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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 조각의 몸체에 새겨진 시공간의 흔적

이선영

조각의 몸체에 새겨진 시공간의 흔적

  

이선영(미술평론가)

  

정현의 대표적인 작품에서 침목(枕木)이라는 재료의 비중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묵직하다. 재료가 중요하다고 해서 형식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조각을 통해서 침목이 재발견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로를 닦기 위해 놓여있던 침목은 거대한 인간상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인간의 위상은 다시 기념비적인 것이 되었다.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사조는 담론에서 인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 점은 인간적 서사보다 형식을 강조한 모더니즘의 역사와도 겹쳐진다. 그런 경향이 생긴 이유는 기존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저자 니체나 그의 현대적 계승자인 푸코 등, 근현대의 계보학자들이 담론과 권력의 관계를 밝혀낸 이래, 모든 용어의 역사가 그렇듯이 휴머니즘 역시 인간을 중립적으로 보지 않았다. 




JARDIN DU PALAIS ROYAL 8



JARDIN DU PALAIS ROYAL5



유색인은 인간이었나? 여성은? 성소수자는? 가난한 사람은? 이교도는? 유태인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폭력에 대해서는 관념처럼 애매하게 포장될 수가 없다. 휴머니즘의 경우 관념과 현실의 괴리가 아니라, 관념 자체에 결함이 있다. 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척도여야 하는 것인가? 인간이 기억할 수도 없는 우주와 지구의 역사는 인간의 시대를 상대화한다. 휴머니즘을 넘어서 인간에 대해 보다 근본적으로 대답하려 했던 이들은 지배적 제도에 의해 핍박받기 일쑤였다. 예술가는 ‘인간 아닌 인간들’과 타자로서 연대하곤 한다. 그것은 예술가가 더 휴머니즘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타자로서 타자들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윤리학이 아니라 미학으로도 충분하다. 미학은 늘 낯선 것들을 동경해 왔다. 같은 맥락에서 낯설게 하기는 예술의 기본 방법론이 되었다. 버려진 재료를 사용하여 독특한 인간상을 구축한 정현의 조각 문법은 인간에 대한 기존 입장과 출발점이 다르다.  


인간처럼 지상 위에 우뚝 서 있있던 조각은 다른 장르들에 비해서 인간의 흔적을 오래 간직했다. 모더니즘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에도 지배적이었던 수많은 역사주의적 조형물을 생각해 보라. 유럽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한국에서도 그 토대가 취약한 정권들은 기념비 조각을 선호했다. 껍데기만 남은 기념비 조각은 예상치 못한 재료로 갱신되었다. 침목은 어떤 기능을 가졌던 물건이지만, 사물에 가까운 대상이다. 기존의 휴머니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일군의 현대 작가들이 휴머니즘을 극복하고자 했을 때 인간의 관점에 의해 너무 오염되어 있지 않은 사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현의 작품처럼 주체가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사물의 표면이 최대한 살려진다. 시공간의 흔적은 조각의 몸체 위에 남아있다. 국내외의 전시장 또는 광장과 거리에 군상처럼 설치된 경우, 그 사이를 오고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도 각인 되어 있는 시공간의 흔적들, 즉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철길을 닦는데 침목이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1880년경이라고 하니, 침목의 역사는 100년이 훨씬 넘는다. 




셔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





침목의 나이는 수 백년 수 천년을 살기도 하는 나무보다는 적지만 인간보다는 많을 수 있다. 원래의 침목들은 마치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일정 간격으로 죽 누운 채 길을 만든다. 미니멀리즘은 ‘인간은 인간, 사물은 사물’이라고 주장한 누보로망처럼 인간과 사물간의 관계를 단절시켰을 때, 인체에 바탕 한 조각적 전통은 결정적으로 해체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해체된다. 미니멀리즘이 대표적이다. 물론 철도의 침목은 기능주의를 통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성을 유지했지만, ‘철도로 대변되는 선형적 사고’(마샬 맥루한)와 물질이 파괴한 유기적 전통을 생각해 보라. 침목은 속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평탄화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철도는 ‘속도를 통한 공간의 지배’(폴 비릴리오)를 가능하게 했다. 철도와 고속도로, 지하철 등을 한창 건설하던 토건 국가의 토목공사에서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토개발과 성장이 맞물리는 시기에 생산성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은 뒷전이었는데, 이 시대에 침목은 수많은 토목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과도 비유되기도 했다. 


정현은 기름때를 비롯한 오염물에 쩔은 침목의 잠재력을 낱낱이 현실화한다. 대리석 덩어리에 잠재된 조각적 형태를 ‘꺼낸’ 고전주의 시대의 대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군상들에는 [무제]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침목의 침묵을 깬 것이다. 침목은 자기에게 새겨진 시공간의 역사를 인간적 서사로 변주한다. 그는 재료를 그다지 많이 가공하지 않는다. 침목으로 만든 상들은 최소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마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 듯한 간략한 모습이다. 인체는 머리를 연상시키는 가운데 토막과 양팔을 생략하고 대지에 굳게 선 두 다리만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과감한 생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인간상으로 보이는 것은 조각이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에 바탕 한 인체를 기준으로 해왔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수직성에 내재한 인간적 상징은 수평과 같이 작동할 때 더 두드러진다. 




정현_무제 Untitled_나무에 먹물 착색_230×1100×75cm_2018_촬영 김민곤



정현_무제 Untitled_나무_212×730×40cm_2017_촬영 김민곤



정현_무제 Untitled_종이에 콜타르_650×150cm_2017정현_무제 Untitled_종이에 콜타르, 오일 바_650×150cm_2017_촬영 김민곤



이미지가 새겨진 긴 목각구조에 검정색 나무 조각들을 세워놓은 2017년의 작품은 마치 수평으로 흐르는 실제의 혹은 가상의 강을 건너는 배 위의 사람들같지 않은가. 오래된 재료를 활용하는 작가는 굳이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연 및 기술의 역사와 더불어 공(共)진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뾰족한 막대기같이 솟은 머리의 표현은 충격적이다. 인간이라는 비유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위상을 확 깍아내리는 듯한 위협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느낌은 등신대보다 3미터 내외의 큰 키도 한몫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인간적 비유는 보다 세부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군상의 경우 기본형식만 비슷하고 조금씩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완전히 똑같은 상태의 침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간에 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동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의 대중을 마땅히 달라야 하는, 그리고 다름이 미덕인 모습으로 나타냈다. 


정현의 인간상은 견고하면서도 취약하다. 우뚝 선 거인들은 기름밥 먹으며 땀과 눈물과 쩔은 바로 그 인간일 터이다. 그의 조각상은 세상과 인간 사이에 체액이 있음을 알려준다. 현대미술의 장에서는 고전적 누드가 아니라 몸뚱아리가 호출되곤 한다. 이때 몸이 열려있다 못해 흐물흐물해지는 상황까지 간다면, 정현의 작품 속 몸은 견고함과 유연함이 함께 있다. 작년에 금호미술관에서 보여준 설치물들은 침목이 아니라, 나무에 먹물을 착색한 재료들도 사용되었다. 검은 나무들은 침목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보다 회화적으로 운용된다. 인체를 넘어서 공간에 획을 치듯이 날렵한 모습으로 배열된 먹물 착색 나무 조각들은 추상화같은 표현을 가능케 한다. 드로잉의 경우, 침목 위를 지나갔던 기차의 속도를 연상시키는 빠른 필획이 특징적이다. 정현의 작품에서 드로잉의 위상은 전시회에 조각과 드로잉을 함께 전시한다거나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가 중요하다든가의 차원을 넘는다. 




정현_무제 Untitled_나무에 먹물 착색_280×335×335cm_2018_촬영 김민곤





그는 최근 전시에서 20년이 넘는 드로잉 작품을 최근 만들어진 조각 및 설치작품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서로를 지시하며 보완한다. 길이가 6미터가 넘어서 바닥까지 늘어뜨린 작품 [무제]는 암/수를 떠올리는 상보적인 한 쌍으로, 드로잉이지만 조각적 힘을 가진다. 골판지나 종이에 콜타르 등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조각과 만큼이나 물질과 에너지의 배분 관계가 절묘하다. 두상이나 행동하는 사람이 연상되는 이미지는 조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조각은 먹으로 친 선들로 만들어진 형태이다. 침목으로 만들어진 인체가 많은 이야기를 내부에 쓸어 담고 있는 정적인 모습이라면, 먹물 착색된 나무 조각들은 공간을 속도감 있게 횡단한다. 물론 풍부한 부피와 중량감을 가지는 설치물도 있다. 집적된 형태들은 마치 인도의 장례문화에서 화장을 위해 쌓아놓은 나무들처럼 구별되는 두 차원의 경계선 상에 놓인 물질을 떠올린다.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는 검은 물질의 재료들은 계속 변화된 모습으로 작품화될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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