은 다음과 같다.

1983년 샘터화랑과 인연을 맺은 이후 매년 샘터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후원을 받았다.

1986년 초대 개인전 『손상기전』(샘터화랑, 바탕골미술관, 평화랑, 대구 이목화랑)

1998년 샘터화랑에서 〈10주기 유작전〉이 열렸고 작가가 생전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기록한 글과 전시작품을 담은 화문집 《자라지 않는 나무》가 출간되었다.

1990년 누드와 인간전 (샘터화랑)

1994년 요절작가 오윤, 손상기전 (샘터화랑)

1998년 10주기 기념화집 ‘손상기의 글과 그림『자라지 않는 나무』 샘터 아트북 발간기념으로 샘터화랑에서 개인전

손상기 25주기 전 ‘고통과 절망을 끌어안은 영혼’ (2013년, GS칼텍스 예울마루 전남 여수시 시전동) 도록과 손상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sonsangki.com 의 연보 중에서 발췌함.

(주10) 서영희는 위의 논문 [손상기 회화, 자기반영의 리얼리즘](2011)에서 손상기를 돈키호테와 비유한다. 손상기가 미술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할 때, 현대소설에서 돈키호테적인 국면을 강조한 책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마르트 로베르, 문학과 지성 출판사, 2001년 발간)을 참고할 만하다.



출전; 손상기 기념사업회

사진 출전; 손상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sonsang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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