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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CORN 전 / 팝콘 냄비 속의 빅뱅

이선영

팝콘 냄비 속의 빅뱅

 

이선영(미술평론가)

  


젊은 작가들 14명이 대거 참여한 POP/CORN 전은 다채로운 색감으로 현대문화를 표현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 색을 넘어서 야광에 금속성 색감까지 더해서 화려함과 현란함으로 가득하다. 현대문화의 우세종은 대중문화이니 만큼, 그들의 작품에는 대중적 도상들이 다수 등장한다. 개막일에 전시장에서 먹은 팝콘은 영화관의 필수 간식이 되다시피 한 팝콘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관은 팝 아이콘을 쏟아내는 꿈의 공장으로 간주된다. 대중은 팝콘을 먹듯이 이미지를 흡수한다. 팝콘은 삶은 옥수수나 콘 샐러드 등과도 다르게 매우 자극적이다. 후회하면서도 먹게 되는 중독성 강한 음식이다. 먹는지도 모르게 큰 통을 비우게 되는 음식이다. 무엇보다도 팝콘은 크고 작은 스크린과 인터페이스를 무대로 운동하는 스펙터클 못지않은 배급망을 가진 상품이며,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는 물질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차원에서 일용할 양식들을 무한 공급하고 소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의 팝아트를 조명하는 ‘팝/콘’전을 보면서 필자는 프랑스의 진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뮤지션인 장 미셀 자르(Jean Michel Jarre)의 음악 [popcorn](2011)을 떠올렸다. [팝콘]은 1969년에 거숀 킹슬리(Gershon KINGSLEY)가 만든 원곡이 있는데,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리믹스 곡을 낳았지만, 장 미셀 자르의 감각과 기술이 워낙 뛰어나서 그가 원래 작곡자인 듯 느껴질 정도이다. 신디사이저가 주를 이루는 전자음악이 클래식, 이전의 대중음악, 심지어는 자신이 발표했던 곡들을 다시 각색하면서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뿔(cornucopia) 같이 모든 것을 집어넣고 다시 출력하는 방식은 정확하게 팝아트적이다. 1인 오케스트라를 가능하게 한 음향합성기기는 연주자가 작곡된 것을 재현하는 방식도 무너뜨렸으며, 한번도 실제로 연주된 적이 없는 파일로도 음악이 존재하게끔 한다. 조형예술가들은 음악가와 달리 시각적인 리믹스를 한다. 


실재는 쉽게 섞기 힘들다. 코드화 되어 있어야 한다. 전시의 작품들은 이전시대보다 더 쉽게 정보를 접하고 취하고 다루는 기술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정보화 사회에 걸맞게 진화된 방식이다. 선택지가 많다면 창조/재창조의 구별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원본이 없거나 무한대로 소급하다 보면 모호해지는 시뮬레이션의 방식은 새로움과 진보라는 모더니즘에 도전한다. 팝적인 문화/예술은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만큼 표면은 활성화된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있을지 모를 하나의 중심이나 본질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위로 떠오르는 다중심의 표면이 활성화된다. 작가의 감수성 이외에 진보된 기기와 기술은 이전의 산물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긴다. 멀찍이 있던 것을 앞에다 당겨놓아 소비하기 쉽게 배열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특징이다. 시공간의 격차에 따른 괴리감들은 더 달콤하고 화려하고 강렬한 조리법을 따라 녹아버린다. 


팝콘의 예만해도, 하나의 냄비에서 튀겨져 나온 옥수수 알갱이들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인가. 각각의 팝콘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같은 모습은 없다. 매번 일어날 이 작은 빅뱅에 상응하는 변화를 확대해 보면 기이하게 느껴진다. 실제 이전시의 작가들은 확대의 수법을 많이 사용했다. 익숙한 것을 확대하여 낯선 면모를 강조한다. 일상을 지배하는 대중문화/상품의 익숙함을 바탕으로 한 팝적 도상들에는 그만큼 대중들과 접속할 지점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팝콘 전의 작품들에는 하나의 입구와 출구가 존재하지 않으며, 14명 작가의 100 여점에 가까운 작품들의 다양한 형식을 명확히 구별할 기준은 없다. 다만 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 팝적 도상을 읽고 다시 쓸 관객 나름의 분류방식은 있을 수 있다. 천국을 떠올리는 밝고 달콤한 가상/현실부터 지옥을 떠올리는 어둡고 씁쓸한 가상/현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계들 사이를 떠도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있다.   

  

  

1. 유의정 ; 현시대의 명품 

  

유의정, Chupa Chups(front)_ ceramic,decal comania, white gold luster, gold leaf, motor  50x40x86cm 2009


유의정의 작품은 이전시대의 유물처럼 배치되어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도자기와 유물같은 진열 방식은 잘 어울린다. 파손으로부터 보호하고 잘 조명을 받는 유리케이스나 좌대 위에 올려진 도자기들은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최대한 의식한다. 그러나 금색을 비롯한 색색의 무늬와 장식으로 점철되어 있는 그의 작품에는 가령 우리가 백자나 청자 등의 유물을 상찬할 때의 기준이 되곤 하는 소박함이나 우아함과 거리가 있다. 하나의 도자기 안에 최대한 멋진 것을 모아 놓느라고 복잡해진 표면들 탓이다. 그가 새겨놓은 기호들은 PRADA나 BMW 같이 대중들이 다 알 만한 유명상표들이다. 원래 도자기 위에 있어야할 자연의 무늬나 추상적 무늬 대신에 파워와 스피드를 상징하는 스포츠 상표, 탄산음료와 달콤한 사탕 등의 상표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과도할 만큼 화려한 도자기를 통해 ‘동시대 문화 형태의 연구’를 진행한다. 소비자들의 욕망이 쏠리는 상품들을 명품이라고 할 때, 자신의 작품 또한 명품의 반열에 놓고자 한다. 명품이 결국은 알맹이 보다는 기표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면, 작가는 그러한 시류에 한 술 더 떠서 욕망의 기표들을 모두 모아 자신의 그릇에 담아낸다. 만약 그의 작품 또한 명품으로 인정되어 유물의 반열에 오른다면, 후세의 고고학자들은 현시대에 대한 단서를 얻을 것이다. 지금의 고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2. 노상호 ; 이미지의 대량 생산과 소비

 


노상호_더 그레이트 챕북 II The Great Chapbook II 2018 캔버스천에 수용성 유화로 채색 270 x 220 cm


많은 이미지가 병치된 노상호의 작품은 거의 공백공포를 떠오르게 하는 밀집성이 특징이다. 작품 구성요소들이 강약이 없이 병렬된다. 구체적 도상이 있지만 멀리서 보면 얼룩덜룩한 추상화로 보인다. 이미지들을 집결시키는 출발지점은 존재하지만, 그 시작점은 중요하지 않으며 종착점도 중요하지 않다. 물론 관객이 나름대로 의미를 상상할 수는 있다. 의미를 열어놓다 못해 무의미까지 한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힘들다. 이미지들이 빼곡하게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천정 높이 걸어놓거나 전시장 벽면을 마치 백화점의 의상들처럼 죽 걸어놓은 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작품 [모빌리스 인 모빌]은 관객이 돌려가면서 볼 수 있다. 쇄도하는 이미지들은 가히 이미지의 인플레 현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도상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보다는, 현시대에 이미지들이 생산/소비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빼앗고 있는 인터페이스 위에서 시선이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다. 관객을 이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산한 이미지들은 모두들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치지만, 정보 폭발의 시대에 소비자의 선택은 가혹하다. 그 마저도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고 빨리빨리 넘겨본다. 노상호의 작품은 대중문화/상품의 소비 방식이 예술에도 피드백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 

 


3. 한상윤 ; 행복의 예술

  


한상윤, 노란꽃이 한가득,행복한 돼지가족,50호 변형(91X91cm),캔버스위에석채,아크릴릭,2017.


팝적 도상이 대부분 매끈한 상품의 형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개인적 필체가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지만,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려진 한상윤의 작품은 회화적 처리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실존적 흔적이라고 할 만 한 끈끈한 물감의 흔적에 실려온 도상은 대중적이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괴리가 있는 한상윤의 작품은 대중적 이미지가 상품의 형식으로 범람하는 현재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묻어있다. 화사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돼지 인간들의 여러 양태는 이전시대의 대중문화라고 할 수 있는 민화를 비롯해 만화적 표현 등을 호출하며, 밝고 화려한 색과 무늬로 가득하다. [행복한 돼지 가족]을 비롯한 한상윤의 작품은 행복에 대한 이미지로 채워진다. 돼지가족들은 루이비통처럼 물신숭배의 정점에 이른 상표들을 걸치고 화사한 꽃밭을 배경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우리는 돼지에 관한한 대량 사육의 결과로 야기된 전염병이나 대량 살처분같은 부정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지만, 동물과 비유된 인간은 기억으로부터 야기된 인간 특유의 병적인 나약함으로부터 자유롭다. 망각이 야기하는 천진함 속에서 동물에게 일어난 사건은 인간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키치풍의 그림들은 모더니즘과 달리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암묵적 신념이 깔려있다. 그것은 물질적 행복에 대한 추구라는 압도적 보편성을 겨냥한다.  

 


4. 275c ; 문화와 예술의 균형

  


S.O.B_s.o.b_01


우드보드 위에 아크릴로 그려진 275c의 작품은 절제된 형태와 색채에서 야기된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현대사회로부터 추출된 글자와 숫자들의 배열 또한 그다지 어지럽지는 않다. 균형은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리듬감 있는 색채/형태들이나 거울을 통해 작품에 끼어든 관객 또한 포함한다. 바탕 면 설치된 거울은 확장성을 가지지만, 특유의 광물질적인 차분함을 가지고 있다. 팝적인 아이콘을 주제로 한 전시라고 해서 반드시 유치찬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자본과 기술이 몰리는 상품의 세계는 웬만한 예술작품보다 더 세련된다. 환경 자체가 전체적으로 계획되다보니 그림을 걸만한 벽면자체도 점차 줄어든다. 근대에는 예술작품과 환경을 아예 하나로 종합한다는 계획이 가득했다. 구성주의나 바우하우스 같은 집단적인 움직임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균형을 찾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마티스나 몬드리안의 작품이 그렇다. 275c의 작품은 말년의 마티스의 색종이 작업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도상의 유사성이라기보다는 작품 [삶의 균형에 대한 고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균형에 대한 공통적 지향이다. 마티스는 장식과 예술의 화해 내지는 종합을 추구했다. 거울이 포함된 275c의 작품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반영상과 함께 완성된다. 예술은 현재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5. 김승현 ; 소통의 역사 속 미술

 


김승현_ Born-series 2018 oil on canvas 117x91cm


김승현의 작품 구역에 진입하면 낯선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버튼들이 크게 확대되어 있다. 벽에 큼직큼직하게 표시해 놓은 것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어느덧 유물이 돼버린 유선 전화기에 있었던 다양한 기능 버튼들의 항목이다. 5개의 기능버튼은 입력(Enter), 일지 중지(Pause), 저장(Memory), 다시걸기(Redial) 등이 있다.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버튼은 인간 뿐 아니라 예술작품에도 해당된다. 기능버튼이 표시된 벽면을 지나 마주치게 되는 작은 방들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찍었을 이우환의 일점 필획부터 아무 생각 없이 선택된 듯한 오브제인 앤디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같이, 그런 작품들이 등장할 당시에는 황당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널리 인정받는 작품의 복제물들이 인테리어 역할을 하면서 배치되어 있다. 작가는 그러한 용도에 대한 내용을 써서 붙여놓기도 했다. 현대미술작품이라는 것을 뺀다면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형식들은 하나같이 얌전하게 실내를 꾸며준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어떤 충격적인 어법도 흡수하는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지금은 그렇게 놓여있지만 작품들이 배치되는 방식을 자유로울 것이며 그러한 배치로부터 가능한 미술사적 이야기도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미술작품 역시 소통의 역사로 맥락화 한다. 미술은 미술들 간의 대화로 진화해왔으며, 보다 큰 소통의 역사 속에서 미술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한다.   


  

6. 김기라 ; 21세기의 묵시록

 


김기라_Super heroes_Wood_2008~09


김기라는 대중문화의 주인공들인 영웅들을 표현한다. 여러 능력을 모두 탑재한 전능한 존재인 영웅들은 동시에 괴물들이다. 컴퓨터에 기반 하는 현대 정보화 사회 또한 멀티 태스킹에 능해야 하는 인간들을 요구한다. 김기라는 이러한 삶의 패턴에 가속도를 붙인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영웅들 드로잉, 그리고 목조각으로 만들어진 영웅은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탄생하는 괴물의 양태를 드러낸다. 네온 같은 현대적 소재가 가미되었지만, 주술적 이미지가 강한 목조각은 영웅이자 괴물인 캐릭터가 격세유전적인 소재임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에서 현대와 원시는 근접한다. 고풍스런 정물화의 방식으로 그려진 현대의 정물화 또한 마찬가지다. 황금빛 액자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대중들의 일용할 양식인 패스트푸드의 풍경으로 이전시대의 정물화가 그렇듯이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그런 음식들을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넘어서, ‘맥도날드 공화국’으로 알려진 현대의 생산/소비 시스템이 자연과 인간 모두를 병들게 한다는 메시지다. 암막이 처진 작은 극장에서 나오는 영상에서 관객은 햄버거처럼 전 세계에 꿈을 실어 나르는 유명한 영화사의 로고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폭죽 놀이같은 파괴의 현장과 중첩된다. 파괴는 슬프기 보다는 기묘하게 아름답고 카타르시스마저 준다. 종말의 비전이 무한히 반복되는 그의 작품은 묵시록적이다.    

 


7. 김영진 ; 경계를 파열하는 사건들

  


김영진_Crash-1, 2019, Acrylic on canvas, 80x80cm


세계 시장화는 이전 시대에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것을 근접시킨다. 각자의 시공간을 넘어서 하나의 질서로 수렴되는 과정인 시공간의 압축은 지구촌이라는 서정적 표현을 낳기도 했지만, 그러한 만남들이 긍정적이지 만은 않다. ‘당신의 경쟁자는 누구입니까’ 하면서 미국의 농민과 한국의 농민을 견주는 식의 대기업 광고에 나타나 있듯이 말이다. 김영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crash’라는 단어와 부딪힘을 나타내는 만화적 기호는 침묵의 그림을 공감각적인 차원으로 변화시킨다. [일어난 일]이라는 작품 제목처럼 무엇인가 강하게 충돌한 사건의 현장을 완화시키는 것은 만화적 표현이다. 예측할 수 없는 충돌로부터 비롯된 사건이 실제가 아니라 상징일 때, 예술에도 유용할 것이다. 현대 예술은 이미 있는 것의 동어반복적인 재현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만화부터 전통적인 문양까지 다양한 것들이 충돌사건에 개입한다. 뱀파이어의 키스처럼 한쪽이 피를 빨리는 사건이나 자동차들끼리의 충돌사고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진 것의 충돌일수록 신선한 결과가 생성될 것이다. 한쪽이나 양쪽이 다 죽는 사건이 아니라 서로를 변형시키는 창조적인 과정 또한 충돌의 산물이다. 사건은 각각이 가졌던 자기동일성의 경계를 파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죽음을 떠올리지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8. 남진우 ; 현대적 낭만주의

  


Jinu Nam_Keeper ofthe Holy Justice_oil, cotton collage on wood_50cmX50cm_2019


세 폭 제단화를 떠올리는 거대한 규모를 가지는 남진우의 작품은 환타지 풍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선택한 형식적 장치이다. 이전 시대의 작품과 다른 점은 거대한 스케일을 유지하기 위해 덧붙인 자국들이 역력히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국들은 큰 이야기 가운데에 작은 이야기들이 언제든 다시 끼어들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 중 일부는 따로 떨어져 나와 개별 작품으로 제시될 수 있다. 남진우의 작품에서 형식적 가변성은 불완전함을 열린 형식으로 전환한다. 9x5m 규모의 대형작품 [두 괴물들의 서사시]는 환타지를 이끌어 나가는 장대한 서사와 그 주인공이 활약하는 무대를 연출한다. [victory of justice] 같은 제목은 숭고한 느낌도 준다. 낭만주의 시대에 재탄생한 숭고미는 무한을 지향하는 종교나 결코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자연 뿐 아니라, 일정한 한계치를 넘어서는 문화에도 해당된다. 좋은 것들을 모두 모아놓는 키치가 그렇다. 경이로운 신화적 사건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만화풍의 인물은 가볍게 보이지만, 가벼운 소재도 일관성을 끝까지 유지하면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양적 축적은 질적 고양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소비자는 기꺼이 그것이 제시하는 환타지를 즐긴다. 그것이 놀이를 가능하게 하며, 예술과의 공통점이다. 반면 몰입할 수 없는 문화나 예술은 협소한 기능에 한정된 도구에 머물 따름이다. 

  


9. 이동기 ; 느슨한 절충주의

  


이동기_ 버블 Bubbles, 2008, acrylic on linen, 250 x 400 cm (diptych)


이동기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그 자신의 분신 격에 해당되는 아토마우스 외에, 여러 기원을 가지는 스타일을 중첩시킨 작품들을 선보였다. 양자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층층이 겹쳐진 산물로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톰과 미키마우스의 짬뽕인 아토마우스가 동서양 대중문화의 접합 속에 태어난 돌연변이라면,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들이 아무 관련도 없이 공존하는 작품은 느슨한 절충주의를 보여준다. 아토마우스가 화학적 결합이라면 절충주의 스타일의 작품은 그때그때 작가의 관심을 끌어온 것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파워세일]이라는 작품제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판매대에 동등한 반열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국면에서 어떤 대상/상품이든 물신주의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사태를 겪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품 [버블]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떤 용기(容器) 속에서 아토마우스들이 무한대로 생성되는 이미지이다. 이 전시의 제목이 팝콘이니 팝콘처럼 튀겨 나온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은 색감이 뛰어나다. 대중문화와 예술을 손쉽게 비교하곤 하지만, 숙련된 화가가 구사하는 색감은 질적 차이가 있다. 아토마우스라는 다소간 고정된 형태는 색감의 무한 조합과 변주의 위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하나는 고정되어 있어야 다른 하나가 부각된다. 즉 형태의 고정은 추상적 색감의 변주를 극대화할 수 있다.  

  


10. 옥승철 ; 예술과 문화에서의 복제 

  


옥승철_Deadlock_Acrylic on canvas_ 170x170cm_2018


옥승철은 만화적 인물의 두상을 거의 성인의 키만큼 거대하게 조각한다. 작품 [deadlock]에서 평면 안에 갇혀있는 도상이 3차원 상에 우뚝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작은 팝콘 한 알도 이 정도 크기로 재현한다면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이 3차원 상의 대상에서 색감이 빠져있다. 석고의 하얀색 그대로이다. 이 거대한 두상은 주변의 조명 조건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섬세한 명암법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시각적 관습상 석고상은 조형적 문법의 기준이 된 고대적 도상이어야 하는데, ‘한낱’ 만화적 대상이 이렇듯 기념비적인 위상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석고상 또한 복제 기법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만화의 생산 및 유통방식과 큰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만화적 대상의 기념비화는 현실 속에서 흔히 일어난다. 어떤 캐릭터가 마케팅의 대상이 될 때 소비자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고자 한다. 평면 속에 있는 만화적 도상이 현실의 어떤 차원은 생략되어 있듯이, 원래 평면에 있던 존재가 3차원 상에 재현되었을 때에도 어떤 차원은 생략된다. 평면이든 입체이든 만화적 도상은 추상이다. 거대하게 확대된 만화적 도상은 앞뒤를 다 떼어내고 말 그대로 뜬금없이 나타난다. 그가 선택한 만화적 인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의 참조대상에 대한 괄호 치기 덕분에 관객은 색감과 형태에 주목할 수도 있다. 그러한 고립을 통해 형식에 주목하게 하는 것은 예술의 방식이다. 

 


11. 아트놈 ; 도상들 간의 리좀적 연결 

  


아트놈_모란가족행복도_193.9 x130.3cm_acrylic on canvas_2017


전통 민화의 방식과 현대의 만화적 기법을 결합한 아트놈의 작품은 시대를 건너뛰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표현한다. 작품 [모란가족 행복도]에 나타나 있듯이, 가족이나 행복의 가치가 그렇다. 잘먹고 잘살기에 관련된 관심은 유사 이래로 이어졌지만, 현대의 발전된 소통기기를 통해 확산되는 행복에의 욕망은 거의 강박관념의 수준이다. 대중들이 매일 보는 SNS에는 ‘행복하다’가 아니라 ‘행복해야만 해’라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그것이 오늘날의 정언명령이다. 아트놈의 작품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캐릭터들이 리좀처럼 연결 되어 있고, 바탕은 하트모양 무늬로 채워져 있다. 예쁜 것을 다 모은 다고 더 예뻐지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러한 의도를 극대화한다. 유명상표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명화들의 변주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졌다. 하나의 원본을 여러 방식으로(one-source multi-use) 구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동서고금의 다양한 기원을 도상들의 연결은 리좀적이다. 그것들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고 횡단적으로 연결망을 이루며, 이러한 연결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깊이와 본질보다는 표면과 현상에 대한 관심, 그것은 예술과 문화를 구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해체되고 있다. 팝아트는 서로 배척하는 팝과 아트라는 두 어휘가 결합된 것이다. 아트놈의 작품에서 편재하는 대중문화/상품을 일상화된 현실로 받아들이고 상호작용한다. 

  


12. 찰스장 ; 수집과 예술

  


찰스장2_2019


찰스장의 평면 및 입체작품은 수집물에 바탕 한다. 수집물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 아니고 수집물의 여기저기의 요소를 합쳐서 또 다른 수집물로 만든다. 전시장 한켠을 차지하는 매우 많은 분량의 수집물은 상당 기간 동안 상당한 공력을 들인 결과로 보여진다. 로봇이나 장난감류가 주를 이루지만, 흔히 구하기 힘든 품목들도 상당하다. 포장된 채로 전시된 것이 있기도 한 수집물은 출시된 지 한참 된 낡은 모양새인데, 당시에 흔한 것일수록 나중에 희귀한 것이 되는 역설을 간직한 것들이다. 제조일자가 같은 대량생산품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사라진다. 그것은 시스템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 이상 낱개를 재현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비록 플라스틱 쪼가리처럼 보이는 것들도 귀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수집의 특징은 끝이 없다는데 있다. 찰스장은 작업을 수집의 대열에 끼워 넣는다. 그가 제작한 것은 예술이고 수집품은 사물이다. 예술과 사물은 차이가 있지만, 수집광이 작품도 하는 경우라면 달라진다. 검은 바탕에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진 자신의 작품도 누군가에게는 수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입체로 제작된 작품은 어떤 수집품보다도 존재감을 발한다. 어떤 결정적 요소가 없기에 끝이 없이 행해지는 수집은 예술작품을 통해 매혹적 요소들을 결집시킨다. 그것은 또 다른 물신숭배의 결정체가 된다.

  


13. 임지빈 ; 부풀려진 존재

  




임지빈은 거대한 풍선 인형을 만들어 전시장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았다. 그것은 실내 뿐 아니라 야외에도 놓여 다양한 서사를 낳을 것이다. 같은 형태의 다른 포즈들은 잠재적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가령 여러 개의 인형은 여기에 있던 것이 저기로 간 듯, 수그리고 있던 것이 쓰러진 듯한 환영이 있다. 인형은 단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고 이런저런 구조물 사이에 끼어 있다. 눈에 띄어 선택된 후, 한참 사랑받다가 버려진 인형같은 우울한 모습이다. 또는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숨어있고 싶은데 덩치가 커서 그렇지 못한 난감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이상적인 전시 공간이라면 숨겨져야 할 기둥아나 벽같은 구조물에 의지한다. 모양새도 화려하지는 않다. 초코바가 녹아버린 듯한 무늬는 멜랑콜리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바람이 빠지면 어떻게 변할까를 생각해보면 크기가 거대한 만큼 공허해 보인다. 임지빈의 작품은 자신을 부풀려야만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현대적 정체성을 표현한다. 현대인의 또 다른 생활 무대가 되다시피 한 SNS라는 가상공간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우리의 삶을 거대한 연극 연출의 장으로 만든다. 예쁘고 행복한 모습만을 전시하고픈 거대한 거울의 방은 그 게임에 참여한 이들 모두를 희생자로 삼는다. 그 분열의 공간에서 개인은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실제와 가상사이의 괴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14. 김채연 ; 마음의 풍경

  


김채연_우기1_Single channel video_Variable dimension_2018


김채연의 작품 속 주인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귀여운 캐릭터의 핵심인 빛나는 큰 눈동자 대신에 눈 부근에 빈 동공이 두 개 뚫려있을 따름이다. 관객은 그 캐릭터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에 시선은 내부로 향할 것이다. 팔도 없고 이빨도 빠진 모습은 무엇인가 받아들이기만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무기력한 상태이다. 김채연이 창조한 캐릭터는 타자와의 상호작용에 지쳐 상처받은 듯한 불완전한 모습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 만큼 설득력이 있다. TV 화면 앞에서 팝콘을 먹고 있는 캐릭터는 밀려드는 자극 앞에서 속수무책인 현대인을 압축한다. 캐릭터 모양의 실루엣으로 뚫린 입구를 지나 들어가게 되는, 동굴처럼 연출한 전시공간은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의 현실적인 또는 이상적인 자리처럼 보인다. 이 문턱을 넘는 순간 우리는 그 캐릭터의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미디어의 소음도 있지만, 하늘 저편으로 뚫린 천정 창으로 민들레 홀씨도 날려 보낼 수 있는 다차원적 우주가 있다. 사막같은 풍경 속 선인장과 다육식물은 캐릭터의 수호자로, 그것들이 담긴 거대한 작품 [우기_벽화]는 작은 조각들에 끄적거리듯 그렸던 드로잉을 극대화한 것이다. 영상과 그림 등으로 연출된 공간은 마음의 풍경이다. 어떤 SF 영화처럼, 관객은 타인의 마음 또는 두뇌 속에 들어가서 그 풍경을 살펴보게 된다.

 

출전; 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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